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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박사모 -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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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모 문학방 신비로운 세상
푸른 돌(靑石) 추천 0 조회 24 23.07.03 19:06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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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7.03 19:13

    첫댓글 1.이제 칠월의 시작인데 벌써 섭씨 30도를 훌쩍 넘었다. 한 여름인 7월 8월이 그대로 기다리고 9월도 중순까지 더울 때도 많다. 엘리뇨 현상으로 서 태평양 바다 온도가 올라가면 날씨가 더워지고 비도 많이 온다고 알려졌다. 지구 온난화로 남극의 얼음이 녹고 해수면도 올라 간다. 해수면이 계속 오르면 태평양의 작은 섬들이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면 그 섬에 살던 사람들은 삶과 생의 터전을 잃게 될 테니 큰 일이다. 전 지구 적 대책과 지원이 따라야 할 것이다. 지구 온난화는 저들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향의 앞 바다에 돛 단 배가 유유히 떠다니면 그렇게 한가하고 평화롭게 보인다. 어쩌다 중선이라는 통통배가 하얀 동그라미 연기를 퐁퐁 내뿜고 달리면 아주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해질 녘 황혼에 갈매기 떼지어 날면서 울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린다. 바다 건너 큰 도시가 있어 밤이면 야경이 훤하다. 전기가 아직 들어 오지 않았던 시절에 밤마다 육지의 그 도시가 그렇게 부러웠다. 그러다 언젠가 전기가 들어 오면서 신작로가 확장되고 포장되어 새로운 문명의 혜택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화도 놓여 급한 일로 택시를 부르면 읍내서 쏜살 같이 달려왔다..=>

  • 작성자 23.07.03 19:15

    2.그 당시는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지역 숙원 사업과 현안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금은 육지로 연결 된 다리가 네 개나 되지만 당시는 하나도 없던 시절이니 최우선 사업이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정자들과 지역 국회의원이 새로운 공약을 내놨다. 국회의원이 군내 숙원 사업을 많이 따와야 당선이 보장됐다. 그렇게 몇 차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면 지역 현안도 풀리고 발전해 갔다.
    농촌의 초가집도 언젠가 스래트가 나오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붕과 부엌을 개량하고 동네 안 도로와 농로도 확장하여 리어카와 경운기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모내기는 그 때까지만 해도 일일이 손으로 심었다. 이웃 간에 품앗이로 상부상조 하며 농사를 지었다. 날짜를 서로 조정하여 사이좋게 모내기를 마쳤다. '이웃 사촌'이란 말이 먼 친척보다 급할 때는 이웃이 더 가깝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논에는 미꾸라지가 많아 그걸 잡아 시래기 국을 끓이면 더 없는 보양식이 된다.
    고향 마을이 섬인 데다 경사 도가 높은 산 골이라 거의 전부 다랭이 논이나 밭이다. 그러니 지게가 첫 째 가는 운반 농기구였다. 골이 깊고 좁으니 길을 바르게 넓히는 것이 어려웠다..=>

  • 작성자 23.07.03 19:17

    3.언젠가 서양의 어느 학자가 농촌에서 우리의 지개를 보고 두 번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몇 백 년 전부터 우리 조상이 고유의 지게를 사용했다 하니 선조들의 높은 지혜에 놀랐다. 그리고 그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개를 쓰고 있음에 또 놀란다는 것이다. 세상은 날로 발전해 바다로 하늘로 또 우주로 달려 가는데 아직도 지개를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스러운 노릇이냐는 비아냥일 것이다.
    이전에 농작물이나 물건을 남자는 전부 지개로 나르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날랐다.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김 없는 철칙이었다. 길쌈이 여자의 전유 물이었 듯이 지개는 남자의 전용물이었다. 물건을 머리에 이는 것 보다 지개로 나르는 것이 무게 중심이 낮아 안전하고 더 많이 나를 수 있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지개를 못 지게 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궁금하다.
    당시 시골 고향 집은 논이 열 마지기, 밭은 스무 마지기 정도 되는 중농이었다. 산골 동네라 거의 전부 경사 도가 높은 다랭이 논 밭이었다. 그러니 농로를 확장하고 곧게 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도 경운기가 겨우 다니는 길이 많다. 상일이는 옛날에 지게 지는 일이 그렇게 힘들고 싫었다..=>

  • 작성자 23.07.05 21:26

    4.농번기가 되면 모두 정신없이 바쁘다. 학교에서 바쁜 봄 가을 농번기에 학교장 재량으로 학생들이 집안 일손을 돕게 며칠 씩 휴교를 했다. 짧으면 2~3일, 길면 4~5일을 쉬며 농사 일을 돕게 했다. 기계화가 전혀 안 되었던 시절이라 모든 일을 사람의 손으로 했다. 모내기는 비가 잘 와줘야 쉽게 마칠 수 있다. 가물면 농부의 마음도 타 들어 간다. 산골 마을이라 저수지도 없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하늘만 쳐다보는 천수답이었다.
    언젠가 엄청 가물어 모내기를 못했다. 못 자리 논도 말라 갔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행정력을 총동원해 동네마다 지하수를 파고 한 방울의 물이라도 못 자리 논에 대려고 혈안이 되었다. 아마 역사적으로도 그 해의 가뭄이 가장 심하지 않았나 싶다. 그 후에 그 정도의 가뭄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기록도 없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인데 여름 방학이 되어 시골을 갔더니 아직도 모내기를 다 마치지 못 하고 있었다. 그 후에 곧 비가 많이 와서 모내기를 마치고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풍년은 꿈도 못 꿨다. 그만큼 제 때의 모내기가 중요해 절기의 오묘함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

  • 작성자 23.07.03 19:21

    5.언젠가 초등학교 시절에 엄청 가물었다. 우리 논들은 그래도 물 사정이 좋은 편이라 논 농사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집에서 꽤 먼 논 한 배미가 있었는데 채 한 마지기도 안 되는 작은 논이었다. 완전 천수답이라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말랐다. 그래서 아버님이 그 논 옆 냇고랑에 작은 웅덩이 만들었다. 굵은 돌로 둑을 쌓아 큰 물이 져도 웅덩이 뚝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 평소에는 물이 자연이 흘러 내리게 했다. 그러다 가물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을 논으로 퍼 올렸다. 낮에는 여기 저기 다른 전 답을 돌보고 밤이면 그 논으로 가서 낮에 고인 물을 펐다.
    어릴 때 아버님이 물 푸러 갈 때 밤에 한 번 따라 갔다. 집에서 가장 먼 논으로 바로 위에 공동 묘지가 있었다. 낮에도 혼자 가기가 좀 뭣한 곳인데 밤에는 더 그럴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는 아버지가 같이 가자 하면 그저 좋아서 따라갔다. 웅덩이 물을 다 퍼 올리면 시간이 꽤 걸린다. 하늘엔 별이 총 총 빛나고 반딧불이 날아 다녔다. 밤이 깊어지면 촉촉이 이슬도 내렸다. 지금도 조용히 추억의 나래를 펴면, 여름 밤 하늘을 가로 지르는 은하수와 반짝이는 노란 반딧불이 보이는 것 같다..^*^

  • 23.07.07 23:03

    오늘이 小暑입니다
    덕분에 좋은 글 고맙습니다

  • 작성자 23.07.12 13:17

    날씨는 점점 더워져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멋진 날들이
    되세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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