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베르디 'Dies iræ'
난 아직도 모르겠어. 모두가 말했지. 할아버지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게 뭘까 대체...
그래서 얼굴을 떠올려 보려는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내가 꼬마였을 때 북쪽으로 떠난 할아버지는, 내 열여섯 생일에도 코빼기 한번 안 비췄는데.
진짜 웃긴 건 뭔지 아나, 레셰크? 정작 날 보고 할아버지를 닮으라던 그들은, 뒤돌아서는 네가 그를 닮지 않았다고 수군거렸어.
- 1214년 크라쿠프에서, 카지크.
피튀기는 싸움의 와중에도 아이들은 커갑니다.
16세 성년을 맞은 레셰크는 포메랄리아의 상속녀 도브라바와 결혼하기 위해 북쪽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포메랄리아는 야인들의 땅과 가까우니, 부디 몸조심하거라."
"그로즈니의 칼끝이 어디를 향할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저는 형수님과 조카들이 걱정입니다."
두 아들을 바라보는 엘레오노르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피와 장미의 왕관은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부디 불길한 예언이 빗나가고, 다시 돌아올 바벨의 주인과 모두가 행복한 재회의 순간을 누릴 수 있기를.
"사미인들은 같은 이교도이니, 힘써 싸우지 않습니다. 그간 품삯이나 넉넉히 주어 돌려보내십시오."
"일리있는 말일세."
지름길을 안다며 야인들의 뇌물을 받고 아군을 속인 정찰병들의 배신이, 선량한 형 헨리크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이끌었었죠.
북방 십자군에 호응한 또다른 나라는 놀랍게도 발데마르 사후 그의 어린 손자가 등극한 덴마크입니다. 성전을 함께 치르는 동지가 되면, 그간의 악감정을 씻어낼 수 있을지도...
"부도를 도울 생각이 있건 없건, 야인들은 이제 어디서 죽을지를 고민할 일만 남았습니다. 순응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겐 피로 세례를 줄 수밖에요."
단장 하인리히의 태도는 어딘가 선을 넘은 광기가 느껴지지만, 당장은 기사단과 반목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수가 많으니, 절대로 얕보지 말게."
딱딱한 빵과 질긴 고기를 억지로 씹던 시절은 사치였습니다.
지옥의 보급한계에 시달리며 스칼로비아를 공략하려던 폴란드군은, 남쪽으로 후퇴하는 척하다가 부대를 정돈해 돌아온 그로즈니의 선제공격을 받았습니다.
"저 악마놈은 내가 맡겠다. 넌 다른 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
"상관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말버릇이군, 아메데."
"부도가 네 남은 오른손도 잘라버리면 내 탓할게 뻔한데, 그럼 예예 하고 복종할까요? 람베르트 대원수님?"
"농담 따먹기 할 기분 아니다."
"나도 농담 아니니까 네 충성스런 부관 말도 좀 들으라고."
"장군들께서 계속 다투시겠다면, 그 틈에 부도의 목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불만 없으시지요?"
람베르트와 아메데의 시선이 동시에 하인리히의 검은 십자가를 향합니다.
'우린 네놈이 제일 쎄하다고... 마자르인인지 독일인인지 헷갈리는 놈.'
운명의 여신 라이마는, 누군가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이 자가 과연 죽어도 되는지 다른 신들과 격론을 벌인다.
하지만 그녀는 정해진 운명을 바꿔주지는 않는다. 단지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슬퍼해줄 뿐이다.
"젠장, 증원군은 왜 이리 늦는 거야. 부도가 그리 두렵나!"
"루스인들도 손사래치는 놈인데 당연하지. 불평 좀 그만해라."
"험한 것을 섬긴다는 저 자의 피는 과연 무슨 색일지 궁금하군요..."
프랑스인, 폴란인, 마자르인의 대환장 삼중주를 옆에서 듣는 왕의 마음은 그저 착잡할 뿐입니다.
'이러려고 성전 왔나... 자괴감이 드는군.'
무기에 맞아 죽든, 늪에 빠져 죽든, 진중에서 얻은 돌림병으로 죽든, 배를 주리다 죽든... 결과는 똑같습니다.
이제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 여력도 사라졌습니다. 아군의 희생이 너무 커요.
물론 손수 검을 들어 적장의 목을 쳤을 때 흘러나온 피는, 우리와 같은 붉은빛이었습니다.
불난 호떡집이 되어버린 발트 연안 근황. 튜튼기사단은 리가로, 폴란드군은 메멜과 스칼로비아로 이동해 공성을 시작합니다.
북방 십자군이 쳐들어오기 전까진 자기들끼리 다투던 야인들이 거짓말처럼 똘똘 뭉칩니다. 뭇 신들도 기도를 들어주느라 귀가 따가울 듯.
이집트 십자군 때는 아프리카 서쪽의 패자 알모하드가 침묵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사라센들인데, 여긴 다르네요.
그런데 뭔가 허전합니다. 익숙한 느낌이... 도우러 온다던 덴마크는 왜 또 조용할까요? 지난번에 빡친 게 아직도 안 풀렸나.
야인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튜튼기사단은 빈털털이가 되어서 쫓겨났습니다.
기껏 점령한 리가와 탈라바는 속절없이 도로 빼앗기고, 전투 한 번에 아주 탈탈 털렸네요.
튜튼기사단이 영지를 얻어서 알박기하는 상황은 미래를 생각했을 때 좋을 게 없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패하면 보편교회의 위신이...
모든 어그로를 저 친구들이 끌어주는 사이에 메멜을 완전히 점령한 건 호재니까 넘어갑시...어? 부도가 언제 저기까지 내려갔죠?
적국 영토에 깊게 진입하면 보급한계에 시달리는 건 프러시아 측도 똑같습니다만,
병력의 대부분이 날아간 그들의 목적은 이제 전세를 뒤집는 게 아닙니다. 죽음의 여신 벨리오나에게 더 많은 제물을 바치는 것.
"모두 죽여라! 신들께서 가려내실 것이다!"
비스와 강만 건너면, 장남의 영지인 산도미에시입니다. 스칼로비아 공성을 계속했다간 크라쿠프까지 위험해집니다.
남은 징집병을 닥닥 긁어모아서 간신히 그로즈니의 엉덩이를 걷어찼더니, 이번엔 마조비아로 후퇴합니다.
칼라트라바 기사단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급하게 투입된 그들은 튜튼기사단처럼 야인들을 얕보다가 거짓말처럼 또 패배했습니다.
리크사의 둘째 아들인 야로폴크가 있는 도브진은 쑥대밭이 되어버렸습니다.
귀족들은 달아났고, 평민들은 그로즈니의 노여움 앞에 무방비로 내던져졌습니다. 집과 농장은 불타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기척이 멈추었습니다.
야인들이 더 강성해져 크나큰 위협이 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명분조차 힘을 잃어갑니다.
하느님도, 발트해의 신들도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그로즈니가 섬기는 악신만이 미쳐 날뛰며 춤을 춥니다.
어린 아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달라며, 하느님을 속여넘기는 재미에 깜박 잊고 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오릅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빛은 어디에.
1201년 가을.
"바실리오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그 이름으로 안 부르면 쳐다보지도 않잖아."
"죽을래?"
"아니, 난 돈벌어서 장가갈거야. 이걸 좀 보라고."
귀찮은 듯, 냄새나는 모포를 도로 머리까지 끌어올리려던 소년은 친구의 극성에 부스스 일어나 앉습니다.
'위험한 여정, 끊임없는 위협, 무사귀환 불확실. 성공 시 명예와 영광.'
돈 줄 테니 대신 죽으란 말을 길게도 써놨군.
"진짜 안 할 거야, 대장? 다들 심심해서 미치려고 한다니까?"
"얀치."
난쟁이 똥자루만한 널 데려가면 뭐에 쓰게? 라고 쏴대고 싶었지만, 녀석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러지 못하겠습니다.
'나보다 큰 놈들이랑 싸우는 거 빼고 다 잘해. 제발 나도 끼워줘.'
손이 더 많이 갈 게 뻔한데, 이상하게도 거절할 수가 없었던 녀석.
이 놈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우리들 대부분이 무사할 수 있단 뜻일 테죠.
"다들 일어나! 늦게 오는 놈은 밥 없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도, 강함을 증명하지 못하면 사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자르인의 전통이고, 아르파드 왕가의 자랑이며, 나 바줄(Vazul)의 신념입니다.
첫댓글 아니 여기서 아르파드가(..)
피아스트! 당신의 이웃이 돌아왔소!!
크킹에 폴란드 장자령 시스템 없는게 아쉽
분할시대를 구현한 모드는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는 왕국이 아니었으니...
볼레스와프 2세부터 프셰미수 2세 사이엔 피아스트가의 국왕이 아예 존재하질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