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버스 외 1편
길상호
안남은 허기와 함께 들른 면 소재지
손두부만 떠올려도 따뜻했는데
식당은 정기휴일 팻말을 걸고 있었네
몽글몽글 엉긴 시간 속을 뛰어다니는 건
어린 고양이들뿐, 뒤따라가면
꽃잎의 쪽방을 닫고 숨어 버리는 통에
술래잡기도 금방 끝이 나고 말았네
식당 앞에는 아무도 없는 공판장
공판장 옆에는 임대를 기다리는 우체국
우체국 옆 이발소 회전간판만 느리게 돌아가는데
백발의 이발사 가위질을 하는 동안
남은 햇빛이 조금 더 짧아졌네
언젠가 이곳에 빵집 하나 차려
담백하게 부푼 시간을 진열해 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려도 좋겠다는 생각,
기다리며 세상을 잊어도 좋겠다는 생각,
언제 자리를 잡은 것인지
분홍 스웨터의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아껴 가며 조금 남은 볕을 쬐네
흙먼지를 끌고 온 버스는
서지도 않고 정류장을 지나가네
방파제
여러 감정이 몰려왔다
비구름을 바닥에 엎지르고 말았다
날개 있는 것들은 날지 않았다
대신 해안선이 비행을 시작했다
파도로 바위 깨기
아침은 쿨쿨 잠에 빠져 일어나지 않았다
너는 찢어진 바다를 꿰매고 앉아 있었다
찌그러진 바다만 출렁거렸다
모래로 만들어진 사람이 사라졌다
해당화만 남아
해원굿을 하며 돌아다녔다
여기는 해안이라 떠밀려 온 언어가 많았다
모두 축축한 혀를 빼물고 있었다
안간힘으로 막아 보지만
당신의 발자국은 어쩔 수 없었다
오고 또 오는 파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 2024)
길상호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등, 산문집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 등. 김종삼문학상, 천상병시상 등 수상.
이제는 우리가 응원할 차례
아무튼 길상호가 돌아왔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시인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며 길상호 시인의 시에 대한 상찬으로 일관했다. 이후 그는 모국어를 자유자재로 부리며 서사와 서정을 제대로 아우를 줄 아는, 시어의 마술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10남매의 마지막에 쌍둥이로 태어나,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던 지독한 가난과 고독의 가족사는 그를 일찌감치 시인으로 키워냈다. 시를 쓰면서 자아를 막무가내로 괴롭혔던 어린 소년은, 타인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기 위해 시를 쓰면서 시인이 되었고, 어느새 역량 있는 중견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작년 초순 면역체계가 흐트러지면서 길상호 시인은 반년 가까이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시달렸다. 머리가 자주 아팠고, 몸과 마음의 수평선이 기울어져, 건망증과 불면증으로 시달렸다. 말이 어눌해졌고, 어눌해진 만큼 정반대로 온갖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머릿속은 부글거렸다. 매일 약을 먹어야 했고, 하루에 세 번 혈당수치를 재야 했다.
그런 심한 병증 가운데에서 길상호 시인은 자신의 아픔 몸을 시로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의 여섯 번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는 삶이 고달픈 어느 시인이 써 내려간 병적 징후의 기록이 아니라, 삶을 버텨내려는 한 시인의 고투이며 치열한 자기 존재 증명의 방편으로 읽힐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날개를 갖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에 시달리는 “어두운 사람” 길상호 시인을 응원해야 할 시간이다. 상처와 고통의 흔적 속에서 더욱 섬세해진 감성과 깊은 응시는, 우리 시의 또 다른 보석이 될 것이다.
아픈 몸을 가지고 나는 씁니다
당신의 얼굴, 나의 응원
예고했듯 앞서 K가 쓴 시에 기대, 그의 아픈 몸을 낱낱이 ‘해석’하고 ‘분석’했다. 쓰면서 나는 깨달은 듯하다. 임상보고서인 줄 알았는데 그가 앓고 난 뒤 쓴, 저 일련의 시에 빨려 들어가 전혀 예상치 않게 그의 새로운 시적 경향을 엿본 것 같다. 그가 ‘기후’와 ‘기분’의 양극을 오간 끝에 그 연장선상에서 약간은 뜬금없게, 나는 처음에 그것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로션과 스킨’을 호출한다. 반복해 보겠다. “무조건 함께 있는 걸로 주세요”. 나는 이 말을 오독했던 것 같다. 앓고 난 후 무너져 내린 자신의 사고체계에 대한 시적 표현이라 생각했다. 무/조/건/ 함/께/ 있/는 걸/로 주/세/요. 그의 요구에 내 대답은 이랬다. “그러지 말고 이거 쓰세요, 로션과 스킨이 따로 있어서 그날 상태에 따라 골라 쓸 수 있어요,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 주세요”(「로션과 스킨」). 이치와 사리를 가리는 내 주문에 당신이 내린 최종 답변이다. “사실 장례와 결혼은 한 몸이에요”(「화환」, 『이야기』). 그가 쓴 시에 기대, 병적 징후에만 골몰했던 내게, 급습하듯 던진 그의 말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둘렀지만 그는 자신의 아픈 몸을 재료 삼아 새로 장착한 시론을 개진한 것이다. 어떤 시론들은 이렇게 불현듯 찾아온다.
자신마저 알지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가 “감염된 심장으로 통화를 해요, 당신은 없는 사람이래요, 식은 밥처럼 조용히 살고 있어요”(「모처럼의 통화는」), 라고 쓸 때 나는 저 문장을 마음으로 읽는다. 그가 내게 한 말들이 시가 된 것이다. “아침부터” “진찰실에 앉아” 의사의 “긴 설명을 들어야 하는 일”(「아침부터」)은 얼마나 난감한가.
……
그가 “먹어 치”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말한다.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이거 좋은 거예요」). 이어 그가 쓴다. “그러니 우리는 그만 제 얼굴을 찾는 게 좋겠어”(「그만해도 돼」). 이것은 자문자답인가. 여기까지 쓰고 “질문이 많아 미안해요,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하세요”(「반쯤 있는 그」, 미발표 시), 라고 그가 혼잣말을 할 때 나 또한 그를 따라 속삭이듯 외친다. 제발 ‘헛소리’여도 좋으니 K, 당신이 당신의 얼굴을 먹지 말고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출판사 책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