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쇼팽 에튀드 '대양'
1214년, 그단스크.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바다뿐인 이 곳에, 새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릅니다.
그 날개짓을 바라보며, 검은 머리칼과 하얀 얼굴을 한 사내가 홀로 서 있습니다.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2세의 둘째 아들, 레셰크입니다.
"기꺼이 도와주겠느냐? 그는 바른 왕이 될 것이다."
피와 장미의 왕관은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호사가들은 말합니다. 장자가 없으면, 차자가 물려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하지만 선량한 이복형의 아들을 받들어 왕좌에 올린 그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비를 죽인 자가 통치중인 헝가리에서는 더 이상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선조의 잘못에서 돌이켜 먼저 용서를 구했던,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는 적법한 후계자를 얻었습니다.
질투에 미쳐 친족을 살해한 베드르지흐는 왕좌에 오르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잘츠부르크에서 영영 실종되었습니다.
그의 아내이자, 벨러의 큰누이인 에르제베트조차도 남편이 간 곳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 없소. 시간은 산 자의 것. 용기를 잃지 마시오. 모든 기다림이 배신당하는 것은 아니니까..."
"복된 아들을 둔 폴란드의 국왕이, 사특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노라."
카지미에시 2세를 총애하던 호노리우스 3세가 선종하고, 새롭게 즉위한 베네딕투스 11세는 학식이 30에 달할 만큼 위엄찬 교황입니다.
교황 특사의 준엄한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노골적인 비난과 야유, 헛소문도 다 내버려두면 그저 흘러갈 뿐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마트페이, 저 별을 좀 보게나."
"너무 많아서 다 셀 수가 없사옵니다."
"우리의 눈길이 닿지 않는 저 별들 너머에, 내 복된 아들의 자리가 있겠나?"
"사실... 별이란, 먼저 간 자들이 흘린 눈물이 아닐까요?"
"눈물?"
"세상을 알게 된 두려움에 흘린 저 눈물이, 이 다음에 올 자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별은 그저 별일 뿐이야.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 현명한 루스인은 나보다도 먼저 별들 속으로 떠나버렸습니다.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볼레스와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자리를 버리고, 하인리히 폰 웅가른이 이끄는 튜튼기사단에 들어갔습니다.
카지크의 남은 아우 미에슈코는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네가 그 아이를 쫓아보냈느냐 물었을 때,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포메랄리아 공작 레셰크를 지지하는 이들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복자의 아들인 카지크를 못마땅해하면서도 그의 적법성에는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세임의 동의를 이끌어낸 후, 지명섭정의 자리도 카지크가 물려받았습니다. 이제 왕좌까지는 단 한 발짝만 남아 있습니다.
"피곤하구나."
"하루라도 떠들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자들이니, 당연하지요."
"언젠가는 저들이 입방아를 멈추고, 온전히 네 명을 따르는 때가 올 것이다."
"바줄을 돕지 않으면 왕위를 물리지 않으시겠다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요..."
"임레는 용서받지 못할 자이지만, 그가 먼저 우리를 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뭐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건 아냐. 그렇지?'
카지크의 두 눈이, 먼저 간 그를 더 닮은 빛깔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네가 옳았다. 쿠만족만도 못한, 빌어먹을 알렉시오스. 안 그러면 믿을 데가 없으니까 믿는 거지.
역시 저 놈을 일찌감치 에스테르곰으로 보내, 야인들에게 탈취한 것으로 십일조 내는 법이라도 가르쳤어야 할까요...
'아버님, 저는 선량하신 형님이 남기고 간 저 아이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후계자의 자리는 그의 것입니다.'
아직도 꽃 같은 엘레오노르, 내 순전한 아내여... 그대가 낳은 아들은, 이처럼 눈부시도록 하얗게(Biały) 빛나고 있다오.
마지막 날이 온다면
아마도 후회만이 가슴 속에 가득히 남아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사랑한 모든 것이여 안녕, 안녕히.
"이제 자야겠으니, 그만 가보거라. 푹 쉬어야겠으니, 깨우지 말아다오."
1214년 8월 13일, 크나큰 슬픔이 온 폴란드를 뒤덮었습니다.
카지미에시 2세의 마지막 궁정사제였던 에메리크 벵기에르스키(헝가리의 임레)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기렸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토록 거룩한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완전해서가 아니다.
무찔러야 할 적을 앞에 두고도 그 숨을 끊는 최후의 일격을 망설이는 어리석은 자,
벌주어야 할 자를 앞에 두고도 그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에 의문을 품고, 헛되이 번민하던 자.
하지만 그는 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모두를 구하려는 불가능한 꿈을 품은 자였다.
자신이 옳은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울고, 화내고, 슬퍼하고, 불타오르고, 때로는 미쳐 날뛰었다.
그 모든 행적이 유익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그가 정의롭지 않다면- 세상 누군들 그러하겠는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다섯 번째 바퀴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나중은 누구보다도 창대하였다.
크나큰 슬픔이 나의 두 눈을 가리는 탓에, 더는 쓸 수가 없다."
"레셰크."
모든 생기가 사라진,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모습을 한 새로운 왕이 말했습니다.
"나는 뭘 할 수 있지?"
벌써부터 자비없이 조여오는 왕관의 무게에 눌린 조카의 질문에, 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정의로운 할아버지와, 복된 아버지를 하나도 안 닮은 내가, 뭘 할 수 있냐고."
에메리크도 이젠 없어! 날 버리고 떠나버렸지! 할아버지를 섬기기 위해, 그 먼 곳에서 찾아왔다는 망할 마자르인 개자식도!
역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야. 아무도 필요 없다고! 너도 마찬가지야, 썩 내 눈앞에서 사라져!
어떻게 해야 모두를 입 닥치게 할 수 있지? 얼마나 위대해져야 직성이 풀리겠나!
미치광이처럼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왕을 남겨둔 채, 포메랄리아 공작은 다시 그단스크로 떠났습니다.
하느님도 속여넘길 재주를 지닌, 자신의 늙은 친구가 한 예언을 굳게 믿으며.
"그는 바른 왕이 될 것이다."
End title: 크리스토퍼 틴 '성 삼위일체 찬가'
* 피아스트 유니버스 시즌 1 종료. 시즌 2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오오 시즌 2로군요. 과연 저 범상한 스탯(....)으로 예언의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것인지
아들 이름을 안중근이나 이순신으로 지으면 안되는 이유랄까요...
항상 잘 보고 있어요. 시즌 2도 기대할게요
돌돌카 ㅜㅜ 원래 평범한 사람의 분투가 (멀리서 보기) 즐거운 법입니다(..)
이야기는 역시 '결핍'에서 시작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