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순례
쌀쌀하던 날도 어제라는 듯
봄볕 화사하고
바람도 보드랍더이
현충지(顯忠池)에 담긴 봄을 보잤더니
아직은 거무튀튀
묵은 수련잎들만 봄볕에 몸을 잦히고 있더라
충혼의 영령들
푸른 하늘과 속삭이고
노야들 무리 지어 충혼천을 걷더라니
영령들이시여!
봄볕 속에 평안하소서
가만가만 지나가나이다.
어제는 역탐꾼들이 동작동의 현충원 일원을 찾았다.
동작역에서 내려 현충원 정문에 들어선 뒤에
충혼천을 따라 걷다가
창빈 안산 안씨 묘소에 들렸다가
호국지장사를 둘러본 뒤에
사당통문에서 빠져나가
남성시장의 어느 칼국수집에서 쉬었다.
걷다 쉬다 하면서 깔깔거리기도 많이 했지만
그해 유월이 이찌 잊힐 리야.
그래서 지난 단상을 꺼내본다.
그해 유월이 잊힐 리야
김 난 석
해마다 유월이 오면
해마다 유월 그날이 오면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건드리는 게 있다
미국의 참전용사가 전쟁기념관 전몰자 비문에 몸을 기대
혼자 살아났음을 부끄러워하며
회한에 젖는 모습이 또 생채기를 긁는다
하여 지난날의 단상을 다시 꺼내보게 본다.
동작역에 내리다 보면
하얀 국화꽃 한 묶음 사는 사람을 본다
하얀 국화꽃처럼 하얀 소복을 입고 간다
그를 따라 걷노라면
왠지 콧등이 맵다
육교에서 내려서노라면
하얀 안개꽃 한 묶음 사는 사람을 본다
하얀 안개꽃처럼 하얀 머리를 이고 간다
그를 따라 걷노라면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길을 따라 걷노라면
구운 오징어 다리인 듯 핏줄마저 말라붙은
소주 한 병 사는 사람을 본다
그를 따라 걷노라면
왠지 콧물이 난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현충문에 들어서면
울컹 눈물이 난다
돌아서는 길엔
왠지
왠지 뒤통수가 가려워진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총성을 듣는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포연을 본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먼 훗날일
이국시대의 역사를 본다
남북시대가 있었더란다
임진강 사이로 서로 겨뤘더란다
모두 다 내 조국이 더란다
하나는 북으로 맹위를 떨쳤더란다
하나는 남으로 용맹을 떨쳤더란다
지금이야 비극을 들여다볼 뿐
유월이여!
언제까지 이렇게 부르랴 조국이여!
해마다 유월이 오면
시퍼런 피는 외면하고 싶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아, 해마다 유월이 오면
새빨간 산딸기를 따주던
어릴 적 내 누이를 떠올리고 싶다
유월이여 유월이여!
언제까지 이렇게 부르랴
조국이여 내 조국이여!
공직 시절, 유월이면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추모식에 참여하곤 했다.
그럴 때면 성역(聖域)에 묻힌 영령들의 희생으로
이렇게 편안함을 생각게 된다.
우린 주변의 희생이나 도움으로 건재하다.
그걸 생각해 보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주변의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일이요
부모님에 대하여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이 몸은 섬길 이 없으니 아쉬움만 남는다.
내 숙부는 상이군인이었다.
9남매 중 제일 똑똑했다는 다섯째
정전된 지 일 년이 지나도록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치신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두 다리 전쟁터에서 잃은 채 삼우제를 지낸 바로 뒷날 돌아왔다.
빨간 봉분에 엎디어 통곡한들 부자의 대화는 영영 단절이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부모님 앞에 나타날 수 없기에
갈 데가 없다는 핑계로 부산 어딘가의 정양원에 수용되어 있었단다.
그러나 고향소식은 며칠 간격으로 다 듣고 있었나 보다.
고향에 돌아오던 날 부산의 노름깡패 몇이 따라붙었다.
알량한 생활부조금을 종잣돈으로 노름을 해
함께 한 밑천 잡아보자는 것이었으리라.
숙부는 돈을 대고 노름꾼들은 야바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동의 노름꾼들이 걸려들어 이들에게 모두 털렸으니
자연 비난의 소리가 커져 노름깡패들은 부산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다리 없는 육신으로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생활부조금을 모아 논을 얼마간 사들였으나
농사는 누가 지으며 운신은 어찌한단 말인가...
내 아버지는 그런 숙부가 불쌍했던지
내 아우를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숙부에게 보냈다.
그래서 내 아우는 지금도 최종학력이 국졸이다.
사지가 멀쩡하지 않아도 장가는 들어야 하겠지.
어느 섬 색시였다.
결혼 한 달쯤 전이었을 게다.
나보고 색시 댁에 한번 다녀오라 했다.
사지는 멀쩡한지 염탐꾼 노릇 하라고 한 게 아니었던가.
굴을 따기 위해 바닷가에 나갔다가
거적 같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세수를 하고 나니
새물이 났다.
찬찬이 살펴보니 손은 거칠망정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저런 멀쩡한 색시가 어디로 시집을 간단 말인가...
나는 거기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례를 올리던 날
신랑신부가 예복을 입고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서 있으니
참 멀쩡하기도 했다.
나는 기어코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그 몸에서 자식 셋을 낳았으니
어찌 다 부양하랴.
그들은 탈 농촌 바람을 타고 서울 구로동으로 올라와
작은 방 한 칸 세 얻어 새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저것이 서울의 생활인가...
숙부님 댁에 사채모집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결국 제일 믿음이 간다는 사람을 하나 택해
그에게 사채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누가 얼마를 빌려 달라 하면 통장과 도장을 내주고
또 누가 얼마를 가져왔다고 하면 통장을 내주어 입금하도록 했다.
이렇게 연명하며 살기 여러 해, 큰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날
그 심부름꾼은 통장과 도장을 들고 도망쳤다.
그때까지 불어난 돈을 한꺼번에 가져가버렸으니
어디 가서 이를 찾는단 말인가...
결국 화병이었던지 시름시름하시다가 눈을 감으셨으니
숙부님의 복은 거기까지인 셈이었다.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잘하는데
둘째 셋째 딸은 고등학교만 나온 후 은행에 다니면서
쉰이 다 되도록 시집을 안 간다고 한다.
제 부모님들의 길을 걷지 않겠다는 것일까...
내 어머님이 돌아가시던 날
나는 시골의 논밭과 가재도구 모두 아우에게 주고 말았다.
아우에 대한 나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내 아내는 그런 나를 곱게 봐줄 리 없다.
내 사연을 알 리 있으랴.
내 아내는 함경도에 근원을 두고 있어 역시 이산의 아픔이 있다.
그런 사연을 내가 알 리 없다.
나의 경우야 조그만 이야기일 뿐
남북 분단의 슬픔은 어디까지 번져나가는 것인가...
오늘은 어느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종군기장을 단 어느 노인과 마주쳤다.
향군회관으로 가는 길을 묻기에
순간 가슴에 단 기장을 쳐다보았다.
그분도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그분의 가슴께를 매만지며
그게 무어냐고 여쭤보니
때를 기다렸다는 듯 유월을 말씀하셨다.
감회가 많으시겠다고 말씀드리고 헤어졌으니
작은 관심이라도 표하고 싶어 어리석은 질문을 해봤던 것이다.
그해 유월의 한국전쟁이여!
이찌 그리 쉽게 잊으랴.(지난날의 단상)
오늘 그해의 유월 그날을 맞아
서울 하늘 아래 우뚝 선 남산을 바라본다.
역사는 기억하는 만큼 교훈으로 살아나는 것.
범부라고 어찌 이 날을 무심하게 보내랴.
바라보는 산하는 희뿌옇기만 해도
하늘은 유월의 진혼곡을 들려주고 있구나.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썼는데
우리는 순국 영령들의 넋을 기려야 하리라.
그해 유월 3천만 중에 2백만의 전사 전상 행불자가 났으니
인구의 10프로에 가까운 목숨들이 화를 입었다.
재산상의 피해야 말해 무엇하랴.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 60만 대군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신이 해이해지면 당나라 군대가 되고 말리라.
2025. 3. 22. 도반(道伴)
첫댓글 사진 좌로부터 수키, 여행, 도반, 투영, 김민정, 소몽,
석탑 뒤에 허주와 서울사람, 석탑 옆에 레드문.
맞나...?
예,맞습니다.
총11분
어제(금), 역사 탐방 참석자 40명 중에 양띠가 무려11명,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랬군요.
어제 수고했어요.
친구님!
덕분에 어제 좋았지요
자주 뵙겠습니다
양띠들의 많은 참석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ᆢ 가재는 게편인데 ᆢ
우리 양이니까요 ᆢㅎ
40명 중에 11명이라지요?
아홉분은 알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