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미 대법관(55세)은 대법원을 용광로라고 표현했다.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은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여기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판결 내용이 달라진다. 대법관 13명이 모두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다퉈볼 필요도 없다. 반면 다양한 가치를 지향하는 대법관들이 서로의 생각을 두고 논쟁하고 시대의 흐름을 판결로 녹여낼 때 대법원은 용광로와 같아진다는 것이다.
“정의는 획일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잖아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르기 때문에 굉장히 역동적인 개념이죠. 그 역동성을 구현하는 것이 결국 다양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치의 다양화를 통해서 그 안에서 치고받고 싸워서 결론을 내면 그게 어느 한 시점의 결론이 되겠죠. 하지만 그게 또 영원한 것은 아니죠. 계속 바뀌어가는 것일 수 있고, 그렇게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 어떤 가치의 역동성을 구현하려고 다양성이 이야기되는 것 같아요.”
오 대법관은 대법원에서 여성 대법관들이 여성적 시각에 입각한 파수꾼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2016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여성 살해 사건, 2018년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 젠더가 주요 사회이슈로 떠오를 때 법원이 제대로 판결하고 있는지 곱씹고 잘못된 판례에 이의제기한 게 주로 여성 대법관들이었다는 것이다.
오 대법관은 “설령 성범죄로 기소된 피고인이 무죄가 맞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그게 정말 맞는지, 요즘 하급심에는 어떤 경향이 있는지 한 번쯤 스크린하는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소부에 1명씩 있어야 된다”며 소부에 여성 대법관이 1명씩 생긴 이후 그런 스크린 역할이 잘 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현재 여성 대법관이 3명이라 소부 3개에 1명씩 배치돼있다. 하지만 오는 12월 퇴임하는 민유숙 대법관 후임으로 여성이 임명되지 않으면 여성이 1명도 없는 소부가 생기게 된다.
여성 대법관들의 시선은 전원합의체 판결에도 반영된다.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기존 판례를 40년 만에 폐기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대표적인 예다. 남성 대법관 5명은 강제추행죄 성립요건 완화에 동의하면서도 보충의견을 통해 처벌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여성인 오 대법관과 민유숙 대법관, 남성인 김선수 대법관은 판례 변경은 처벌범위를 부당하게 넓히려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사건 주심이자 여성인 노정희 대법관은 보충의견을 통해 성범죄를 규율하는 세계 주요 국가의 법률과 판례가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하던 데서 ‘동의 부재’를 기준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짚었다. 김명수 대법원의 마지막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대법관들이 취임할 때 진보건 보수건 20~30년간 소수자와 약자 보호를 말하지 않는 대법관들은 없다. 과연 진정한 소수자와 약자는 누구인가. 피해자가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소수자·약자이고, 소수자·약자는 구조적으로 피해자의 위치에 처한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론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