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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전달하는 천사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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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무기자 스크랩 포천 산정호수 ‘평화의 쉼터’ 6‧25 전적지
호박조우옥 추천 0 조회 75 17.11.24 18: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맑은 수질과 아름다운 산세로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1977년 국민관광지 ‘포천 산정호수’를 찾았습니다. 아름다운 호수나라 ‘산정호수 둘레길’은 물길과 숲길을 동시에 즐기며 호수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호수와 어울려 절경이었고, 붉고 붉은 단풍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은빛 물결이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곳은 포천하면 빼놓을 수 없는 국민관광지입니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 걷는 길은 산정호수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포천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명성산 아래 호수는 이름마저 예쁩니다.

산정호수는 일제강점기 때(1925년) 영북영농조합의 관계용 저수지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산 속에 있는 우물’이라하여 ‘산정호수로 불렸습니다. 또 ‘산 안에 있다’고 하여 산안저수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수변데크길과 송림숲, 붉은 적송숲, 조각공원 등 3.2km의 호수 주변의 멋드러진 풍광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제방 건너편의 망무봉 산자락과 제방 중간쯤에서 명성산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수변데크길을 걸으면서 만난 ‘평화의 쉼터’는 6?25 전적지입니다. 걸음을 멈추고 6?25 전적지 안내판들을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1951년 4월) 국군 6사단이 중공군 5차 공세를 막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지역으로 2008~2011년까지 육군 제5군단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실시한 결과 호국용사 136위의(박달봉 16위, 광덕산 5위, 상해봉 108위, 수리봉 4위, 운천 1위, 관모봉 1위, 금주산 1위) 유해와 유품 300여점을 발굴한 지역입니다.




평화의 쉼터는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고양시키며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드리고,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나라사랑과 호국보훈의식을 함양케 하고자 경기도 포천시와 육군 제5사단이 함께 안보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명예를 되찾아 드리는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책무임을 생각하시고 마지막 한 분의 전사자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그들을 가족의 품으로......”호국영령들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6?25 전쟁이란?
1.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침략전쟁
2. 북한의 치밀한 사전준비에 의한 계획된 전쟁
3. UN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최초의 전쟁
4. 냉전시대의 개막을 알린 첫 번째 전면전


북한의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한국군은 1950. 9.28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 계속 북진하여 1950. 10. 20 평양 점령,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1950. 11. 17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유엔군은 오산까지 후퇴하게 되었고, 1951. 6. 16 Trigve 유엔사무총장이 6?25전쟁의 휴전을 정식제의 하였으며, 6?27 Gromyko 소련 외무상이 휴전관련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최초의 접촉은 1951. 7. 8 대령급을 대표로 하는 예비회담을 개최하였으며, 1951. 7. 10 첫 휴전회담이 개최, 26회까지 개성(래봉장)에서 회담을 갖고, 1950. 7. 20부터 휴전회담은 협정체결까지 159회의 본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188회의 참모장교 회담, 238회 연락장교 회담 등 총 765회의 회담을 거쳐, 결국 1953. 7. 27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가 서명함으로써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중국군 철수, 북한의 무장해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등을 내세우며,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진에는 6?25전쟁 때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T-34 인민군 탱크, 북한 제105탱크여단을 뒤따라, 50년 6월 28일 오전, 작전중인 인민군, 청천강에서 전투준비중인 유엔군, 엄마의 시신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남매, 북한군에 의해 대량 학살된 시신 옆에서 오열하고 있는 우리의 부모님~다시 또 이렇게 처참한 전쟁을 겪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생각이 굳어집니다.



6?25 전쟁의 피해
한국군 및 유엔군 피해
한국군 사망/전사자는 137,569명 - 부상 450,743명 - 실종/포로 43,838명입니다. 유엔군 사망/전사자는 40,670명 - 부상 104,280명 - 실종/포로 9,931명입니다. 한국군과 유엔군 총 사망/전사자는 178,569명 - 부상자는 552,022명 - 실종/포로 42,769명입니다. 사망/전사, 부상, 실종/포로자를 모두 합쳐 한국군 621,479명, 유엔군 154,881명입니다. 공산군 피해는 2,035,000명입니다. 

 

민간인 피해(당시 남한 인구 3,000만명)는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을 합쳐 990,968명이고 북한민간인은 150만명입니다. 남한과 북한 민간인 피해 총수는 2,490,968명입니다. 피난민은 320만여명, 전쟁 미만인 30만여명, 고아 10만여명, 이산가족 1,000만여명입니다.

주요 군사장비 손실은 한국군과 유엔군의 항공기는 1,992대이며 공산군 항공기는 2,186대입니다. 전차는 한국군/유엔군은 777대, 공산군은 1,178대입니다. 재산 피해는 230억불이고, 가옥 피해는 전 가옥의 60%인 293만호, 건물 피해 5만 3,000여동이고 철도와 교량은 630km가 파괴되었습니다.




6?25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에 대해 안내하고 있습니다.
1. 증언 및 현장답사
제보를 하며 그날을 떠올리는 할아버지 “저기.....저 산에....전우를 묻었어...”, 어렸을 적 벌어진 처절한 상황을 떠올리며....죽음으로써 진지를 사수한 호국용사를 떠올리며
2. 개토식
“땅을 연다”는 의미의 개토식이 진행되고 있다. 참전용사의 유해발굴 기원, 성공적인 유해발굴을 기원하며 묵념을 하고 있다. 참전용사의 유해발굴 기원
3. 유해발굴 및 수습
유해수습 중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발굴병, “전우야, 늦게 찾아온 나를 용서해 다오...”“나는 이렇게 오십년을 기다렸다.” GOP철책에서 유해발굴을 위한 의식행사
4. 유해감식
유해 계측에 의한 유해감식, 두개골과 치아에 의한 성별 및 연령감식, 유해감식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5. 영결식
“편히 잠드소서....”군 관계자가 분향하고 있다. 군 관계자들이 선배전우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 발굴된 호국용사에 대해 묵념하는 학생, 영결식 행사 후 봉송되는 호국용사
6. 국립묘지 안장
발굴된 유해 합동봉안식, 봉안식 행사 후 봉송되는 호국용사 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는 호국용사, 호국용사들에 대한 예를 갖춰 충혼당으로 봉송





6?25 전쟁 국군과 유엔군 전사자 유품
군단지역에서 발굴된 6?25전사자 유품들은 제복단추, 계급장, 스푼, 나이프, 신발, 총탄, 군번줄, 철모 다양합니다. 전사자들의 혼을 담고 남아있는 유품들입니다.





6?25 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보면 마음이 더욱 아파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금의 경제, 문화적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이 자랑스럽습니다.




화랑부대 주요전투 *철원, 포천지역 주요전투


화살머리고지(일명 28고지)전투
1953년 6월 29일 ~ 7월 11일에 걸쳐 전개한 전투

피아 상황
-적군 : 중공군 제 29군 예하 제73사단(3개연대)
-아군 : 미 군단 예하 한국군 제2사단(3개 연대)


전투결과
-제1차 전투 : 6월 29일 밤 국군 2사단 32연대가 중공 제73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 화살머리고지 일대의 주저항선을 돌파당하자 제17연대가 역습을 실시하여 진지를 회복하였다.
-제2차 전투 : 7월 6일 제32연대가 화살머리고지를 피탈당하자 또다시 제17연대가 역습을 실시하여 5일 동안 격전을 치른 끝에 진지를 회복하였다.



천덕산 전투
1951년 10월 2일 ~ 10월 6일에 걸쳐 전개한 전투
철원군 안목면 묘장면 위치
피아 상황
-적군 : 중공군 제124사단
-아군 : 한국군 제3사단


대성산지구 전투
1951년 6월 9일 ~ 6월 14일에 걸쳐 전개한 전투
철원군 근남편 마현리에 위치
피아 상황
-적군 : 중공군 제20군 예하 58사단 177연대
-아군 : 국군 제2사단(2개대대 규모)
전투결과
피아간의 6일간 지속된 전투에서 적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피해와 대성산 일대 확보를 통해 김화지역 확보

지격능선 전투
1961년 6월 9일 ~ 6월 14일에 걸쳐 전개한 전투
강원도 철원군 김화 북방, 북녘땅 오성산 자락에 위치(580고지)
피아 상황
-적군 : 중공군 제15군 예하 4개사단(약2만여명)
-아군 : 국군 제2사단 연대(17연대, 32연대)
전투결과
아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로 6주간에 걸쳐 42회의 백병전을 거듭하면서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처절한 전투로 7,600여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아군은 485명이 전사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에 걸쳐 펼쳐진 전투
강원도 철원군 동송 서북방 비무장지대에 위치
피아 상황
-적군 : 중공군 제38사단 예하 112,113,114사단
-아군 : 국군 제9사단, 제51연대, 제1포병단
전투결과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이 백마고지 쟁탈을 위해 10일간 처절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 속에 12차례 걸쳐 뺏고 빼앗기는 전투 속에 국군 9사단이 승리한 전투
전투결과 중공군은 1만여 명의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다.
국군 9사단도 3,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함
발사된 포탄은 아군 219,954발, 적군 55,000발 등 총 274,954발임


사진에는 포연에 휩싸인 백마고지 전경과 포격을 받고 있는 백마용사들, 필사적으로 사수하는 백마용사들, 수류탄 하나만을 가지고 인해전술로 돌격하는 중공군, 유공자에 대한 훈, 포상 수여 사진들이 그 날의 전투를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산정호수 데크길을 걷다가 ‘평화의 쉼터’ 6?25 전적지를 한번쯤 거쳐갔으면 싶습니다. 우리의 행복한 삶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바로 6?25전쟁에서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낸 국군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걸으면서 둘러본 산정호수와 망무봉과 명성산이 달리 보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되뇌며 산정호수를 걸었습니다.



<취재 : 청춘예찬 부모기자 이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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