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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와 나단의 반역
민 16:1-15
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4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5 고라와 그의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사람을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
6 이렇게 하라 너 고라와 네 모든 무리는 향로를 가져다가
7 내일 여호와 앞에서 그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8 모세가 또 고라에게 이르되 너희 레위 자손들아 들으라
9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10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11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12 모세가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더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13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14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15 모세가 심히 노하여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는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나는 그들의 나귀 한 마리도 빼앗지 아니하였고 그들 중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민 16:1-15 / [고라가 들고 일어나다] 레위의 증손자이며 고핫의 손자이고 이스할의 아들인 고라가 르우벤 사람인 엘리압의 아들인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과 함께 모의를 하여 2)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지도자로 뽑힌 250명의 대표들과 함께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3) 모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이들이 함께 몰려와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다. `당신들은 해도 너무하는 것 같소. 여호와께서 우리 이스라엘 온 공동체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모두 거룩하오.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만이 우리 공동체 위에 군림하려고 하오?' 4) 모세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기도한 뒤 5) 고라와 그 무리에게 말하였다. `내일 아침에 여호와께서 누가 여호와께 속한 사람인지 누가 거룩한 사람인지 보여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뽑으신 사람들은 모두 다 제단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실 것이다. 6) 그러니 너희 무리는 모두 향로에 7) 불과 향을 담아서 여호와 앞으로 나오너라.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몸소 뽑으신 사람들을 구별하실 것이다. 그러면 누가 여호와께 속한 사람인지, 누가 거룩한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지나친 사람들은 바로 너희 레위 후손들이다.' 8) 모세는 고라에게 계속해서 말을 하였다. `너희 레위인들은 들어라. 9)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에서 너희를 특별히 뽑아 내시어 당신에게 가까이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대신하여 여호와의 성막에서 일을 보게 하셨다. 너희는 이러한 일을 그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느냐? 10) 하나님께서는 너와 너희의 일가붙이인 모든 레위인들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와 당신의 일을 보게끔 하셨는데 이제 너희는 제사장 일까지 보겠다고 나서느냐? 11) 이렇게 무리를 지어 몰려오다니, 아론에게 대드는 것이 곧 여호와께 반기를 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느냐?' 12) 모세가 엘리압의 아들인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가지 않겠소 13) 그대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굶어 죽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또 우리를 마음대로 부려먹으려 하는거요? 14) 당신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지도 못하였고 농사 지을 땅도, 포도밭도 주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우리를 속이려고만 하오? 우리는 당신한테 가지 않겠소.' 15)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모세는 여호와 앞으로 나아갔다 `주님, 저들이 주께 어떤 예물을 드린다해도 받지 마소서. 나는 저들에게 어떤 잘못도 한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들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나귀 한마리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 때문에 이스라엘은 40년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의 일부가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반역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무서운 심판을 초래하게 될 반역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1-7) 고라는 이 반역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레위인으로서 고핫 종족 출신이었고, 모세의 사촌이었습니다(1). 어느 시점에선가 광야 40년의 방황에 대하여 서로 원망과 불평을 하며 모세와 아론에게 저항할 반역을 꾸미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50명의 지휘관까지 충동하여 함께 반역을 꾀합니다(2). 그들은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대해 비난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너무 많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생각하였고(3),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도 모세와 아론의 탓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실 만큼 죄 많은 백성이 아니기에 모세가 회중 위에 군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이들의 말을 듣고 엎드립니다(4). 모세는 각자 향로를 취하고 여호와 앞에 향을 불사름으로 자신을 입증해 보자고 합니다(6-7). 제사장들만이 향을 불사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자들은 향을 불사를 수 없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였다가 불이 그들을 삼켰습니다(레 10:1-2). 만일 반역에 가담한 자들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도자라면 불로 인한 시험에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모세는 고라 자손의 반역에 가담한 레위인들에게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다”고 했습니다(7).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8-15) 모세는 반역에 가담한 고라와 레위 자손들에게 경고합니다. 레위 자손들은 성별된 사람들로 이스라엘 백성을 섬기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이 역할에 감사해야 했고,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9).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제사장직을 구하는 죄를 범합니다(10). 모세는 다단과 아비람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부름을 거절하며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12)고 합니다. 모세를 대적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애굽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 모세와 아론이 우리를 이끌어내서 광야에서 죽게 해놓고 우리의 왕이 되려 하느냐고 반항하면서(13)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모세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14).
적용: 높은 지위는 섬기는 자리입니다. 지위에 욕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막 10:45)?
大知閑閑 小知閒閒[대지한한 소지간간] “크게 안다는 것은 탁 트인 것이고 작게 안다는 것은 좁디좁은 것이다.”-장자. 그릇이 큰 사람은 소소한 일로 다투지 않습니다.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너그럽고 넓어서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지혜가 작은 사람은 작은 일에 집착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시간과 노력을 허비합니다. 큰 지혜는 실질을 추구하고 작은 지혜는 명분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직분과 은사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가입니다.
< 설 교 >
거스리고 원망하고 대적하는 것
민 16:1-21 / 김명혁 목사
며칠 전에 기독교 티비에 녹화된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를 감명 깊게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욥42:1-6 말씀을 본문으로 회개를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회개가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가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할 때 죄인이 처음에 신자로 태어나고 회개할 때 신자가 마지막에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신자가 마지막에 “나는 무익한 죄인입니다 나는 망할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회개할 때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운동경기에 있어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지막 마무리가 가장 중요한데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무리가 회개라고 강조했습니다. 욥의 마지막 마무리가 회개였습니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이 마지막에 진정으로 회개했을 때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개할 때 기쁨이 생기고 회개할 때 평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개인생활에 기쁨이 없고 가정생활에 기쁨이 없고 직장생활에 기쁨이 없고 교회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회개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인생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회개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년과 노년에 이르러 회개의 눈물이 메말랐다면 그것은 가장 큰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회개가 가장 큰 은혜요 가장 큰 축복입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고후7:10). 회개가 없는 사람은 구원과 상관이 없고 천국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선포한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기 때문에 낙원 곧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분부하신 말씀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제일 처음 설교에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고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마지막에 회개를 힘썼고 프랜시스가 마지막에 회개를 힘썼고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회개를 힘썼습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아홉번째 설교를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거스리고 대들며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고라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거스리고 대들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고라는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고 성막 봉사의 직분을 맡은 성별된 사람이었지만 마지막까지 거스리고 대들며 회개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았습니다.
제가 최근에 이전보다 심각한 마음으로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강변의 성도들이 모두 오른 편에 서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자기 안일 자기 편안 자기 행복에 치우쳐 있는 사람은 왼 편에 설 수 있는 위태로운 형편에 처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강변의 성도들이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합니다. 눈물의 회개를 가슴에 지니고 모두 천국 문으로 들어가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주님의 오른편에 서기를 바라지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모두 회개하고 구원의 축복과 천국의 축복을 받기를 바라지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고라와 그의 당이 범한 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첫째 고라와 그의 당은 모세와 아론을 거스렸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인과 함께 일어나 모세를 거스리니라”(1,2). 고라와 세 사람이 당을 지어 하나님이 택하시고 세우신 종 모세를 거스렸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하나님의 종을 거스리는 것도 죄인데 여럿이 당을 지어 하나님의 종을 거스린 것은 더 큰 죄였습니다. 성경은 당을 짓는 것을 죄라고 규정했습니다. “오직 당을 지어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보응하시리라”(롬2:8). 고라는 당을 지어 모세의 영적 지도력에 대항했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이 자기들의 지도력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3). 하나님이 택하시고 세우신 종을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거스리는 것과 같은데 고라는 당을 지어 하나님의 종을 거스리고 하나님을 거스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남이 자기보다 높아지면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거스리며 대항하게 됩니다. 남이 자기보다 은혜를 받고 복을 받으면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았을 때 가인의 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했을 때 에서의 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했을 때 사울왕의 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와 반항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교회의 담임 목사로 세우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의 장로로 세우시고 어떤 사람은 권사와 집사로 세우십니다. 어떤 사람은 몸의 눈으로 어떤 사람은 몸의 귀로 어떤 사람은 몸의 손으로 어떤 사람은 몸의 발로 만들어 주십니다. 서로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귀하게 여기고 서로 협력하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시기 질투하고 분쟁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신의주 제이교회의 김기범 장로는 아들 같은 젊은 목사 한경직 목사를 너무 잘 받들어 섬겼고 평양 산정현 교회의 조만식 장로는 자기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주기철 목사를 너무 잘 받들어 섬겼습니다.
그런데 고라와 그의 당은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의 지도력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당을 지어서 불만을 토로하며 모세를 거스렸습니다. 유명한 족장들 250명과 당을 지어 모세를 거스렸습니다. “이백오십인과 함께 일어나 모세를 거스리니라.” 모세의 영적 은사와 지도력에 대한 불만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강변교회에 젊은 목사가 담임 목사로 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을 잘 받들어 섬기므로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 회사의 직원들처럼 대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회사의 인사과장 정도로 대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고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고라와 그의 당이 범한 죄는 모세의 영적 지도력에 불만을 품고 모세를 거스리고 하나님을 거스린 것이었습니다.
둘째 고라와 그의 당은 자기들의 분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고라와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구별하여 택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막에서 봉사하는 귀한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오늘날 장로님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라와 레위 자손들은 성막 봉사의 직분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세의 선지자 직분을 시기 질투하며 원망했고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시기 질투하며 원망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봉사의 종교인데 사람들은 봉사를 싫어하고 지도하고 다스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에게 다스리는 자들이 되지 말고 섬기는 자들이 되라고 분부했습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고 다스리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을 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찌니라”(눅22:25).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섬기는 자로 세상에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모세가 고라와 레위인들을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너희 레위 자손들아 들으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리는도다 아론은 어떠한 사람이관대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7-11).
자기의 분수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2장-4장에서 자기를 약한 자라고 했고 무슨 물건과 같은 존재라고 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고 만물의 찌끼라고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장에서는 자기를 만삭되지 못해서 난자라고 했고 엡3장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고 딤전1장에서는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분수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와 직분을 황송하게 여기며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라"(딤전1:12).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16:6). 고라와 그의 일당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겨주신 직분을 황송하게도 감사하게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과 원망을 나타내보였습니다. 1달란트 맡은 자와 같은 불만을 나타내보였습니다. 자기 분수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셋째 고라와 그의 당은 회개의 기회를 대적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모세는 고라와 그의 당을 타이르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않았고 모세의 부름에 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모세가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보내었더니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12).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13-14). 한번 마음이 삐딱해진 사람은 타이르는 말을 들어도 소용이 없고 충고를 들어도 소용이 없고 책망을 들어도 소용이 없고 설교를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들은 점점 더 거칠게 대들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대적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심히 노했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모세도 노하고 베드로도 노하고 바울도 노합니다. 모세는 심히 노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암시했습니다. “주는 그들의 예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고라에게 마지막 경고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라는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아 놓고 모세와 아론은 대적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21).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31-33). 고라와 그의 당은 결국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모세를 거스리며 대적하다가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250명이 망했고 그 이튿날엔 일만 사천 칠백명이 망했습니다(49).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회개하면 삽니다. 회개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고라와 비슷한 죄를 범하고서도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론이었습니다. 아론도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비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자 즉시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순종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제사장의 직분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민12장과 16장과 17장과 18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모세의 사생활과 모세의 지도력을 비방했습니다]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자기들의 분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거스리는 것을 그대로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내 종 모세는 나의 온 집에서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민12:1-10). 바로 이 장면에서 아론이 무릎을 꿇고 모세와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10,11). 모세가 무릎 꿇고 중보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론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민16:46,47에는 아론의 순종이 나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민16:46). 아론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민17:8에는 회개하고 순종한 아론을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축복하시고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민18:1에는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다시 제사장 직분을 맡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족은 제사장 직분을 담당할 것이니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거스리고 대들며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회개가 없는 자에게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막 봉사의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무력화 시키는 유일한 해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체면과 자기의 지위와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옳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오직 십자가만을 붙잡는 것이고 오직 주님의 옷자락만을 붙잡는 것입니다. 회개는 주님의 종들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방향 전환입니다. 유교적인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남자들이 회개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 전통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회개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타난 회개자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고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이었고 문둥병자나 중풍병자와 같은 병자들이었습니다.
김삼환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 반복하므로 말씀을 맺습니다. “회개는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회개는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회개할 때 죄인이 처음에 신자로 태어나고 회개할 때 신자가 마지막에 천국으로 옮겨집니다. 개인생활에 기쁨이 없고 가정생활에 기쁨이 없고 직장생활에 기쁨이 없고 교회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인생을 새롭게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회개를 힘써야 합니다. 장년과 노년에 이르러 회개의 눈물이 메말랐다면 그것은 가장 큰 불행입니다. 회개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강변 성도 여러분들, 고라의 길로 가지 말고 아론의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거스리고 원망하고 대적하는 길로 가지 말고 회개하고 순종하고 봉사하는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개인이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사는 길이 회개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회개의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함으로 누리는 자유
민 16:1-16 / 양인순 목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추석명절 아침입니다.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님들에게 보름달처럼 풍성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계속 살펴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 불신앙, 그리고 비전의 부재 라는 고질병에 걸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을 차지하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의 고단한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여정에서 다시한번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른바 ‘고라일당의 반역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레위지파인 고라와 르우벤 자손이 다단, 아비람과 온이라는 네 사람이 주동을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 급에 있는 사람 이백 오십명을 포섭합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영적인 리더인 모세와 아론을 대적합니다.
반역의 이유는 자기들도 아론처럼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다같이 일하는데 자기들은 심부름 역할을 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들의 역할도 중요함을 일깨워주며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완강하게 버팁니다.
그 결과 주동했던 네 사람은 땅이 갈라져 그들의 집과 가족들을 모두 삼켰습니다.
그리고 협력했던 250명의 지도자들은 불에 타서 죽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 사건을 보고 원망하던 백성들에게 염병을 내려서 1만 4천 7백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반역했다가 엄청난 대가를 치룬 사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권위자, 영적인 리더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목사나 항존직, 그리고 가르치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영적 권위에 대해서 반항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라의 일당이 반역한 이유를 3절에 소개합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월권을 행사한다고 여깁니다.
자기들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여기시는 자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들인데 너무 교만한 것이 아니냐고 대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세와 아론이 지나치게 교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자기들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함께 일하는 자들인데 당신들의 시중이 드는 심부름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보다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밑에서 지배를 받기보다는 지배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교만함이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높아지거나, 더 많은 복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시기심과 질투심이 생깁니다.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결국은 대적하거나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셨을 때 가인의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했을 때 에서의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했을 때 사울왕의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와 반항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대적하거나 불순종하는 자는 멀리 있는 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란 점입니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서로를 대적하고, 불순종합니다.
반역의 주동자인 고라는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세워준 자로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과 질투심이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망각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을 반역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고라가 그런 행동을 주동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사탄의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실상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상처를 주거나 배신할 일은 없습니다.
언제 우리의 마음이 가장 시리고 아픕니까?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고 돌아설 때가 아닙니까?
사탄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켜서 서로를 공격하고 대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서로를 절제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촌수가 없는 부부사이를 잘 지켜야 합니다.
자칫 방심하는 순간 사탄이 가라지를 뿌리면 가정이 잡초가 우거지고, 지옥처럼 변합니다.
가까운 친구관계를 잘 지키지 못하면 배신하게 되고, 서로를 파멸시킵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성도관계를 바르게 유지해야 합니다.
서로를 잘 안다는 것 때문에 인간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대하다가 자칫 사탄이 틈타면 관계가 깨어지고,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서로를 의심하거나 거리를 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고, 절제하라는 뜻입니다.
고라와 그 일당들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교만해졌습니다.
9절에 모세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 겠느냐”
그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가장 가까이에서 성막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막중한 책임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스런 예배의 자리에서 봉사할 수 있는 특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우리들도 모세와 아론처럼 얼마든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영적인 교만함으로 대적하는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교회의 담임 목사로 세우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의 장로로 세우시고, 어떤 사람은 권사와 집사로 세우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찬양대원으로, 어떤 섬김의 봉사로, 어떤 사람은 전도자로 세워주십니다.
각자의 은사가 다르고, 능력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서로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귀하게 여기고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다양성 속에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결코 서로 시기 질투하고 분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에 따라 순종함으로 최선을 다해 섬길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 교회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고라일당의 반역은 단순히 모세와 아론에 대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만이요 도전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목회자와 당회, 당회와 제직회, 때로는 성도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 갈등이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해결되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의 양상으로 갑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갈라지고, 심지어는 세상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영적 리더들에 대해서 불순종하거나 대항하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 리더들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소한 갈등이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부단한 자기 갱신의 노력을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바르게 이끌어 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이기에 실수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보기에 이해하기 힘든 결정을 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과연 어떻게 처신하고, 대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입장에서 판단하거나 생각하지 말고,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먼저 접근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자기의 자존심이나 이기심을 가지고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합당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결코 자기주장을 내세우거나, 자기 우월성을 강조하는 곳이 아닙니다.
모든 결정과 행동의 중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냐 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수 있는 일이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공동체의 덕과 질서를 세우는데 합당하냐입니다.
아무리 내 판단이 옳아도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덕과 질서를 깨뜨린다고 생각하면 절제해야 합니다.
좀 더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비난하는 자가 아니라 창조적인 대안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이런 훈련이 되지 않으면 고라일당처럼 영적 리더들과 대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영적 리더들의 권위에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고라와 그의 일당을 타이르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12-13절 말씀에 “모세가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더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미 마음이 완악해지고 걍퍅해진 그들은 오히려 원망과 비난을 하며 올라가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한번 마음이 삐딱해진 사람은 타이르는 말을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충고를 들어도 소용이 없고, 설교를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미 그 마음이 사탄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고라 일당은 회개의 기회를 오히려 또 다른 대적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심히 노했다고 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셨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면 심판이 임합니다.
모세는 심히 노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암시했습니다.
“주는 그들의 예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15절)
고라 일당에게 마지막 경고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아 놓고 모세와 아론은 대적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21).
결국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아니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주동했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땅이 갈라져 죽습니다.
그들의 모든 재산과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또한 고라 일당의 반역에 동참했던 250명의 지도자들은 불에 타죽었습니다.
그리고 반역의 결과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염병을 내리십니다.
물론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해 염병을 그치는 방법을 제시하셔서 모든 백성을 멸하는 것은 막았지만 1만 4천 7백 명이 죽고 말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그러나 돌이켜 회개하면 살고, 은혜를 받습니다.
고라와 비슷한 죄를 범하고서도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론입니다.
아론도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비방한 일이 있었습니다.(민12장)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자 즉시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순종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제사장의 직분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리더들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교회 안에 있는 영적 리더만이 아니라 세상의 권세자들에 대해서도 순종하라고 명하십니다.
제자대학 훈련 팀들의 방학과제가 “순종”이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2주간에 걸쳐서 책을 읽은 후의 느낌과 적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공통적인 의견 중의 하나가 교회 안의 영적 리더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국가의 지도자들에 대해서까지 순종하라는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국가의 지도자든, 직장의 상사든, 가정의 부모님이든 간에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명령에 따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권위를 거부할 수 있는 한 가지 예외는 죄에 대한 요구입니다.
죄를 짓도록 요구하는 것 이외에는 일단 그 권위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권위, 리더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물론 내 생각과 뜻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에 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약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리더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사람이 세운 것이라면 사람이 손을 봐서 해결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요 권위이기 때문에 사람의 손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사울 왕이 무고하기 자기를 죽이려고 10년이 넘도록 쫓아다닐 때 그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기에 자기 힘으로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입니다.
내가 정의를 세우겠다고 앞장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리더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사람이 손보는 것은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벗어나게 되면 그것은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리더들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순종함으로 누리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 서로 거스르고, 대항하게 되면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불평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 자유함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영적인 리더들에게 순종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인간적인 탁월함이나 능력이 우선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좀 부족하고 실수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이기에 함께 협력하고,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 속에 더 발전적인 대안이 나오고, 더 창조적인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순종” 이란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인 리더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바로 리더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영적 리더들에 대한 순종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이요
영적 리더들에 대한 불순종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요 반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리더의 권위를 존종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보다도 먼저 순종의 태도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형식이요 오히려 하나님의 근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영적인 리더십과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보시기에 영적 리더들이 좀 부족해 보이신다면 사랑의 마음으로 더욱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난하기에 앞서 창조적인 대안을 가지고 지혜롭게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이나 판단에 앞서서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기뻐하는 모습은 무엇일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영적 리더의 위치에 있는 분들은 자신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이 성도들에게 오해와 불신을 일으키는 영향력이 있음을 깨닫고 더욱더 맡겨진 일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영적 리더들의 권위에 순종하고, 영적 리더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더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으로 든든히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반역과 그 결과
민 16:1-11 / 피영민 목사
서 론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 한자로는 백성 민(民)에 숫자를 나타내는 수(數)를 사용해 백성의 숫자를 말합니다. 이 책의 제목이 민수기인 이유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두 번에 걸쳐 계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수기를 보면 백성의 숫자를 계수한 것은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불평과 원망과 반역의 사건은 끊임없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에는 백성의 원망 사건, 12장에는 형제의 원망사건, 13장과 14장에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백성의 반항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민수기는 차라리 불평수기라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15장에는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의 제사규정을 다시 반복하는데, 16장에서 우리는 또 다른 반역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지도자 반항사건입니다.
지도자들이 모세 반대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대표자가 고라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고라의 사건’, 혹은 ‘고라의 사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라의 사건은 그저 지나간 옛날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위험성을 언제나 안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고라의 사건을 보면서 함께 교훈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반역의 이유
먼저 우리는 고라뿐만 아니라 다단, 아비람, 온, 이 네 사람이 반역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유명한 지도자였지만 모세가 하는 일에 늘 불평만 했습니다. 우발적으로 한두 번 불평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불평했습니다. 16장 1절 후반에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당을 지었다는 말은 조직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모세에게 반항운동을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군소정당이 아니라 거대야당입니다. 이 네 사람들이 주동자가 됐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명한 족장 250여명이 힘께 가담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2절)고 했습니다. 족장 250여명이 가담을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대거 가담을 했습니다. 49절에 보니까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거대한 반역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반역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유는 모세나 아론 두 사람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운 은혜기관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나 아론이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두 거룩하고 평등한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은혜기관이란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기관을 말합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중이 모두 거룩하고 여호와께서 회중 가운데 계시는데, 왜 모세와 아론만이 스스로 여호와의 총회 위에 높이느냐고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은혜기관으로 세우신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고라, 다단, 아비람, 온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민수기 15장 37절부터 보면 그 원인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을 만들고 술을 달아 입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파란줄을 매게 하셨습니다. 왜 술을 달게 했을까요? 그 술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기억하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 거룩한 옷을 입고 다니다 보니 모세와 아론을 자신들과 평등하게 여겨 반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거룩합니다. 루터
의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모든 신자는 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택하신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진리이고 옳은 말이지만, 이 한 가지 진리를 내세워서 은혜기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그 직분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다 거룩하고 평등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 교회에 직분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이 원리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다 거룩하고 평등하므로 은혜기관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항한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반역의 원리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은혜기관을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그들이 말한 대로 평등한 원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모세와 아론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 은혜기관을 허물어버리고 그 대신 자기들이 그 자리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반역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의 9절부터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제사장의 직분을 구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자신들이 그 자리에 올라가도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역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거기서 출발합니다. 고라는 하나님께서 고라 자손들에게 주신 성물 운반하는 사명을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직분을 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왜 제사장 직분을 구했을까요? 이들은 르우벤 지파 사람들입니다. 르우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장자인데, 아주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서모를 범하여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야곱이 르우벤의 장자 특권을 뺏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지파는 장자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레위 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서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의 후손들이 불만을 가졌습니다. 불만에 찼을 때,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 중에 불만에 앞장서는 지도자, 고라가 나타나니 그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에 진을 치는데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세 개의 지파와 레위자손 중 고핫 자손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라와 르우벤 지파는 남쪽의 한 동네에 텐트를 치고 있었던 이웃사촌입니다. 떨어져 있었으면 반역을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웃을 잘못 만나 반역에 가담했습니다. 평소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고라가 일어나니까 부화뇌동하고 휩쓸려서 반역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반역의 판결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네 사람에 대해 판결을 내리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판결을 내리시는지 본문 6-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라. 너 고라와 너의 모든 무리는 향로를 취하고 내일 여호와 앞에서 그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 그 때에 여호와의 택하신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그들이 제사장이 되려고 하자 향로를 가지고 나와서 불을 담아 하나님께 분향을 해보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지 받지 않으시는지에 따라 판결을 내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향을 받으시면 그들도 제사장이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면 그들은 제사장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반역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다 나옵니다. 이 반역 운동의 일급 주동자인 고라, 주동자는 아니지만 주동자와 앞장서서 나간 이급 반역자인 다단과 아비람과 온, 3급 반역자인 이스라엘의 족장 250인, 그리고 모든 백성들 중 이들에게 부화뇌동된 4급 반역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16장 19-21절을 보면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그 두 사람을하려 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순식간에 다 죽이려고 하니까 모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한 번 시원하게 처리하시지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엎드려서 온유하고 침착하게 22절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모세는 1, 2, 3, 4급 반역자들이 있을지라도 고라 한사람만을 범죄한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을 다 멸하려 하십니까? 하나님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중보기도를 받아들이셔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멸망에 처할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예배하는 이 자리가 마지막 기회가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혹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죽으면 돌아갈 집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23절을 통해 “회중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단과 아비람에게 가서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 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 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고 경고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라의 장막을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의 가족들입니다. 이들은 장막의 땅 밑이 꺼질 때, 땅속으로 모두 생매장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1급 반역자와 2급 반역자는 이처럼 땅에 생매장되어 죽고 3급 반역자인 족장 250여명은 여호와께로서 나온 불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35절 말씀을 보니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고 했습니다. 4급 반역자인 백성들은 그 날에는 모세의 말을 듣고 고라의 장막을 떠나서 일단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음날 일어나서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41절을 보니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고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들을 죽였습니까? 모세 아론은 살려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회중들은 또 불평하고 원망하며 “너희가 여호와 백성을 죽였도다”고 말하며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더 이상 안되겠다 하여 염병을 내리셨습니다. 염병이 급속도로 퍼져가자 모세와 아론은 향로에 불을 담아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서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결국 염병은 14,700명만 죽이고 멈추게 되었다는 내용이 고라 반역 사건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민수기 16장을 보게 되면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민수기 16장을 볼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떨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의 사랑의 하나님이므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옛날 2세기에 마르시온(Marcion)이 그런 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게 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맞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그 날로 부부동반으로 죽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나 고라의 사건이나 다 비슷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진리의 양면을 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라 사건의 교훈
이 고라의 반역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이 시대에 받아야 할 교훈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단과 아비람, 온과 고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길어도 7~80년입니다. 이 짧은 인생 동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쓸데없이 고라와 같은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아무쪼록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아름다운 믿음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혜기관을 함부로 비방하고 중상모략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마다 이런 일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일들은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이웃이 반역할 때에 우리는 이웃의 반역에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주동자도 죽었고, 부화뇌동 한 사람들도 다 같이 죽지 않았습니까? 세 번째, 아무리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신앙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옳지 않은 일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문제는 가족의 정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부모들이 식탁에서 목사님을 욕하고 비방하면 그 자녀들이 다 배웁니다. 부모들이야 나중에 생각을 바꾸면 그만이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목사님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아이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게 되는 책임은 그 부모들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앙문제 만큼은 가족 정신에 이끌려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 서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 영혼을 하나님앞에 바르게 세우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스토리를 읽다보면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그 가족들까지 모두 죽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는데 주동자였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반역하는데 끼지 않고, 그 장막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26장 11절을 통해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고라의 자손들은 나중에 시편도 많이 짓고,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양하는 일도 감당하게 됩니다. 시편 84편을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85편에는 “고라 자손의 시라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84편 10절을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고라조상들은 성물을 메고 가는 직분에 만족하지 못하여 제사장이 되겠다고 했지만 고라의 자손들은 이 일을 반면교사 삼아 배우고 고친 것입니다. 또한 시편 85편 8절을 봅시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찌로다” 역시 고라 자손들은 “우리 조상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상을 심판하셨지만 우리를 죽이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기회를 주셨으니 우리는 망령된 대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문지기 일이라도 감사하며 감당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결론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책의 저자인 서진규 씨는 어촌에서 엿장수 딸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가발공장에서도 일하고, 골프장에서도 일하다가 23살에 단 돈 백달러를 들고 미국에 가서 식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식모살이를 하던 중, 미국의 군대에 들어가서 소령까지 진급을 했습니다. 소령으로 예편한 후에도 계속 공부를 해서 지금은 50살이 넘는 나이에 하버드 대학의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습니다. 서진규 씨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멋진 반항심, 거룩한 반항심이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마음속에는 반항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살짜리 어린애도, 어른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반항정신이 다 나쁜 건 아닙니다. 때로는 반항심이 삶을 건설하는 에너지로 작용하는 때도 있습니다. 자기의 나쁜 환경에 반항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반항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반항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반항하는 것,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혜기관을 향해서 반역하는 것, 그것이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양면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올 한해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는 조금도 보지 마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만을 보시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민 16:1-11 / 이성우 목사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이 듣게 되고, 또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곧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 관계라는 말은 우리 인생의 모습이 아주 다양한 것만큼이나 아주 다양하고 폭넓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라는 말은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해서 부부관계, 부모 자식 간의 관계, 또 형제관계, 이웃관계 등등 아주 다양한 관계를 넘어서 이 관계라는 말은 국제적인 무대로 옮겨가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제 관계’까지 아주 다양하게 사용되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 관계라는 말은 우리 인생살이의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하게 되는 종교적인 영역에까지 확대되어서 하나님과 우리 관계라는 단계까지 확장되어 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관계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적용할 수 있고 사용되어지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가 아주 다양한 이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이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살이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자기 삶을 둘러싼 다양한 관계를 건강하고 좋은 관계,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맺고 살아가야만 하는 다양한 모든 관계들을 건강하고 좋은 관계, 더 나아가서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서 그 속에서 얻어지는 행복감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해야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요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인 것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그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말씀 가운데 구약성경 시편 1편 1-6절을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의 삶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기록해 놓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자연스럽게 결단하도록 이끌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또한 시편 32편 1-3절을 보면 우리들이 생명처럼 여겨야 할 하나님의 관계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걸림돌이 되거나 방해물이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깨우쳐 주고 있음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이제 말씀드린 두 곳의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본질적이고도 기본적인 문제,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에서 갈등과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존재로 만드셔서 우리를 가까이 두시고 언제든지 교제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시기를 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들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우리 인간을 가장 마지막 순서에 만드심으로써 우리 인간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서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 인간을 그 곳에서 살아가도록 배려하신 것이라든지, 또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심으로써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오직 우리 인간만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대화하며 교제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한 관리를 우리 인간에게 맡기신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창세기 1장 2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인간을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가장 소중히 여기셔서 가까이 두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관리권을 위탁하신 사실을 깨닫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 아침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음을 우리들이 먼저 기억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좋은 관계,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것 보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더불어서 친밀한 관계를 맺으심으로서 가까이 두시고 교제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음 중에 복음인 것이며, 여기서부터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요 우리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신약성경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이 사실을 줄기차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3장에서 뱀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지내던 아담을 먼저 찾아와서는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어집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그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인간을 찾아오셔서는 만나주시며, 그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방법으로, 그리고 또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던 것이 신약성경의 성육신 사건, 곧 하나님께서 급기야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찾아오시는 모습 속에서 가장 극적으로 발견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더불어 가까이 지내시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려고 하는 것일까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데,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이미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 16-17절 말씀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놓으셨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남아있는 한 가지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남아있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 말씀인 민수기 16장 1-11절 말씀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한 가지 우리에게 제공해 줌으로써 우리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민수기 전체의 중심주제인 ‘불평과 원망’이라고 하는 큰 틀 속에 포함되어 있는 말씀으로, 민수기 11장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중의 불평과 원망이 다양한 형태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본문의 불평과 원망이 가지는 특징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시기심에서 비롯된 모습으로, 고라를 비롯한 몇 사람의 선동과 그 선동에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250명이라고 하는 많은 수의 무리들이 동조해서 계획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인 모세와 아론에게 도전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라 일당의 반역 사건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발단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 잘못된 생각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 1절을 보면, 선동의 주동자인 고라라고 하는 사람은 레위 지파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제사장들을 도와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고, 고라의 선동에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선동에 동조했던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온, 이들 세 사람은 12지파 가운데 가장 장자 격이었던 르우벤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인간적인 기득권에 대한 감사한 마음 보다는 우월감이라든지, 아니면 교만한 마음, 그리고 지나친 욕심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만족하여 그것을 감사하며 충성을 다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욕심을 부리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세움 받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의해서 세워진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욕심이나 방법에 의해서 세워진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결국은 그들을 향한 도전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고, 그것이 결국은 그들을 일꾼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본문 11절 말씀에서 고라 일당을 향해서 이렇게 지적하며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고라 일당의 반역 사건이 얼른 보기에는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인간적인 도전이요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과 불평, 그리고 원망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들의 반역 사건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이 세상적인 것을 가까이 하는 데서부터 비롯된 지극히 불신앙적인 마음의 표출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고라 일당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일으킨 이 불행한 반역 사건의 결과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인데, 본문 말씀 이후를 살펴보면, 땅이 입을 벌려 삼킴으로 죽었던 고라 일당과 그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도 염병으로 죽은 자의 숫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는 자신도 죽음에 이르게 되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만들게 되는 불행한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왜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고, 내 주변을 살리는 자로서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 살아가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프고 어두운 역사의 한 단면을 통해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입춘도 지나고 새 생명이 움터오는 좋은 계절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몸과 마음, 그리고 심령까지도 웅크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제부터라도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여러분들을 가까이하시고 은혜와 복, 그리고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셔서 오늘도 먼저 손 내미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을 믿음의 결단으로 굳게 붙잡으심으로 날마다 날마다,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셔서 자신도 살고, 주변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반역세대에서의 권위
민 16:1-2 / 이익환 목사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스승의 권위를 존중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고 스승을 밟는다’는 자조적인 말이 생겼다고 한다. 권위자의 권위가 존중되지 않는 시대이다. 자신에게 따끔하게 말해주는 사람을 쉽사리 ‘꼰대’라고 부르는 시대다. 권위에 대한 반역이 쿨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물론 ‘권위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들의 ‘권위’를 흔드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의 권위에 반역하는 사건이 나온다. 광야 40년 기간 중 모세에게 가장 위기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리더십의 최대 위기를 맞았던 모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모세를 대적한 중심 인물은 고라였다. 그는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이었다. 모세, 아론과는 사촌지간이었다. 고라는 언제부터 모세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했을까? 출애굽 2년 후 인구조사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인구조사를 마치고 모세는 각 종족의 대표지휘관을 임명한다. 민 3:30, “웃시엘의 아들 엘리사반은 고핫 사람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의 지휘관이 될 것이며” 모세는 고핫 종족의 지휘관으로 엘리사반을 임명한다.
여기서 고핫의 족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 6: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은 네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은 아므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였다.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었고, 모세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고라는 고핫의 둘째 아들 이스할의 장남이었다. 당연히 서열상 자신이 가문의 대표지휘관이 될 차례였다. 그런데 모세는 고핫의 네번째 아들인 웃시엘의 아들, 엘리사반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고라로서는 불만스러운 결정임이 분명하다.
지난 토라포션에서 우리는 가나안 정탐 사건을 살펴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생활이 40년 더 지속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찌되었건 모세는 그때까지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지 못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속에서 고라는 반역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힘의 규합에 나선다. 그에게 동참한 자는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르우벤 자손이었다. 르우벤이 누구인가? 야곱의 장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장자의 역할에서 제외된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제사장직은 레위지파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리더십 역할은 유다와 요셉지파에게 넘어간다. 장자 지파였지만 장자의 역할을 박탈 당한 르우벤지파는 한마디로 현 지도부에 대해 불만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반역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가져봤거나 여전히 힘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고라는 르우벤지파만 포섭한 것이 아니다. 민 16: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이 정도면 유다지파 갈렙과 에브라임지파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파가 고라편에 선 것으로 보여진다.
고라의 주장을 살펴보자. 민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고라는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리더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리더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리더십을 지위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묘사된 리더십이 아니다. 성경은 모세를 ‘여호와의 종’(민24:5)으로 묘사한다. 성경의 리더십은 곧 서번트 리더십인 것이다. 종으로 섬기기 위해 리더라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고라는 세상의 리더십과 영적 리더십을 구분하지 못했다. 영적 리더십의 자리는 사람이 노력해서 오르는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자리다. 우리는 그가 당을 지었다는 표현에서 그의 야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히브리어 ‘라카흐(לקח)’라는 동사가 씌였는데, 이는 ‘Take, 취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자리는 사람이 취하여 얻는 자리가 아니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였다. 고라가 하나님의 권위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모세와 아론에게도 순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세와 아론을 인간적인 눈으로 평가했다. 물론 모세와 아론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다.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도 못했다. 그것이 무능해 보였을 것이다. 고라는 자신이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면 그처럼 반역의 길로 가기 쉬운 것이다.
자 이제 반역을 대하는 모세의 자세를 살펴보자. 그는 고라의 반역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인간적인 배신감과 분노가 밀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보복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엎드리는 것이었다. 엎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이다. 그는 사람과 직접 상대하기보다 하나님께 먼저 나아간 것이다. 진정한 권위자인 하나님의 권위에만 순복하겠다는 결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총회 위에 자신을 세우신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반론을 제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엎드린 후 모세가 했던 다음 반응은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는 향로에 불을 담아 다음 날 아침에 가져오라고 말한다. 모세는 자신이 직접 옳고 그름을 가리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판단에 맡긴다. 다음으로 모세가 한 반응은 직면이었다. 민 16:7, 9-11,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직면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직면이다. 다른 사람이 틀리는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애정이 없다는 증거다. 모세는 그들의 반역이 분수에 지나친 행위라고 직면한다. 그리고 그들의 반역은 지금 현재 자기 직분에 감사하지 못하고 대제사장 자리를 넘보는 탐욕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이 여호와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직면한 것이다.
모세는 이어서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사람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며 이런 말을 전한다. 민 16:13-14,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는 표현은 ‘속이지 말라, 우리가 더 잘 본다’라는 말이다. 그들은 어쩌면 광야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했을 수 있다. 그것은 모세에게 따지고 들만한 정당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들의 눈은 밝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결과는 현실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그들이 노예로 고통받았던 애굽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하는’ 지도자로 묘사한다. 모세와 아론이 광야의 힘든 상황을 몰랐을까? 그들이야말로 따질 만한 많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에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모세와 아론은 모든 이유를 불문하고 하나님께 순복한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은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모세와 아론, 그리고 고라와 250명의 지도자들은 모두 향로를 들고 회막문 앞에 선다. 그 순간까지도 모세는 반역한 자들을 스스로 심판하려는 태도가 없었다. 민 16:28,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말미암아 알리라” 모세는 자기의 권위를 임의로 휘두르지 않았다. 자신을 거역하여 일어난 무리들을 스스로 심판하여 처단할 뜻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조치에만 순복한 것이다.
사실 모든 배역의 기원은 사탄이다. 사탄은 자기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반역한 천사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 위에 자기 보좌를 세우려 함으로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다.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지금도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이 세대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일으키기 원한다.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따라서 모든 반역과 불순종의 배후에는 사탄의 영이 작용한다. 사탄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흔들고 하나님 나라의 진행을 멈추게 하려 한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우신 부모의 권위를 흔들고 불순종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교회의 권위를 흔들고 성경의 기준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폐하려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여정을 멈추실 수 없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 배역의 영을 심판하셔야 했다. 결국 땅이 열리고 고라편에 선 자들은 모두 그 땅에 삼켜졌다. 그들의 배역이 음부의 문을 연 것이다. 분향했던 250명도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불살라졌다. 다음 날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모세와 아론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이 죽었다는 원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회중들도 멸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모세는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회중을 위한 중보자로 나선다. 이미 염병의 심판이 시작되어 만 사천 칠백명이 죽었다. 모세는 급히 아론에게 백성들을 위해 속죄하라고 지시한다. 모세는 아론을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게 했기에 더 이상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고라의 반역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먼저, 권위자가 되려면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 권위에 순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철저히 권위에 순복하셨다. 히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자신을 세우신 대표 권위자인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팔로워가 되었기에, 예수님은 때가 되어 하나님을 대신한 구원의 근원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팔로워가 될 수 없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칙인 것이다.
우리는 왜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부모님이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우신 대표 권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엡 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잘 되기 원하는가? 부모님께 순종해야 한다. 부모님의 뜻을 잘 따르는 팔로워가 될 때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을 잘 따르는 팔로워가 된다. 직장에서도 여러분이 따라야 하는 대표 권위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과 지시사항이 이해가 안 되고, 맘에 안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직장에서도 대표 권위에 대해서 마음을 다해 순복해야 한다. 여러분이 팔로워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후에 여러분이 대표 권위의 역할을 하게 되는 때가 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들을 통해 진행된다.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권위’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힘 있는 자들은 힘을 규합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흔들려 한다. 합리주의와 인본주의로 결국 자기 욕망을 채우는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사탄의 영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침을 튀기며 비판하는 것이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권위자들에게 반항하고 기존의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쿨한 것으로 평가되는 시대이다. 지금 세대는 자신의 기호에 맞는 권위자가 나타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순종하지 않고 삐딱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는 세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림으로 하나님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 권위자가 누구인지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권위에 가까이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가까이 있는 자를 결국 세워주신다.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 권위에 왜 순복해야 하는가? 그 대표 권위의 인도를 받아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에 순복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에 이르는 길을 끝까지 믿음으로 걷는 자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 앞에 엎드림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만질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이 세상에 더욱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