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류리코비치 OST 'Dynasty'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너를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라.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소리를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에 누운 자 같을 것이라.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나는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으리라' 하리라.
아, 하느님도 너무하시지. 우리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땐 모른 척 하시더니!
그럼 맨 정신으로 깨어나서, 삶의 고통을 매 순간 하나하나 뼈마디에 새기란 말인가.
'모두 죽여라! 신들께서 가려내실 것이다!'
"어서 피하십시오! 오늘 망설이면, 내일은 늦습니다!"
"내가 영주다. 어찌 영민들을 버리고 달아나란 말인가!"
"고귀한 류리크의 혈통도, 그로즈니에게서 당신을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비스와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은 쿠야비 공국.
이미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내 어린 조카딸이 물려받은 곳. 아무도 그녀를 진심으로 받들지 않았다.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겠소!'
그때부터였다. 저들이 내뿜는 독기에 질려버려, 술을 찾지 않으면 잠들 수 없게 된 건.
전쟁은 겨우 끝났지만, 누군가는 내가 어린 조카딸로부터 쿠야비를 빼앗고 한발 나아가 류리코비치의 이름으로 왕좌에 오르길 바랐다.
아니,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나를 지지해준 대가로 내민 청구서에, 덤까지 후하게 얹어 돌려받는 게 목적이잖아?
스스로 주군을 선택할 자유. 가장 뛰어난 자가 모두의 위에 선다... 이보다 더 우스운 사기극이 어디 있나?
순은의 무게가 왕좌를 좌우한다. 황금으로 충성을 사고, 호의를 베푼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내 의견이란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가 그 정부와 함께 폭도들에게 둘러싸여 비참하게 맞아죽었을 때, 내 형 미하일은 열두 살, 나는 고작 열 살이었다.
마녀의 아들들. 폴란인의 땅에 루스인의 깃발을 꽂은 침입자들. 크라쿠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마음은 키예프에 가있을, 잠재적 배신자들.
'네 뿌리를 잊지 마라.'
유감스럽게도, 그 짧은 일생을 루스인으로 살아간 내 형의 유언을 지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후에도 용케 살아남아, 내게 오늘의 빵 한 조각을 구걸하는 자들을 보라. 나는 이제 폴란인이 되어야만 한다.
내 혈관 속에 그 옛날 류리크의 피가 흐를지라도, 내 마음은 이제 폐허가 되어버린 도브진에 그들과 함께 있다.
야로폴크 바실리코비치. 혹은 야로폴크 마조비에츠키. 그게 내 이름이다.
"어우... 술냄새. 나까지 취하겠군. 이봐, 정신이 좀 드나?"
뭐지? 이 순도 140%의 찌질한 목소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문 열고 들어왔지."
"...아무리 폐하셔도, 이건 가택침입 아닙니까?"
"네 하인들한테 가서, 네 주인의 주인이 왔다고 하니까 바로 문 열어주던데?"
말을 말아야지. 이딴게... 폴란인의 왕?
"그럼 도로 문 닫고 나가십시오."
"싫어. 말끝마다 긁어대는 튜튼 기사단장보단 너랑 노는 게 훨씬 나을 거 같거든. 목이 타는데... 혹시 숨겨둔 술까지 바닥났나?"
사실 좀 찔리긴 한다. 내 술값이면, 수십 가구를 먹여 살릴 수도 있을 텐데... 술 없인 잠들 수 없다는, 비겁한 핑계.
"당신과 같은 방패 쓰는 친척들에게나 가보십시오. 마녀의 아들이랑 논다고 소문나서 좋을 게 뭐 있다고."
"마녀의 아들? 혹시... 자네, 진짜 마법도 쓸 줄 아나?"
제기랄... 술 깨자마자 도로 미쳐버리겠네.
"신기해. 자네한테선 술 쩐내가 진동하지만, 키예프의 냄새는 하나도 안 나. 아, 이러면 조상님 모독인가..."
보헤미아의 약탈과 이교도 반란, 연이은 봉신들의 배반으로 산산조각났던 폴란드.
피아스트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카지미에시 1세는, 죽을 힘을 다해 헝가리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아들들을 모두 잃고 죽어가던 이슈트반 1세는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죠.
카지미에시 1세는 다시 헝가리를 떠나, 어머니가 머물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으로 향했습니다.
카이저를 알현한 그는 보헤미아와 키예프가 손잡고 폴란드를 멸망의 위기에 몰아넣었다고 호소했죠.
교회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납치해간 보헤미아의 선 넘은 만행에, 제국도 키예프도 마음을 바꿔 폴란드를 돕기로 했습니다.
루스가 비록 한때 체흐와 손잡고 레흐를 죽도록 때렸지만, 정말로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화해의 표시로, 키예프의 마리야 도브로니에가는 카지미에시 1세와 혼인해 폴란드의 대공비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폴란드 왕가는, 모두 그녀의 작은아들 브와디스와프 1세의 후손들이고요.
"저는 폴란인이지만, 왕가의 성을 쓰지 않습니다."
"그게 뭐? 세임이 동의만 하면, 너도 합법적인 왕국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데?"
"비엘코폴스카(대폴란드) 공작을 이미 점찍어 두시고, 무슨 딴소릴 하십니까? 간보기도 아니고..."
"흠, 뭐 솔직해서 좋네. 그런데 말이야... 나랏일을 왕 혼자 하나? 자네 생각엔, 이 나라에 지금 제일 필요한 건 뭘까?"
"빵입니다. 하루치 빵."
매일 읊는 기도문에도 나오잖아요. 오늘 하루를 넘길 빵을 달라고.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난 예수님이 아니라서... 빵과 물고기를 무한 복사하는 기적은 못 일으켜. 치트도 못 쓰고...
선왕 때부터 일해온 재무상 가르치아는 어쩌고 저한테 우는 소릴 하시는 거예요... 머리 아프니까 그만 좀 돌아가세요.
가르치아?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평생을 할아버지한테 괴롭힘 당하다가 이제 주님 곁으로 가게 생겼는데...
다시 말하지만, 일은 왕 혼자서 하는 게 아냐. 재무상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할아버지만 좋아하고 날 싫어하지. 회의장이 텅텅 비어있으니까 자꾸 놀고 싶잖아...
마법이 필요해. 더 구체적으로는,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 자네의 그 찬란한 '외교력' 말야.
나도 솔직히 말해, 검은 방패를 쓰는 널 차마 후계자로 삼겠다는 결단은 못할 테지만... 도와주지 않겠나? 폴란인으로서.
내 아버지는, 배고픔을 못이겨 아이들을 강물에 던지고 목을 매단 어미를 위해 울다가 돌아가셨지.
그 분이 순리대로 왕좌에 올랐다면 모두가 행복해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네 앞에 지금 서 있는 건 이것밖에 안 되는 멍청이야.
제일 높은 자리에 팽개쳐둔 채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러니까 부탁이야.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