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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思春期)...
사춘기란 시기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성숙과 변화의 과도기적인
청소년시기이기도 하고, 자아을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방황하기도 하는 시기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저마다 다른 사춘기를 지나며 그 개념도 다양하지 않나 싶다.
아무래도 사춘기 하면 이성을 그리워하게 되는 시기-
한자의 뜻으로도 봄을 그리워하는, 기다리는...
즉 이성을 생각하는 시기라는 좁은 의미의 표현이지만,
아마 우리 땐 다들 이렇게만 알고 지낸 듯 하다.
나에게도 사춘기는 한자의 뜻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봄을
기다리는 시기에 사춘기가 찾아 왔다.
중학교 졸업식의 겨울은 눈내리는 추운 계절이었건만,
봄을 그리워하게 되는 황홀한 일대사건을 맞았다.
졸업 앨범을 펴놓고 임마..점마, 어쩌고..어쩌고 ..친구들의 별명을 붙여가며,
특히 여학생들의 사진은 한명씩 빠짐없이 체크하듯 호기심 깊게 봐내려 가는데,
운명의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짧은 찰나에 상상치도 못한 사춘기가 시작 되었다.
한 여학생의 사진에 시선은 멈춰 버렸다.
그리고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의 야릇한 느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심장은 뛰었다.
나는 얼른 친구들 사이를 빠져나와 혼자서 사진을 보았다.
유난히 희어 보이는 얼굴에, 약간 웃음을 참으려는 듯 약간 삐뚤어진
입술의 한 여학생의 모습에 그냥 “뿅~” 가버린 것이었다.
이게 무슨 감정일까?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약간 오르더니 가슴이 두근두근,
머릿속이 하얗게 사진의 얼굴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보는 한 여학생의 사진을 보았을 뿐이데...
‘뭐라 할까 ...그냥 예쁘다고 하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이고,
멋있다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성적매력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천박해
적절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해야 옳을 듯...
기숙사 생활을 하는 나로선 바깥의 여학생을 만날 기회도 없을뿐더러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아, 카톨릭 학생회 행사로 인해 알게 된 몇몇 여학생
외에는 아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어떤 사람..아니 어떤 여자일까? 실제는 어떤 모습일까....?’ 보고 싶어졌다.
그녀를 볼 수 있을 새학기 봄을 기다려야 했다.
화려한 봄날을 기다리는 겨울은 더디게 지났다.
그녀의 집으로 보아 등교길에서 100m 정도 마주쳐 지나게 되어 있었는데,
사진만 보았지만 너무도 선명히 모습을 그리고 있었기에,
단 한번에 그녀임을 알것이라 확신 하고 있었다.
언제 지날지 모르니 불과 30초 시간차의 마주침이 있기까지는
등교 시각을 모든 시간대로 다 적용해 본 뒤의 늦은 등굣길이었다.
바로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동쪽의 해를 뒤로하고 걸어오는 여학생은 밝은 태양에 눈부셨으나
그 얼굴은 사진과 너무도 꼭 같았고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였다.
그녀는 나를 모르나, 나는 아마도 1초 이상을 바라 볼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들켜 버릴까 이내 땅을 보며 빠르게 걸었다.
그가 내 옆을 지났다.
기다리던 봄이 오고야 말았다.
‘이럴수가...! 상상속의 그녀가 실제 내 앞을 지나다니...’
그날의 반짝이는 아침 햇살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만개한 목련꽃이 신비스럽고, 파릇한 새싹들은 이리도 여리고 밝은지..
아지랑이에 실려 내 몸은 둥실둥실 하늘로 올랐다.
이후에도 그녀는 일정한 시간대에 등교하기에 매일 그녀를 볼 수 있었으나,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아 반대편 건너에서 겨우 한번 슬쩍 보는 것이었지만
그 흥분됨이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론 만족 할 수 없었다.
그녀와 한동네 사는 아는 여학생에게 어렵게 부탁하여 만나기로 했다.
억지를 부려 만나 보기만이라도 하라며 약속을 잡았단다.
일요일 학교 정문 맞은편 매점 옆의 빵집에서 소개하는 친구와 세명이 마주 앉았으나,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고 내내 고개를 들지 않아 재대로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턱밑에 작은 점 하나 있는 것 외에는,
친구가 자리를 피해 주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저....저는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데요...같은 학년이고, 이름은...”
소개한 친구가 벌써 말했을 몇마디를 하고나니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잠시 식은땀이 흐르고 침묵이 흘렀다.
‘아...! 뭐라고 해야 하나...으 으...’
이때 그녀가 조금만 소리로 고개 숙인 채 말했다.
“얘긴 들었는데요..... 공부도 해야 되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이어서...
“엄마가 걱정도 하실 것 같고...”
그녀의 말은 끝을 맺은 듯 목소리는 작아졌고, 서울 말씨의 귀여운 목소리였으나,
결론은 사귈 수 없다는 요지였다.
‘듣기로는 공부는 잘하는 편은 아니라는데 무슨 공부 핑계...’
‘그리고 남학생 사귄다고 엄마한테 왜 얘길 하나...?’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건 모두가 진리인양 들렸고,
어쨌던, 얘기는 끝인가 보다, 맹꽁한 내가 그녀 앞에선 더욱 대책이 없다.
“아...그..래요...” 또, 묵...묵.
‘내 마음을 고백해야 할 차례인데....’
나도 고개를 숙인 채,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 할지 몰라 끙끙 대고 있는데,
그녀가 일어서는게 아닌가.
“그럼 저 ...먼저 갈께요...”
‘잠시만...’ 하며 붙잡고 싶었지만 당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 첫 만남은 지났다.
이렇게 멋진 여학생과 쉽사리 사귈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못했지만,
실망과 함께 그에 대한 생각과 목소리는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등굣길에 나를 알아보고는 아예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숙이고 다녔다. 나도 역시...
아카시아 향기에 취할것 같은 5월,
교내콩쿨대회가 열렸다. 여고와 함께 여고 강당에서.
어쩌다 나가게 된 나는 몇일 전 부터 가슴이 뛰고 있었다.
많은 여학생들 앞에서, 게다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노래를 한다는 게
도무지 자신이 나질 않았으나 이미 예정된 일.
무대에 올라서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곡목은 ‘가고파’ 피아노 반주가 시작 되었다.
앞에는 온통 여학생들, 그사이 어디엔가 그녀가 있을 것...
서서히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음악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주 다시..!”
긴장하여 시작을 놓쳐 버린 것이다. 땀이 흘렀다.
겨우 시작된 노래는 실제로 다른 곡보다 두배나 긴 곡이라
불러도 불러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악몽으로 가위 눌리는데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해 괴로워하는 그런 심정이랄까.
자책으로 머리를 쥐어박아도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함이여...!
부끄럽고, 창피하고, 억울하고, 아...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그 후 나는 등굣길에도 그녀를 피해 일찍 학교엘 갔다.
2학년이 됐다.
나의 무능과 무력감에 그리움을 애써 싹이며 잊어 보려 했으나
그녀로 인한 나의 시련은 계속 되었다.
개교기념일인지...남고에서 반 대항 결승 축구시합이 있었다.
아침부터 여학생들이 남고로 올라 왔다.
기념행사를 함께 하고 스탠드에 모여 앉았다.
축구시합을 구경한다고...기회가 왔다.
그녀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지난번 창피를 깨끗이 씻어리라고.
나는 당당히-실은 조금 우겨서-출전을 하였다.
같은 체육복을 입고 있으니 팀 구별이 어려워 한팀은 웃통을 벗고 하기로
주장이 가위 바위 보로 정하였는데 우리반이 옷을 벗기로 결정 되었다.
아....! 또 일이 꼬여 들어가기 시작 했다.
머슴애들이 여학생 앞이라 해도 웃통을 벗는게 뭐 그리 부끄럽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다.
어릴적 연탄불 위에 떨어져 배에 화상을 입어 흉터가 조금 남아 있었기에,
나의 치부를 그녀에게 보이는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여학생들이 있는 스텐드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려 애써건만
어디 그게 내 마음대로 되야지...
멋진 모습을 보여 주려 했으나 이제는 최소한 내 몫을 해서 체면이라도
세워야 할판. 해서, 부득이 스텐드 쪽으로 가기만 하면 헛발질에 빼앗기고, 넘어지고,
그녀가 보고 있다는 사실에 이미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 탓으로 한골을 먹질 않나, 휴~도대체 되는 일이 없다.
또 다시 대 참패!
내가 밉고, 자신이 싫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좋았다.
끙끙대다가 다시 용기를 냈다.
‘그래 편지를 보내는거야..!’
하루에 열 번을 썼다가 찟으며 일주일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함양에서 형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안부와 함께 내가 여학생 얘기를 소상히 심각하게 상담을 한터라
잘 되어 가는지를 물으며, 짧은 싯구절을 몇줄 보내 왔다.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에 미소까지 그렸지만은
마지막 한가지 못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햐~!! 이렇게 멋진 표현이...’
턱밑에 점하나... 입가에 미소...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너무도 딱 맞는 표현이 아닌가!
‘형에게- 턱밑에 점이 있고..어쩌고...어쩌고 그녀에 대해 말했더니
이렇게 내 대신 멋진 시를 하나 지어 보내 주다니,
형은 역시 글을 잘 쓰네...고마워..내 마음을 이리도 잘 알아주니
무슨 다른 말이 필요 하겠는가- 이 시를 그대로 보내면 될 것을
용기를 내어 편지를 보냅니다.
공부는 잘 되시는지요.
지난번에는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학업에 방해가 될지 모르겠으나,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밤을 세워 쓴 시 한편 보냅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바닷가........당신의 마음.
전에 부탁한 친구편으로 편지를 전달하고 답장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여름방학이 다가 오는데, 집에 가기전에 연락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꼬...’
일요일이라 모두들 밖으로 외출을 해도 혼자서 라디오를 듣고 침대에 드러누워
왠종일 그녀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라디오에서 노래가 들려왔다.
처음부분의 가사는 못 알아들었지만,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밑에 점 하나...
너무도 또렷이 들려오는 가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귀를 기우렸다.
똑 같다...! 어찌된 일인가?
‘그렇다면... 형의 자작시가 아니고 유행가 가사란 말인가!’
나는 튕기듯 침실을 나와 고3 선배에게 시를 보여주며
이런 유행가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어~, 이 노래... 있어... 요새 유행하는 노랜데, 나는 잘 몰라.”
‘뭐라구~ 유행가라구... 으아...아..악..........!!’
‘신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이리도 무참히 버리시나이까?’
‘한번도..두번도 아닌 세 번이나 개망신을 하다니’
정말 쪽팔려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이러니 답장이 올 턱이 있나..
“뭐? 밤을 세워 시를 썼다고...아유 얘 웃기네,
방주연의 '당신의 마음' 작사 서종원 이란다...호호호”
그녀의 말이 환청이 되어 뇌속까지 파고 들었다.
나의 사춘기는 이렇게 두 번의 봄을 지나며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思春期가 死春期로 바뀌고 있었던거지...
지금은 봄을 그리는 사춘기가 아니라
지난 사춘기를 그리는 50대를 살고 있다.
-저작권법 위반의 형벌로 사춘기를 반납함-
첫댓글 그땐 참 쑥맥들이었지요 우리때에는 기숙사 졸업하고 집에갈 보따리 싸고있는데 여학생들이 찿아와 한번 같이놀자고 조르는 바람에 난생 처음 여학생들과 보래부르며 논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선배님들이 우리때 보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더좋았나 봅니다. ㅎㅎ
흐미~! 소설가가 따로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