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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일본군 가미카제(神風, Kamikaze)
카미카제는 80~90도 사이의 고각에서 내려꽂힐 때 파괴력이나 피탄률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높은 효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저런 고각 돌입은 사실상 급강하 폭격이나 다름없는데, 왜 파일럿을 급강하폭격에 숙련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특공으로 써먹었냐면 일격일탈로 함선에 폭탄을 명중시키고 생환시키는것보다, 자살을 전제로 그냥 들이받는게 더 쉬웠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과 필리핀 해전을 거치면서 숙련된 조종사들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남아있는 인원들은 비숙련 파일럿이기 때문에 급강하폭격의 명중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급강하 폭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이미 어느정도 숙련된 파일럿임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복을 통해 전력을 보전한다거나, 혹은 어거지로 파일럿을 육성한다는 선택지 대신에 일본군은 명중률을 조금 높여보고자 그들을 1회용으로 써먹는 미친짓을 한 것이다.
그리고 상당히 인상적인 케이스로, 1945년 4월 도미야스 슌스케(富安俊助) 중위는 엔터프라이즈의 엘리베이터에 충돌하기 직전에 폭탄을 격납고로 가도록 조준해 분리하여 전방 엘리베이터와 격납고를 동시에 파괴하는 신묘한 재주를 부렸으며 그 과정 또한 상당히 비범하다. 중위는 본래 총 26기 항공기로 구성된 공격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나머지 25기는 엔터프라이즈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고 6기가 대공포에, 19기가 초계기 F4U 콜세어에게 떨어졌다. 그 동안 도미야스 중위는 구름 위에서 항모의 위치를 확인하며 함재기들의 감시를 피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6시 53분, 단신으로 엔터프라이즈의 방공망에 돌입한다. 함에서 쏘아올리는 엄청난 포화를 회피하며 함 위에서 180도 좌측 롤 이후 배면비행 상태로 전방 엘리베이터에 충돌하여 대폭발을 일으키고 덤으로 돌입 직전 폭탄을 분리하여 격납고까지 피해를 줬다. 이 때 엔터프라이즈의 방공화기는 40mm 보포스 기관포 54문에 20mm 오리콘 기관포 32문이었다. 여기에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여 숙련도 만큼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이 저 무지막지한 화력을 항공기 단 한 대에 집중했으니 이 파일럿에게는 거의 최고 난이도급 탄막 슈팅 수준으로 포화가 쏟아졌을것이다. 근데 그 화망을 뚫고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는데 성공한다.
이 공격으로 인해 엔터프라이즈는 120미터 상공까지 연기가 치솟았으며 전방 엘리베이터 완파+화재로 동부 솔로몬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에 이은 역대 3번째 사상자를 내고 본국으로 돌아가 종전까지 도크 신세를 지게 된다. 물론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군대라면 이런 가능성이 있는 조종사에게는, 평범하게 공격하고 어떻게든 생환해서 다시 싸우게 하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더 생각이 있는 군대라면 이런 인재는 아예 후방으로 빼서 새내기 조종사들에게 자신의 실력과 경험을 가르치는 교관 역할을 맡기거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효율적인 항공 작전을 구상하는 지휘관 역할을 맡기는게 정상이다.
저런 묘기에 가까운 카미카제를 성공시킨 것만 보면 도미야스 중위가 베테랑 에이스 파일럿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역시 일본해군항공대의 조종사 인력풀 붕괴로 학병(와세다 출신 + 만철근무)으로 입대하여 속성으로 키워진 조종사들 중 하나로, 비슷한 시기 육군의 특별조종견습사관으로 입대한 조선인 가미카제 탁경현이나 김상필의 경우에서 보듯 경력이나 실력과 상관없이 학력으로 임관하고 바로 소위 계급을 받은 케이스다. 물론 더 날림으로 키워지던 요카렌이나 소년비행병 출신 조종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비행시간이 월등히 길어 이들을 지휘하는 비행교관이나 편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저 길다는 특조출신의 비행시간도 250시간에도 못 미치며, 이는 지금 기준으로는 저가항공의 신입 부기장 최저 지원 기준에도 미달하는 비행시간이다. 그러니 고작 100시간 남짓한 비행 경력만을 가진 새내기에 불과한데도 저런 묘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일류 파일럿이 될만한 재능을 가진 원석이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카미카제로 피해를 입힌 다른 사례들도 살펴보자.
먼저 호위항공모함 USS 오마니 베이(CVE-79)의 경우, 오마니 베이는 1945년 1월 1일 수리가오 해협을 지나 항해하고 있던중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다. 신푸 특공대 욱일(쿄쿠지츠)대 대장 카자마 만넨 중위가 이끄는 스이세이 2기가 몰래 접근해 1기는 호위항모 룽가 포인트에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오마니 베이는 P1Y 긴가 폭격기의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다. 이 자살공격 중 폭격기는 2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이 중 폭탄 1발과 카미카제로 인한 피해는 갑판에서 그쳤지만, 그 폭탄 중 1발이 갑판을 뚫고 격납고 안에 있는 함재기 연료와 유폭해서 폭발. 전사 및 실종 93명, 부상 63명의 피해를 입고 결국 미군이 어뢰로 자침시켰다.
호위항모 비스마르크 시(CVE-95)의 사례를 보자. 비스마르크 시는 이오지마 전투 중 40mm 대공포좌 하부에 카미카제 공격을 받고 엘리베이터 케이블이 절단되면서 폭발이 일어났고, 이에 화재가 났으나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날아온 공격기 1기(정체는 확실치 않음)가 이전 자살공격에 의한 화재의 불빛을 보고 자살공격을 감행하면서 투하한 폭탄이 그 절단된 후부 엘리베이터에 명중하면서, 함재기, 탄약, 연료가 연이어서 유폭시켜 사망자 318명과 함께 침몰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벙커힐(CV-17)의 사례를 보자. 벙커힐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카미카제 공격을 받고 대파된다. 벙커힐에 카미카제 공격을 성공시킨건 제3 쇼와공격대 편대장인 야스노리 세이조 중위와 편대원 오가와 키요시 소위 였다. 먼저 야스노리 중위의 제로센이 폭탄을 떨궈서 명중해 제3 엘리베이터 바로 옆 갑판을 관통 그대로 천정을 뚫고 좌측격벽에 구멍을 내고 바다로 떨어져 폭발했다. 이에 야스노리 중위는 그대로 갑판에 돌격 F4U 콜세어 1기와 함께 바다에 추락했다. 이어서 오가와 소위가 폭탄을 투하하고 격돌했으나 카미카제 자체로 인한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공격하면서 투하한 500kg의 폭탄이 갑판을 관통하고 격납고의 항공기 연료 탱크와 함께 대폭발하면서 미군 사망 346명, 실종 43명, 부상 246명이라는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물론 각 사례들이 자살을 전제하고 달려들었기에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미 레이테 만 해전에서 허를 찔린 미국은 일본군의 자살공격에 대해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요 함급에 대해 전과를 낸 파일럿들은 단순히 소모해버리기엔 지나치게 아까운 인재였다고 평가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그저 소모해버린 일본 군부가 근시안적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저런 자살공격으로 무의미한 조종사의 소모가 반복되면서 더더욱 조종사의 질은 열화되었고, 결국 오키나와 전투쯤 돼서는 대부분이 구형 복엽 연습기나 도태된 정찰기를 몰고 대공포의 사각인 저공 수면 위로 접근하여 흘수선에 들이받도록 교육받거나 대량의 편대가 동시다발적으로 45도로 내려꽂는 방법이 나왔다. 대전 말 대부분의 카미카제 조종사들의 안습한 숙련도를 생각하면다면 수직 급강하는 어림도 없고 이러한 방법들이 그나마 확률이 높았다.
일본 육군항공대 칠생소도대 소속 Ki-51 공격기의 자살 공격을 받은 직후의 영국 해군 카운티급 중순양함 HMS 서섹스(Sussex) 함. HMS 서섹스 함의 경우 100mm의 측면장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정도 두께의 장갑은 영국의 장갑항모들이 보여주었듯 급강하로 500Kg 폭탄을 투하해도 데미지를 입힐까 말까인데 비교적 느릿한 정찰기의 속도로 250Kg 폭탄을 부딛히는 것으로는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공격 방식은 장갑이 가장 두터운 함선의 측면, 즉 때려달라는 곳을 때리는 꼴이기 때문에, 설령 제대로 박는다 하더라도 호위항공모함이나 상선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의미 있는 피해를 주긴 어려웠다. 즉, 상대방이 방패를 들고 있는데 방패에 돌을 던지는 격. 애초에 당시 공대함 폭격은 고공에서의 낙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상대적으로 얇은 전투함의 갑판 장갑을 뚫고서 피해를 입히는 방식이었는데, 가볍고 내구성 약한 전투기의 운동에너지와 별 거 없는 250kg짜리 자폭용 폭탄 한 발 따위로는 대응방어를 고려하여 비교적 두껍게 만들어진 중순양함 이상의 주력함에 데미지를 주기 어려웠다. 특히, 2차 세계대전때 운용된 전투함은 거함거포주의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건조되거나 설계된 함선들이 거의 대다수라서 중순양함급 이상 체급의 배들은 자기 주포를 맞아도 견딜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장갑을 두껍게 발랐다. 물론 구축함이나 호위함같이 잘해야 기관포탄이나 막을 정도로만 장갑을 두른 경장갑 전투함은 카미카제가 측면에 처박혀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실제로 카미카제로 인해 격침까지 간 피해는 대부분 구축함의 경우였다.
여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수면 가까이 저공 비행을 하다가 적 함선이 시야에 들어오면 내리꽂기 좋은 고도로 급상승한다음 들이받는 전술도 있었다. 그리고 이 방식은 급상승 할때 속도가 심하게 느려져서 대공포에 격추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대규모의 편대가 45도 각도로 돌진하는 것은 일단 상부 구조물이나 갑판 장갑을 때릴 수 있기 때문에 성공한다면 급강하 돌입만은 못해도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방식이지만, 문제는 그 각도로 가면 영락없이 대공포에 맞고 떨어진다는 점이다. 동료들의 희생 속에 간신히 함재기들의 요격망을 뚫고 들어갔다 치더라도 대부분의 초보 조종사들은 본능적으로 이 각도를 잡고 달려들다가 대공포의 식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포병 입장에서 보면, 45도 각도로 오는 항공기는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이며 조준하기도 편한 각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체 방어 무장이 없는 함선들인 소해함 및 상선이나 대규모 자살공격 편대를 모두 방어할 수 없었던 구축함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대부분의 주력함들에 대해서는 USS 벙커힐(CV-17)의 경우를 제외하면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지 못하였다.
카미카제는 흔히 퍼진 인식과 달리, 폭격을 전제로 한 자살공격이었기에 더 고난이도의 조종능력을 요구하는 급강하폭격에 비해서는 손실대비 더 높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고, 미군의 입장에서는 고작 폭격 1번에 자살을 전제로 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기에 시행 초기에는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뇌격과 급강하 폭격은 오히려 굉장히 효과적이다.
더 이상 미군에 대하여 정상적인 방법으로 피해를 줄 수 없는 상황에서 도태된 항공기의 숫자는 점점 쌓여가고 일반적인 공격으로도 막대한 소모를 감내해야 되는 시점에서 항복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남은 악수들 중에서는 합리적인 공격 방법이었고, 이는 공격을 받은 당사자인 미군도 전후 연구자료에서 인정하는 부분이다.
자살을 전제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운 경우는 미군에서도 자주 있었던 일이다. 미드웨이 해전 때의 미군 뇌격기 부대도 이런 방법을 써서 일본군 전투기들과 견시원들의 시야 범위를 저공으로 묶어뒀기에 노틸러스 잡으려다가 급히 본대로 귀환하던 아라시가 남긴 항적을 추적해서 온 급강하폭격기 부대가 고공에서 기습적으로 뛰어들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이것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 유명한 운명의 5분의 내막이다. 또한 같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반격에 나선 히류 항공대의 고바야시 대위나 토모나가 공격대 역시 전황을 뒤집기 위해 자살에 가까운 공격을 했고, 대부분이 생환하지 못했지만 요크타운을 길동무로 끌고가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도 피격되어 생환이 불가한 공격기 2대가 자의로 호넷에 자살 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결사의 각오로 돌입한 조종사들은 미군에게까지 용감한 적으로 인정받고 전사가들도 전략적으로 가치있는 공격으로 인정을 한다.
문제는 카미카제는 처음부터 자살을 전제한 공격이었다는 것이다.
더 멍청한 사실은 전쟁말기에는 기존 전투기도 모자라서 아예 카미카제 전용 무기를 따로 개발해 제작하기에 이른다. 이는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전하는 와중에도 온갖 신병기에 집착하며 군수상황을 스스로 악화시켰듯이, 안 그래도 열악한 공업력으로 인해 생산성이 나빴던 일본군의 생산능력을 더욱 더 악화시켰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N1K-J 시덴이나 J6K 진푸 등에 투자해도 모자랄 자원을 자살공격병기에 투자하는 미친짓을 통해 전쟁역량을 일본군 스스로 깎아먹은 것이다. 일본의 카미카제 전용기는 MXY-7 오카의 경우만 봐도 알수 있듯이 융단폭격으로 공업지구 전체가 날아가는 와중에도 자폭기용 생산 라인을 별도로 또 만들고 있던 것이라서 그 멍청함이 원점부터 다르다.
결국 카미카제 대원의 유서에 나온 대로 카미카제는 언 발에 오줌 누기,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을 뿐 절대로 현명한 타개책이 아니었다. 제로센으로 미군의 대공포화와 전투기를 피하면서 그 화망을 뚫으면서 한 대도 맞지 말라고 시키는데? 전함에 충돌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있는 조종사라면 자살 돌격 따위가 아닌 정상적인 공격으로 더 큰 성과를 내고, 운이 좋다면 살아 돌아와서 그런 공격을 또 시도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자살공격이라는 특성상 조종사를 잘 해봐야 1회의 공격 성공으로 무조건 소모한다. 따라서 조종사를 인간 미사일로 써버리고 훈련이 별로 안 된 신참 조종사들도 소모시켜 결국 조종사의 질을 점점 저하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국가 규모로 따지자면 항공기와 조종사를 무차별적으로 소모하는 재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합군의 응전 태세에도 더욱 경각심을 주어서, 결국 일본은 하늘에서부터의 재앙을 두 번이나 겪는다. 정권 유지를 위하여 국민들의 목숨을 패전의 제물로 바치는 인간방패 전략으로 연명한 것이다. 즉 시간적 측면으로 보면 가장 귀중한 자원이자 무기인 것을 갖다 버린 것밖에 안 된다. 총만 들려 총알받이로 쓰려해도 10년에서 20년이 필요한데, 파일럿은 오죽하겠는가? 맥아더가 "나였으면 그런 명령 내린 놈을 쏴 죽였을거다"라고 평한게 괜히 그런게 아니다. 그리고 윌리엄 홀시 제독이 "잽스들도 끝이군." 이라고 말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국에 비해 훨씬 적은 인적, 물적자원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병력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엄청난 자원과 시간을 낭비해 버렸다. 반면에 오히려 인적, 물적 자원이 훨씬 풍부한 미군은 전투 중에 추락한 조종사나 침몰한 배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 주변 해역을 샅샅이 뒤져 구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두 명의 해군 장교인 존 F. 케네디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포함한 많은 인재들을 살려낸 것으로 보답받았다.
1944년 하반기, 미 공군의 B-29 폭격기 부대들이 마리아나 제도에 전개되어 일본 본토공습을 펼쳤을 때 기체 고장, 피격 등의 다양한 이유로 무시 못 할 숫자의 상당수의 승무원들이 태평양의 망망대해에 불시착했었다. 미군은 여러가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불시착한 B-29 승무원들을 구조하기위한 육,해군 합동조직을 신설하고 구조 체계를 완성시켜 불시착한 승무원의 과반수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불시착한 승무원은 근처에 있는 해군 수상함, 잠수함, 육군 항공대의 정찰기, 구조용으로 개조된 주력 전투 항공기들과 어렵지 않게 접촉할 수 있었다.
그보다 시기적으로 더 전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때도 마크 미처 제독은 야간에 귀환하는 비행단을 인도하기 위해 등화관제를 깨고 전 함대의 서치라이트를 밝혔고, 이후 아이스크림을 걸고 바다에 불시착 혹은 격추당해 물에 빠진 생존 조종사 구출을 독려했던 적도 있다. 함재기가 없는 항공모함이 야습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파일럿의 생환을 최우선으로 둔 사례였다.
물론 미군도 완벽했던 건 아니었고 온갖 문제로 점철되어 대형 참사로 일을 키운 것도 모자라 책임을 억울한 사람에 떠 넘기고 덮어버리는 흑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수많은 병신짓 퍼레이드에 비하면 미군의 삽질은 우스운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명에 대한 인식과 전체적인 전황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시각의 부재가 일본 군부의 패망으로 나타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카미카제는 그러한 배경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숙련된 조종사를 양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급강하폭격시 중고도에서 이탈로 인하여 명중률이 낮은데 반하여, 속성으로 훈련한 저숙련 조종사가 자살을 전제로 폭탄을 1발이라도 적함에 맞추는 것은 적어도 급강하폭격보단 높은 명중률을 보이기는 했다. 실제로 카미카제의 명중률이 14% 정도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대함폭격명중률이 당시 4%였다는 점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는 유효한 공격 수단이었다. 필리핀 해 해전 당시 400여기에 가까운 항공기를 손실하고도 사실상 미함대에 준 피해가 없다는 것을 고려할 때 14%의 명중률은 일본 입장에서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이런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상황을 인식하고 무조건 항복을 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카미카제는 어떻게든 발악하면 전쟁을 이기거나 적어도 자신들의 권력을 보전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품고, 전쟁에 지고 실각하느니 온 나라의 국민과 함께 자결하는 것이 낫다는 미치광이의 결정에 불과하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한다. 카미카제는 일본군 수뇌부들의 정신이상을 대변한다.
•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지명되어서 출격했다고 다 죽은 건 아니라서 간혹 생환해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시기를 놓쳤거나 기계 고장, 컨디션 불량, 기후 불량 등으로 출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간혹 목표를 못 찾아 그냥 돌아온 경우도 있었으나 미쳐 돌아가는 상부는 맨발의 겐 1권에서 나온 것처럼 이들을 갈군 뒤 다시 출격시켰다. 때문에 9번에 걸쳐 출격했으나 적을 찾지 못해 돌아온 특공대원이 있었다. 결국 그는 끌려가서 총살당했다. 그는 와세다대학 졸업생이라고. 이쯤 되면 자국민을 갈아마신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위에 여러 번 서술되었듯이, 초등학교만 의무교육이던 당시에, 대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이라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큰 인재인데, 이런 인재를 일회성 자살 공격에 몰아넣은 것이다.
• 이에 관련된 도시전설에 가까운(?) <고추잠자리>라는 전후 반전동화도 있다. 한 카미카제 파일럿은 적을 향해 날아가다가 우연히 계기판 안에 자리잡은 벌레를 보았고 찰나 생명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어서 자신과 벌레가 살기 위해서 원래 적기까지 갈 정도로 넣은 얼마 안 되는 연료를 적기가 아닌 무인도로 향해 돌려서 무인도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카미카제 파일럿의 이야기도 있고 한다.
• 특공대원으로 생환한 이들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니시무라 코우(탤런트), 내각 관방장관 겸 외무대신과 후생성 장관을 역임한 소노다, 항공자위대 교관 및 전일본공수 기장으로 반전단체 대표인 시다 등이 있으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사람 중에는 <천하제일회>의 우치무라 켄이치, 특공대원으로 자신을 포장한 범죄자로는 <3억엔 보험금 살인사건>의 아라키 호미, 츠루타 코지 등이 있다.
• 1944년 10월 12일~15일에 대만 앞바다에 미 제3함대가 나타나자 역시 카미카제 공격을 시행했고 제26항공전대 사령관 아리바 소장이 직접 카미카제 대원이 되어 전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게 아래에 나오는 명언으로 유명한 대만 항공전이다. 그런데 이 전투 결과 일본은 카미카제 공격=격침으로 여겨버려 '항모 11척 격침, 8척 대파'라고 선전해 일본 국민들을 잠깐 환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소식을 윌리엄 홀시 제독은 코웃음을 치며
"도쿄 로즈가 전멸했다고 하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향해 급속 퇴각 중"
라는 유명한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실제로 미군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 기쿠스이 작전 등 카미카제 공격을 일선에서 총지휘했던 우가키 마토메 제독도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의 소식을 듣자 몇 명의 부하를 이끌고 카미카제 공격에 나섰고 당연히 사망했다. 이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해서 카미카제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책임자' 중 '진짜로 최대한 책임을 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같지만은 사실은 부하 조종사에게 그 자살 폭격기를 조종하게 했고 자기는 그 뒷좌석에 타서 자살 돌격했다. 이 때문에 그 부하 조종사의 유가족은 물론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등에게 "정말 책임을 지고 싶었다면 혼자 가서 뒈질 것이지 왜 죄 없는 부하들을 끌고 갔냐?" 면서 대차게 까였다. 이런 인간이 다른 인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다라는 말이 나올 수준이니 말 다했다.
• 아무래도 폭탄이나 어뢰 자체로도 위험한데 거대한 항공기까지 딸려 오는 셈이다보니, 오늘날 아무리 비효율적이네 발악이네 욕해봐야 공격당하는 미군 함선 입장에서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미군의 대공포로 출중한 성능을 가진 40mm 보포스 대공기총이 유명하지만 항공기 자체를 박살내는 데에는 위력의 한계가 있다보니 대전기 말에는 카미카제 공격에 대비해 무려 76mm 대공포를 장착한 디모인급 중순양함이 건조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곧 끝나버렸기 때문에 정작 카미카제에 대항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이러한 노력은 기본적으로 개념이 '크고 성능 짱짱한 대공포를 달아 카미카제를 시전하는 적 기체를 한방에 날려야지' 수준이어서 그러한 '크고 짱짱한' 대공포들을 달 체급이 안되는 구축함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소용이 없었고, 이미 대전기 중에도 대공포만으로 만든 대공화망의 한계가 지상, 해상 가리지 않고 드러났으며, 무엇보다 2차대전 이후 이러한 함선들이 수상 전투함 세력의 주축이 되어버린 이상 미국은 새로운 함대공 방어체계를 준비한다.
• 조선인도 카미카제기에 태웠다고 한다. 귀촉도, 화사 등 1940년대 시인 중 한 명인 서정주는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 라는 필명으로 '매일신보' 에 '오장 마쓰이 송가(松井五長 訟歌)' 라는 시를 발표하여 레이테 만 해전 배경의 전시선전을 하고 카미카제의 우월성을 찬양했다. 김재규도 여기에 끌려갔다 살아나왔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 8일, 필리핀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급유중이던 미 태평양 함대 제3함대가 세력이 비교적 약한 열대성 저기압으로 잘못 예측한 태풍 '코브라'의 직격을 받았다. 실제론 당시 코브라의 최저 기압은 최소 907hpa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국에서 최악의 피해를 입힌 사라의 최저 기압이 최저 908.1 hpa, 한반도 상륙 당시 945hpa 수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태풍이다.
당시 레이더로 촬영한 코브라의 사진. 윗부분의 동그란 점처럼 생긴 부분이 태풍의 눈이다.
이로 인해 홀시의 3함대는 함대의 구축함 3척 침몰, 전함, 순양함, 구축함, 항공모함, 기타 함선 등 26척이 손상을 입고 그중에서 9척이 심한 손상이었으며 항공모함들의 함재기 146여 대가 손·망실되고 약 790명의 사망자를 낸 후에 예정되었던 필리핀 작전 항공지원 계획을 중단하고 전열에서 이탈해야 했다. 게다가 이건 홀시 제독이 기상예보를 생까고 위치를 고수하다가 입은 피해라서 레이테 만 해전 때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한테 낚인 건과 더불어 비난을 받았다. 이 일로 홀시 제독은 군사법원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아 "함대를 태풍 쪽으로 향하도록 한 판단의 잘못은 있었다"라는 결론이 내려졌으나 실제로 어떠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태풍에 항공기 146대와 구축함 3척 손해에 대형함들 역시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은 이 피해는 웬만해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카미카제라 불러줄 법하겠으나 상대는 바로 미국. 구축함 3척과 함재기 146기는 본국에서 몇 주면 찍어내는 물자에 불과했다.
여담으로 이때 죽을 뻔한 인물 중 한 명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제럴드 포드. 당시 포드는 해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풍랑과 싸우다 떠내려갈 뻔하고 타고 있던 선박에 화재까지 나는 등 크게 고생했단다.
그리고 홀시 제독은 그다음 해인 1945년 6월, 최저기압 980hPa인 태풍 코니에 지휘하던 3함대가 또 피해를 보게 되었고 이번에는 함선 침몰이 없었지만, 다수의 함선이 손상을 입고 6명이 목숨을 잃고 항공기 76대가 손·망실되어 또 군사법원에 소환되어 저번에는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퇴역할 것을 법원에서 권고했지만,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도움으로 퇴역하지 않고 종전까지 현역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모가지는 겨우 피했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때부터 일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며 전공을 세웠던 홀시 입장에서 퇴역 얘기가 오가는 건 치욕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1945년 10월에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와 같은 카미카제가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종전식이 끝난 10월에 오키나와 동부에 정박한 미 해군 선단을 태풍이 덮쳐서 꽤 피해가 났는데 문제는 이 정박지는 일본 본토로의 침공이 시작될 경우 규슈 침공 부대가 머무를 정박지라는 것이다. 만약 계획대로 상륙이 이루어졌다면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큐슈 침공에 대해서는 몰락 작전 문서 참고.
저런 피해로 인해 태풍 정보의 수집과 대응이 해군의 중요한 숙제가 되었고 이것이 현대 태풍예보체계 구축의 중요한 토대 중 일부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미친 짓거리인지 파악이 안되는 일본 극우들 사이에서 카미카제를 미화하는 사례가 다수 있다. 물론 전쟁 직후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였기 때문에 이 일을 미화시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반 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은 극우 젊은층을 중심으로 카미카제를 미화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무서명 형식으로 '카미카제에 지원하겠냐'라는 질문란에 모두 "아니오"를 선택하였다. 즉 본인들부터가 하지 않을 것을 남들도 하라고 미화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클리셰는 나라를 위해 자신 한 몸 바쳐서 일본을 구한 구국영웅 식. 물론 위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카미카제 조종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카미카제 폭격기에 탑승해야 했으며, 어찌어찌 생환해서 돌아오면 사형을 시키는 케이스도 있을 정도로 당시 일본군 수뇌부들은 인간이 아니였다.
결국 조종사들은 국가의 강압적인 명령과 묵인, 압박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며,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일본 제국과 이런 결정을 내린 당시 일본군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즉, 이들이 카미카제를 미화하는것은 살인자를 옹호하기 위해 그 피해자의 명예를 들먹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2014년에는 아예 이 카미카제 또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올렸다. 일본의 지자체인 가고시마 현에서 카미카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로 등재하려 시도했으나, 유네스코 일본 위원회에서 부결시켰다. 사유는 '일본 관점으로 기술된 기록밖에 없어서 자료의 편중이 심해 형평성에 어긋난다' 였다. 이 일을 추진한 가고시마는 2년 뒤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본 극우들의 '미화'와는 달리 출격 전 카미카제 대원들의 실제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처참한 출격 전야... 그들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쯤되면 극우들의 미화는 이들을 칭송하는게 아니라 고인드립하는 거라고 봐야 할 지경이다.
일본 극우파들의 미화와는 별개로 일본내에서도 당연히 '카미카제 미화'에 대한 비난과 비판적인 의견들 또한 상당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보수일간지인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전 회장겸 주필은 일본의 우익들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천황을 위한 자발적인 순교자’로 미화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와타나베 회장은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기있게, 기쁘게 떠났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분개하며, "그들은 마치 도살장의 양들과 같았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고 회고한 뒤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서 기간병들에 의해 실려서 강제로 비행기 안으로 밀어넣어졌다"고 증언했었다. 와타나베 회장은 실제로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등병으로 입대했었던 인물이다. 요미우리 신문 회장 "무식한 고이즈미, 역사도 철학도 몰라" "무식한 고이즈미 공부도 하지않아"
거기다 생존해 있는 가미카제 대원들 또한 이같은 미화에 대해 “미친 짓”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가미카제에 배치됐다 일제가 항복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칸베 유타카(89)씨는 "가미카제를 미화하려는 생각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그건 미친 짓"이라며 아베 정부의 우경화와 일본 젊은 세대들의 전쟁에 대한 무감각을 우려하며, “가미카제로 허망하게 죽어간 친구들을 평생 애도하며 살았다. 그렇게 친구들이 죽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고통받고 있다"면서 "가미카제는 절대 미화해서는 안되며 다시 일어나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앵화(벚꽃)'라는 암호명이 붙은 가미카제 분대에 속했던 전직 파일럿 아사노 아키노리(85)씨도 "우리가 왜 그런 명령에 따랐고 왜 죽어야 했는지 묻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당시에 ‘나는 가미카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가미카제는 대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운영했다고 비판한 셈이다. 아사노씨는 이어 “가미카제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면서 “일본 젊은이들이 그 비극과 공포를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도 말했다. 가미카제 미화한 영화 '영원의 제로' 열풍에 생존자들 "미화해선 안돼" 경고
전쟁 기간 동안 필리핀에서 9번의 비행을 하여 9번 살아 돌아온 전설적인 가미카제 조종사 토모지 사사키(1924~2016)는 가미카제로 죽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 기지 사령관은 내가 날아갈 때마다 죽길 바랬다. 왜냐하면 대본영은 내가 국민의 영웅이 될 영령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매우 존경하는 고위 장교는 폭격으로 싸우라고 말했다. 그는 나 말고 모든 부하들에게 똑같이 말했지만, 우리 지휘관의 압력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죽인 1차적인 살인자는 먼저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이다. 카미카제가 나쁜 연유도 그것의 본질이 '행정살인'이며, 살인의 주체가 다름 아닌 일본 제국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문단에 있는 일본 제국을 옹호하는 관점으로 서술된 기록밖에 없는 카미카제 조종사들의 유서가 기각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일본 극우들이 자신들의 아집으로 희생시킨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현대 정치공세에 써먹는 것을 비판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카미카제 = 전체주의자들의 기득권을 하루라도 더 연명하기 위한 인간 폭탄이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 군부의 실세들은 국민들이 얼마나 죽든지 상관없이, 군국주의 체제에서의 권세와 식민지의 자원을 지키고 싶었고 카미카제 조종사들은 군부 기득권층의 충실한 자살방패가 되었다. 나아가 일본 극우파들은 도리어 군국주의를 까는 인사들을 카미카제 조종사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조롱한다. 애초에 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서 그 많은 인명을 방패로 삼았는데?
카미카제를 미화한 영화가 공개되었을 때 일본인 기자가 중국인 기자에게 "카미카제로 조국을 지킨 일본 청년들이 자랑스럽다"라고 하자 중국인 기자가 "카미카제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고 하는데 애초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일어나지도 않을 비극이었다. 오히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연합군 청년들에게는 미안하지 않느냐?"라고 답했고, 그러자 그 일본 기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카미카제 특공기에는 연료를 만땅으로 채워서 보냈다. 반만 넣고 그런 거 없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목표를 확실히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미 언급되었지만 카미카제 파일럿들은 대다수가 초급훈련만 간신히 마친 풋내기 파일럿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다 위에서 목표를 찾아 날아가는 해상 항법에 대단히 서툴렀고, 툭하면 바다 위에서 헤매기 일쑤였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경험 많은 베테랑들(이 베테랑들은 카미카제 작전에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이 호위기로서 이 풋내기들을 이끌도록 되어 있었지만, 전쟁터의 운이라는 것이 있는 게 사실이니 계획대로 날아간 지점에서 적과 마주하지 못할 가능성도 높았다. 당연히 연료를 넉넉하게 넣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료를 절반 가까이 소모하고도 미국 함대를 찾지 못하면? 돌아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처 없이 헤매다 바다 위에서 연료가 떨어지면 기껏 결심한 자폭도 하지 못하고 값없이 죽게 될 뿐이니까. 때문에 목표를 찾지 못하고 연료가 떨어지면 다시 기지로 돌아와야 한다. 물론 죽으러 나가서 살아 돌아온 비겁한 놈 취급은 받겠지만, 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자폭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처벌받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다음에 다시 출격할 뿐이다. 물론 그 창피를 당하느니 돌아가지 않겠다고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바다를 헤매다가 추락하거나 운 좋게 미군을 만나 돌입한 비행기들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1.연료 자체가 폭발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포클랜드 전쟁 때 영국 구축함 셰필드 호를 타격한 엑조세 미사일의 경우,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발사된 탓에 아직 많이 남아 있던 미사일의 로켓 연료가 대화재를 일으켰고 결국 셰필드를 끝장내고 말았다. 물론 애초에 해당 미사일 자체가 CIC를 제대로 들이받아 처음부터 함선이 고자가 되었고, 이미 탄두의 폭발로 셰필드의 주요 기능이 제거되었다지만, 연료의 대화제가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셰필드를 끝장낸 것도 사실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항공기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제트기들은 비교적 인화점이 높은 등유를 쓰지만 당시에는 가솔린을 사용했고, 아직 탱크에 가솔린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군함에 격돌하면 빈 비행기로 들이받는 것보다 상대편 배에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이만하면 출격하는 특공기에 연료를 가득 채울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조종사가 타고 나면 승강구에 못질을 한다(혹은 용접한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조종사가 목표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거나 비행기의 고장으로 출격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금방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경우 조종사를 내리게 하고 비행기를 다시 정비해야 하는데 조종석을 못이나 용접으로 봉인해 버리면 심히 곤란하다. 아예 출격하지 못하거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온 조종사는 일단 쉬게 하고 다음날 다시 태워서 보내면 된다. 컨디션이 좋아야 조종도 잘 한다.
또한 카미카제 특공대가 목표를 찾지 못할 경우 귀환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적 함대를 발견할 때까지는 탑재한 폭탄의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만약 안전장치가 풀려 있으면 활주로에 착륙할 때 비행기가 폭발할 위험이 있고 비행중에는 안전장치를 다시 걸 수 없었기 때문에, 아직 적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절대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랬더니 초짜 파일럿들이 적을 발견하고도 안전장치 푸는 걸 잊어버리는 바람에 기껏 자기 비행기를 미군 군함에 명중시키고도 폭탄이 터지지 않아 큰 피해를 주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거다. 당한 미군 쪽에서는 땡 잡은 거지만.
이건 카이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카이텐은 정말 말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병기로, 항공대의 카미카제 특공대처럼 목표를 찾지 못해서 돌아오는 경우를 아예 상정하지 않았다. 카미카제가 원거리에서 비행기로 출격, 적을 탐색하여 그 결과에 따라 공격하거나 귀환하는데 반해 카이텐은 잠수함 상갑판에 적재, 잠수함의 잠망경으로 적함의 존재를 육안으로 확실히 인식한 뒤에야 출격했다. 일단 표적을 찾아야 하는 카미카제와 달리 뻔히 눈에 보이는 적을 상대로 하니, 돌아올 이유가 없다.
문제는 카이텐이 기계고장으로 출격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거다. 표적을 발견, 카이텐을 발진시키려는데 고장이 나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탑승원은 다시 잠수함으로 복귀해야 하고, 고장 원인을 밝혀 수리한다면 재출격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안 되면 다시 카이텐과 함께 기지로 귀환해야 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러자면 출입구를 용접하는 따위 일은 할 수 없다. 게다가 후기형 카이텐은 수중에서 발진했는데 수중 용접을 하고 있을 여유도 없다.
이런 정보가 알려진 것은 역시 일본군의 이미지가 한 몫 하지만, 기체 자체의 오작동 때문에 이런 정보가 퍼졌다는 추론도 있다. 즉, 용접은 안 했는데 목표를 못 찾고 귀환해보니 승강구가 안 열리는 경우로 인해 발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2차대전 중후반 이후부턴 철이 없어 숟가락으로 총포 찍던 일본군의 조악한 군용품 품질 덕에 이렇지 않을까 하는 정황 추측이지, 이를 제대로 표기한 보고서는 없다.
11.5.3. 술을 먹여, 혹은 마약을 먹여 출격시킨다?
카미카제 조종사들에게 출격 전에 주는 술은 사수관에서 조조가 관우에게 준 술 한 잔 정도의 의미일 뿐이다. 해군 항공기지에서 청소부 일을 하던 사람의 회고록에 따르면 송별회, 그러니까 출격 전날 밤에 비참하게 맘껏 술을 마신다고 했다. 누구는 말없이 술만 마시고 누구는 울먹이며 유서를 쓴다고 한다. 카이텐 승무원의 경우에도 당일이 아니라 출항 전에 취하도록 실컷 술을 먹인다. "여섯 개의 손과 여섯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도 조종이 힘들다고 할 정도로 복잡한 자폭용 어뢰를 술 취한 상태로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신이다.
필로폰같은 경우에는 그 시절에는 피로회복제 내지 각성제로 그냥 일상적으로 먹었다. 물론 중독이 된 장병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군에서 병사들에게 특별히 의도적으로 먹이고 그런 게 아니었다. 피곤하면 기운 나라고 한 알, 졸리면 잠 깨라고, 죽음의 공포가 두려우면 먹고 힘 내라고 먹은거다. 애초에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일본군도 그것이 마약인 줄 모르고 사용했다. 당시만 해도 매스암페타민의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연합군의 경우도 장거리 폭격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폭격기 승무원이나 호위기 조종사들이 지급받아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계 최초 함대공미사일 T자 돌림 3형제의 탄생 계기
이 카미카제의 의의를 찾아본다면, 최초로 실전배치된 함대공 미사일인 RIM-2 테리어와 RIM-8 탈로스, 그리고 더 나아가 RIM-24 타터, 이 T자 돌림 3형제를 만드는 계기라는 것이다. 미 해군은 카미카제라는 이 의미없는 자살돌격에 말려드는 것에 질려 2차대전 이후 대공포 이외의 효과적 함대 방공 시스템을 찾고 있었고 그러다 나온 것이 바로 '범블비' 프로젝트였다. '범블비' 프로젝트 가운데에 미 해군이 주목한 실험작들은 각각 SAM-N-6와 SAM-N-7였는데, 미 해군은 원래 SAM-N-6쪽에 먼저 투자를 했고, 그만큼 SAM-N-7보다 기대를 하였으나, SAM-N-6는 그만큼 개발이 느려 미 해군은 우선 SAM-N-7쪽에 먼저 개발 및 실전배치를 하게 된다. 이 SAM-N-7은 이후 'RIM-2 테리어'라는 제식명을 부여받았고 SAM-N-6 쪽은 이후에 'RIM-8 탈로스'라는 제식명을 부여받게 된다. 이후 RIM-24 타터마저 추가되면서 미 해군의 T자 돌림 3형제가 완성된다. 이 셋 모두 나름대로 성공한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고 퇴역했으며, 그 계보는 현재 미 해군의 스탠더드 미사일(SM)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SM 시리즈 가운데 탄도미사일 방어를 담당하는 SM-3의 경우, 일본이 미국과 공동 개발국으로써 참가하고 있는데, 이 SM 시리즈의 계보상 조상인 T자 돌림 3형제의 개발 원인이 바로 카미카제를 밥먹듯 실행하던 일본임을 감안하면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