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와 차별은 큰 죄입니다.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강론>
(2024. 8. 17. 토)(마태 19,13-15)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9,13-15).”
1) 여기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이었거나,
아니면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지 말라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람들을 막은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0,14).
‘언짢아하시며’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막은 일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실 정도로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2)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라는 말씀은, 어린이들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해 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또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일을 해야 하고,
원한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연결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가장 크고 중요한 사명인 ‘복음 선포’는,
바로 그 ‘연결 통로’가 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연결 통로’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할 이유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라는 말씀과,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말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라는 임무를 주신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늘나라에는
소외와 차별이 전혀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에 없는 소외와 차별이 지상의 교회에 있다면,
그 교회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작은 이들, 즉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에게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작은 이들’이 한 사람도 소외당하지 않고, 차별 당하지 않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라고 계시니,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교회 안에 ‘소외’와 ‘차별’이
분명히 있고, 그 소외와 차별 때문에 신앙생활 하기를
어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연결 통로’가 되기는커녕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목소리가 큰 사람들, 즉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죄이기도 하고, 공동체 전체의 죄이기도 합니다.
4) 사도들은 그 소외와 차별을 대단히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야고 2,1-4)”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은,
사도시대 때부터 있었던 일이고, 사도들은 그것을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소외와 차별은 사랑의 정반대 쪽에 있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아주 엄하게 말씀하신
가르침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그래서 교회를 다스릴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소외와 차별은 사랑의 정반대 쪽에 있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