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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이름으로 나온 여러 책들 가운데 1963년 9월1일 向文社에서 펴낸「국가와 혁명과 나」는 특별하다. 代筆者 朴相吉씨(청와대 대변인 역임)에 따르면 朴최고회의 의장(당시)이 일일이 읽고 고치고 했기 때문에 내용은 완전히 朴대통령 것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朴正熙가 5·16 군사혁명 때 가졌던 꿈을 잘 보여주는 이 책은 朴正熙의 인간성 그대로 소박하고 솔직하게 쓰여진 게 특징이다. 이 책에서 그가 반드시 이루겠다고 다짐했던 꿈들이 그의 18년 통치 기간중 그 이상으로 실천되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흥미롭다. 인용한다. <나의 갈 길-경상북도 선산군, 이곳이 본인이 태어난 곳이다. 20여년간의 군대 생활, 그리고 소년시절에도 본인은 自立에 가까운 생활을 배워왔다. 그만큼 가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환경이 본인으로 하여금 깨우쳐 준 바 많았고, 결의를 굳게 하여 주기도 하였다. 이 같이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恩人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恩人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生理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급,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所以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庶民의 人情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念願한다> 朴正熙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일부 상류층의 사치나 특권층의 권력남용에 대해 생래적 反感을 드러냈던 이다. 호화주택을 지어 朴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가 정치생명이 끝나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의 庶民性은 의료보험 도입, 근로자 야간 학교 설립, 社員持株制 도입 등 많은 親勞정책으로 나타났다. 그의 장례식 때 보여준 서민들의 애도, 지금도 국립묘지의 그의 묘소를 찾아오는 참배객의 행렬(대부분이 서민들이다)은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했던」그의 꿈이 이뤄졌음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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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손, 카빈소총, 벽돌 썰렁한 침대위에서 박정희대통령은 눈을 떴다. 맞은 편 벽에 걸린 고 육영수여사의 커다란 초상화가 맨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동창밖으로 번지는 여명에 아내의 미소 띤 얼굴이 점차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유화로 그려진 초상화 아래로는 붙박이 단이 있고 그위에는 국화가 꽂힌 노란색 화병 두개와 책 한권이 놓여 있었다. 책은 박목월시인이 쓴 '육영수 여사'로서 나무 상자에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1974년 8월15일 광복절 행사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상처한이후 아내 생일에는 직접 꺾은 국화 송이를 초상화 밑에 가지런히 얹어 놓곤 했다. 아내가 없는 공간을 대신한 것은 박정희의 머리맡을 차지한 '효자 손'이었다. 플라스틱 막대 끝에 스테인레스로 된 손이 달린 것이었다. 62세로는 단단한 체구를 가졌던 박정희는 그 무렵 노인성 소양증세를 비롯해 세가지 질병을 갖고 있었다. 온몸, 특히 등쪽이 가려웠던 박대통령은 이 때문에 순면 내복을 입었고 가려움증을 없애준다는 알파케일을 주치의로부터 구해 목욕물에 풀어 몸을 적셔 보기도 했지만 별무효과였다. 밤중에 가려움이 심해도 등을 긁어 줄 사람이 곁에 없어 효자손을 반려자로 삼고 있었던 홀아비가 박정희였다. 1960년대에 그는 축농증의 일종인 부비동염 수술을 받았으나 곧 재발하였다. 1978년 하반기에 대통령은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다시 코 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코를 통한 호흡이 원활하지 못하여 편도선 주위염이나 목감기를 자주 앓았다. 그 며칠 전에도 대통령은 목감기가 들어있었다. 노인 박정희를 괴롭힌 세번째 질병은 가벼운 궤양성 소화장애였다. 그 1년 전쯤 박 대통령은 2층 침실에서 자다가 토사곽란을 만난 적이 있었다. 고통을 참지못한 대통령은 1층 부속실로 통하는 인터폰 부저를 눌렀다. 숙직중이던 박학봉 비서관이 뛰어 올라왔다. 대통령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내가 변소에 열번 이상이나 다녀 왔는데…"라고 했다. 주치의를 긴급 호출한 박 비서관은 대통령의 배를 주물러 드렸다. 연락을 받은 주치의가 한밤중에 청와대로 달려와 진통제를 주사했다. 잠시 후 고통이 수그러들자 비로소 대통령은 잠이 들었다. 박 비서관은 잠든 대통령에게 이불을 덮어 드렸다. 그 휑한 방에 대통령을 혼자 남겨두고 나오려니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침대 발끝 오른편엔 카빈 소총 두 정을 걸어 둔 나무 총가가 놓여 있었다. 탄창과 실탄은 총가 밑 서랍에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한 달 전쯤 박비서관을 시켜 이 총을 청와대 경호단에 반납시켰다. 총가가 있던 자리에는 희미한 자국만 카페트위에 남아 있었다. 총으로 권력을 쟁취했던 박정희는 그 총구가 언젠가는 자신을 향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대통령은 맨 먼저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동쪽 창문을 비롯, 서재와 거실의 창문들을 활짝 열어 젖혔다. 청와대 본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박대통령의 창문여는 소리와 함께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지어진지 40년째가 되었던 청와대 본관은 대통령이 욕실에 들어가 물 트는 소리 조차 아래층에서 다 들을 수 있었다. 침실 옆 욕실 변기의 물통속에는 대통령이 아무도 모르게 넣어 둔 빨간 벽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일과시간에 사용하는 1층 집무실 옆 대통령 전용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석유파동 이후부터 골프를 삼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고나면 어김없이 본관 부속실로 연결된 인터폰을 눌렀다. "운동하자". 대통령을 측근에서 수발하는 제1부속실 직원은 당시 박학봉 비서관과 이광형 부관 두 사람이었다. 이들이 대통령 집무실에 근무하면서 교대로 숙직을 했다. 그날 아침 숙직한 직원은 이광형 부관(당시 32세)이었다. 이 부관은 운동복 차림에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현관앞으로 나와 대통령을 기다렸다. 잠시후 대통령도 운동복을 입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나란히달렸다. 청와대 본관을 빙 둘러 쳐진 철망을 벗어나 동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면 상춘제가 나타나고 이어서 실내 수영장. 석유파동 직후 대통령은 "수영장에 물을 넣고 하면 돈도 많이 드는데 마루를 깔고 배드민턴이나 치도록 하자"고 지시해 실내 수영장 이 실내 배드민턴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환갑을 넘긴 대통령과 배드민턴을 치고 나면 젊은 이 부관도 땀으로 온 몸을 적셔야 했다. 운동이 끝나자 이 부관은 도구를 챙겨들고 대통령과 함께 본관으로 돌아 왔다. 이날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참석하기로 일정이 잡혀져 있었다. 이 부관은 박 대통령의 양복과 구두를 챙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2층 거실의 대통령으로부터 인터폰이 울렸다. "예, 이광형입니다" "어제 입었던 그 양복하고 구두, 그거 가져 오게" "예, 알겠습니다" '어제 입었던 양복과 구두'란 허리단을 수선한 곤색 양복과 금강제화에서 맞춘 검정색 구두를 말한다. 한해 전 코 수술을 받은 직후부터 담배를 끊었던 대통령은 몸무게가 60kg에서 3∼4kg쯤 불었다. 1층 집무실로 출근할때 자신이 전날 입었던 양복바지를 든채 내려온 적도 있었다. 대통령은 부관에게 바지를 뒤집어 허리 뒷단을 보여주며 손가락 으로 정확히 폭을 재 보이고는 "여기 요 만큼만 더 늘려주게"라고 했다. 부속실 직원들은 을지로 2가에 있던 '세기 양복점'으로 옷을 보내어 고쳐 오도록 했다. 그날 대통령의 마지막 양복을 준비했던 이광형(현재 삼양산업 부 사장)은 "바지는 수선해서 입고 구두 뒤축을 갈아 신은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이 부관은 평소보다 십여분 늦게 양복과 구두를 들고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대통령은 거울 앞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자주색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체는 반바지 모양의 팬티 차림 그대로였다. 대통령은 이 부관이 들어서자 "어, 어, 이리 가져와"하며 반겼다. 농촌 시찰이 있는 날 대통령은 소풍가는 소년처럼 들떠 있곤 했다. 이날도 늦게 올라 온 양복을 받아 입으며 연신 어깨를 들썩이면서 알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 흥얼했다. 권력이란 갑옷을 걸치기 직전 박정희라는 한 인간의 내면을 엿보게 하는 것은 고독, 무인, 절약의 상징물인 효자손·카빈 그리고 변기 속 벽돌이었다. 그는 양복을 입음으로써 이같은 자신의 내면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감싸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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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진 혁대 두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일부러 보이면서 둘러선 군의관과 위생병들에게 "꼭 살려야 해요" 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정규형 대위는 이우철 일병에게 심장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일병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가서 두 손을 포갠 뒤에 왼쪽 가슴을 몇 차례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정 대위는 수동식 인공호흡 기 '암부'를 환자의 입과 코에 덮어씌워 놓고 공기주머니를 눌러 공기를 허파로 밀어보냈다. 정 대위는 심장을 자극하여 박동하게 하는 강심제 에피네프린 20cc를 가슴에 주사했다. 심장마사지도 다시 했다. 한 20분간 응급소생법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회생불능이었다. 정 대위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송계용 소령이 "돌아가 셨습니다"라고 곁에 버티고 있는 두 감시자에게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송 소령의 물음에 두 감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군의관 정규 형 대위는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 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 처지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송소령이 "피 닦고 사후조치를 취해"라고 지시했다. 위생병이 시체 의 얼굴을 덮은 손수건을 치우려고 하니 두 감시자가 또 제지했다. 송 소령이 "사후조치를 하지 않으면 시체가 부패한다"고 달랬다. 두 감시 자는 "누구도 바깥으로 나가선 안된다"고 조건을 달고는 허락했다. 위 생병 이우철과 이인섭 병장이 시체를 깨끗이 닦는 역할을 맡았다. 얼굴을 솜으로 닦는데 상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손과 솜에 피가 묻어나곤 했다. 이일병은 천천히 시체의 머리를 더듬어 보았다. 오른 쪽 귀 뒷부분에서 새끼 손가락 하나가 쑥 들어갔다. 머리카락으로 덮여 잘보이지 않았던 그곳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병은 이곳을 다시 닦아내고 솜으로 틀어막았다. 시체의 와이셔츠를 벗겼다. 쇄골에서 약15cm 아래 가슴에 총탄이 들어간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아래 등에 사출구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사출구의 와이셔츠는 뚫려지지 않았고 탄알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8시 국군서울지구병원장 김병수 공군준장은 병원당직사령으로부 터 "응급환자가 왔으니 빨리 나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용산구 이촌 동의 자택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도착하여 당직실로 갔다. 군의 관에게 "무슨 사고야"라고 물었다. "총기사고입니다. 브이 아이 피(VIP) 같습니다." "어떻게 되었나.". "익스파이어(expire)했습니다. 디 오 에이(DOA. Death of Arrival) 입니다." "뭘 이런 걸로 날 불렀나. 그런데 누군가.". "모르겠습니다." "누가 데려왔나.". "비서실장님이 데려 왔습니다." "응급실에 가보자.". 김병수 원장은 '공군준장 김병수'란 명찰이 달린 가운을 입고 응급 실로 갔다. 침대위에 있는 시체는 와이셔츠에 양복바지였다. "이 분들은 누구야.". 김원장은 옆에 서 있던 유성옥과 서영준을 가리키며 물었다. 군의관 이 대신 답했다. "같이 온 분들입니다.". 두 사람을 향하여 물었다. "이 사람 누구요." "모릅니다.". "당신들은 누구요." "알 필요 없습니다.". "그럼 소속은 어디요." "비서실 직원입니다.". 김원장은 두 사람의 기세에 눌려 더 추궁을 못했다. 김원장은 군의 관들의 그 동안 처치과정을 듣고 직접 청진기를 가슴에 갖다 대어 사 망을 확인했다. 이어서 시체의 신분을 확인하려고 머리를 덮고 있는 수건을 벗기려 했다. 흰 수건은 피에 푹 젖어 있었다. 두 감시자는 얼 굴의 한쪽씩만 보이도록 수건을 열어보였다. 오래 관찰도 못하게 했다. 밤8시40분쯤 당번병이 "비서실장님 전홧니다"라고 알려 왔다. 원장실 로 뛰어가는데 두 감시자가 붙었다. "어떻게 되었나.". 김계원 실장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죽었습니다. 실장님, 이미 실장님이 데려올 때 사망했습니다.". "그럼 정중히 모셔라." "예.". "그런데 어디에 모시려나." "글쎄요. 저희 병원에 영안실이 없으니 어떻게 하지요.". "그럼 각하 방에 모셔." "그건 절대 안됩니다. 실장님. 아무리 그렇지만 각하 방에 어떻게 아무나 모십니까.". "그럼 어떻게 하려나." "우리는 어쩔 수 없지요.". "그래 알았다. 하여튼 김장군이 책임지고 정중히 모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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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극단 '스바루'가 한·일 연극 교류를 위해 서울의 세종 문화 회관 소극장에서 10월 27일 첫 날의 개막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10월 26일의 무대 연습까지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배우들과 함께 프라자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밤 10시경이었다. 박 대통령이 흉탄을 맞은 시각은 7시 55분, 물론 우리들은 그 날 밤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출연자들에게 고칠 점을 이야기한 후에 그 때 마침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우리들과 같은 비행기편으로 서울에 와있던 마츠하라 씨와 새벽 5시 넘어서까지 아야기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2시간도 되지 않아 누가 깨워서 일어나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만큼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따라서 경악과 낭패를 느끼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에게 그의 암살은 강 건너 불구경 27일 나는 아침부터 일본의 TV, 신문, 주간지들의 국제 전화에 쫓겨 다녔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밝고 활기 있는 목소리로 "운이 좋았군요.", "타이밍이 좋았군요." 하는 바람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내가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10월이었는데, 그 때를 포함해서 세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 두 번째는 1978년이고 마지막은 1979년 9월이었다. 이번에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정치가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한 개인적 기분을 일본의 언론에 강매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정치, 사회의 현실을 논평하는 자는 모두 '죽음의 상인'이다. 입으로는 평화와 무사를 외치고 유토피아의 실현을 대망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는 대안의 화재를 잔뜩 기다리고 있다. 천재·사건·사고의 피해는 크면 클수록 흥분하고 5명의 사망보다 100명의 사망에 삶의 보람을 느끼며 100며의 광부 생매장보다 대통령 한 사람 암살에 가슴 두근거린다. 그들 삶의 충실감은 신문 표제 활자 크기에 정비례한다. 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벌레도 죽이지 못하는 선량한 부부, 부자가 함께 사는 가정에서도 그날 저녁 평화와 화목은 10월 27일에 한해 석간의 '박 대통령 암살당하다'라는 커다란 표제로 인해 한층 더 긴밀도를 더했을 것이다. 현지에 있던 나는 역시 그행운에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를 통하여 현지에 있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햇다. 덕분에 나는 현지에 없었던 사람들(일본인)이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 어떻게 이해하고 싶어하는지를 역탐지 할 수 있었다. 결국 현지에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서울과 동경, 한국과 일본, 이 양자의 차이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와 그것을 가지지 못한 외딴 섬의 차이이며, 그 국민과 그 주민의 생활 방식 차원의 차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국가라는 말애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꾸어 말하자. 크든 작든 위기감을 갖지 않으면 국가는 성립하지 않는다. 일본은 잠재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잉태하고 있으면서도 위기감은 전혀 없다. 그래서 국가 의식이 애매하게 되고 국가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려 국민도 영토도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일본 열도라는 지역과 그 곳에 서식하는 주민만 존재할 뿐이다. 일본에 돌아와서 그 동안 박 대통령 암살 사건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고서, 아니 내용은 읽을 필요도 없이 표제만 보고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다 나의 '역탐지'를 통해서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역시 일본은 '수호할 가이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공론에 정신이 빠져 있는 한가로운 사람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반체제적이라고 말하던 야당측의 신문 동아일보까지도 일본의 보도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 논설을 게재했다. 당연한 일이다. 실수의 근본은 모두 박 대통령을 독재자로 간주한데에 있었다. 더욱이 그렇게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보도기관이 종종 경망의 우를 범하는 것은 다분히 생계 때문이겠지만 또한 그 약점을 이용한 경망의 도를 환영하는 경망의 성벽이 신문의 천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소 속에 비친 고독 대통령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만일 북이 쳐내려 온다면 나는 한 발자국도 서울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선두에 서서 죽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런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 박 대통령이 전사한다면 전군의 사기가 문제될 것이다.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대통령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는 편이 국민의 전의를 더욱 강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미소 속에 그분의 고독을 간취했다. 최초로 회견할 때 약속은 오전 11시에서 정오까지로 되어 있었으나, 그 며칠 전에 보고 왔던 제2땅굴의 얘기를 끄집어 내었더니 박 대통령은 벌떡 일어나서 응접실 구석에 있는 휴전선 부근 모형판으로 나를 안내하여 땅굴의 내부 구조를 하나하나 설명하고 이러한 상황하에서 대포와 버터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 자유, 평등을 말하지만 미·일의 그것과 한국의 그것은 동일시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이름 아래 전혀 정치 지도력도 외교 정책도 상실해 버린 일본, 그리고 일본보다는 낫지만 월남 전쟁이래 대통령의 지도력이 약해지고 언제나 소련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있는 미국, 그 어느 쪽도 대소의 차는 있을지언정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외딴 섬인데 반하여 한국은 월남 붕괴 후 아시아에서 전체주의 사회와 대치하고 있는 자유 진영의 최전선 기지이다. 그 고뇌를 미·일 양국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박 대통령은 이런 얘기를, 몇 가지 구체적 예를 들어 가며 말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약속한 한 시간이 지나 물러가려고 하는 나를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만류하면서 "어차피 점심을 먹어야 합니다. 내가 먹는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시다면 드시고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평소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않는 나였지만 그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고인에 대하여, 또한 일국의 원수에 대하여 대단히 결례되는 말이지만 나는 감히 쓴다. 솔직히 그 조식에 놀랐다. 오믈렛은 속까지 딱딱했고 표면은 군데군데 타 있었다. 만약 일본 호텔이렀다면, "이것도 오믈렛인가?" 하고 나는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먹고 있는 청와대의 '독재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군사 혁명을 일으키기 전의 박 소장은 청빈에 만족했던 것처럼 대통령이 된 후에도 때때로 외출하다가 당시 한국에 어울리지 않는 '호저'가 눈에 띄면 누구의 저택인지를 묻고 그것이 각료나 고관의 집이면 견책했다는 말이 결코 지어낸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 무렵 조선 호텔에서 그런대로 맛있는 오믈렛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 방식이 건전한 지도자 박정희 많은 사람들은 곧잘 잊지만 박정희 씨는 농민 출신이며, 일본 통치 시대에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동안 교편을 잡았다가 만주 군관 학교에 들어가 1등으로 학업을 마쳤다. 일본군의 육군사관 학교는 3등으로 졸업, 구 일본군의 이른바 '군인정신'이 몸에 배었으며 그로 인해 구 일본군을 증오하는 평화 멍청이 전후 일본 지식인으로부터는 호감을 받지 못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대통령의 인품의 근간에 있는 것은 구 일본군의 '군인 정신'보다도 오히려 그 근원이 되는 유교 도덕이며 그것이 일본의 명치 유신을 달성시킨 근대적 합리 사상과 유착된 것이다. 따라서 친일파라는 등 간단한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서 좋은 의미로는 대부분의 일본 사람보다 훨씬 더 일본적이었다. 그 이상으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이러한 대통령의 통치하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사민 평등의 근대 국가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 500년은 중국식 봉건제였고, 그 다음 일본 통치 시대에 한국인은 관민을 막론하고 차별 대우를 받았다. 또 전후 이승만, 운보선 대통령 시대에는 미국과 양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햇으며 정치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박 대통령은 유신 혁명 후 무엇보다 외국과 양반 세력을 배경삼아 자기 지반을 굳히려 하던 자들을 싫어하여 그들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하려 했다. 그러니 민중이 대통령을 자부(慈父)처럼 흠모한 것은 당연하다. 박정희 대통령과 요시다 수상의 공통점 나는 식사 후 30분 정도 지나 금방 달아나는 것 같기는 했으나, 약속 시간이 너무 초과했다고 말하고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오늘 오후는 아무런 예정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다시 만류했다. 이미 나의 노리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몸습은 사라지고 지기 박정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 다시 이야기에 열중했다.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당시 대통령 대변인, 현재는 문화공보부 장관 김성진 씨한테 들은 얘기를 상기하고 그것이 사실인지 물어보았다. 그 이야기란 이러하다. 대통령 일행이 어딘가 시찰하러 갔을 때 도중 갈림길에서 보통때면 직진해야 될 곳인데 자동차가 급히 우회전했다. "왜 돌아가려 하는가?"라고 대통령이 묻자 보좌관이 "대학 분쟁으로 경찰과 학생이 대치하고 있고 학생들의 투석이 격력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 모양인데 대통령은 즉시 "괜찮으니 원래 길로 가자."라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명령대로 그 길로 갔는데 얼마 안 가서 데모 중인 그 학교 앞에 당도하자 대통령은 자동차를 세우고 뛰어내려 혼자서 대학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고 한다. 놀란 것은 학생측으로서 즉시 투석을 그치고 뿔뿔이 달아났다고 한다. 대통령은 그 길로 총장실에 들어가 총장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는데 이미 자택으로 도망가 버렸던 총장이 나타난 것은 수십 분 후였다. 기절할 것 같았던 그에게 대통령은 차근 차근 타일렀다고 한다. "이럴때일수록 총장이 책임을 지고 학생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물음에 대통령은, "아,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학생들이 설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총장이란 사람은 소동의 경과를 보고 있으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는 내 마음에 새겨져 있던 "유사시에는 서울에서 일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 대답이었다. 이런 일을 두고 사람들이 그를 '독재자'라고 말하는지.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민주제보다 독재제를 택하겠다. 과거 요시다 시게루는 'one man'이라고 호칭되고 대미 추종 외교를 한다고 비난받았으며 장기 집권한다고 일본 국민이 싫증내고 미워했다. 이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요시다 씨와 많이 닮았다. 1954년 초 내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일본 담당 관리들의 초청을 받아 식사를 함께 했는데 "요시다 초리만큼 고집 센 사람도 없다. 미국에 대들기만 한다."고 해서 일본 내 평가와 전혀 다른 데 놀랐던 사실을 기억한다.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지 않았을까. 미국을 가까이 끌어당겨 놓아야 한다는 데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이면에, 이러한 한국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국산, 그것도 이제는 도가 지나쳐 고장투성이인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미국에 대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미국에 대한 기대와 불신, 이 딜레마는 최초의 회견시에도 엿보였다. 물론 이 딜레마는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기대 쪽이 강하고 불신이라기보다는 곤혹의 형태로 나타났다. 어깨를 흔들면서 웃던 대통령 금년 9월 세 번째 회견 때 나는 "카터 대통령이 인권 외교를 한국에 적용하는 것은 내정 간섭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결론적으로 간접 침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각하를 독재자라고 부른다면 카터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독재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한 미군 철수에 반대한 싱글러브 소장을 해임하는가 하면, 아마 디트로이트에선가 시카고에서 '워시 터을 상대하지 않고 자기 편은 인민 대중뿐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으니까요.'"라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그러나 동경 서미트 후에 여기에 왔다간 후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상을 가지고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고 대답하였다. 나도 동감이었다. 주한 미군 철수의 잠정 동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 그 전날 호텔 텔레비전으로 ㅌ카터 대통령의 서울 방문과 그 환영 상황을 한 시간 정도 보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볼 스 없는 '인권 억압'은 별개로 하더라도 서울의 시민 생활은 일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공기가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눈으로 확실히 확인했음에 틀림없다. 오히려 환영의 깃발을 흔드는 민중은 있어도 그거슬 단속하는 경찰관은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다. 혹시 카터 씨는 일본 쪽이 훨씬 경찰 국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독재자에게는 도재자가 안 보였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농담을 하였더니 대통령은 어깨를 흔들면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대통령의 불신은 주한 미군 철수 동결만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가 보았다. 그 대가로 미국측은 끈질기게 '개방된 민주주의 사회'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 베트남 공작의 잘못을 한국에섯까지 저지르려고 하고 있는 것일까. 박 대통령보다는 내가 더 분노를 느낀다. 미국은 물론 일본도 다음의 중요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20대 후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북쪽의 위협이라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소비 생활이나 언론 자유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한편 미국 유학에서 테크노크라트의 우수성을 인정한다 해도 그 재능이나 능률은 평화시를 전제로 할 때만 십분 발휘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휴전선의 벽을 그늘에서 지켜 주는 힘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 기능이 훌륭히 수행되어 북의 침공을 억지하는 성과를 올리면 올릴수록 겨우 40km후방의 서울에서는 그 벽을 지탱하고 있는 힘의 존재가 보이지 않게 되고, 또한 그 너머에서 끊임없이 이쪽을 노리고 있는 북한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에어 포켓이된다. 오일 쇼크보다 더 큰 쇼크 지금까지 무제한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해서 미움의 대상이 되면서도 일반 국민으로부터 경애받던 박 대통령은 이제 없다. 권력과 권위, 이 양자를 겸비한 인물이 금후 과연 나올 것인가. 일본의 한국통이라는 사람들조차 유신 체제는 더 이상 필요없으며, 적어도 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아직은 그럴시기가 아니다. 만약 와화시키면 수습할 길이 없이 혼란이 일어나고, 다시 군사 쿠데타라는 최악의 사태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때를 노려 북한이 밀고 내려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박 대통령이 오랫동안 유신 체제를 지속해 온 데는 득이 있는가 하면 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존재는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그 일부가 오염되었다고 해도 공기를 빼 버리는 사람은 직식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나 일본이 끊임없이 공기를 보급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런 각오도 없이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을 나는 증오한다. 물론 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유신 체제하에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한 '한강의 기적'에 작년 말경부터 암운이 끼기 시작한 사실을 나는 아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플레가 극심하고 모터럼 새마을 운동으로 기초를 굳히게 된 민생의 향상도 한계에 부딪히고 빈부의 차도 증대되어 왔다. 제2차 오일 쇼크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국 부자 나라 미국도 마찬가지라댜 할 것이 아닌가. 한국의 인플레나 빈부의 차를 반드시 오일 쇼크 때문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제일 큰 원인은 주한 미국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한 카터 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이다. 이를 대비하여 한국은 군사비를 예산으 3분의 1 수준으로 증대시켰고, 9월에 다시 그 상태를 1985년까지 유지할 것을 국회에서 결의했는데, 그 주름살이 시민의 소비 생활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즘이 발전 도상국 또는 중진국에 대하여 항상 범하는 잘못은, 근대화와 선진국으로의 탈피를 늦추고 정체시키는 책임을 모두 지도자층으로 돌리고, 그들만 제거시키면 자기들과 같은 근대 사회가 이룩될 소지가 그 나라에 이미 구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체제 비판자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만약 박 대통령을 어떻게 해서라도 '독재라'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러나 나는 한 나라의 원수로서 그 죽음이 국제 정치의 동향을 좌우하는 둘도 없는 인물은 유럽의 티토와 아시아의 박정희, 이 두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내가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학생이나 노동자는 차치하고라도 한국 내부에서는 지금까지 박 정권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사람 혹은 반체제적이었던 정치·언론인은 미국 저널리즘만큼 낙천적일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넘어뜨릴 수 없는 천하 장사 '독재자'를 잃은 후 가장 진퇴양난에 빠진 사람은 그들이다. 안심하고 무책임한 반체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심하고 무책임한 반체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번 내닫기 시작하면 그것을 정지시켜 줄 두꺼운 벽이 이제는 없어졌고, 북한에까지 달려가지 않으면 끝장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애도하는 수많은 민중들 10월 28일경부터 국장 전인 11월 2일까지 서울시를 비롯해 전국 시·읍·면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귀국 후 들으니 분향자 수는 인구 3,700만 중 2,0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인구의 5분의 1이 모여 있는 서울에서는 민중들이 분향을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고 모두 비통한 표정이었으며 우는 사람도 많았다. TV에서는 박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생전의 사진을 차례차례로 비추고 있었는데 호텔 여종업원은 나의 방을 청소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이와 같은 얘기는 배우들한테서도 들었다. 국장일에는 거리 정리를 하던 경찰관들도 이따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10월 31일 판문점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중앙청 앞 분향소에 분향하러 가는 행렬이 세종로 양측을 메운 것을 보고 안내양이 대통령에 대하여 민중이 얼마만큼의 경애의 정을 가지고 있었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짬을 봐서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독재자라고 합니다."라고 했더니 그 순간 안내양은 언성을 높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틀린 것입니다."라고 덤벼들었다. 비단 버스 안내양뿐만 아니라 몇 사람의 반체제 언론인도 대통령만은 별격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을 나는 들어서 안다. 주변 인물을 헌신적으로 만드는 매력 '역탐지'로 이미 여러 가지 모략설을 듣고 있었으나, 그런 추리 소설의 범인 찾기에 탐닉해 있을 때가 아니다. 물론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 근저에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경쟁'이 있었고, 그것이 범행의 동기였다고 나는 보고 있다. 그만큼 인간 박정희에게는 주위의 인간을 헌신적으로 만드는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남자를 반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 '충성심 경쟁'을 독재자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라는 정치상 일반적 도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찾고 싶다면 수사의 상도에 따라 박 대통령이 죽어서 가장 득을 보는 자가 누군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북한 외에는 아무도 없다. 만약 미국이 한국에서 손을 떼는데 가장 적당한 정세를 조성하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랴말로 억측에도 분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즉, 미국이 한국 실정에 어둡고,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한국을 지키는 것을 일본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에 비해 한국에 대해 부당하게도 매정하게 굴었다. 그러한 미국을 붙잡아 놓기 위한 '우국 충정'에서 거꾸로 읍참마속한 격이 된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9월 대통령과 세 번째 회견시 나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다.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각하께서도 아마 아실 것입니다. 일본에서 소련 다음으로 싫어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외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통령은 즉시 대답했다. "매스컴 때문이지요." "매스컴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밖에 또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각하께서 농촌에서 노파와 한담하실 때라든지 또 대구에서 옛 사범 학교 동기생과 간단한 안주를 놓고 막걸리를 드실 때 웃으시는 얼굴을 사진을 보아 알고 있습니다만 대체로 일본인들은 각하의 엄한 얼굴밖에 모르며 구 군인으로서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지금 한국은 군사 정치하에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으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런 일로 손해를 보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니 대통령은 "아무래도 나 혼자 있을 때 카메라를 들이대면 웃을 수 없게 됩니다."라고 했다. 과연 나 자신도 그렇다. 혼자서는 웃을 수 없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 때였다. 대통령이 "담배 한 개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 방에 안내되어 의자에 앉자마자 "각하께서는 담배를 피우십니까?"라고 물으니 "아니오. 여즈음 끊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워도 괜찮습니까? 설마 혐연권을 발동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피우시지요." 이런 대화가 있은 후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역시 다른 사람이 피우는 것을 보면 피우고 싶어집니다. 아직은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속주머니에서 담뱃갑을 끄집어내면서 "일본 Peace로 필터가없는 담배 입니다만……."이라고 했다. 그러자 "아니 좋습니다."라면서 한 개비를 뽑았다. 국제 정세를 내다보는 안목의 소유자 그러던 중 ㅐ통령이 불쑥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일본에 가 보고 싶습니다. 정말 아내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염원입니다. 그에 앞서 일본의 총리가 한번 와 주지 않으면 내 입장이 곤란합니다. 얼마 전에 야마시타 방위청 장관이 서울에 왔지만 나한테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외 그랬을까요?"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즉시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이라는 곳은 만사가 그런 식입니다. 조금 전에 각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문이라는 독재자가 여론을 조작하고 한국을 소련 다음으로 싫어하는 나라고 날조해 버렸기 때문에 대신쯤 되면 헌법상의 주관자인 국민의 얼굴을 살펴 그 허가가 없으면 여행, 방문의 자유도 없는 실정입니다." 대통령은 나의 농담에 천진스러이 웃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다시 민주화, 근대화와 유신 체제라는 진지한 문제로 옮겨졌다.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를 방문한 미국의 전 고관이 전해 준 정보라고 전제하면서 소련의 시리아에 대한 작용을 이야기하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신형 전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만약 제3차 대전이 시작된다고 한다면 자기는 중동에서부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말 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말은 "5년이나 7년이 지나면 한국과 일본이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양국이 손을 잡고 미국을 붙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나라 한 나라가 각각 미국과 연계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위험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부터 3개월 후인 오늘 미국이나 일본이 민주주의라는 미약에 도취하여 한국의 '독재'에 잔소리나 하고 있는 사이에 이란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으로 소련이 손을 뻗어 수에즈 운하, 페르시아 만을 영향권 안에 집어넣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둘러싸는 외호를 하나하나 메워가고 있어서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아도 미국을 아시아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정세가 아니다. 나는 대통령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 그러나 오늘의 일본에는 한국의 다리를 잡아당기기만 하지 각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정치가가 과연 있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없이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대통령의 표정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올린 친서 마지막 헤어질 때 여느 때 같으면 문에서 악수하고 그대로 방을 나왔으나 그 날만은 대통령이 나의 허리를 왼손으로 안으며 복도를 함께 걸어 나왔다. 조금 걷다가 나는 "괜찮습니다. 다음 달 또 찾아 뵈올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다시 한번 악수를 했다. 그 '다음 달', 내가 서울에 도착하여 셋째날이 되는 날 밤에 대통령은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내가 일본 정부 그 밖의 모든 공기관과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책임한 상태에서' 금후 한·일 양국의 문화 교류에 관하여 대통령에게 약속한 두세개 현안에 대해서 답할 기회는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박정희 씨의 인품을 전심으로 경애하던 나는 그의 사후 서울의 호텔에서 혼자 있을 때 아무리 해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돌아가신 후, 아들딸에게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명했던 대통령이 가족끼리만 있을 때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 통곡했다는 얘기를 상기 하면서. 추기(追記): 이제 와서 생각난다. 언제인가는 확실히 기억이 없으나 한번 동경에서 대통령에게 친서를 올려 "충성심 경쟁'이 여러 가지 폐해를 낳고 있는 데 대한 '간언'을 드린 적이 있다. 물론 대통령 자신이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었다. 그 편지가 과연 대통령의 손에 들어갔는지 물어 보는 것을 잊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 중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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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그 아름다운 가을의 어느 날 서울에서 내자와 더불어 영주 부석사로 향했다. 도중에 수안보에 있는 아담한 온천 호텔에서 일박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막상 호텔에 도착해 보니 방이 없다는 게 아닌가. 머리에 욱하고 치미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날 아침 서울에서 전화로 예약을 확인하고 떠났는데. 화가 나서 프런트의 담당자에게, "오늘 아침에 확인을 했는데 그것을 잊은 것을 보니 당신의 기억력은 빵점인가? 지배인을 불러와! 지배인을……." 하며 벼락을 쳤다. 한시라도 빨리 샤워를 하고 방에서 한잔 들이켜며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의 노호도 강압적인 음향 효과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 흘낏 로비를 둘러보았다. 둘러보면 볼수록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예약한 호텔 방이 없다니, 박 선생이 뭐길래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이 바쁘게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한눈으로 보아도 경호원인 것이 분명한 여러 사람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왁자지껄 떠들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슬그머니 겁먹은 내자는 나의 웃저고리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개처럼 짖어대지 말라고 타일렀다. 로비에서 밖으로 나가자고도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실추된 남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먼저보다 나의 항의 음악은 피치가 더욱더 올라가고 말았다. 그랬더니 지배인인 듯싶은 한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타나서 내 귀에 대고 한다는 말이 "대통령 각하이십니다."고 하는 것이아닌가. 각하 일행이 사사로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갑자기 이호텔을 '임시 접수'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피가 역류하리만치 격노하고 말았다. "대통령이 신이냐! 무슨 권리가 있어서 그렇게 제멋대로 할 수 있는가! 그리서 또 한번 호통을 쳤다. "박 선생은 도대체 자기를 무어라고 알고 있는가."라고. 서구식 민주주의는 소화 불량을 일으킨다 박 대통령은 어떤 인간이었는가? 이것이 본서의 편저자인 내 친구의 설문이다. 대답하라는 것이다. 일단 거절을 했다. 그 이유는 간단 명료. 박 선생과는 단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다. 그것도 타임지 와의 딱딱한 공식적 인터부를 할 때뿐이었다. 이런 인터뷰만 갖고 대상 인물의 성격을 깊숙이 파고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 편저자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이쪽이 끝내 굽히고 말았다. 그래서 엉터리 분석이겠지만 여러 가지 추억의 저편에서 되도록 짧게 다음과 같이 써 보기로 했다(이 같은 무책임한 글을 읽어줄 한가로운 사람이 있으랴만……). 박 선생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 노기자의 해석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정치학 용어가 필요치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Man of Vision, 즉 자기의 비전에 신들린 '신념 거사' 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신념 속에서 특기할 만한 여러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기로 하겠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평생토록 변하지 않았던 태도에 관해서이다. 생각해 본다면 박 선생은 이 명제에 관한 한 판에 박힌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똑같은 말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즉, 당시의 한국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멱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든가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해도 국가 존속에 일대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소화불량'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이에 대하여 국내외에서는 귀가 따가울 정도의 반론이 매번 있었다. 인권이 경제보다 선행한다는 말이다. 그의 철학도 부국 강병의 실용주의 이 소리를 목청을 돋우어 외쳐댔던 당시의 야당 인사들, 물론 양 김씨(대중 씨와 영삼씨), 자타가 인정하는 인권 운동가들, 그리고 혈기 왕성한 학생 제군. 이들의 외침을 박 선생은 어떤 얼굴로 청와대에서 듣고 있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끊일 줄 모르는 합창을 그 때 유행했던 문자인 휴전선 이쪽에서의 달콤한 음악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나는 보장할 수 있다. 똑같이 보장할 수 있는 것이 또하나 있다. 그것은 당시 미국 백악관의 주인까지도 비공식이었지만 그 음악에 박수를 보낵 있었으나, 이에 대해 박 선생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지금 귿이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산더미처럼 많은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항상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이 문제에 대해 하나의 바위 덩어리처럼 완고한 태도를 박 선생이 계속 지켜왔다는 일이다. 죽을 때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당. 그 집념과도 같은 태도를 조금이라도 변경하였던 것일까! 대답은 물론 '노(No)'였다. 왜냐? 그 대답은 명백하고도 남음이 있다. 2,000년 전의 철학자 관자와 마찬가지로 '의식이 충족된 뒤에야 예절도 지키게 된다.'는 우선 순위가 정확히 설정되어 있었고, 이에 대해 추호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있는 대중에게 민주주의를 일러주는 것 처럼 무의미하고 잔혹한 일은 없다. 이 강열한 실용주의! 여기서부터 국가 존속의 기초는 '부국 강병'이며 그 달성의 결정적 시기가 확립되면 그 때 비로소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의 길이 자연히 순탄하게 열리게 된다는 그의 철학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금에 와서 거론되고 있는 이른바 아시아식 민주주의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박 선생은 이의 선구자라 하겠기에 'Man of Vision'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속에서 그는 명백하게 민주주의 모델의 하나가 아니라 복수임을 몸으로 증명한 정치가로 분류되어야 한다. 이 복수설을 태평양의 저쪽에 있는 덩치 큰 동맹국에서, 그것도 그들 역대 당국자들이 과연 잘 배워 왔던가? 여기에서도 대답은 '노'라고 하는게 정답이라 하겠다. 얼마 전에 인권 외교라는 명목으로 어슬렁 중국 북경까지 찾아 갔던 국무장관이 있었다. 이것은 박 선생 시대에 바로 그 덩치 큰 나라의 두목이 똑같은 문제 때문에 한국에 대해 취했던 태도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역사는 변함없이 되풀이하는 것인가 싶다. 여기서 역사라는 말을 두 번 썼다. 한 번 더 써 본다면 박 선생은 한국 근대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일까? 천학비재한 나에게는 그것은 너무 커다란 명제가 된다. 다만 항상 감탄하는 것은 박 선생이 시인과 같이 놀랄 만한 직감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연설집은 그 점을 명명백백하게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한국 국민의 높은 잠재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잠재력이 오늘의 번영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자신만만한 말로 예언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급기야는 그의 성격이 되고 말았던 것일까! 희랍 비극에서는 성격이 운명으로 된다. 애처롭게도 박 선생은 그러한 비극의 주인공과도 같이 암살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후 샴페인과 장미꽃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안보에서의 말다툼은 어떻게 결말이 났던가? 결국은 이쪽이 지고 말았고 커다란 온돌방에서 새우잠을 강요당하고 말았다. 이 강제 조치를 받아들일 때 대통령 경호대의 두목인 것 같은 사람과 하나의 협상을 했었다. 즉, 사죄의 표시로 나에게는 샴페인 한병을, 그리고 내자에게는 장미꽃 한 묶음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 후 샴페인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고 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 후 천국으로 간 내 내자는 거기서 아직도 그 꽃다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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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 수상자들을 모두 부른 적이 있다. 무척이나 더운 한여름날이었다. 박의장은 수상자들이 입장하자 일일이 악수를 청하면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었다. 박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금상첨화격이오. 여러분께서 영예로운 상을 타서 좋고 가뭄 끝에 비가 내리니 얼마나 좋소. 그래서 아침 일찍 농촌 순시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오』 이 말에 나는 그가 영락없는 농촌 출신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한번은 내가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호원이 와서 가자고 했다. 나는 이발을 하다 말고 그의 차에 타면서 『어디로 가냐?』 물었지만 『보안 관계로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도착한 곳은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 뒤에 있는 한식으로 지은 연회장이었는데 그 자리에는 이후락, 김성곤씨 등 많은 각료와 요인들이 수십명 와 있었다. 그들은 양주를 주전자에다 따라 그 속에 얼음을 넣어 마시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나에게 『이런 때는 여자가 있어야 하는 데 우리 집사람이 극구 반대란 말이야』라고 했다. 술에 취한 그들은 흥에 넘쳐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나와 춤을 추기를 원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춤추는데 박 대통령보다 내 키가 조금 크다보니 어깨동무를 하는데 내 팔이 대통령 팔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내가 팔을 내려 그의 팔 밑에 넣으려는 순간 그는 나를 보며 『노는데 무슨 상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짝사랑」을 불렀다. 대통령의 노래는 박자는 맞지 않았으나 구성지게 들렸다. 10.26 며칠 전에 나는 술자리에 불려간 적이 있다. 국무총리 공관이었다. 그 자리에는 박준규 공화당 의장서리, 최규하 국무총리,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태원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이 앉아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갔을 땐 박 대통령은 이미 취해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아 자기 옆에 앉히면서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인생은 영원할 수 없는 거요. 후배 양성을 하시오』 그는 이 말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했다. 당시는 부마사태로 해서 정국이 매우 어수선할 때였다. 나는 그때 「이 양반이 후계자를 키우지 못했구나」라고 직감했다. 모두들 노래를 불렀고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노래를 불렀다. 「어차피 갈 바엔 오지나 말 것을」하는 노래였다. 대통령은 이 노래를 부르고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취한 상태에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통령이라구 머저리같은 것을 앉혀 놓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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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10시 20분쯤.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 무대위 연설대에서 박정희대통령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8.15 경축사를 3분의 1쯤 읽고 있을 무렵이었다. 반짝반짝하는 섬광과 함께『탕,탕,탕 』하고 터지는 4~5발의 총성은 8.15 기념식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약 2천여명의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단상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야아! 총소리다, 누구야! 대통령이 맞았냐? 저기 저놈이다, 저놈 잡아라』하는 비명과 외마디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극장 안을 뒤흔들었다. 연설대 오른쪽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김정렴 비서실장, 조상호 의전비서관 등이 일제히 의자에서 내려앉아 무대 바닥에 엎드렸고 연설대 왼쪽에 앉아 있던 육영수여사는 의자 손잡이에 고개를 떨구었다. 『육여사가 맞았다, 저거 봐, 육여사가 의자에서 넘어지네, 빨리 육여사를, 빨리요.. 』불과 20~30초 간의 일이었다. 박종규 경호실장만이 뒤늦게 연설대 앞으로 뛰어나와 권총을 빼들었으나 이때는 이미 범인이 경호원들에 의해 덮쳐진 뒤였다. 이 순간까지도 박대통령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은 채 관중석을 쏘아보면서 오히려 큰소리로 호령을 했다. 『왜들 이리 소란하시오? 조용히들 해요』하면서, 그제야 단상의 좌우를 살펴보았다. 박대통령은 육여사가 의자에 넘어져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경축사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경축사가 계속되는 동안 단하에서는 범인 문세광을 경호원들이 밖으로 끌어 내고 단상에서는 의자에 비스듬히 쓰러진 육여사를 업어 황급히 뒷문으로 나가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박대통령은 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태연자약하게 기념사를 읽어 내려간 것이다. 첫번째의 섬광과 총성이 터졌을 때 목표 인물이 대통령 자신이라는 것은 즉각 감지했을 것이다. 후일 그 장면을 VTR을 통해 본 외국기자들은「그레이트 리더」라고 평가했다. 언론사 사장 자격으로 식에 참석했던 나는 식이 끝나기 전에 극장을 빠져 나와 MBC사장실로 달려 돌아왔다. 보도국 간부들을 불러 사건 현장을 어느 정도 잡았는지 확인해 본 결과 MBC, KBS, TBC 등 국내 방송 3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간 신문들까지도 범인의 저격장면과 육여사 의 쓰러진 장면, 체포장면을 잡은 카메라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8.15 경축식이 끝나면 박대통령은 지하철 1호선 개통식 테이프를 끊게 되어 있어 모든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국립극장을 나와 청량리역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나서 김영수 보도국장 이 내 방에 뛰어들어오면서 외쳤다. 『사장님, 미국의 CBS 카메라맨이 오늘 사건 현장에 끝 까지 남아서 사건 전모를 잡아 본사로 보냈다고 합니다. CBS는 우리 MBC와 뉴스협정이 되어 있으니 뉴욕 본사에 사장 명의로 필름을 요구해서 인공위성으로 받아 전국에 때리면 어떻습 니까』 나는 CBS 뉴욕 본사에 긴급 타전을 시켜 필름 송부를 약속한 텔렉스를 받은 뒤 청와 대 비서실의 전석영 총무비서를 통해 박대통령의 긴급면담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청와대 본관으로 가서 박대통령을 만났다. 『각하, 오늘 국립극장 사건의 전모를 찍은 미국 CBS 필 름을 MBC에서 받기로 했습니다. 위성으로 필름을 보내오면 밤 6시부터 전국에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가해 주십시오.』 『 뭐, 외국 방송기자가 찍었어, 그러면 우리 집사람이 쓰러 지는 장면이 나오겠는데, 흉하지 않을까』 박대통령은 남산이 보이는 창 밖을 물끄러미 내 다 보면서 몇 번이고 한숨을 내뿜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한 마디 거들었다. 『각하, 이항 사장이 말씀드린 대로 텔레비전에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북한의 흉계를 국민에게 보여 줘야 됩니다.』 『사모님이 쓰러지는 장면은 편집해서 삭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박대통령에게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좋아, 내보내. 기왕 방송을 할 바에는 우리 집사람이 쓰러지는 모습도 자르지 말고 다 보여줘. 모습은 흉하겠지만 국민들이 알 것은 알아야지』 나는 방송사에 돌아오자마자 CBS가 보내준 끔찍한 필름을 앞뒤에 멘트나 CM을 빼버린 채 전 국에 내보내고 또 재방송을 몇번이고 시켰다. 아마도 이 필름은 76회에 걸쳐 MBC를 통해 방 송된 것으로 기억된다. 끔찍하고 비통한 일이었지만 내가 겪은 박대통령의 모습 중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박대통령의 의젓하고 대담한 모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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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 조금 늦었습니다.』 약속보다 늦게 이학식당에 나타난 김동하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내게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체구, 까맣고 비쩍 마른 무표정한 얼굴, 빛나는 눈, 그리고 스프링코트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모습이었다. 난 바로 그가 오늘 날 보자고 한 박정희 소장이란 걸 직감했다. 서로의 소개가 끝난 후 난 왜 그가 날 보자고 했는지 궁금해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음식이 들어오고 술잔이 오고 가도 도대체 그는 말이 없었다. 『아니, 보자고 했으면 얘길 해야지. 참 괴짜 같은 친구구먼 』 난 속으로 나름대로 그를 평하며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러니 나 또한 얘기할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술만 마셨다. 그것도 작은 술잔이 아닌 맥주잔에 정종을 3분의 1쯤 채워 숨도 쉬지 않고 꼴깍꼴깍 들이키고 있었다. 호주가가 따로 없었다. 자연히 난 김동하와 신변잡기를 주고받을 수밖에. 그런데 약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박소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박사, 내 박사한테 물어볼 말이 있소. 대답해주시오』 그리곤 내가 채 그의 말을 들었는가 싶은 찰나 무섭게 말을 이었다. 『나 쿠데타 할 거요. 그런데 그러면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 같소? 』 순간 난 쇠망치로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저 양반이 지금 제 정신인가 싶었다. 초면에 하는 얘기치곤 너무 허황됐기 때문이었다. 조금 지나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난 자세히 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 진짜 쿠데타를 하려면 이렇게 함부로 발설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 에 그를 살펴보았지만 분명 농담은 아니었다. 어느새 빈틈없는 그의 눈에서는 불이 나오고 있었다. 난 평소의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건 내가 보기엔 이렇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국민을 위한 쿠데타이고 반미 쿠데타가 아니며 국민이 지지하는 쿠데타라면 별 문제 될 것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박장군은 가장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만일 박장군이 쿠데타를 하고 싶다면 진짜 애국하는 충정에서 결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옳다고 판단되면 밀고 나가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으면 그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왜 미국을 계산에 넣습니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애국하는 마음입니다.』 어느 새 내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박소장은 이윽고 알겠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저 혈기 왕성한 군인의 가슴에서 으레 발아할 수 있는 사례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았다. 때문에 난 노파심에서 이학식당을 나오기 전 그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도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엔 장면 내각은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입니다. 그리고 지난해(1960년) 8월 출범했으니 이제 겨우 8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가 박장군이라면 이유야 어떻든 1년 정도는 기회를 주겠습니다. 그래야 쿠데타의 명분도 서지요. 하나 지금 당장이라면 아마 후세의 역사가들이 정권욕 때문에 쿠데타를 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그날의 만남은 박정희 소장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인연이 후에 내 인생을 바꿀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못 된 1961년 5월 16일, 난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곤 혹시 하는 마음에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불과 한 달 전 내게 쿠데타 할 거라 외치던 바로 박소장의 사진이 내 눈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었고, 3월 들어 정치활동 정화법에 불만을 표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박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때 장충동에서 다시 내 게 연락이 왔다. 『이박사, 그간 어떻게 지냈소. 내 부탁드릴 일 있어 불렀소. 알다시피 내가 청와대로 들어가야 하는데 난 당분간 장충동에 있을 생각이오. 하나 어차피 청와대를 지켜주시오』 이번에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더구나 외국 나가는 일도 아니잖 은가. 『알겠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외국 나가는 일 아니니 부족하지만 혹 도움이 된다면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난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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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느라 오늘 약속시간 지키지 못했네요~ㅎㅎㅎ 감사합니다
그때부터 박대통령에게 좌익들이 음식이나 아니면 음식점 점주를 표섭해서 수은같은 이물질을 넣었거나 생명에 해가되는 물질을 주기적으로 주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또한 엘지로 부터 갖은 이불질과 옥상에 물탱크를 3개 설치해서 직수에 오만 이물질을 다 넣어서 보내고 있어서 약수물을 떠서 먹고 있습니다.
큰 화분에 고추를 심어서 작년에 먹었는데 몸이 너무나 거려워서 피가 엄청 많이나게 계속 글었으며 나는 설마 화분에 까지 횟고지를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나 어느날 화분을 유심히 보니 하이타이를 풀어서 스트롱으로 불면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고추화분안이 반짝반짝 빛나서 보니 수은 같았습니다. 때문에 고추를 그 후로는 먹지 않았으며 그랬더니 몸에 가려움증이 없어졌습니다.
여름 내내 가려움증으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이고 몸이 말이아니었지요 어떤 카페에서 비누를 쓰면 몸이 가럽지 않다고 해서 여름 내내 비누를 쓰지 않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