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작권 및 모든 권한은 Shiroyuki(시로유키/qlaud000) 에게 있습니다.
* 작가수정 안됩니다.
Tattoo - 의문투성이
그가 사라진지 일주일 하고도 하루. 별일 없이 지내고 있다.
그냥 무작정 1년 동안 날 도와주겠다는 헛소리를 의기양양하게 해놓고는 딱히 연락 가능한 어떤 것도 남겨 놓지 않았다.
역시 미친 것이 분명하다.
그런 당치도 않는 헛소리를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짓거리고
처음 우리 집에 왔던 그 모습 그대로 나간 놈이 무슨 제대로 된 사고를 하겠는가?
막말로 내가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어떻게 알겠다는 건가?
이런 저런 잡생각에 잡혀 있을 때 하이 톤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내 귀에 파고들었다.
“언니. 저번 주에 견적 뽑은 거 어디 뒀어요?”
“어. 잠시만 내가 갖고 있어”
주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 서류철이 꽂혀있는 책꽂이를 뒤졌다.
견적을 뽑아서 일단 현장 관리 대리인 주영이에게 확인을 해야 하는데 저번 주도 아마 상무와 데이트가 있었던 모양인지
견적확인도 하지 않고 나가 버렸었다.
아침부터 찾는걸 보니 부장이 또 난리를 피우나보다.
견적 뽑은걸 보라고 책상에 올려뒀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무 방으로 뛰어갔으니 아마 확실하지 싶다.
이번 견적이 계약과 직결되는 견적이라 그냥 두기도 애매해서 다시 갖고 와서 챙겼더니, 저럴 줄 알았다.
견적을 받아들고 부장에게 건네며 뭐라고 하는 걸 보니 아마 오늘 계약인가보다.
다만 본인이 담당이면서 확인도 하지 않는다는 게 좀 걸리기는 했지만.
일단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실수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장과 한동안 이야기 하던 주영은 내 쪽을 한번 보더니 자기네들 끼리 킥킥거리며 웃어댄다.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만했다.
‘뭐야. 기분 나쁘게’
사무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알고 있다.
남성편력. 웃기지도 않는다.
내가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아주 심한 남성편력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유가 붙어있었다.
예쁘지도 않은 게 주제도 모르고 엘리트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간략하게 줄이면 저런 문장 하나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난 단지 연애 운이 없을 뿐 그런 건 없다.
단지 사람 사귀는데 있어서 조금 더디고 힘든데,
그걸 이해하거나 잡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런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만나지 않았던 내가 주제도 모르는 남성편력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진짜 남성편력이라 정말 어디하나 빠지지 않는 그런 남자가 내 애인이라는 자리에 한번이라도 앉았던 적이 있다면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그러면 그들이야 어떤 오해를 하든 결과적으로
그들 눈에는 남성편력으로 인한 엄청난 훈남을 내가 골라 사겼다고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내 눈이 그렇게 높지도 그렇다고 내주위에 그렇게 잘난 인간이 있지도 않았다.
“으휴..”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불쌍한 내 인생. 어쩌다가 저런 오해까지 사게 된 건지. 지금 저 오해들을 일일이 해명하러 다니기도 귀찮고,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는 내성격도 있겠지만,
이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넘기고 있었다.
지옥 같은 월요일 업무도 슬슬 끝이 나고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주영은 오늘도 상무와 데이트가 있는지 퇴근시간이 1시간가량 남아있음에도 벌써 화장을 고치고,
아니 아예 다시 한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지 싶을 정도로 하고 있었다.
뭐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일단 나보다 어리고 예쁘고 잘빠진 그녀가 우리 회사 최고의 훈남을 손에 넣은 것은 부러운 일이었다.
어떻게 꼬였는지 상무는 주영에게 푹 빠진 눈치였다.
점심시간까지 에스코트를 해다니는 판이니 역시 젊어서 그런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책상위에 널브러져 있던 파일들과 서류들을 정리하고 내일 해야 할 일들을 대충 파악한 후 퇴근 준비를 했다.
집에 갈 길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일단은 머리를 정리하고 립글이라도 발라야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갔다.
“누가 나 좀 집에 데려다 주면 좋겠다.”
대충 부스스했던 외관을 정리하고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봤는데 저절로 푸념이 흘러 나왔다.
“언니, 내가 데려다 줄까?”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주영이 제일 안쪽 화장실에서 나오며 내게 말하는 게 보였다.
얼굴에는 거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그녀의 행동은 도도함 마저 묻어났다.
“너도 차 없지 않아?”
“아.. 윤혁씨랑 오늘 교외로 드라이브 가기로 했거든. 가는 길에 내려줄게.”
“윤혁?.. 상무님 말이야?”
“응”
거의 퇴근을 같이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근데 이름까지 불러 가며 다닐 정도로 친해진 건가? 아니면 벌써 사귀기라도 하는 건가?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한 것 같았다.
또 한동안 주영이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겠구나.
이번엔 엄청난 대어를 물었으니 좀 오래 갈려나?
벌써부터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차를 대절해서 태워다 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같이 콩나물시루에 끼여 갈만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일단 태워준다고 하니 그러마. 라고 대답해 버렸다. 오늘은 정말 피곤한 하루였나 보다.
퇴근시간에 맞춰 가방을 정리해 회사 앞으로 나왔다.
로비를 지나 현관 앞에 있는 경비원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주영과 같이 회사 건물 앞에서 상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명희!”
누군가가 갑자기 뒤에서 확하고 날 끌어안았다.
내 이름을 부르며 날 끌어안았던 사람의 목소리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상당히 기분 좋은 베이스 톤의 목소리.
돌아보기 전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던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지만 적당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날 끌어안은 팔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걸로 봐서 키도 상당히 큰 것 같은데
내가 아는 남자 녀석들 중에는 이렇게 키가 큰 녀석이 없었다.
“누.......... 헉..!”
누구냐고 물어 보려던 말이 턱하니 막혔다.
고개를 돌려 뒤에서 끌어안은 사람의 얼굴은 일주일전 내 방 침대 시트와 이불 그리고 수건을 쓰레기통행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
놀라 뒷걸음질 치며 슬슬 물러났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그리고 왜 내 뒤에서 날 끌어안고 있는 건지. 도대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 나에 대한 정보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뭐야.. 귀신이라도 봤어?”
“미.. 미... 치.....ㄴ...헙”
내 혀가 미친놈이라는 단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일보직전에 그 녀석에 의해 저지당했다.
근데 입만 막으면 되지 왜 또 끌어안고 지랄이야 지랄이!
내 손목을 잡아끌어 그대로 안다니! 그리고 잠시 후 내 귀에 그녀석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입 좀 다물지? 도와주려는 거니까”
“....... 무슨...?”
그 말을 끝으로 날 놔주며 자신의 옆에 세웠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정말 미친 거 아냐?
“저기... 명희 언니 누구...?”
“.. 응? .. 아.. 음.. 그러니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난 이 미친놈에게서 아는 정보라는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겼으며 몸이 좋고 성격이 더럽다는 걸 알고 있을 뿐
그 외의 정보는 모른다. 이 재수 없는 놈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막막했다.
적당히 대충 말을 돌려 아는 동생이라고 둘러 댈 생각에 입을 다시 열었다.
“강명희 애인”
“네?”
저 미친놈이 드디어 사고를 치는구나.
저랑 나랑 언제 사겼다고 애인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지.
도와주러 왔다는 놈이 왜 날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인지.
“아.. 아니야.. 주영아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아는 동생이야 동생.. 오해하지 마.”
“어머, 언니주변에 이런 멋진 사람이 있어? 의외네? 안녕하세요...박 주영이라고 해요”
아아 그냥 애인이라고 하는 거 가만 놔둘걸 그랬나?
주영의 레이더에 아무래도 이 미친놈이 걸린 것 같았다.
뭐 일단 겉보기에는 완벽하다 못해 눈이 부시기까지 하니 그녀의 레이더에 안 걸린다면 말이 안 된다.
이놈이 좀 미친 건 사실이지만 저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보다 더 무서운 주영에게 뺏기는 것 같은 기분이라니.
아는 동생이라고 말한 내 입에 저주를 내리며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강명희 넌 아는 남. 자. 동. 생이랑 니 침. 대에서 자냐?”
댕~! 머리통이 보신각종인 줄 알았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내가 언제 자기랑 잤다고 턱이 빠져라 입을 떠억하니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뭐 이런 놈이 다있냐를 시작으로 온갖 쌍욕을 머릿속에서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놀라고 어의가 없어서 내 머릿속의 형용할 수 없는 욕들은 내 입에서 튀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 어.. 언니.. ?”
주영이 황당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에서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기도 참 애매하고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저 미친놈이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넘어갈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 이.. 녀석이.. 장난치는 걸 좋아해”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주영과 살짝 거리를 두고 있었던 터라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여 무슨 짓이냐고 따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기서 키스라도 해야 입을 다물 건가?] 였다.
확실히 미친놈 맞다. 도저히 저건 정상인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별로 좋지도 않은 내 이미지에 금을 내고 싶지는 않았음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그가 애인이라고 회사에 소문이 나면 나의 대한 욕은 늘어나도 능. 력. 도. 없. 는 이라는 수식어는 붙지 않을 테니.
“권렴이라고 합니다.”
“네. 명희 언니 주변에 이런 멋진 동생이 있는 줄 몰랐네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주영은 그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저 여우가 또 작업을 거는 구나. 그나저나 저 녀석 이름이 권렴? 이름 참 독특하네.
둘의 대화에 그다지 끼고 싶지 않아서 그냥 멍하니 보고 있었다.
왠지 주영에게 먹잇감을 던져준 기분이라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로 하여 그가 나에서 주영으로 갈아타준다면 나야 손해 보는 것 없을 것이다. 난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은 딱 질색이니까.
“사귀고 있으니 오해 없으시길”
“네..? 아.. 네..”
그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나와 사귀고 있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을 듣고 주영이 당황해 하는 것이 왠지 고소했다.
이 남자 저 남자 잘난 남자로 갈아타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주영의 콧대가 꺽인건가?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데 상무의 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k7? 아마 이번에 새로 나온 신차인걸로 알고 있다.
뭐 디자인이 괜찮아서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오늘 저걸 타고 집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가
옆에 서 있는 그를 보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오늘은 빼도 박도 못하고 콩나물시루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그가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뭘 도와주러왔다는 건지 모르겠다.
“주영아..”
다정하게 주영을 부른 상무는 차에서 내려 조수석 차문을 열며 주영을 태우려 했다.
남자들은 그런 거 있나?
좀 더 있어 보이고 싶은 거 권렴 앞에 서니 상무도 그런 티를 내고 싶었는지 새로 산 k7을 자랑스럽다는 듯 으쓱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알기로 그렇게 비싼 차는 아닌 걸로 아는데 말이다.
뭐 이유야 어떻든 한번 타보고 싶었던 차였는데 라는 아쉬운 생각에 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명희씨는 옆에 분하고 같이 가시는 건가요?”
“아.. 네 그렇게 된 거 같아요. 아하하하”
“따로 차 안 갖고 왔으면 같이 가요..”
상무는 역시나 다정했다.
그리고 그 말에 조수석에 이미 앉아 있던 주영이 승자의 미소를 띠며 [그래 언니 같이 가~]란다.
뭐 일단 자존심은 상하지만 집에 편하게 갈수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 같이 타고 가자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저기.. 같...”
“죄송합니다. 제가 차를 갖고 와서요. 가자 명희야”
응? 차를 갖고 와? 어디?? 라는 생각에 주의를 훑어봤다.
그리고 눈에 띈 포르쉐 911.
내가 아무리 차에 아는 것이 없다고는 해도 포르쉐가 얼마나 비싼지 그리고 포르쉐가 어떤 마크를 달고 있는지 정도는 안다.
저건 확실한 포르쉐 였다..
“어... 버...버....”
“뭘 그렇게 봐 집에 안 갈 거야?”
“저거.. 그쪽..꺼?”
“저거라니? GT2?”
"응?“
“저 은색 차?”
내가 못 알아듣자 그는 은색차라고 상당히 유치하게 표현해주었다
감사하기도 하지 그리고 이 주변에 주차 된 차가 저거 말고 또 있냐?
이 미친놈아? 저게 니 차라고? 장난치는 거지?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사기를 치냐? 라며
온갖 욕을 속으로만 궁시렁 거리던 내 귀에 그의 답변이 들려왔다.
“어 내 찬데?”
허억.
그가 자신의 차라고 말하는 순간 상무와 주영의 얼굴이 싹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들에게 한방 먹인 것 같은 기분에 난 왠지 모를 승리감에 도취되어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마자 싱글거렸다.
일단 지금은 내 애인이라는 잘생기고 멋진(솔직히 인정할건 인정해야했다.) 남자가 내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왔고
그가 나를 위해 몰고 온 차는 포르쉐 911 GT2인가 뭔가 하는 엄청 비싸 보이는 차라니,
드라마 속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난 신기한 듯 그의 차로 가서 차체를 만져 보았다.
광택 나는 은색의 멋진 스포츠카. 우리나라에서 포르쉐를 모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구나.
아니 그보다 내가 죽기 전에 포르쉐를 보기도 힘든데 타보기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참이나 차의 주변을 돌며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모습에 또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 차에 탈수 있게 해주었다.
나를 차에 태우고 차의 앞쪽을 돌아 운전석으로 앉는 그를 보며 성격만 아니면 진짜 완벽한 킹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런 싸가지 없는 성격도 좋다는 얼빠진 여자애들이 있는 걸로 알지만
내 나이쯤 되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그저 착하고 착실한 인간이 최고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일단 멋지고 매너 좋아 보이는 남자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으쓱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GT2라는 그의 차가 미끄러지듯 회사 앞을 빠져나왔다.
상무와 주영을 뒤로 하고 빠져나올 때 그 기분이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나를 무시했던 주영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
차안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렀다.
처음 듣는 피아노 반주곡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느껴지는 편안함과 선선한 것 같은 차내의 온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 때문에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돌아가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차로 꽉 들어차 막힐 서울 시내 한복판을 지나는 것보다는 집에 빨리 도착할 것 같았다.
그는 차를 운전해 서울 중심가를 빠져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운전만 했다.
슬쩍 그의 운전하는 모습을 훔쳐 본 것 같다. 어찌되었던 눈이 가는 얼굴이다.
저렇게 운전하는 모습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이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 잘생긴 거 아니까 그만 힐끔거리지?”
저 자뻑에 싸가지 없는 성격만 아니면 정말 완벽할 텐데.
내 눈썹 사이에 또 내천자가 깊이 새겨지는 게 느껴져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밖의 풍경은 나랑은 관계없는 듯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내 이름이랑 회사 어떻게 알았어요?”
“그게 중요한가?”
“내 신상정보니까 당연하죠.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든 내 허락이 없었으니 불법인건 알죠?”
“.. 크큭...”
그는 내 말이 뭐가 웃긴지 그저 큭큭거리며 웃기만 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무래도 듣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노려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고 이내 포기해 버렸다.
“혹시 그것 말고 나에 대해 더 아는 거 있어요?”
“이름 강명희, 나이 27, 사는 곳 **동, 부모님은 부산, 남동생은 1년 전 사고로 죽었고, 키는 165cm 체중 58kg,
더블사이즈 침대에서 뒹굴며 자는 걸 좋아하고, 박주영이라는 여자를 싫어하고, 구윤혁이라는 상무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
뭐가 더 필요한가?”
내가 그를 본이래 가장 많은 말을 했지만 가장 많은 말을 했다는 것에 놀랐다기보단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정보들에 대해서 놀랐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줄줄줄 내 뱉은 내 정보들은 나 혼자만 알고 있던 비밀도 그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언제 알아낸 거지? 심부름센터? 몰래카메라? 도대체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저런 것들을 알아낼 수 있는 거지?
“....... 어.. 어떻게 알아 낸 거죠?”
“글쎄..”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람 누구지? 나에 대해서 왜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왜 내 주위를 맴도는 거지? 이런 저런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내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어쨌든 오늘의 기분 좋은 마무리를 골 싸매고 누워가며 고민거리들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 툭
그가 내 쪽으로 핸드폰을 하나 던졌다.
이게 이름이 뭐더라?
요즘 나오는 핸드폰은 다 그만그만하고 특별하게 다른 디자인이 없다.
특히 터치로 바뀌고 난 뒤부터는 더 그랬는데 그가 나에게 던진 것도 터치 폰이었다.
“전화하면 받아라. 그리고 나한테 연락할 일 있으면 1207로 문자나 전화하면 돼”
“1207? 내 생일.. 아 그게 아니고 그런 번호로 문자나 전화가 연결되는 거예요?”
“의심되면 지금 당장 시험해보던지?”
난 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화면에 1207이라는 숫자를 넣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당연히 될 리가 없다.
단축번호는 100자리 이상 되지 않고, 전화번호를 다 누르지 않는 한 정상적인 통화는 불가능한 번호다.
그런데 내 예상을 산산조각내고 앞 유리가 있는 쪽 공간에 놓은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핸드폰이 열심히 울려대고 있었다.
차안에서 흐르는 피아노곡과 똑같은 곡이 말이다.
“어떻게...”
뭔가를 물으려는 나의 말이 시작 될 쯤 차는 우리 집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단지라고는 이 한동이 전부인 낡은 아파트.
처음 그가 우리 집을 보는 것도 아닌데 왠지 보여 지는 게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차에서 내려 조수석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 건 궁금해 할 필요 없고 올라가지”
“네? 올라가요?”
“집에 안 들어갈 건가?”
그는 그저 차문을 열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뭐 표정은 똥씹은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빨리 내리라거나 끌어내리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내가 내릴 때까지 계속 기다릴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일단 내렸다.
그나저나 데려다 줬으면 갈 것이지 왜 남의 집까지 올라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워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와서 태워주고는 뭔가 대가를 바라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5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오로지 들리는 건 내 숨소리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뿐. 510호. 집 앞에서 그를 돌아봤다. 이제 얼른 가보라는 눈빛으로.
“그렇게 안 봐도 갈 테니 얼른 들어가. 연락하면 바로 받고”
“아 맞다. 제 폰 번호 드릴 테니 이건 갖고 가세요. 요금 낼 능력도 안 되고 일단은 저도 핸드폰 정도는 있으니까”
그에게 핸드폰을 받을 이유는 없다. 내가 왜 이 녀석과 연락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연락을 안 한다고 하면 뭔가 봉변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려고 했었다.
“니 폰 안 돼”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내 폰이 안 될 리가 없다.
오늘 오전 회사에서도 엄마랑 통화했었는데 핸드폰이 안 된다는 헛소리를 믿겠는가?
나는 핸드폰 폴더를 열어 확인했다. 그러나 메인 화면에 뜬 내용은 개통 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황당한 얼굴로 내 핸드폰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기기 변경했으니까 그냥 써. 요금걱정은 말고”
“아..! 그래도 이건 못 받아요! 내가 왜 그쪽한테 이런 걸 받아요?”
“.. 애인 사이잖아?”
“네에?”
그는 큭큭 거리며 돌아서서 가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그를 한참이나 멍하니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있는 통로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간 것 같지도 않았다.
비상구 쪽으로 갔나 싶어 비상구문을 열었지만 비상구에서는 아무런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파트 앞에 있던 그의 차가 주차된 곳을 바라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차도 없었다.
귀신에 홀린 듯 내 손에 들린 그가 준 핸드폰과 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
그때 그가 준 핸드폰이 울렸다.
그의 차안에서 들었던 피아노곡이 역시 내 벨소리로 지정되어 있는 듯 했다.
화면에는 니애인♡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또라이새끼 갈수록 입이 험해지는 것 같다.
“.......... 여보세요?”
[내일 출근할 때 데리러 갈 테니까 일찍 자라]
“굳이 그럴 필요는....”
[1년이야. 잘 자라.]
“.........................”
역시 정신 나간 놈이 분명하다.
의문되는 부분도 한두 개가 아니다. 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놈한테 휘둘린단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같이 나를 통쾌하게 해준다면 내 인생에 그리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1년?! 설마 지가 날 죽이기야 하겠어?”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될 대로 되란 식의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어둑어둑한 동네를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난 나중에서야 알았다.
권렴이라는 이름의 남자. 싸가지는 없지만 꽤나 잘생긴 얼굴에 키가 큰 내 애인을 자처하는 남자.
어떻게 알았는지 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남자. 포르쉐 911 GT2를 몰고 다니고 연락처보다는 핸드폰을 넘기는 남자.
어떻게 보면 스토커 같은 그 남자 덕분에 오늘 하루가 즐거웠던 것 같다.
“1년이라......아참.. 근데 그 남자 나이가 몇이지?”
그때 깨달았다.
이 남자에게서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 남자의 이름이 권렴이라는 것 말고는 그 사람의 나이가 몇인지 어디에 사는지 회사를 다니는지 아니면 학생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뭐야 나에 대해서는 훤히 꿰고 있는 것 같던데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인 걸?”
내일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강명희. 앞으로 잘 부탁해..”
명희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기분 좋은 베이스 목소리가 아파트 통로에 울렸다.
그리고 명희의 집 현관문 앞에는 까만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거리더니 그 자리에 권렴이 나타났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까만 캐주얼 슈트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연기와 함께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다음편은 다음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처음 올리는 소설이지만 즐거운 감상 되시구요..;
제가 그냥 책자로 쓰는 소설이 익숙해서 엔터가 부족한점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되세요^^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엔터 때문에 불편하실것 같아 수정하러 왔는데 기분 좋은 댓글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