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그날 밤은 달이 뜨지 않아 매우 추운 밤이었다.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두 견습기사는 가을답지 않은 쌀쌀한 날씨에
장작불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크실 놈들도 오지 않겠지. "
나머지 한 견습기사가 대꾸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거라는걸 뻔히 알텐데 ? 내가 크실의 바스엘드
라면 이런 날에 공격하겠어. 달도 없겠다... "
손을 앞으로 해 가슴을 덥히던 그 견습기사는 이번엔 등을 돌려 등 쪽
을 불에 쬐었다. 훈훈한 기운이 갑옷 안까지 전해져왔다.
"한심하지 뭐. 이렇게 성 안에 갖혀 있는 이나바뉴 기사단 꼴이라니...
가끔 정찰병이나 띄우는게 고작이니 말이야. "
"하는 수 없지. 지원대가 오기까지는 이렇게 가만히 기다릴 수 밖에.
적은 20만 가까운 숫자이고, 우리는 여기에 와 있는 로젠다로 기사단까
지 포함해도 겨우 7만 아닌가. 게다가, 상대는 단 10만기로 에우로페 나
이트들이 이끄는 로젠다로 최정예 기사단을 부순 기사단이란 말이야. "
"그래, 바로 그거야. 난 그 점을 믿을 수가 없어. 물론 옐리어스 나이
트 보다야 못하겠지만 에우로페 나이트가 그렇게 무력할 수가 있나 ? 한
번의 전투에서 둘씩이나 목숨을 잃다니. "
"쉿. 말 조심해. "
그는 아무도 있을리가 없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에우로페 나이트가 들으면 당장 렉카아드라도 신청하려 할 말이야.
그 분들 입장에서는 동료의 죽음을 본것 아닌가. "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건 그렇고, 일단 로젠다로를 공격한 다음에는 이쪽으로 국경을 넘
지는 않는 모양이군. 사실 걱정 했었는데... 하라데스에 집결을 했다고 들
었는데, 갑자기 쥬렌다스가 함락되어서 깜작 놀랐쟎는가. "
"그래. 깜짝 놀랐었지... 쥬렌다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자
로젠다로에서 원군 요청이 와서 정신 없었지. 용의주도한 놈들이야. 양쪽
을 동시에 공격해서 우리가 로젠다로에 파병할 시간이나 여유를 주지 않
았으니까 말이야. "
로젠다로는 이나바뉴와 크실 양 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중립국이었다.
창조신 아펠르의 첫째 아들인 사타 루스와 결혼한 여신--신화에는 이나바
뉴의 공주였다고 이야기되고 있으나 신화일 뿐이었다--쥬르가 통치하기
시작되었다고 했다. 본래는 양국 사이에서 평형을 이루며 무역을 하는
부유한 국가였지만 1, 2차 천신전쟁이 모두 이나바뉴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현재에는 정책적으로 이나바뉴와 가까와질 수 밖에 없었다. 크실
은 우선 이나바뉴의 쥬렌다스 지방을 공격한 후, 쥬렌다스에 최소한의
주둔군만을 남겨 놓은 채 곧바로 이 로젠다로로 진격했다--아마도 로젠
다로의 에우로페 나이트를 의식한 공격이었을것이다--그리고 이나바뉴가
로젠다로로 빠른 시일내에 지원을 올 수 없도록 이 공격은 최단시간내에
이루어졌다. 마치 양쪽이 동시에 공격을 받은것 처럼. 기사단의 기동력은
병력 자체를 두배, 세배로 늘여준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도 사용되는
기사들 사이의 격언이었다.
로젠다로는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수도 포프슨 전투에서 로
젠다로 기사단은 최정예의 에우로페 나이트를 전원 출전시키면서 크실에
대항했지만 크실은 너무나 강했다. 결국 국왕은 에우로페 나이트 두명이
생명으로 뚫은 혈로로 탈출을 시도했고, 넷째 공주인 세렌과 몇명의 귀
족들이 그들에게 포획된 채 이나바뉴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이 현재
머물고 있는곳은 이나바뉴와, 전에 로젠다로와의 국경이었던 라르그산맥
너머의 다쟌이라는 작은 성이었다.
두 견습기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금씩 날이 밝아져왔다.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벌써 날이 샜군. 교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겠는걸. "
"그래.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야전 침대에라도 눕고 싶군. "
"잠깐, 기다려 봐. "
한명의 견습기사가 방금 말을 꺼내려던 그의 동료를 저지했다. 둘 다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멀리서 말 발굽
소리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 최소한 5만기. "
먼저 입을 연 것은 동료를 저지했던 견습기사였다.
"미네온님께 알려야겠어. 빨리 ! "
예상보다 훨씬 빨랐지만 결국 로젠다로에 주둔하고 있던 크실의 대군
이 다시 움직인것이었다.
다쟌의 성주인 미네온은 이나바뉴 바스크 160의 기사이기도 했다. 그
는 보고를 받자마자 크실은 새벽이 오기 직전의 짙은 어둠을 틈타 공격
을 해 왔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혹, 자신들의 기사단에게 Ebarado{{
) 섬광계 마법. 잠시동안 어둠속에서도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준다.
}}의
스펠로 어둠속을 볼 수 있게 해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이트 미네온이 맨 처음 취한 행동은 로젠다로의 병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병력을 성 위에 집결시키고 애프러더를 장비하게 한 것이었다. 그들의 의도가 그러하다면 어둠이 있는 동안의 야습은 지켜내고 새벽을 기다리는것이 우선이라고 판단된 것이다.
"로젠다로의 병력이 참전을 원하고 있습니다. "
나이트 미네온의 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기사로 꼽히는 기사이자, 미네
온의 첫째 아들인 이나바뉴 바스크 283, 나이트 레다스가 미네온 앞에
섰다. 미네온으로서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로젠다로의 기사들이 비
록 전투에 패해 나라를 떠나 타국에 몸을 맡기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
엔 끊없는 투지와 크실을 향한 증오가 새겨져 있었으리라는것을 짐작했
기 때문이다.
"라즈파샤님이 뵙고싶어 하셨습니다. "
로젠다로 바스크 3,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는 로젠다로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최정예의 에우로페 나이트중에서도 가장 용맹하고 강한 기사
로 알려져 있었다. 로젠다로 바스크 2인 에우로페 기사대장 나이트 퓨네
스가 지난 전투에서 정체불명의 크실의 기사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그는 실질적인 로젠다로 기사단의 대표였다--로젠다로는 전통적으로 기
사단 바스크 1을 국왕이 겸하고 있었다. 로젠다로는 이나바뉴나 크실에
비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종교적 결속력이 더 강한편이었고 국왕의 통치
방법 역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로젠다로의 기사단은 '성기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기사들이었고, 그래서 종교도시이자 로젠다로의
제 2도시인 슈리온의 이름을 따 에우로페 나이트를 '슈리온 성역 수호
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국왕이 기사대장을 겸하는 것 역시 신에대한 충
성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바스크 1은 상징적 의미였으며 실제
로 기사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사는 바스크 2의 기사였다. 기사대장
이 전사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로젠다로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미네온은 눈만을 돌려 창문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새벽이 오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은듯 했다.
"레다스, 적의 병력은 정확히 파악이 되었느냐 ? "
나이트 레다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둠때문에 정확하게 파악은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대략 6, 7만기 정
도로 보입니다. "
"전부 오지는 않았군... 우선 위협만 주겠다는건가. "
미네온의 하얀 턱수염 끝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
레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새벽을 기다려 나아가 싸운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있는것은 아닙니
다. 물론 무턱대고 성을 지키는 것 역시 승산이 있는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
미네온이 그의 아들의 흐려진 말꼬리를 이었다.
"... 이쪽으로 지원군이 오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지. "
레다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
다. 이나바뉴 중앙 기사단에서 파견을 나간 두 갈래의 선봉대는, 각기 하
라데스와 로젠다로로 진격해 갔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었다. 이나바뉴의
입장에서는 로젠다로를 점령한지 단 며칠만에 다시 험준한 라르그 산맥
을 넘어 이나바뉴의 땅을 습격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고, 그 작은 확
률을 고려하여 다쟌을 지원하러 가기보다는 하루빨리 로젠다로와 로젠다
로의 넷째 왕녀를 되찾는것이 더 중요했던것이다. 나이트 미네온은 자신
들의 관점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몰랐지만 어쩐지 크실이 곧장 이쪽으로
진격해 올, 이런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실제로 일
어난 것이다--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일찍.
"미네온님. "
문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를 가진 기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앳된 얼굴에 빨갛고 갸름한 입술, 마치 소녀를 연상시키는 듯한 아름다
운 모습의 젊은 기사였다. 로젠다로 바스크 3, 나이트 라즈파샤였다.
"... 싸우실것 아닙니까. 참전시켜 주십시오. 저희의 병력은 4만기나 됩
니다. "
몸을 의탁하고 있는것은 로젠다로의 기사단이었지만, 사실 다쟌에 주
준해 있던 이나바뉴 기사단은 3만기가 채 되지 않았다. 손님의 군대를
내어 쓰지 않으면 솔직히 이 전투는 힘든 전투였다. 미네온은 고개를 끄
덕였다.
"국왕께서는 안녕하십니까 ? "
국왕은 나라와 왕녀를 잃고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에우로페 나이트의
두명까지 잃은 탈출의 충격으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라
즈파샤는 미네온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
그의 표정은 비장했다. 나이트 미네온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승산이 없
는 공성전 보다는 이 믿을만한 로젠다로 제 1기사와 협력하여 크실에 대
항할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283, 나이트 레다스는 첫번째 적과 일곱번 하야덴을
교환한 후, 그를 쓰러뜨리면서 문득 성문이 열리기 전 차가운 표정의 로
젠다로의 기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 절대 상대하지 말아야 할 적은 오직 한명, 저의 나라의 기사대장의
생명을 빼앗아간 정체불명의 기사입니다. 그는 온 몸을 검은색 갑옷으로
감싸고 있을테니 찾기가 어렵지 않을겁니다. 그를 만난다면... 절대 대적
하지 마십시오. "
결국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공성전을 마치고, 새벽이 오는것과 동시
에 다쟌의 성문이 열렸다. 열린 성문 밖으로는 나이트 레다스가 지휘하
는 이나바뉴 기사단 2만여기와, 나이트 라즈파샤가 이끄는 로젠다로 기
사단 3만여기가 성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나바뉴 기사단은 그렇다
치고라도, 로젠다로 기사단은 두명의 인원이 줄어든 '슈리온 성역 수호
대' 에우로페 나이트들이 기사단의 선두에 일렬로 정렬한 채 적을 향해
돌격하였다. 그들은 결코 몸을 아끼지 않았고, 최강의 기사들이 선두에서
돌격하는 로젠다로 기사단의 파괴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순식간에 전세
는 단 3만여기의 로젠다로 기사단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공격력이군. 아무리 최정예의 4만기라고는 하나, 이렇게
까지 강할 수가 있나. 이런 전력을 갖고서도 로젠다로가 며칠만에 수도
포프슨을 적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인가 ? '
나이트 레다스는 속으로 그들의 전투력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새벽, 다쟌의 이른 아침 밝아온 하늘 빛에 모습을 드러낸 크실의 기사
단은 대략 8만기. 5만기, 아니 로젠다로의 단 3만여기의 기사단이 크실의
기사단을 압도하고 있었다. 다쟌 성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새벽
을 지나고 아침 햇살이 전장을 비추기 시작할때까지 계속되었다.
약간의 피로함을 느낄 즈음, 나이트 레다스는 크실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적을 추격할 것인가--만약 추격을 시작한다면
레다스에겐 대부분의 적을 섬멸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다쟌의
기사단은 소수였고, 추격을 나간 사이 성이 공격을 받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멀리에서 하야덴의
한광을 뿌리고 있는 나이트 라즈파샤를 바라보았다. 멀리에서 그의 시선
을 의식했을리는 없지만, 라즈파샤도 레다스를 바라보았다.
'진격. '
라즈파샤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수도와 왕녀를 빼앗긴 복수를 하겠다
는 건가... 라즈파샤는 거침없이 자신의 기사단에게 추격을 명했고, 레다
스는 약간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기사단에게 역시
추격 명령을 내렸다.
크실의 기사단은 이제 전력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전투를 포기
하고 후퇴하는 크실의 기사단은 빨랐고, 언뜻 보아도 충분히 오랜시간동
안 훈련된 기사단임을 알 수 있었다. 레다스와 라즈파샤의 연합 기사단
은 한나절을 그들의 선두와 적의 후미에서 약간의 교전을 벌였을 뿐, 추
격과 도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라즈파샤님 ! "
기사단이 어느 언덕을 달려 올라갈 즈음, 달리는 말 위에서 레다스가
외쳤다. 이미 다쟌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뒤였다. 혹 이것은 함정이 아닐
까... 그렇지 않아도 20만 규모의 기사단중 단지 8만기만으로 이나바뉴를
공격해 온 것이 석연치 않았는데, 이렇게 성에서 멀어져 버리니 불안해
진 것이다.
"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습니다 ! "
실은 라즈파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등을 돌리고 도망
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적의 군세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투는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 싸운 시간이 짧았고 아군의 규
모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크실에 큰 타격은 주지 못한것이 그에게는 못
내 아쉬웠다. 그러나 라즈파샤는 레다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
다스의 하야덴이 하늘을 향했다.
"정지 ! "
레다스의 명에 따라 이나바뉴의 기사단이 추격을 멈추기 시작했다. 기
사단의 전진이 멈추고 아주 짧은 시간 후, 레다스와 라즈파샤는 아쉬운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적의 기사단을 바라 볼 뿐이었다.
"... 좋은 기회를 놓쳤군. 너무 성급했어. "
라즈파샤가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크실
의 후미를 돌아보며 기사단을 반전 시키려는 순간, 레다스의 비명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라즈파샤님 ! 적의 선두에 ! "
레다스의 외침을 듣고 라즈파샤는 휙 몸을 돌려 적이 멀어져간 방향을
보았다. 적이 올라가기 시작한 언덕 끝에서 한떼의 기사단이 갑자기 모
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시 함정이었다. 적의 증원군이야 ! "
라즈파샤가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나. 이곳까지 우리를 유
인해 내어 증원군과 합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쟌 성을 노릴 생각이었나. 라즈파샤는 등이 오싹했다. 로젠다로 최정예의 에우로페 나이트의
전원은 바로 이곳에 있었고, 국왕이 머물러 있는 다쟌 성은 텅 비어 있
었던 것이다.
"반전 ! 즉시 퇴각하라 ! "
라즈파샤는 자신의 기사단에게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따라 로젠다로의 기사단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
랍게도, 그들과 연합하고 있는 이나바뉴의 기사단은 반전하기는 커녕 함
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문득 돌아본 레다스는 승리에 찬 표정으로 하야
덴 대신 돌격용 리첼반을 꺼내들고 있었다. 레다스의 입에서 천둥같은
호령이 터졌다.
"돌격 ! 적을 섬멸하라 ! "
"...... ? "
라즈파샤가 다시 언덕위를 바라보니 방금 언덕위에 나타난 3만여기의
기사단은 무서운 기세로 크실의 기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크
실의 증원군이 아니라 이나바뉴의 기사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크
실은 양쪽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협공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레다스는 갑작스런 아군의 출현에 적지않게 기쁘면서도 그들이 누구인
지 의아스러웠다. 그의 시선은 적진의 선두에서 하야덴을 휘두르는 기사
에게 꽂혔다. 거기에는 자신의 키와 비슷한 길이의 은빛 하야덴을 휘두
르는 기사가 있었다. 그의 하야덴은 불필요한 동작이 없이 주위의 기사
들의 급소 급소를 차례로 찔러가고 있었다. 그의 하야덴은 시간이 지날
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갈수록 경쾌하고 점점 빨라지는 쾌검의 기사--그의 하야덴을 보지 않
더라고 그 말 위에 앉은기사의 키만으로도 그 기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열의 하야덴 '베락스'의 기사, 옐리어스 나이트 라벨이 적
진 한가운데서 크실의 기사단을 섬멸하고 있었다.
후에 '다쟌 언덕의 전투'라고 불리운 이 전투는 어둠을 틈타 다쟌을 습
격한 크실의 대패로 끝났다. 크실은 의외로 완강한 이나바뉴와 로젠다로
연합 기사단의 반격에 급히 퇴각했고, 아침이 오기 직전 다쟌 언덕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선발인 옐리어스 나
이트 라벨의 기사단과 마주쳐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하고 전멸
에 가까운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처음 다쟌을 공격해 온 8만여기의 기
사단 중 온전하게 로젠다로로 퇴각에 성공한 기사단은 3만기 정도의 규
모 뿐이었다.
라벨은 건장한 체격의 서글서글한 기사가 말에서 뛰어내려 무릎을 꿇
고 예를 취하는 것을 보며 급히 자신도 말에서 뛰어 내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쟌 성주 미네온의 아들인 레다스라고 합니다. "
라벨도 오른손을 올려 예를 취했다.
"이나바뉴 바스크 149, 나이트 라벨입니다. 옐리어스 나이트입니다. "
그렇게 이야기 하며 라벨은 상대편에게 보이지 않게 약간 양미간을 찌
푸렸다. 레다스의 뒤에 집결한 기사단원들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
고 있는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옐리어스 나이트다... 저 사람이 옐리어스
나이트야... 그들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경외심이라기 보다는 신기한 눈
으로 쳐다보는 그 많은 시선들을 감당해 내기엔 라벨은 너무 어린 나이
였다.
레다스와 몇마디 겸양의 말을 나누던 라벨은 문득 뒤에 서 있다가 천
천히 앞쪽으로 걸어 나오는, 자신의 입술만큼이나 붉은 갑옷 차림의 긴
머리에 창백한 얼굴의 기사를 보았다--강하다--나이트 라벨이 그를 처음
본 순간 느낀 느낌이었다. 강한 기사만이 강한 기사를 알아본다고 했던
가. 그 기사는 오른손을 올리고 허리를 가볍게 굽혀 예를 취했다.
"로젠다로 바스크 3, 나이트 라즈파샤입니다. 에우로페 나이트입니다.
"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라벨은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는 기쁨에 웃어 보였다. 그와 라즈파샤가
몇마디 말을 나누는 중, 문득 레다스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 로젠다로 원정대는 로젠
다로 쪽으로 가는줄 알고 있었는데요. "
라벨은 자신이 지휘한 3만여기의 기사단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로젠다로로 갔었죠. 사실 다쟌이 공격받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요. 원정대 선발 지휘관인 레이피엘님이--다른 사람의 앞이었기 때문에
라벨은 '퀴트린 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이쪽으로 와서 병력 지원을 요
청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쩌면, "
라벨은 잠시 말을 쉬었다.
"이쪽 전투를 의식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원을 요청하려고 3
만여기를 꺼내 주신것이 이상했거든요. "
라즈파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다스가 말을 이었다.
"... 여기에서 이야기는 이쯤 해 두죠. 다쟌 성으로 잠시 가셔서 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출정은 하려고 하더라도 식사 한끼 정도는 하고 가셔
야죠. "
"그래요.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로젠다로는 레이피엘님
과 이바이크님이 탈환하실거란 말이에요. 저도 싸우고 싶거든요. "
레다스는 손을 들어 기사단을 반전시켰다. 라즈파샤는 그 어린 옐리어
스 나이트의 전투력에 감탄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
었다--오늘, 로젠다로를 멸망시킨 바로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없었다.
그래서 전투를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로젠다
로 주둔군에 있는 것일까 ? 왜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을까 ?
로젠다로의 기사 라즈파샤가 이런 생각을 하며 말머리를 다쟌성으로
돌릴 즈음, 그의 생각 속에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크란은 이미 하
라데스성을 폐허로 만들고 로젠다로 원정대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로젠
다로로 진격하고 있었다.
"레이피엘님, "
옐리어스 나이트의 순백색 전투복을 입고 긴 펜플을 바람에 날리며 말
위에 앉아 적진을 주시하고 있던 퀴트린은 나이트 네이서스가 무엇을 이
야기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엷게 미소를 띄우며 나이트 네
이서스를 바라보았다. 50세에 가까운 백전노장, 이나바뉴 바스크 182 나
이트 네이서스는 의미있는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주홍색과 푸른색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공격 명령을 내리면
당장에라도 맞붙을 거리--이나바뉴와 크실의 기사단은 상대방이 바라보
이는 언덕위에 각기 포진하여 있었다--에 정렬해 서 있는 적의 기사단을
향하고 있었다. 퀴트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의 전력은 파악 되었나 ? "
"예. 채 8만이 되지 않는것 같습니다. "
"8만이라... "
퀴트린은 엷게 미소를 띄웠다. 퀴트린, 이바이크, 라벨이 이끄는 이나
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선발 병력은 8만여기. 그 중 라벨이 3만
기를 이끌고 다쟌으로 달려갔으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기사단은 5만
기 뿐이었다.
"8만기의 숫자적 우세를 접어두고 렉카아드를 하려 하다니... "
"지난번 전투 때문이것 같습니다. "
조용한 목소리로 나이트 네이서스가 말했다. 나이트 네이서스는 나이
가 나이인 만큼 직접 선두에서 적의 기사단과 혈전을 벌이기 보다는 많
은 전투 경험으로 지휘관에게 조언을 하는 부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
다. 나이트 레이피엘, 이바이크, 라벨등 최강의 기사들이 지휘하는 로젠
다로 원정대의 전투력은 어디에 비할 바 없었으나 단지 셋 모두가 젊은
기사들이기 때문에 경험이 많지는 않았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나
바뉴 기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는 자신의 부장으로 수십년간 전투를 같
이 했던 나이트 네이서스를 퀴트린이 지휘하는 로젠다로 원정대에 붙여
둔 것이다.
퀴트린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의 눈은 승리를 확신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전투에서 맞붙어 본 크실의 기사단은 그가 생각했
던 것 보다 훨씬 무력했다. 아니, 그들이 무력하다기 보다는 로젠다로 원
정대가 너무 강한것이었다. 이나바뉴의 역사에 옐리어스 나이트 세명이
동시에 참전한 경우는 없었고, 그들의 개인 기사단을 앞세운 원정대의
강력함이란 많은 훈련을 받은 크실의 기사단에서도 상상하기 힘든것이었
다.
"... 강한 기사가 나올것 같은가 ? "
퀴트린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트 네이서
스는 잠시 적진을 바라보았다.
"... 상관 없지 않습니까 ? "
그의 말에 퀴트린은 자신의 오른쪽에 서 있던 나이트 이바이크를 바라
보았다. 그는 불타는 눈으로 크실 적진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자신이 카발리에로의 예를 취했던 로젠다로의 넷
째 왕녀 세렌의 생각으로 가득하리라. 퀴트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적진 한가운데의 주홍빛과 푸른빛의 깃발이 열리며 몸집이
거대한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검은 갑옷은 아니로군. "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혼잣말이 퀴트린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곳
까지 오는 동안 그들은 검은 갑옷의 기사를 만나지 못했다. 퀴트린은 지
금까지 작은 두번의 전투와 큰 한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나이트 카사드렛
의 생명을 앗아간 그 검은 갑옷의 기사의 기사단만이 크실의 핵심이며
최정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디에 있을까. 퀴트린이 생각하는것은 바
로 그것이었다--물론, 퀴트린 역시 그때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이미 로
젠다로를 떠나 하라데스에서 이나바뉴군을 패퇴시켰다는것은 짐작하지
못했다.
퀴트린은 천천히 그의 시선을 나이트 이바이크에게 옮겼다. 순간 기마
격투용 리첼반이 땅에 떨어지며 투명한 금속음을 냈다.
"내가 나가겠어, 나이트 레이피엘. "
이바이크가 그의 하야덴--그의 하야덴은 날이 두껍고 무거웠으며 무척
날카롭고 잘 다듬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하야덴이라기 보다는 페치에
가까울 정도로 장식이 달려있지 않은 것이었다--을 꺼내든 것이다. 퀴트
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바이크가 내 뱉듯 다음 말을 이었다.
"저런 조무라기를 쓰러뜨리는데 드는 시간도 아까워... 그 시간만큼, "
이바이크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세렌 공주님은 더 크실의 손에 잡혀있게 될거란 말이야. "
이바이크는 차분한 목소리로 펜플 안, 목 주위에 감겨 있던 케틀러스
(목에 감는 머플러의 일종. 원래는 기사계급의 악세서리 였지만 현재에는
꽤 많은이들--평민들을 말한다--이 이 케틀러스를 악세서리로 사용한다)
를 풀어 내어 하야덴의 손잡이에 둘러 매듭을 지었다. 그의 케틀러스는
모양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하얀 천에 금색 실을 정성들여 넣은 것으로
비교적 그의 하얀색 옐리어스 나이트의 예복과 전투복에 어울리는 편이
었다. 바느질이라고는 해 본적이 있을리가 없는 로젠다로의 세렌 공주가
자신의 카발리에로를 위해 며칠을 만든 케틀러스였다.
렉카아드나 전투 참가하기 위해 출정할때, 많은 경우 카발리에로를 떠
나 보내는 귀부인들은 자신이 몸에 지니거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의미있
는 물건을 주곤 했다. 손수건일 수도 있었고, 작은 노리개나 반지등일 경
우도 있었다. (나이트 라벨이 출정할때 레젠이 모자에 달린 깃털 장식을
떼어 그녀의 카발리에로에게 건네준 것도 그런 의미였다.) 지금, 세렌 공
주가 크실군에 잡혀있는 지금, 그녀의 생사 조차 확인할 수 없지만 이바
이크는 그녀에게 그런 물건을 받는 대신 예전에 그녀에게 받았던 케틀러
스를 하야덴에 감아 쥔 것이다. 이바이크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모양 정말 볼품 없죠 ? "
"...... "
"왕영 재단사를 시켰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하다못해 하녀에게라도
시켰더라면 훨씬 나았을텐데... "
"...... "
"... 그래도, 하나쯤은 제가 만들고 싶었단 말이에요. 기사님이 쓰실것
을. "
"...... "
"역시 기분이 언짢으신거죠 ? 마음에 안 드세요 ? "
"...... "
이바이크는 뚫어지게 그 케틀러스를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 아무런 말
을 하지 못했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가슴이 너
무나 벅차 올라 할 말을 찾지 못했던것 뿐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반 만큼만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면. 나이트 이바이크는 자신에게
말재주가 없는것만을 안타까와 하고 있었다.
퀴트린이 천천히 하야덴을 꺼내 들었다.
"렉카아드가 끝나는 즉시 돌격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일시에 쓸어버리
게 말입니다. "
이바이크는 대답대신 퀴트린을 보고 씨익 웃었다. 마음을 알아줘서 고
맙다는 표정이었다.
"간다 ! "
기합소리와 함께 이바이크는 말을 몰아 쏜살같이 크실의 기사를 향해
달려나갔다. 나이트 이바이크는 젊은 옐리어스 나이트였다. 퀴트린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어보이는 아주 큰 키에, 우람한 체구. 검게 그을린 강
한 피부와 부리부리하게 큰 눈의 호인형의 얼굴과 떡 벌어진 어깨를 가
지고 있었다--기사의 전투복이나 갑옷을 입지 않는다면 나뭇꾼이나 대장
장이정도로 보였을 것이다--그의 하야덴은 힘. 라벨의 하야덴은 불필요
한 동작 없이 깔끔하고 재빠르게 공격하는 쾌검이었고, 퀴트린의 하야덴
은 화려한 기술로 유명했다. 이바이크의 하야덴은 힘의 하야덴이었다. 그
는 퀴트린과 마찬가지로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고 두 손으로 무겁고 두꺼
운 하야덴을 쥐었다.
퀴트린의 생각대로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공중에서 하야덴이 교차
되자마자 상대의 하야덴은 부러지며 그의 손을 떠나갔고, 이바이크의 하
야덴은 단 한번의 공격으로 크실의 기사의 하야덴과 페가드, 갑옷과 몸
을 단숨에 두조각으로 만들었다. 퀴트린은 힘차게 손을 들어올렸다.
"공격 ! "
퀴트린의 하야덴이 전방을 향함과 동시에, 함성소리와 함께 5만기의
이나바뉴 기사단이 크실군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렉카아드에서 패
한 크실의 기사단은 그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나바뉴 기사단은--
특히, 렉카아드에 참전한 이바이크가 지휘하는 기사단은--반대로 사기가
오를대로 올랐다. 퀴트린은 최전방에는 서지 않고 기사단의 중간쯤,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달렸다. 전체적인 전세를 보기 위함이었다. 선두에는 이
바이크가 서 있었다. 그의 하야덴이 한번 휘둘러 질때마다 한명씩의 크
실의 기사가 사라져갔다. 나이트 이바이크의 하야덴을 받은 기사들은 베
어지기 전에 하늘로 날아오르듯 주위로 나뒹굴었다. 그의 하야덴은 절망
적일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숫적으로는 적지만 기세로 이나바뉴 기사단
은 크실의 기사단을 압도했고, 렉카아드에 패한 크실의 기사단은 전의를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로젠다로 탈환에 나선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가 첫번째로
탈환한 성은 로젠다로에서 이나바뉴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위치적으
로 매우 중요한--이나바뉴에서 로젠다로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
르그 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그 산맥을 넘자 마자 도착하여 대열을 재
정비 할 수 있는 성이 바로 이 성이었다--펫파 성이었다. 이나바뉴의 기
사단이 성 앞 언덕에 나타나자 크실은 성문을 열고 평지에서 그들을 맞
아 싸우려 했다. 하지만 렉카아드에서 패한 크실군은 무참히 부숴져내렸
고, 하루와 반을 성 안에서 버텨낸 다음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퀴트린은
잠시 성에서 라벨을 기다리기로 했다. 어짜피 선봉이라는 것은 로젠다로
전체를 탈환하는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퀴트린은 조금 욕심을 내
고 싶었고, 그런 욕심을 내기엔 5만여기의 기사단은 너무 적은 숫자였다.
라벨의 3만기와, 그가 이끌고 올 증원군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그렇게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결국 그 판단은 놀
라운 기동력을 가진 크실 기사대장,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크란이 이나
바뉴 기사단의 로젠다로 탈환전이 끝나기 전에 로젠다로로 돌아올 수 있
는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실 바스크 47, 나이트 쿼어즈는 그 얇은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
다.
"역시 문제는 그녀석이로군. "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머리 바로 아래에서 묶어 내린 호리호리
한 체격. 날카로운 눈매와 긴 코, 진홍색의 얇은 입술을 가진 그의 얼굴
은 침착함을 넘어서서 냉혹함까지 주위에 뿌려내고 있었다. 그의 표정
에는 냉소가 어려 있었다. 뒤를 돌아 창문 밖,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을
감싸고 있는 라엘만 협곡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쿼어즈는 중얼거리듯
이 말했다.
"... 이미 알고 있었다. 이나바뉴의 기사들중 경계해야할 용사--이 표현
은 오직 크실에서만 쓰는 표현으로, 기사중에서도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기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셋 뿐이다. 기사대장 아켈로르. 그리고
옐리어스 나이트의 하이파나와 이바이크. 정보를 가져온 첩보단 쪽에서
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지만 내 생각엔 그렇다. 문제는 그렇게 세명이
다. "
쿼어즈가 등을 돌려 서 있는 쪽으로는 회색과 녹색, 자주색등 여러가
지 색의 갑옷과 펜플을 걸친 기사들이 마주본 채 서로 몇발자국씩 떨어
져 두줄로 서 있었다. 그 줄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은 기사가 한명 있었
다. 투구를 벗은 채 얼굴엔 고통이 역력한 그 기사는, 본래 예를 취할때
에는 오른 주먹과 오른 무릎을 바닥에 대어야 함에도 왼쪽 주먹을 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른쪽 팔은 잘리워져 나간듯 했다. 쿼어즈는 손에 들
고 있는 술잔을 조용히 탁자위에 내려 놓았다.
"어쨌든 고맙다. 내 생각이 옳다는것을 알게 해 줬으니 말이다. 이젠
미련한 곰을 저 라엘만 협곡 속에 쳐박아 버리는것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전에, "
"나이트 프렌스크, 그대는 하야덴을 들어야 할 오른팔이 잘리워졌다.
펫파성 전투 참패의 책임을 묻지 않더라도 이젠 무엇으로 크실에 그 충
성을 보일것인가 ? "
나이트 프렌스크라 불리운 그 기사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이 없
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린 쿼어즈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 한팔로 위대한 크실의 깃발이라도 붙잡아 흔들어 볼 셈인가 ? 북
이라도 치겠나 ? 아니면 부엌에서 수행하는 하인들의 수발을 들 셈인가
? "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 기사의 명예는 어디에 두고 ?"
차가운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렸다. 쿼어즈가 하야덴을 꺼내 든 것이다.
"... 각오는 되어 있겠지 ? "
방안의 공기는 그 훨씬 전 부터 냉각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차가
와 질 여유가 없었다. 해는 벌써 협곡속으로 가라 앉은지 오래였다. 쿼어
즈가 하야덴을 꺼내들었음에도, 이상하게도 방 안은 살기로 채워지지는
않았다. 쿼어즈가 말을 시작하고나서 처음으로 프렌스크가 입을 열었다.
"... 훨씬 전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기사로서 죽음을 맞이
하는것만은 허락해 주십시오. "
쿼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가 친히 너의 생명을 거두어주마. 일어서라. "
프렌스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였던 모습과는
다르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당당했고, 그의 고개는 뻣뻣하게 서 있었다.
눈은 쿼어즈의 어깨 너머, 창 밖으로 보이는 로젠다로의 하늘을 바라보
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손으로 정복한 아름다운 나라의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 나이트 프렌스크. 그대는 용맹한 크실의 기사였다. "
쿼어즈의 입이 다물어짐과 동시에 그의 하야덴이 방 안에서 은빛 곡선
을 그렸다. 프렌스크의 머리는 잠시 그의 목 위에서 머물더니, 이내 중심
을 잡지 못하고 흔들거리며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나서
야 그의 몸은 무릎부터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Yehmn Precsel Harrd. (화염계 소독마법) "
하얀색 불꽃이 쿼어즈의 하야덴을 손잡이 부분을 덮었다가 위로 화르
륵 타 오르면서 끝 부분에서 사라졌다. 불꽃이 사라지자 그의 하야덴은
다시 전과 같은 한광을 발했다. 앞 뒤로 하야덴을 뒤집어보며 나이트 쿼
어즈가 중얼거렸다.
"나이트 각센, 나이트 이베론, 나이트 바란슈다스, 셋은 여기에 남아라.
지시할것이 있다. 나머지는 프렌스크의 시체를 거두고 각자 위치로 가서
명령을 기다려라. "
쿼어즈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앞에 두줄로 정렬해 있던 크실의 기사
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이트 쿼어즈는 내
려 놓았던 술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 사냥을 시작해야지. 그래... "
기사도나, 바스크에 관한 제도가 태초에서부터 있었던것과 마찬가지로
사형제도 역시 태초에서부터 있었다. 인간들이 신의 지배를 벗어나면서
부터--물론 이 시점은 역사학자들의 관점에서 조명된 것이지만--인간은
죄를 범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법이 만들어졌다. 법--태초
의 법은 문서화 된 그것도 아니었다--에 따른 인간대 인간의 심판에서
죄에 구형되는 최고의 형벌은 사형이었으나, 최고의 처벌은 아니었다. 귀
족이나 기사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스러운 처벌은 계급 강등과 함께하는
사형이었다--귀족이나 기사계급이 죄를 지으면 사형을 집행할때 무릎을
꿇지 않고 선 채로 머리를 잘리운다. 하지만 평민들이나 그들 이하의
계급은 무릎을 꿇은 채 그들의 죄 값을 치렀다. 따라서 무릎을 꿇리운
채 목이 쳐 지는것은 최고의 치욕이었으며, 따라서 포로로 잡은 기사를
사형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그의 명예를 보아 선 채 머리를 잘랐다. 물론,
천민계급은 하야덴이나 페치에 머리를 잘리워 죽는 일 보다는 주인의 채
찍이나 몽둥이에 맞아 죽는 '사형'이 훨씬 많았다--나이트 프렌스크의 죽
음은 기사로서 죽은 죽음이었다. 아마도 그는 죽어서도 원통하지는 않았
으리라고 나이트 쿼어즈는 생각했다.
밤 이었다.
별들이 수 놓아진 밤 하늘의 새카만 적막이 마치 그가 사랑한 소녀의
머릿결 같다고 나이트 이바이크는 생각했다. 그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와
커다랗지만 날카로운 기사의 눈. 억센 팔과 날렵한 옐리어스 나이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몸집. 그 호탕함과 쾌활함으로 이름 난
기사 이바이크의 모습은 전에 없이 침울해 보였다.
'세렌... '
나지막히 그는 로젠다로 넷째 왕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녀는 이
바이크보다 다섯살 아래였다. 이바이크가 그녀를 처음 만난것은 3년전인
아펠르력 640년 봄, 그가 스물 다섯살일때의 일이었다.
'퓨론사즈를 떠나온 후, 오늘까지 내 하야덴 아래 사라져 간 목숨은 마
흔 셋. 이제 또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아야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오.
'
슈캉-- 하는 파찰음이 들렸다. 이바이크가 하야덴을 뽑아 든 것이다.
'이 하야덴이 서른 조각으로 갈리워지고 온 몸이 피와 먼지로 뒤덮여
도, 그런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찾아 갈 것이오. 지금은 당신의 생사도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순간엔 당신의 차가운 시신이라도 만나러 갈 것이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날은 크실의 마지막 기사까지 내 하야덴 아래
쓰러진 날이 될 것이오. '
나이트 이바이크는 자신의 하야덴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그 날도 그랬
다. 자신의 입이 떨어지도록 무던히도 바라면서 그는 뽑아 낸 하야덴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하야덴의 한쪽 면에는 놀라서 그렇지 않
아도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떠진 세렌 공주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세렌 공주님, "
그가 그날 아침, 꺼낸 첫마디의 말은 그것이었다.
"... 그래요. 맞습니다. 만난지 며칠 되지 못했지요. 실례인줄 압니다. "
그 커다란 몸집에 입혀진 옐리어스 나이트의 순백색 예복이 우습게 보
였던 걸까. 청순한 그녀의 얼굴에는 다음순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어색한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다시 이나바뉴로 떠난다면 저는 평
생 후회할것만 같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이바이크의 목소리는 떨리다 못해 쉰 듯했다. 수만여기의 기사단을 지
휘하던 통쾌한 바스엘드의 목소리는 어디로 간걸까. 이바이크는 그 다음
말을 하기전에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
돌로 만든 층계 바닥이 부서지듯 흔들렸다. 바닥에 꽂아 놓은 그의 하
야덴이 부르르 떨린 것이다. 이바이크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카발리에로가 되고 싶습니다. "
그 순간 길었던 그 적막과 고요를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
었다. 그 긴 기다림의 끝은 세렌 공주의 울먹임으로 끝이 났었다.
"저도... 오늘 기사님을 떠나 보내면 어떡하나 하고... 그리워지면 어떻
게 하나 하고... "
엄청난 죄를 지을 뻔 했구나 ! 그 다음 순간 이바이크는 깨달았다. 이
말은 그녀 역시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는 말이라는것을. 용기를 내지 못
하고 그냥 그렇게 떠나 갔으면 고귀한 세렌 공주의 눈물을 떨구는 상상
도 할 수 없는 죄를 지었으리라는 것을.
"누구냐 ! "
나이트 이바이크의 회상은 자신의 뒤쪽에서 바스락거림이 인 것을 마
지막으로 끝이 났다. 발걸음 소리로 보아 기사나 견습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것이 그에
게는 무척이나 쑥스러웠다. 급히 닦은 눈물 자욱이지만 밤이 깊었으니
또렷이 보이지는 않겠지. 이바이크는 발걸음 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자신
의 등 뒤쪽에서는 짧은 두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중 한명이 갑자
기 바닥에 엎드렸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별 구경을 나왔다가 그만... "
기사를 따라온 수행원 일행이겠군. 이바이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약간
멋적게 하야덴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서 있던 여자
의 소매를 잡아 끌어 같이 엎드리게 했다.
"용,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
나이트 이바이크는 아직 화가 난 듯 하지만 방금 전 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시간에 밖에 나다니는 것은 금지 되어 있었다는것을 모르느냐. "
호탕한 모습의 평소의 그 라면 당연히 용서를 해 줬을 일이다. 아니,
앉아서 더 구경을 하고, 하지만 일찍 들어가라고 한마디 해 준다음 오히
려 자리를 비켜 주었을 그였다. 지금 이바이크는 화가 난것이 아니라
조금 쑥스러운 것이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
그 둘은 두려움에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이바이크가 약간 난감해 하고
있는 순간, 저쪽에서 하얀 그림자가 다가왔다. 친숙한 느낌의 향이 코 끝
에 느껴졌다. 슈렐린 차 향기. 전장의 밤 한가운데에서 맡을 수 있는 가
장 사치스러운 향기였다.
"나이트 레이피엘 ? "
"무슨 일이십니까 ?
이바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는 웬일이지 ? "
하야덴 하나만으로 무장한 채 퀴트린이 다가오고 있었다. 걸어오다 적
당한 거리에서 멈춰 선 그는 가볍게 오른 손을 올려 예를 취했다.
"생각할 것이 있어서 주위를 돌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 "
"아, 아니... "
퀴트린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두명의 여자를 보고나서 다시 이바이크
를 바라보았다.
"이 두명 모두 제가 데리고 온 몸종입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 "
이바이크는 헛기침을 했다.
"일어나라. "
어색하게 한마디를 내뱉고 나서 이바이크는 막사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밤에 돌아다니려 하길래 주의를 주려고 했을 뿐...
자네를 수행하는 종들이라면 자네가 잘 간수하게. "
퀴트린은 멀어져 가는 이바이크의 뒷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세렌
공주님의 생각을 하고 계셨군... 그가 앉았던 자리에 묻어 있던 짙은 그
리움이 퀴트린에게는 느껴졌다.
"일어나라. 오늘 있었던 일은 신경쓰지 말고... 참, "
퀴트린은 자리를 떠나려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 슈렐린 차는 네가 타도록 해. 맛이 없더군. "
퀴트린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걷던 방향을 향했다. 내일
이면 라벨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겠지...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은
이제 겨우 말을 달려 5일 거리에 있었다.
라엘만 협곡.
산등성이에 등을 대고 반원형으로 만들어진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
은, 뒷쪽에서 공격받을 위험이 없다는 요새적 장점과 더불어 그 자신을
감싸고 있는 라엘만 협곡으로 인해 중립국의 수도다운 안전성을 자랑하
고 있었다.
그 라엘만 협곡을 바라보며 마주한 포프슨 평원을 앞에 두고 퀴트린은
조용히 옅은 아침 안개속의 포프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벨이 입을 열
었다.
"... 어렵군요.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는게 좋겠어. 무작정 공격은 유리하지 않아. 네가 데리고
온 증원군에 로젠다로의 에우로페 나이트가 있었다고 했지 ? "
"네. 그렇지 않아도 퀴트린형을 만나뵙고 싶다고 계속 얘기해 왔어요.
"
퀴트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쪽은 라즈파샤의 증원군을 포함해서 11만. 아직 파악되지 않은
적은 15만정도... 거기에 적은 라엘만 협곡이라는 천연의 요새를 페가드
로 가지고 있다. "
라벨은 퀴트린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다시 안개속을 바라보았다. 안개
는 무척 짙게 깔려 있었다.
"여섯명이 밤에 정찰을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돌아오지
못할것 같군요. "
"그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것보다는... "
말을 마치자 갑자기 퀴트린의 표정이 굳었다. 라벨은 급히 퀴트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기사 ? "
퀴트린의 입에서 낮은 신음같은 소리가 나고 나서야 라벨은 미세하게
땅의 진동을 따라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기사.
하지만 단신이었다. 그 말발굽 소리는 포프슨 평원 건너 이나바뉴의 국
경에서부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
라벨이 왼손으로 옐리어스 나이트 전투복의 긴 펜플을 어깨 뒤로 젖히
자 오른손으로 가볍게 쥔 정열의 하야덴 '베락스'가 문득 드러났다. 퀴트
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보겠다. 넌 이바이크님을 불러줘. "
퀴트린은 말을 마치자 옆에 서 있던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라벨은 베
락스를 든 오른손을 약간 올리며 예를 취하고는 즉시 자신의 말에 올라
타 이바이크의 막사가 있는 기사단 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퀴트린은 급히 말을 달려 다가오는 말을 향해 말을 달렸다. 무언가 불
안한 느낌이 들었다. 기사로서의 육감. 불길한 소식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 말을 달렸을때, 퀴트린은 말 위에서 쓰러진 채 말을
몰고 있는 기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흙 먼지와 피, 땀으로 범벅이
된 갑주위에 얹혀진 희미한 백색의 전투복.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의 몸
자체보다도 더 튼튼히 말에 고정되어 있는 황금색의 애프러더, 신궁 아
카르드가 보였다. 퀴트린이 존경해 마지않던 옐리어스 나이트의 2인자,
나이트 하이파나가 그 말 위에서 숨이 끊어질듯 한 상태로 자신의 군영
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그 말뿐이었나 ? "
나이트 이바이크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
퀴트린의 목소리 역시 무거웠다. 그 옆에 서 있던 라벨은 거의 울먹이
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
이바이크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 이를 깨물었다.
막사 침대위에 누워있는 하이파나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다. 펜플은
이미 뜯겨져 나가 한쪽 어깨에 걸린 부분만 남아 있었고, 피와 흙먼지로
물든 전투복 역시 대부분 찢어져 나가 있었다. 옐리어스 나이트의 갑옷
역시 가슴과 다리, 오른 손의 바샤켄{{
) 보호용구로 팔꿈치 이하 손등까지를 보호한다. 대개 갑옷에 포함된다.
}}만
남
긴
채
모두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부숴져 있었다. 오히려 남은 갑옷의 조각들은 날카롭게 찢어지거나 끊겨 하이파나의 몸을 긁거나 속에 박혀 있었다. 이바이크가 입을 열었다.
"하라데스 파견대와 원정대의 선봉은 완패했다... 적의 주력 6만기는
이곳, 로젠다로쪽으로 향했다... 라는 말만 남겼다는거지, 나이트 레이피
엘.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젠다로 파견대를 따라 온 왕영 의술사는
벌써 침상에 누워있는 하이파나의 상체 갑옷을 열고 그의 살 가죽에 박
힌 갑옷 조각과 벨폰의 앞부분등을 제거해 가기 시작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탈진된 상태이고, 온 몸에
다섯 군데의 골절이 있는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회복에는 많은 시간
이 필요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놀라운
정신력입니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
거기까지 말하다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옐리어스 나이트'를 보통의
기사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국왕 친위대에 대한 불손한 말이었기 때문
이다.
"그렇게 상처 입은 몸으로 6일 낮과 밤을 달려왔는데, 당연히 그렇지
않겠나. "
퀴트린은 짤막하게 말했다.
"... 하지만, 호위하는 기사도 없이 이렇게 단신으로 오실 정도로 기사
단이 전멸했을까요 ? "
라벨이 말했다. 이바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처음에는 몇 기의 기사가 수행했을테지... 하지만 6일 낮과 밤
을 달릴정도의 체력을 가진 기사가 이나바뉴에 얼마나 있겠나. "
"... 자신이 탄 말에 체력 회복 마법을 계속 시법하면서 말이야. "
퀴트린이 말하자 라벨은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나
바뉴 최고의 기사들, 옐리어스 나이트 세명중에서도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말을 타지 않고 6일 낮과 밤을 걷거나 뛰는것은 가능
했을지 몰라도 말이다.
본래 회복 마법은 쉽지 않은 마법이다. 하지만 하이파나는 하야덴이나
리첼반을 들고 직접 싸우기 보다는 애프러더를 사용하는 기사이기 때문
에 비교적 옐리어스 나이트 중에서는 완전한 기사에 덜 가까왔다. 그의
마법은 이나바뉴 기사단 전체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하이파나가
말에서 내리는 순간 그의 애마--하이파나의 말 역시 보통의 말은 아니었
다--가 절명한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는 하이파나의 마법력
도 또한 바닥이 났던것일것이다.
"어쨌든, "
이바이크가 입을 열었다.
"확실한 정보를 얻은 셈이군. 적의 증원군도 6일정도 안으로 이곳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야. "
"... 이 평원에서 적을 대비할 6일의 시간을 하이파나님이 벌어주신 셈
이네요. "
이바이크의 계산은 이러했다. 하이파나는 하라데스성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잠시 중앙 평원으로 몸을 피한 후 거기에서 이쪽 로젠다로로 달려왔
다고 했다. 크실군의 주력 6만은 아마도 며칠정도의 짧은 휴식을 취하고
이쪽으로 진군을 시작했을것이다. 하이파나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이
곳으로 달려왔고, 그들은 휴식을 취하며 올테니 6일, 짧아도 5일정도의
시간이 그들과 만날때까지 남아 있을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
6일간, 평원에서 이나바뉴 로젠다로 원정대의 11만으로 6만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퀴트린은 약간 미소를 띄우며 이바이크를 바라보았다.
"...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 "
이바이크와 라벨이 퀴트린을 바라보았다. 퀴트린은 말을 이었다.
"6일 안으로 포프슨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말로 말입니다. "
그의 말에 이바이크가 동의했다.
"좋아, 그 6일동안 어떻게 저 마법의 페가드--은유적으로 로젠다로의
포프슨을 지칭한 말이다--를 부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고. "
"그렇다면 우선, " 퀴트린이 말했다. "어떻게 저 포프슨이 점령당했는
지부터 아는것이 순서일것 같습니다. "
막사 안에 있던 모든 기사들의 시선은 그때까지 가만히 한 구석에 서
있던 창백한 얼굴에 얇고 빨간 입술을 가진 기사에게로 쏠렸다. 로젠다
로 바스크 3,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였다.
아침의 짧은 일전이 끝난 후 크실군이 만든 협곡을 건널 다리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끝이 없었고, 너무 성급하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그들은 다리를 완성시키고 나서 막사
를 걷을 준비를 하고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야습일것이다--포프슨 성
망루에서 크실군을 응시하고 있던 로젠다로 바스크 2, 기사대장 나이트
퓨네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
옆에 있던 나이트 라즈파샤가 눈은 다리 건너편의 크실 진영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저렇게 대담할수가 있습니까 ? 바로 눈 앞에서 협곡을 건널 교각을
만들다니요. "
퓨네스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저렇게 교각이 완성될때까지 우리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은것에 대
해서는 그들이 의아해 하지 않을까 ? 결국 마찬가지이네. "
"그럼, 원래의 계획대로 오늘 밤, 야습을 시작하겠습니다. "
"좋아, 에우로페 나이트의 실력을 보여주게. "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들은 겨우 10만 남짓일 뿐입니다. "
라즈파샤는 예를 취하고 몸을 돌려 성 망루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나이트 퓨네스는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승리는 확
실했다.
크실군은 잘 훈련되어 있는것 같았지만, 복장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몇번의 전투를 거치고 이리로 달려온것 같았다--연락
은 없었지만 아마도 펫파등 몇개의 성은 점령당했을 것이다--그리고 나
서 조금의 휴식도 갖지 않고 또다시 교각을 건설한 것이다. 그들이 협곡
으로 둘러싸인 포프슨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게 그 교각을 건
너오는 수 밖에 없다. 에우로페 나이트들을 앞세워 교각을 건너기만 하
면 그들의 진영이 나온다. 평야에서 그들을 맞아 싸운다면 지친 그들은
쉽게 이길 수 있을것이다--이것이 로젠다로 군의 작전이었다.
성문이 열리고, 다섯명의 에우로페 나이트들이 이끄는 12만의 기사단
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성 안의 최소 전력만을 남겨 놓고 로젠다로
군의 총공세가 시작된것이다. 나이트 라즈파샤와 나이트 벨리드가 선두
에 선--바스엘드가 기사단의 맨 선두에 서는것은 로젠다로 기사단의 오
랜 전통이었다--로젠다로군은 순식간에 다리쪽으로 접근해갔다. 야습은
성공적이었다.
다리위의 크실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세명을 벤 라즈파샤는 약간 이상
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만든 교량이 무용지물이 되어가는데도 이상하
게도 그들의 저항은 필사적이기는 커녕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
의 체력 손실이 큰 탓일까. 로젠다로군은 별 손실 없이 다리를 건너 크
실의 막사 진영에 도착했다.
"조금... 느낌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 함정이 아닐까요 ? "
옆에서 말을 몰던 나이트 벨리드--그 역시 에우로페 나이트였다--가
하야덴으로 다시 한명의 적을 쓰러뜨리며 라즈파샤에게 물었다. 함정 ?
라즈파샤도 그 말을 듣는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야습이었기 때문에
시야가 어두워 처음엔 알지 못했던 것이지만, 생각했던것 보다 적의 숫
자가 너무 적다는 생각을 라즈파샤 역시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함성소리가 사방에서 일제히 들리기 시작했다─아차, 포위된 것일까─
라즈파샤는 급히 말을 멈추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벨리드가 그를 쳐다보
았다. 순간 라즈파샤는 눈을 찌푸렸다. 벨리드의 등 뒤에서 무언가 검은
물체가 쏜살같이 벨리드를 향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나이트 벨리드, 뒤다 ! "
벨리드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온 몸을 검은색 갑옷으로 덮고 있는
기사가 자신을 향해 보통 크기의 한배 반 정도되는 긴 하야덴을 겨눈 채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저녀석이 크실군의 바스엘드다--그의 몸에서 분
출되는 중압감이 벨리드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저할 시간이 없이
벨리드는 하야덴을 돌려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향했다.
한번 하야덴이 교차했다. 벨리드는 하야덴끼리의 충돌 후 깜짝 놀라
말을 움직여 두세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충격으로 손목부터 팔꿈치, 어깨
까지 저려왔다. 굉장한 힘이었다. 나이트 벨리드가 물러서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다시 하야덴을 찔러 왔다. 왼손에 든 페가
드만으로는 막을 수는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 벨리드는 페가드를 손에
든 채 팔꿈치를 굽혀 바샤켄을 페가드의 뒤에 밀착시켰다. 우선 일격은
피하고 볼 셈이었다.
검은 갑옷의 기사의 두번째 공격이 벨리드를 엄습했다. 엄청난 충격이
엄청난 속도로 벨리드의 페가드로 파고 들어왔다. 나이트 벨리드는 굽힌
왼쪽 팔을 가슴 앞쪽으로 당기며 충격을 완화하려 했지만 그정도 기술로
완화될 정도의 힘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부숴진 페가드와 바샤켄--바샤켄은 안쪽에 벨리드의 왼쪽 팔뚝을 담은
채--이 공중으로 날았다.
하지만 벨리드는 팔꿈치 바로 밑에서 팔이 잘리워져 나간 통증도 느끼
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 순간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덴은 공중에서
반원을 그리며 무서운 속도로 벨리드의 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함정... 이정도의 함정에 빠지다니. '
벨리드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로젠다로 기사단이
자랑하는 에우로페 나이트중 한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하지만 벨리드는
죽는 순간에도 알지 못했다. 함정은 이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반전 ! "
아직 자신이 가장 아끼던 기사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라즈파샤는 갑자
기 닥친 적의 포위 공세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는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에우로페 나이트들은 후미에서 전체를 엄호하라 ! "
그는 자신과 에우로페 나이트들과 더불어 기사단의 후미에서 후퇴하는
기사단을 보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것 처럼 신속한 후
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은 단지 5만도 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포위
를 당했기 때문이겠지.
"라즈파샤님 ! "
어디선가 라즈파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너온 교각이 파괴되었습니다 ! "
"뭐라고 ! "
사소한 실수가 아니구나... 라즈파샤는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완전히
계획된 작전에 빠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라즈파샤는 다급
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 뒤는 협곡--절벽과 다름 없는--이었고, 적은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
었다. 왼쪽을 맡고 있던 기사단이 무너져 내렸다.
'설마 벨리드가 쓰러졌을까 ? '
바스엘드에게 문제가 생긴 기사단은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지금 로젠다로의 왼쪽 진영이 그런 모습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든, 숫적으
로는 우세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퇴로는 ? 라즈파샤는 눈 앞의 기사를 쓰러뜨리고 문득 다시 뒤를 돌아
보았다.
'교량이 무너졌다... 그렇다면 성으로 돌아갈 뒤쪽의 퇴로는 없... '
뒤를 돌아본 라즈파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불타오
르는 교량 뒤로 보이는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 성 안에서 불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이 점령당했다 ? '
본래 크실군은 그 절반이 다리가 놓인 협곡의 안쪽에 잠복해 있었다가
로젠다로 군이 교량을 건너자 그 다리를 파괴하고 협곡을 기어올라 직접
성으로 향한 것이다. 포프슨에는 최소의 전력만이 남아이었다.
'대부분의 전력을 다리를 건너게 한 다음 그 다리를 파괴해 고립시키
고, 그 시간을 벌어 미리 건너왔던 기사단으로 성을 공격했단 말인가. '
라즈파샤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포프슨이 점령되
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보시다시피 포프슨 평야에서 포프슨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군데에
있습니다. 크실의 진공소식을 듣고 저희 손으로 파괴한 다리--크실이 만
든 다리는 바로 저희가 먼저 파괴했던 그 다리가 있었던 위치에 있습니
다--와, 협곡이 가장 좁은 서쪽에 있는 또 하나의 다리입니다. 그 다리는
대군이 지나갈 수는 없고 대개 길을 잘 아는 행상들이나 상인들이 이용
하는 길 입니다. 그 길은 숲속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워낙 상황이 급박
했기 때문에 크실군이 알아 채리지 못했으리라 급히 예상하고, 국왕님과
왕족들, 귀족들은 기사대장님--로젠다로 나이트 바스크 2, 나이트 퓨네스
을 가리키는 말이다--과 나머지 에우로페 나이트들의 호위하에 탈출을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
퀴트린은 기사대장 나이트 퓨네스는 국왕을 호위하다 전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누가 그를 쓰러뜨렸는지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
다.
"아시다시피, 그 검은 갑옷의 기사였습니다. 그놈은 악마에 가깝습니
다. "
나이트 라즈파샤의 얇고 새빨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침상
에 누워있던 하이파나가 움찔했다. 그의 입에서 짙은 신음소리가 흘러나
왔다.
"... 그 녀석이... 쥬를... "
"쥬님을 ? "
나이트 라벨과 퀴트린이 깜짝 놀라 하이파나 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다시 하이파나는 정신을 잃었다. 혹시 나이트 쥬가 당했다는 말인가 ?
라벨의 눈 앞에 하이파나의 긁힌 상처와 항상 성실하고 호쾌한 선배기사
옐리어스 나이트 쥬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계속하십시오. "
나이트 네이서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문득 라즈파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그 탈주로까지 예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리
쪽 퇴로를 끊긴 제 기사단의 포위망이 조금 느슨해지는듯 하더니 서쪽
숲에서 함성소리가 들렸습니다. 결과는... 퓨네스님이 생명으로 퇴로를 지
키는 틈을 타 국왕님을 호위한 에우로페 나이트들과 3만여기의 기사단만
이 살아남아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
네이서스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퀴트린을 쳐다보았다. 퀴트린은 시
선은 라즈파샤를 응시하고, 표정도 바뀌지 않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트 네이서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
"... 예. "
퀴트린이 상대해야 하는것은 공포의 대상인 '검은 갑옷의 기사'만이 아
니었다. 다리를 만들어 적을 끌어들이고 그 퇴로를 차단한 후, 미리 준비
해 두었던 기사단으로 상대의 기사단이 빠진 성을 공격하고 그 퇴로까지
막아 놓다니... 이런 치밀한 계획을 세운 지략가 역시 퀴트린이 당장 상
대해야 할 적이었다. 네이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라데스에서 우리의 파견대를 격파한 기사단은 바로 그 검은 갑옷의
기사로 생각할 수 밖에 없을것 같군요. "
말 그대로였다. 쥬렌다스에서 나이트 카사드렛의 목을 벤 기사가 이끄
는 기사단의 기동성은 퀴트린 역시 익히 들은 바였다. 이번에는 이바이
크가 말했다.
"지금 포프슨에는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없겠지만 그 미지의 '전략가'
는 있을법 해. 우선 그 둘이 합쳐지기 전에 하나를 먼저 쓰러쓰리는것이
유리하겠군. "
퀴트린도 동의했다.
"있을 법 한것이 아니라 아마도 있겠지요. 그는 지금 벌써 우리를 공
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어쨌든, 방법을 모아봐야겠어요.
전쟁을 시작한 것은 크실쪽이었다. 2차 천신전쟁 이후, 또 오랜 기간의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내며 이나바뉴는 전쟁에 대해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에 반해 크실은 철저한 준비 후 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일
것이다. 적이 우리를 아는것에 비해 우리는 적에 대해 아는것이 너무 없
다는것이 큰 문제라고 라벨은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는 아직 이나바뉴의
카사드렛과 로젠다로의 퓨네스등 이름 난 기사들을 쓰러뜨린 '검은 갑옷
의 기사'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회의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몇가지 의견이 오고 가긴 했지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그런 묘안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이나바뉴의
기사들이 미지의 '전략가'를 의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아아젠, 아아젠 ! "
이제는 이스케의 호들갑스러움에 익숙해진 아아젠은 밝지는 않지만 어
색하지 않을정도의 웃음으로, 만난지 오래지 않았지만 오래된것 같은 편
안한 친구를 맞아주었다. 그녀는 식기를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슈렐린 차야. "
이스케는 주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짤막하게 요점만 말했다. 급하긴 한
모양이구나... 이스케의 입에서 사설 없이 요점부터 튀어나오다니. 아아젠
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이스케는 입을 다물지 않았
다.
"아아젠, 요즘 너 자주 웃는것 같다. 예전에는 웃는 표정 한번 보려면
며칠씩 기다려야 했는데... 좋은 일 있니 ? "
"좋은 일은 무슨... "
하긴, 음유시인으로 이나바뉴 대륙을 떠돌때 보다는 마음이 따뜻해졌
다는것은 사실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평민들의 발에 채이고, 식사때마
다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먹어야 했던 생활에 비하면 여유가 생길 수 밖
에 없었다. 물론, 가끔 자신의 진짜 신분--지금 그녀는 평민 행세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이 생각날때면 가슴이 서늘해질 때도 있었다. 이스케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 견습기사라도 한명 만나는거 아니니 ? "
아아젠은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말이야. 그럴리가 있니. "
"아냐, 너 정도면 얼굴 예쁘고, 목소리도 예쁘고. 예법에 익숙하지 않
은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그런건 아주 높은 분들에게가 아니라면 오히려
귀엽게 보일 수도 있단말이야. "
아아젠은 그저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아아젠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슈렐린 차라고 하지 않았니 ? "
이스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그녀가 여기에 온 까닭
이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 참, 내 정신좀 봐. 슈렐린 차야. 그것도 이번에는 두 잔. "
"두 잔 ?
가끔 새럿가의 집에서 일할때엔 섀럿경과 귀부인이 두 잔을 원할때가
있기는 했지만 퀴트린은 항상 차를 혼자 마셨기 때문에 두 잔을 달라고
하는것은 처음이었다. 물 양과 슈렐린 차 잎 양을 조절할때 애를 먹겠는
걸... 게다가 끓이는 시간도. 아아젠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향이 좋게 타 져야 할텐데... '
아아젠의 머릿속에 그녀가 오랫동안 사모해 왔던--그 감정은 아직 입
밖으로 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그 기사가 지나가듯 던진 말이 떠올랐
다. 별 빛이 하늘 가득한 아름다운 밤 이었다.
"... 슈렐린 차는 네가 타도록 해. 맛이 없더군. "
아아젠의 얼굴에 가볍게 홍조가 인 것은 이스케도 보지 못했다. 아아
젠은 슈렐린 차를 타기 위해 천천히 찬장의 그릇을 꺼내기 시작했다.
"로젠다로는, "
퀴트린이 입을 열었다.
"어떤 나라입니까 ? "
그의 말에 라즈파샤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나라였지요. "
나라였지요... 과거형으로 말하는 라즈파샤의 말에는 설움과 나라를 앗
아간 크실에 대한 적의가 담겨져 있었다. 끝까지 싸우겠구나, 이 기사는.
퀴트린은 문득 라즈파샤는 생명이 꺼져갈 순간까지 로젠다로를 위해 싸
울 기사라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퀴트린은 약간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
다.
"로젠다로는 자유로운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
라즈파샤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자유롭다는건 약간 어색한 표현인것 같군요. 자유는 이나바뉴를 상징
하는 말이 아닐까요 ? 로젠다로는 이나바뉴와 크실, 양 대국 사이에 끼
인 자그마한 나라라 그다지 입지가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
저녁 식사후의 긴 회의가 계속됐지만, 역시 결정된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회의가 제자리를 맴돌고 나아갈 방향이 보이지 않자, 혼수상태에 빠
진 하이파나--그들이 하이파나의 옆에서 회의를 계속했던것은 하이파나
에 대한 경의때문이었다--를 대신하여 의장격을 맡고 있던 퀴트린이 잠
시 휴식을 제안했다. 잠시의 휴식 후 다시 본 막사로 모이기로 한 것이
다. 그 사이 퀴트린은 라즈파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슈렐린차를 대접하
려고 자신의 막사로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라즈파샤가 말했다.
"이렇게 말씀 드려도 되는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로젠다로에는
필요 이상으로 경직된 예법과 의식같은것은 이나바뉴에 비해 적은 편이
라고는 할 수 있지요.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요. 제가 말씀드린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
2차 천신 전쟁이 끝난 후, 루지아 9세의 정책은 계급간의 경제 격차를
감소시키는데 집중되었다. 그 결과로 경제적으로 나라는 안정이 되었지
만, 계급간의 정신적인 지위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로젠다로나 크실에 비해 이나바뉴에 특히 더 계급의 차이가 크고 그
고랑이 메워질 수 없을만큼 깊이 파여진것도, 타국인들이 보았을때에는
필요 없을정도로 많고 복잡한 격식과 예법, 예절과 의식등이 존재하는것
도 사실 이 때문이었다. 루지아 9세의 정책은 정책으로서는 성공했지만
그 후에 나타날 부작용 역시 품에 안고 성공했던 것이다.
나이트 라즈파샤가 말을 이었다.
"... 이나바뉴의 예법과 의식이 잘못되어 있거나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
닙니다. 물론 멋지게 보이고 그만큼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습니다. 단지 복잡하고 치장이 많아서 가끔은 불편할때가 있을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퀴트린은 어깨짓으로 그의 말에 동의함을 표시했다.
"맞는 말이지요... 옐리어스 나이트들 조차 가끔은 불편하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
옐리어스 나이트는 이나바뉴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격식과 예절을 중
요시하는 집단이고 그 예법을 지키는것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기사들이었
다.
"누가 오는군요. "
라즈파샤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막사 문쪽을 바라보았다. 퀴트
린도 알고 있었다. 매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하지만 허약한 몸짓으로
이쪽으로 걷는 발 소리가 느껴졌었다.
"슈렐린 차를 가지고 오는 하녀인 모양입니다. "
라즈파샤는 빙그레 웃었다.
"역시 명차는 오래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군요. "
"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한것 같군요. "
라즈파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막사 문 밖에서
가볍게 찻잔과 그릇을 담은 쟁반이 달그락 거리며 놓여지는 소리가 들린
다음 기어 들어가는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입니다. "
"들어와라. "
잠시후 문의 역할을 하고 있던 막사 장막이 조심스럽게 걷히고 슈렐린
차가 담긴 쟁반을 든 하녀가 고개를 숙인 채 걸어 들어왔다. 라즈파샤는
약간 알싸한 슈렐린 차의 향기가 방 안에 가득 퍼진다고 생각했다.
"멋진 향 이군요. 마시기도 전에 가슴 속이 따뜻해 지는것 같습니다. "
슈렐린은 이나바뉴의 북쪽 휴우젠산 기슭에서만 자라는 야생 나무의
잎사귀로 만든 차였다. 이나바뉴의 궁중에서만 맛볼 수 있었을 뿐, 아마
도 태어나서부터 로젠다로를 떠난 적이 없는 라즈파샤로서는 처음 맡아
보는 슈렐린 차 향이었을 것이다.
퀴트린이 웃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자 하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찻잔을 들고 잠시 향기를 음미하던 라즈파샤는 문득 이렇
게 말했다.
"아름다운 하녀로군요. "
"예 ? "
"아, 그녀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
라즈파샤는 자신이 한 말을 반복했다.
"아름답다고요... "
이나바뉴의 계층 체계와 같은 사회구조를 로젠다로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급 차이라는 것은 이나바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아서--이것
역시 루지아 9세의 정책 덕분이었다--로젠다로의 기사나 귀족들은 어렵
지 않게 평민들과 이야기를 했고, 호탕한 성격을 가진 기사라면 별 거리
낌 없이 자신이 거느린 견습기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병사들과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이나바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이나바뉴에
서 살고 있었기에 퀴트린에게 라즈파샤의 말은 어색하게 들렸던 것이다.
'아름답다는 표현을 그녀에게도 쓸 수 있는 걸까. '
라즈파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퀴트린은 슈렐린 차 를 입으로 가져갔다.
'... 내가 로젠다로의 기사였다면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을 했을까. '
퀴트린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고 있었다.
곧 이어서 회의를 계속해야 할 시간이었다.
순백색의 슈샤헨으로 덮인 침대는 본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다. 전란이
포프슨 성을 휩쓸고 지나가긴 했지만 성 자체, 특히 자신의 방만은 그
전과 다름이 없었다. 주인까지도 그 전과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로젠다로의 넷째 왕녀--였던-- 세렌은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 역시
하얀색 슈샤헨과 금색 무늬로 장식된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밝고 순진한 미소, 밝고 맑은 웃음이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얼마 되
지 않는 기간동안 훌쩍 커버린 느낌이었다. 하루에 다섯번, 밥을 먹을때
와 일어날때, 잠자리에 들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시종까지도 볼 수 없
었다. 항상 언니들과 사촌들, 귀족들의 중심에서 있던 그녀는 이제 외로
움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누굴까... 로젠다로의 기사들은 아닌것 같은데. '
창 밖을 통해 보이는 라엘만 협곡 건너 포프슨 평원에는 많은 기사--
그녀는 눈 대중으로 병력의 숫자를 파악하는 능력 같은 것은 당연히 가
지고 있지 않았다--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로젠다로의 기사들도 아니었
고, 그렇다고 열마 전 이 포프슨을 점령한 크실의 기사들 역시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나바뉴 인가 ? 이나바뉴의 기사단이 로젠다로를 탈환하러
온 것일까 ? 그녀는 망설이면서 손 끝으로 걷고 있었던 긴 슈샤헨─커튼
과 같은 것이다─을 조금 더 넓게 벌리고 눈을 창 가까이로 가져갔다.
이나바뉴의 기사단... 그렇다면 혹시 이바이크님이 ?
스물 세살, 세렌 공주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나타났다. 그녀는 멀리에
서도 나이트 이바이크의 모습은 쉽게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고 있
었지만, 생각보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수천, 수만명의 기
사단 속에서 자신의 카발리에로를 찾던 세렌 공주는 결국 슈샤헨을 걷은
손을 내렸다.
잠시동안의 침묵을 깬것은 라벨이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 "
방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모두 라즈파샤를 쳐다보았다. 포프슨 성의
구조상 그 방법이 가능하냐는 표정이었다.
"... 가능은 합니다. 성 위에 세워진 초소를 파괴할 수만 있다면. "
크실군은 포프슨을 점령한 후 성 위쪽 산에 초소를 세워 놓았다. 포프
슨은 원래 등을 산에 기대고 반원형으로 지어진 성이었기 때문에 그 초
소가 있으면 성 뒤쪽에서 공격하는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그 초소가 없
다고 하더라도 포프슨은 라엘만 협곡이라는 천연의 장애물로 둘러 싸여
져 있기 때문에 공격이 매우 어려운 성이었다. 크실은 그에 초소를 더해
완벽을 기한 것이다.
의견을 냈었던 나이트 이바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소가 있었군요. "
이바이크가 낸 의견은 무모하긴 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성공할 가능
성이 있는 의견이었다. 크실군이 가장 자신이 있고, 공격 하기가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한 성의 뒷편, 산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어떠한 방법으로
적의 시선을 산 위쪽에서 떼게 할 수만 있다면 작전은 성공할 수도 있었
다... 크실군이 새로 설치한 초소만 없었다면. 혹시 그 미지의 '전략가'가
포프슨을 점령한 후, 포프슨 성 주위의 지형을 살피고나서, 산 뒤쪽에서
의 공격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리 초소를 세워 놓은 것이 아닐
까 하고 라벨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말 용의주도한 녀석이다. '
다시 회의가 계속된 후 아직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퀴트린이 말했
다.
"저도 이바이크님의 의견이 그래도 지금까지의 의견 중에서는 가장 좋
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
퀴트린은 세렌공주가 적의 손에 잡혀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 냉정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이바이크에 대해 새삼 감탄하고 있
었다. 로젠다로의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제가 포프슨을 지킬때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입
니다. 성공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요. "
초소만 없었다면 성공했을텐데... 퀴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네이
서스를 쳐다보았다. 퀴트린, 이바이크, 라벨등 이나바뉴 최정예의 기사들
이 이끄는 로젠다로 원정대에 참모격으로 참가한 기사대장 아켈로르의
부관, 50세에 가까운 백전노장 나이트 네이서스도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는 깊이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에는 시간은 너무 늦었고, 또한 이바이크의 생각
은 포기하기에도 아쉬웠다. 자신만만한 적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
여 경계를 늦추고 있는 배후. 어쩌면 그 곳이 포프슨의 유일한 약점이었
을지도 몰랐다.
"라벨이 단신으로 침투한다고 하더라도 들키지 않고 초소를 습격할 수
는 없을것입니다. "
"그렇겠지... "
퀴트린의 말에 이바이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문제는 초소였다.
라벨이 머리가 아픈듯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작지만 또렷하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 뭔가 하나 잊어버리고 있는것 같군. "
모두들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얼굴 전체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고, 통증을 참느라 온 몸이 떨리고 있었지만 입가에 약간 미
소를 띄우며 나이트 하이파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파나님 ! "
라벨이 가장 먼저 일어서서 하이파나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하이파나
는 제법 여유있는 표정을 지었다.
"오, 라벨. 첫 출전인데도 무척 잘해냈구나. 이젠 제법 늠름해졌어. "
그는 로젠다로의 따가운 햇살에 그을린 라벨의 얼굴이라도 만지려는듯
손을 들었지만 아직 손을 들 정도의 체력이 회복되지는 못한 모양이었
다. 라벨은 당장 눈물이라도 터트릴듯한 표정이었다.
"정신이 드신거죠 ? 어떻게 된거예요 ? 하라데스 파견대는 ? 쥬님은
? 호위기사들은요 ? "
하이파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라벨의 뒤에서 퀴트
린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만둬라 라벨. 그 말을 하셔야 했다면 벌써 하셨을거다. "
하이파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것은 퀴트린이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문득 라벨이 돌아 본 퀴트린의 얼굴은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레이피엘님 ? "
하이파나는 자신의 침상을 둘러싼 기사들을 돌아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트 레이피엘은 내 말을 이해한것 같군. 이바이크 ? "
그제서야 이바이크도 하이파나의 말 뜻을 알아들은것 같았다. 그는 갑
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아카르드 ! "
이나바뉴의 제1궁사, 이나바뉴 바스크 17 나이트 하이파나가 그의 애
프러더에서 쏘아낸 벨폰은 '아카르드'라는 별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애프러더는 결코 빗나가는 일이 없었고, 일단 명중하면 페가드--방패--
나 갑옷 따위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쏘아낸 황금색의 벨폰은 '아
카르드'라 불리우며 이나바뉴의 여러 궁사와 기사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
어 왔다. 초소를 공격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아카르드가 있었던 것이다.
라카이드 헬로판가의 장남 쇼안 헬로판은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는 소
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나바뉴 중앙 기사단 소속 기사로, 이번
전투에 중군에 소속되어 참여하기로 했다. 지금 그는 오후에 있는 기사
단 소집에 나가기 위해 갑옷을 손보고 있는 중이었다. 중앙기사단의 갑
옷은 녹색과 황색이 어우러진 색이었고, 전투복도 마찬가지였다.
"레젠 ? "
레젠 헬로판은 얼마전부터 전에 없이 우울한 표정이었다. 항상 생기발
랄하고 여자답지 않은 장난기로 가득찼던 레젠을 보아온 가까운 사람들
은, 그녀의 변한 모습에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
녀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쇼안은 요즈음 항상 그래왔듯이 밝
은 웃음으로 그의 막내 누이동생을 맞았다.
"내 방에 온건 오랫만인것 같구나. "
레젠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입은 옅은 연두색
드레스에 붙어 있던 슈샤헨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엔 어색하다
못해 우습게까지 보였던 그녀의 드레스 차림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고 생각한순간, 문득 쇼안의 눈 앞에는 몇주일전 어느날 아침, 그녀가 멍
한 표정으로 문을 들어선 그 다음날 아침의 레젠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뭐라고했니, 레젠 ? "
엔나 헬로판은 그녀의 딸이 한 말이 믿겨지지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
다--그녀는 아주 어릴때부터 그랬다--어릴적 친구들과 어울려 목검을 휘
두르며 말을 달리고, 남자처럼 웃으며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가끔, 예식
이나 무도회가 있어 드레스를 입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런 옷들을 매우
불편해 했고, 예식이 끝날때 까지 간신히 참아낸듯한 표정으로 집에 오
면 그 옷들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기 일쑤였다. 아마도 그녀는 퓨론사즈
의 귀족집안 귀부인들중에는 유일하게 승마복이 드레스보다 많은 아가씨
였을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놀란표정을 짓자 레젠
은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이 한 말을 반복했다.
"제 승마복들, 전부 왕영 승마원에 기증해 달라고 했어요. 아니면 버리
시던지요. "
"하지만 레젠, "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무슨 꿍꿍이 속일까 하고 생각했다.
"이제 승마는 하지 않을거란 얘기니 ? "
레젠은 잠시 말을 쉬었다.
"... 승마를 하지 않을거란 얘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전처럼 망아지처럼
뛰어다니지는 않을거라구요. "
망아지처럼이라... 엔나 헬로판은 조금은 의아스러웠지만 속으로 웃었
다. 레젠이 왜 이런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그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승마복들을 몇벌을 제외하고는 전부 왕영 승마원
에 기증해 버렸고, 그녀는 그 다음날 퓨론사즈 성내의 양장점에서 자신
에게 맞는 드레스를 여덟벌이나 주문했다.
그 다음날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예법이라면 질색을 하던
그녀가 자청을 해서 자신에게 예법을 가리킬 선생님을 구해달라고 엔나
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녀는 점점 숙녀다와졌고, 그 날 이후 몇주일이
지난 지금, 그녀는 근처에서 소문난 아름다움과 정숙함을 갖춘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레젠의 옛날 모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
었다.
아버지인 라카이드 헬로판에게 있었던 마지막 걱정이 사라진 것이다.
문득 상상에서 깨어난 쇼안은 레젠에게 침대쪽에 있던 의자를 권했다.
"거기 앉아.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니 ? "
레젠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의자로 다가가 우아한 자세로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쇼안은 문득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농담을 걸고싶은 기분
이 되었다.
"어때, 오랫만에 대전이나 해줄까 ? 네가 나무로 만든 하야덴을 휘두
르는걸 본지도 꽤 지난것 같다. "
레젠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숙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젠 웃는 모습까지도 숙녀다와졌군.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양의 예법
을 어떻게 다 배웠는지 신기할정도였다.
"그게 아냐, 오빠. 물어볼게 있어. "
"하야덴과 기사도 외에 물어볼것이 있단 말이지 ? "
쇼안은 싱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레젠의 시선은 자신의 손끝에 가 있
었다.
"이번 전투에 출정한다고 들었어. "
쇼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출정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오늘 오후 기
사단 소집에 나간 후, 돌아와서 자신의 개인 기사단--쇼안 역시 이나바
뉴 바스크 290의 작위를 받은 기사였다--7백여기를 소집할 생각이었다.
"혹시... 앞서 간 기사님들의 소식은 듣지 못했어 ? "
쇼안은 보이지 않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카발리에로라는 열 여섯짜
리 꼬마 옐리어스 나이트를 걱정하는 모양이군.
"글쎄. 원래 일반 시민들에게는 해줘서는 안되는 안되는 이야기인데...
"
레젠은 쇼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도 벌써 여러군데에 이 이야
기를 물어보았을 것이다. 군사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와는
다른, 많이 미화되고 이나바뉴에 유리한쪽으로 왜곡된 이야기만을 그녀
는 들었을것이다. 그녀가 원하는것과는 다른...
'어느쪽이 승리하고, 어느쪽이 패배했는지에는 관심이 없겠지. '
쇼안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라데스쪽으로 간 선발대는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모양이야.
하지만... "
쇼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젠다로로 간 선발대는 승리를 거듭하고 있지. 몸이 다친 기사는 아
무도 없어. 물론 너의 꼬마 기사님도 말이야. "
레젠은 고개를 숙이고 윗이빨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지만, 얼굴
에 홍조가 나타나며 웃음이 지어지는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서 중앙 기사단은 우선 하라데스쪽으로 병력을 투입할것 같아.
우선 하라데스를 탈환해야지... 로젠다로는 현재의 병력으로 우선 위협만
하는것이 좋아. 벌써 쌍방이 많은 기사들을 잃었으니까. "
쇼안이 웃으며 그의 막내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끄
덕였다.
"라벨님을 만나면 네 얘길 전해줄까 ? "
라벨의 이나바뉴 바스크는 149. 나이는 어리지만 쇼안보다는 서열상
상위의 기사였기 때문에 그는 라벨을 가리켜 존칭을 사용한것이다.
"아니. 그를 보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건 조용히 기다리는것 뿐이야.
"
많이 성장했구나... 이젠 정말 한명의 여인이 된거로구나. 쇼안은 따스
한 눈길로 그녀의 동생을 바라보다 눈을 돌려 창밖을 향했다. 기사단 소
집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젠님.
깊은 밤 이지만 아직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일 저녁에 있을 총 공격
에 대한 긴장감 때문인것 같습니다. 내일, 드디어 잃어버린 로젠다로의
수도, 아름다운 포프슨을 탈환합니다.
그래서인지 기사단들도 모두 긴장하고 있는것 같아 저희 예하 개인 기
사단은 푹 쉬도록 해 두었습니다. 내일은 더 힘든 전투의 날이 밝아올테
니까요. 이바이크님도, 언제나 냉정한 표정의 레이피엘님도 긴장한 모습
입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나바뉴를 전부 뒤져내도 그 둘과
같은 강한 기사들은 찾아낼 수 없을테니까요.
밖에는 별이 많고, 공기엔 이안{{
) 풀꽃의 일종. 귀족들의 정원 장식용으로 쓰인다.
}}의 짙은 향기같은
흙
냄
새
가
묻어 옵니다. 레젠님이 좋아할 만한, 전쟁 한 가운데에 있어서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조용하고 아름다운 밤 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잠의 여신의 달콤한 품에 안겨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겠죠. 아니면, 무엇인지 그리워 창 밖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실것도 같습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신건 아닐까요--무엇이든 좋습니다--언젠가는 저도 그리로, 아름다운 레젠님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요.
저도 눈을 조금 붙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다면--물론, 승리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우선 병사를 시켜 이 편지를
부치겠습니다. 말이 빨리 달린다면 스무 밤을 지내기 전에 레젠님의 손
에 도착하겠죠.
내일, 저를 지켜 주시겠습니까.
레젠님이 항상 예뻐해 주시던 제 베락스--정열--에 꽂힌 당신의 영광
을 위해, 이나바뉴와 국왕--루지아 10세--님을 위해 내일 싸우겠습니다.
지켜 주십시오.
643년 가을, 멀리 포프슨 평원에서
당신의 카발리에로로 부터.
이나바뉴 바스크 53, 나이트 이바이크는 막사 안의 침상에서 번쩍 눈
을 떴다. 막사 장막이 걷혀지며 위병이 뛰어들어온것은 그와 거의 동시
였다.
"밖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 "
이바이크는 서둘러 침상 옆에 세워 놓았던 하야덴을 집어 들었다.
'아차, 너무 깊이 잠이 들었구나. '
문득 밖을 보니 시간은 아직 새벽이었다. 한 밤중까지 회의를 거듭한
후,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깊이 잠에 든 것이다. 잠이 깊이 들면 기사
로서의 직감이 둔해지는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즉시 기사단을 소집하고 나이트 레이피엘에게 사실을 알려라. 내 갑
옷은 어디에 있지 ? "
지시를 받은 위병은 지체없이 막사에서 뛰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연
락병의 복장을 한 기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야영지의 좌로부터 적군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둠때문에 규모는 파
악이 되지 않습니다. "
좌로부터라고... 이바이크는 생각했다. 숲에 둘러싸인 작은 다리를 이용
해 공격해 온 것이로군.
"각 기사단에게 당황하지 말라고 전달하라. 곧 가겠다. "
이바이크는 빠른 동작으로 갑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여섯명째 크실의 기사를 쓰러뜨린 라벨은 적의 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마치 지난 밤 그들의 회의가 있었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크실
기사단은 탐색전 정도의 접촉이 아니라 전면적인 공격을 해왔다. 잠을
자지 않고 편지를 쓰고 있었던 라벨이 가장 먼저 그들의 접근을 알아 차
렸고, 그래서 그는 연락병들을 띄워 각 막사에 사실을 알린다음 당장 움
직일 수 있었던 자신의 개인 기사단을 이끌고 먼저 전투에 나선 것이었
다. 이것은 이나바뉴 기사단이 전투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
한 것이었다.
"루델 ! "
베락스--'정열' 이라는 뜻으로, 라벨 의 하야덴이 가진 별칭이었다--가
미친듯이 움직여 다시 크실의 기사 한명을 쓰러 뜨렸다. 라벨은 자신의
부관인 루델을 찾았다.
두어번 정도 더 그의 이름을 불렀을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불
쑥 피범벅이 된 리첼반이 솟아 올라왔다.
"여기 있습니다 ! "
"본대로의 연락은 어떻게 되었나 ? 이대로는 버티기 힘들것 같다 ! "
라벨이 급히 소집해 온 기사단은 자신의 개인 기사단 8백여기와, 이나
바뉴 기사단의 1천여기 뿐 이었다. 거의 5대 1, 10대 1이 넘는 싸움이었
고, 실력 보다는 경험이 부족한 라벨이 맞서기에는 벅찼던 것이 사실이
었다. 라벨과 그의 기사단은 조금씩 뒤로 밀리면서 로젠다로 선발대의
본대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루델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수천,
수만기의 함성소리에 묻혀버렸다. 후방에 나이트 이바이크의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돌격 ! "
하야덴과 하야덴, 하야덴과 리첼반이 서로 부딛히고 부러지는 속에서
도 이바이크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돌격 명령과 함께 이나
바뉴의 기사단은 맹렬한 속도로 크실군에 부딛혀 갔다. 라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새벽이 밝아올 듯도 한데, 아직 주위는 칠흙처럼 어두웠다. 대 혼전이
계속되고, 몇명째 적의 기사들을 쓰러뜨렸는지 기억할 수 조차 없을때
즈음, 퀴트린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싸우고 있는 기
사들 사이의 밀집도가 증가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포위 당했나 ?'
아닌게 아니라 크실의 기사단은 이나바뉴 기사단을 삼면으로 포위 한
채 점차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포위당하지 않은 한면은 바로 라
엘만 협곡 쪽이었다. 이대로 밀려서 협곡에 도달하게 되면 이나바뉴의
기사들은 당황하여 혼란에 빠지게 될 상황이었다. 퀴트린은 입술을 깨물
고는 우선 나이트 네이서스를 찾았다.
"네이서스 ! 하이파나님을 지켜라 ! "
지금 하이파나의 막사는 로젠다로의 라즈파샤가 지키고 있었다. 네이
서스까지 그리로 보낸것은 퀴트린이 지금 혈로를 만들어 탈출을 해야 할
것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는 패전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시간이 점점 지나면 크실 기사단 보다는 이나바뉴 기사단이 훨씬
더 많은 타격을 입을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명의 기사를
하야덴으로 겨누었을 때, 퀴트린의 옆에서 날카롭게 리첼반이 꽂혀져 들
어왔다.
날카로운 파찰음이 울렸다--힘이 좋은 기사였다--말에 탄 채 몸을 뒤
로 젖히고, 하야덴 손잡이의 바로 윗 부분으로 그 리첼반을 걷어 올린
퀴트린은 말을 왼쪽으로 회전시키며 리첼반으로 찔러온 기사를 바라보았
다.
퀴트린의 한배 반은 되는듯한 몸집의 그 기사는, 퀴트린의 키 만한 거
대한 페가드를 한손에 들고 나머지 한 손에 리첼반을 들고 있었다. 검붉
은 빛의 갑옷을 입은 그는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퀴트린에게 말했다.
"네가 이바이크냐 ? 생각보다는 작은 키로구나. "
퀴트린은 대답하지 않고 하야덴을 들어 그 기사를 향했다. 크실의 기
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이베론. 이나바뉴의 바스엘드와 겨루고 싶다. "
퀴트린은 이바이크는 아니었으나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바스엘드임은 틀림이 없었다.
퀴트린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크실의 기사 이베론의 리첼반이 숨김
없이 퀴트린의 가슴을 노리고 찔러져 왔다. 퀴트린은 여유있게 몸을 옆
으로 움직여 어깨 위로 리첼반을 피해 낸 다음, 하야덴을 들어 리첼반의
머리 아래쪽을 찔렀다.
강하지 않은 충격음이 들리며 이베론의 리첼반이 하늘을 날았다. 이베
론이 찔러 들어간 힘이 하늘쪽으로 향하자 힘을 회수할 시간이 없이 리
첼반이 이베론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다. 퀴트린은 다시한번 하야덴을 하
늘 위로 찔러 올려 리첼반을 꿰었다.
이베론은 잠시 당황하는 표정이었으나, 그 얼굴은 곧 분노로 바뀌어갔
다. 그는 말 안장 옆쪽에 매달아 두었던 하야덴을 꺼내 들었다. 그 하야
덴 역시 보통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하야덴의 한배 반은 되는 길이의, 두
배 정도는 되는 두께를 가진 하야덴이었다--이바이크님이 사용하는 하야
덴보다 더 크겠는걸--퀴트린은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이베론은 그 거대한 하야덴을 꺼내 들고도 페가드
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바이크도 역시 두껍고 긴 하야덴을 사용하기
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
하면 이베론이 가진 힘은 정말 놀라운것이었다. 곧 이베론의 하야덴이
퀴트린의 왼쪽에서 쓸어치듯 엄습 해왔다. 퀴트린은 하야덴을 왼손으로
고쳐 잡고 하야덴을 수평으로 한 채 바닥을 향해 내리 찍었다. 그의 하
야덴에는 방금 이베론으로부터 탈취한 리첼반이 꿰어진 채 였다.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퀴트린이 바닥에 내리 꽂은 리첼반으로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이베론의 하야덴은 그대로 리첼반과 퀴트린의 하
야덴까지 밀어내 버린 것이다. 리첼반은 공중에서 둘로 나뉘어졌다.
"네 힘은 이게 전부냐 ? 듣던것 하고는 다르구나. "
퀴트린은 뒤로 잠시 밀린 다음 하야덴을 다시 오른손으로 바꿔 잡고는
즉시 이베론을 찔러갔다. 이베론은 하야덴을 눕혀 들어 퀴트린의 하야덴
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퀴트린의 하야덴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
이며 이베론의 어깨를 찔러갔다. 이베론의 어깨갑옷이 날아 올랐다.
이베론은 깜짝 놀랐다. 퀴트린의 하야덴은 방어하고 있는 그의 하야덴
과 페가드 사이로 찔러져 온 것이다. 그 정확함과 속도는 전율할 정도였
다. 퀴트린은 일단 하야덴을 회수했다. 이베론은 힘은 뛰어났지만 기술적
인 면에서는 퀴트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퀴트린의 두번째 하야덴이 이베론의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이베론은 급히 페가드를 돌려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퀴트린의 하야
덴은 옆쪽에서 쓸어오다 갑자기 방향을 바꿔 노출된 그의 손목을 향해
급히 직선으로 찔러져 왔다. 처음부터 퀴트린이 노린것은 페가드를 쥐고
있는 왼손이었던 것이다. 이베론의 굵은 팔뚝이 중간께에서 부터 잘리워
져 나갔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페가드와, 그것을 쥔 이베론의 왼팔이 바
닥에 떨어져 내렸다. 이베론은 괴성을 질렀다.
"이놈 ! "
이베론은 몸을 돌린 다음, 하야덴을 쥔 오른손을 길게 뻗어서 공격해
왔다. 이번 공격에는 이베론의 체중과 남은 모든 힘이 담겨져 있었다. 퀴
트린은 힘으로 맞서지 않고 몸을 옆으로 약간 돌린다음 하야덴을 비스듬
히 뻗어 이베론의 하야덴에 교차시켜 나갔다. 하야덴의 끝 부분끼리 닿
으려는 순간--정면으로 비스듬히 부딪혔다면 아마도 퀴트린의 하야덴은
멀리 튕겨져 나갔을 것이다--미묘하게 퀴트린의 하야덴이 흔들리며 이베
론의 팔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퀴트린은 몸을 앞쪽으로 숙이자 그의 하
야덴은 이베론의 팔을 발판삼아 직접 이베론의 가슴으로 뛰어 들었다.
작지만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퀴트린은 어깨를 움찔했다. 이베론
이 공격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하야덴이 가슴을 관통했어도 그 하야
덴을 쥐고 있던 퀴트린의 팔에도 역시 약간의 무리가 온 것이다. 짧은
시간동안 퀴트린과 이베론의 눈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쳤다. 이베론의
일그러진 표정은 경이와 감탄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
베론의 육중한 몸은 천천히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퀴트린이 이베론의 가슴에서 하야덴을 뽑아 내고 잠시 그의 시체를 바
라보고 있을때, 등 뒤에서 퀴트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피엘님 ! "
나이트 네이서스의 개인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에리엔과 테바였다─
그 둘은 모두 작위가 없는 기사였다─이었다. 방금 이베론과의 렉카아드
를 하기 전에 나이트 하이파나를 지키기 위해 네이서스와 함께 자리를
떠났던 기사들 이었다.
에리엔과 테바는 자신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 두어명의 기사들과 싸우
고 있었다. 퀴트린은 급히 그쪽으로 돌아가 그중 한명을 베어내었다. 에
리엔은 계속해서 하야덴을 휘두르며 외치듯 말했다.
"포위가 된것 같다고, 탈출해야 한다고 네이서스님이 전하라고 하셨습
니다 ! "
퀴트린이 있지 않은 반대편 쪽, 크실의 공세는 더욱 더 거세어 지고
있었다. 이바이크가 있는 쪽은 그런대로 막아지고 있는것 같았지만 라벨
쪽의 방어선은 언제라도 무너질 기세였다. 이쪽은 방금 퀴트린이 크실의
바스엘드를 쓰러뜨렸기 때문에 크실의 기사들이 당황을 하고 있었고, '이
기고 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곳은 이곳 뿐이었다.
"에리엔 ! "
퀴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이트 라벨에게 가라. 이바이크님께 후위를 맡긴다고 전해라. 내가
선두에서 탈출로를 찾겠다. "
"옛 ! "
퀴트린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벨폰을 공중에서 쳐서 떨어뜨렸다.
"테바 ! "
"옛 ! "
붉은 구레나룻을 기른 테바가 대답했다.
"다시 나이트 네이서스에게 돌아가라. 네이서스와 라즈파샤님이 양쪽
에서 하이파나님을 호위하도록.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이탈한다. "
"옛 ! "
생각 같아서는 결판이 날때까지 싸우고 싶었지만, 삼면이 포위가 된
상태에서 라엘만 협곡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퀴트린과 그
가 이끄는 개인 기사단이 최선방에 서고, 나이트 이바이크의 기사단이
후미를 방어하는 상태에서 이나바뉴 기사단은 크실의 포위망을 뚫기 시
작했다. 어둠속에서의 전투라 쌍방에 얼마의 피해가 났는지는 알 수 없
었지만 이나바뉴의 퀴트린은 직감으로 이나바뉴의 패전임을 느낄 수 있
었다. 하루만 늦게 공격했었더라도... 퀴트린은 계획이 수행되기 바로 전
날 습격이 있었다는것에 대해 안타까와 하면서 계속해서 앞을 가로막는
크실의 기사단을 부수어 나갔다.
새벽이 오려 하고 있었다. 아침 노을빛인지, 핏빛인지 모를 붉으스름한
여명이 포프슨 평원으로 다가서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