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이소룡 영화를 보고 자라난 세대라고 한다면,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오오우~라고 소리치고 쿵푸 자세를 잡던 그의 모습만큼이나 잊을 수 없는 것이, 그의 마지막 영화였던 [사망유희]의 노란색 트레이닝복일 것이다. 두 개의 검은 줄이 상의에서부터 하의까지 길게 그어진 노란색 트레이닝복은, 이소룡이라는 한 쿵푸 스타가 할리우드를 비롯해서 전세계 액션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강렬한 이미지였다. 한 세대의 감각은 이렇게 한 배우의 특정한 형태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 경우가 많다. 대중들의 보편적 감각이 집단적으로 투영되지 못하면 생존 불가능한 영화매체는, 이렇게 호소력 있는 이미지로 그 세대의 감각을 기억 속에서 박제한다.
타렌티노 감독의 4번째 영화, 아아 그는 너무 일찍 거물이 되어버렸다 이제 겨우 4번째 영화인 것이다, [킬빌]은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어쩌면 향후 그의 영화문법이 더 많은 대중성을 띄도록 방향 전환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칠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수지의 개들] 이후 타렌티노교의 신도가 된 나 같은 매니아들은 상업적 유혹과의 야합, 배신, 뭐 이런 극단적 단어를 지껄이면서 표표히 그의 곁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앞서 가지 말자, 타렌티노가 작가주의 영화 운운하면서 폼을 잡았던 적은 없다. 그는 항상 싸구려 B급 무비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영화 역시 그렇게 유쾌한 농담과 시시껄렁한 음담패설로 관객들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타렌티노는, 영화사의 물줄기를 바꿀만한 새로운 영화문법을 창조했다. 그것은 수직적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비선형적 시간의 질서를 창조한 데서 찾아야 한다. 보석털이에 실패한 갱들이 자신들 속에 침투한 첩자를 찾아내는 후일담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는, 보통의 갱 영화에서 핵심부 역할을 수행하는 보석털이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범행 모의 씬이나 범행 실패 후 은행을 탈출하는 씬은 있지만, 그 핵심은 제외되어 있다. 또, 도입부 범행을 모의하는 카페 씬 다음에 갑자기, 폭력적으로, 피 흘리는 차안 씬이 전개된다.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점프컷이다. 사건의 명확한 전개는 결말까지 본 뒤에 다시 관객의 머리 속에서 시간적 순서로 재조립되어야 한다.
[펄프픽션] 역시 마찬가지다. 수미쌍괄식으로 도입부와 엔딩씬에 레스토랑씬이 배치되어 있다. 마피아 중간 보스인 존 트라볼타와 샤뮤엘 잭슨이 좀도둑에게 지갑을 털리는 장면이다. 하지만 내러티브의 시간적 전개로 본다면 이미 존 트라볼타는 [금시계] 에피소드에서 브루스 윌리스에게 살해당한 뒤다. 타렌티노의 영화는 이렇게 관객들로 하여금 내러티브 속으로 적극 개입을 권한다. 일상적 시간의 해체에 의해 재구성 된 파편적 이야기들은 관객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서만 비로소 퍼즐 맞추기처럼 일정한 형태를 갖게 된다.
[킬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총 3시간 분량이 2편으로 나뉘어 개봉하기 때문이다. 극장 개봉이라는 상업적 이유 때문에, 아마도 총 상영시간은 3시간을 훨씬 넘길 것이다.(실제로 [킬빌]vol.1의 런닝타임은 100분이 넘는다) [킬빌: Volumme.1]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간적 흐름을 파괴하는 타렌티노의 내공이다. 핵심사건은 5년 전에 일어난 결혼식 참사다. 임신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려던 더 브라이드(우마 서머 분)는 같은 조직의 보스인 빌에 의해 무참히 습격당한다. 결혼식장 바닥에 흥건하게 쌓인 탄피가 끔찍한 참사를 설명해준다. 피로 물든 결혼식 대참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은 더 브라이드 뿐이다. 의식이 없는 코마상태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 5년을 보내던 더 브라이드는, 갑자기 눈을 뜬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살인조직 데들리 바이퍼의 5명 조직원들과 보스 빌에게 차례로 복수한다.
1부에서는 일본 동경 야쿠자 조직의 보스로 성장한 오렌 이시(루시 리우 분)와 4살 난 딸을 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버니타 그린(비비카 A 폭스 분) 등 2명에게 복수를 했으니까, 2부는 좀 더 숨가쁘게 흘러갈 것이다. 다른 3명에게 복수를 하기에는 남아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물론 복수극의 핵심에는 5년전, 피의 결혼식이 있다. [킬빌]은 아마 DVD판으로 출시될 때는 새로운 디렉터스컷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2편으로 나누어 상영되는 극장 시스템 아래서, 상업적으로 소모되기 위해 필요보다 늘어졌을 것이고, 불가피하게 재편집해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타렌티노 영화의 미학구조로 보면, 2편으로 나누어 개봉하는 것은 치명적인 독약이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은 편집이다. 선형적 내러티브를 무시하고 비선형적 세계질서를 창조한 그가, 2편으로 나누어 개봉하는 시스템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형적 질서와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는 부분이 있다. 나는 이것이 가장 큰 불만이다.
침대에서 5년동안 코마 상태로 지내던 더 브라이드가 병원을 벗어나는 장면부터 우리는 타렌티노의 엽기성을 목격할 수 있다. 더 브라이드는 코마 상태에서 병원 직원으로부터 수없이 강간을 당했다. 더구나 병원 직원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강간을 주선하는 파렴치범이다. 그들에게 잔혹하게 복수하는 씬들에서 피의 복수극 서막이 울려 퍼진다. 오랫동안 하반신을 쓰지 않아서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더 브라이드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탈출한다.
대낮 주택가, 버니타 그린의 비좁은 가정집 주방에서 벌어지는 혈투만 봐도 타렌티노 미학의 정수를 알 수 있다. 그는 비좁은 부엌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액션의 쾌감도를 상승시킨다. 극단적인 로우/하이 앵글의 대비, 상대의 정수리를 향하여 날아가는 칼의 빠른 속도감과 그 이후의 정적, 이런 카메라 앵글의 조화와 리듬의 완급 조절은, 타렌티노 액션의 숨가쁜 속도감과 미학적 질서를 보여준다.
5명의 리스트에서 한 명을 삭제한 더 브라이드는, 오키나와로 가서 검의 명인 하토리 한조(소니 치바 분)에게서 검술 훈련을 받는다. 야쿠자 조직 보스로 변신한 오렌 이시와의 대결을 앞두고 철저하게 준비를 하는 더 브라이드의 검술 스승으로 등장하는 하토리 한조는 일본 사무라이 액션의 대가 소니 치바가 맡고 있다. 그는 [킬빌]의 후반부 사무라이 검법 액션의 무술 안무까지 책임지면서, 전체 무술 감독인 원화평의 홍콩 와이어 액션과 조화를 이룬다.
오렌 이시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킬빌] 1부의 후반부의 핏빛 액션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왜 사람들이 타렌티노를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고 불렀는지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화면 가득 낭자하게 피가 흐른다. 댕강, 댕강, 댕강 1백여명 야쿠자 조직원들의 머리가 잘려나가고 팔이 잘려지고 발목이 잘려진다. 신체의 각 부분이 더 브라이드의 예리한 검에 의해 잘려나간 뒤에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오고 폭포처럼 쏟아진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 일부는 흑백 톤으로 보여지지만 그러나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이나 [펄프 픽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흥건한 피를 화면 가득 쏟아붓고 있다.
1949년 세워진 중국 [베이징 영화 스튜디오] 내에 셋트를 만들어서 촬영된 [청엽정House of Blue Leaves] 장면은 오헤이 타나다와 데이빗 와스코의 디자인팀이 설계한 건물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디자인 된 나이트클럽 [청엽정]은 마치 홍콩 액션 영화의 주막씬을 보는 것처럼 설계되어 있다. 중앙의 넓은 홀,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 중앙 홀을 둘러싼 사각형의 2층 난간 등은 홍콩 액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거기에 일본식 다다미 방과 정원이 삼투된다. 홀의 투명한 아크릴 바닥 밑으로는, 일정한 방향으로 다듬어진 모래 위에 큰 돌 몇 개가 설치된 일본식 정원이 보인다. 다다미 홀에서는 맨발로 기모노를 입은 여성 밴드가 록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이런 기묘한 풍경은 특히 서구인들의 동양 취미를 만족시켜줄 것이다. 결정적으로, 오렌 이시의 오른팔로 나오는 고고는 교복 입은 여고생으로 상징되는 일본 소비문화의 섹시 코드를 그대로 갖고 있다. [킬빌] 1부에서 가장 매력적인 스타는, 우마 서먼이나 루시 리우보다는 고고 유바리 역으로 등장하는 치아키 쿠리야마다.
홀에는 붉은 색 조명이, 주방에는 녹색 조명이, 그리고 더 브라이드가 마지막으로 오렌 이시와 일대일 대결을 펼치는 눈 내리는 정원 장면에서는 흰 색 눈 위로 푸르스름한 조명이 쏟아진다. 마치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 홀(붉은 색)과 주방(녹색)과 화장실(흰색) 등으로 조명이 특화되어 사용된 것과 비슷하다. 타렌티노는 [킬빌]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일본 사무라이 영화(더 브라이드와 야쿠자들간의 혈투에는 [사무라이 픽션]의 유명한 실루엣 장면이 패러디되어 있다), 홍콩 액션 영화(더 브라이드의 노란색 트레이닝복은 그 자체로 이소룡에 대한 오마쥬이다. 그외에도 [청엽정]씬은 장철이나 호금전같은 홍콩 무술영화 절정기의 작품들의 흔적이 배어 있다), 이탈리아의 마카로니 웨스턴 등등 다양한 국가,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포스트 모던 영화의 대표 전시물을 보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킬빌]에 대한 완성된 평가는 2부가 나온 뒤에나, 그리고 어쩌면 그후 한 묶음으로 다시 편집될지도 모르는 디렉터스컷을 보고난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극장의 상업적 시스템 아래서 1,2부로 나누어 개봉되면서 타렌티노가 얻은 것은 상업성이며 대중들의 갈채지만, 잃은 것은 자신의 독특한 영화미학이다. 비선형 질서의 특징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만,(오렌 이시의 과거를 져패니메이션으로 삽입하거나, 결혼식의 피의 참사가 내러티브 곳곳에 박혀 있는 것 등) 그러나 2부로 이어지는 내러티브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타렌티노는 내러티브의 파편적 구조를 최소한으로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비교적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는 대중화에 기여하지만, 독특한 타란티노 미학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1,2부로 나누면서 심지어 5명의 살해 리스트가 뒤바뀐 흔적까지 보인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판단을 최종적으로 내려서는 안된다. [킬빌 volumme.2]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