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나가기 위하여 길을 걷는 사람들, 그들의 앞모습을 보고 싶으면 소리쳐 부르면 됩니다. 왜? 부름에 그들은 분명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부르는 사람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응답한 사람들 역시 답을 전하였기에 소득의 마음이 따르니 편해집니다. 그러나 시간은 불러도 돌아 보지 않습니다. 다만 흘러버린 시간의 체취라도 느끼려면 회상이란 단어를 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기분이 드는 달이 바로 12월입니다. 아무튼 시간의 흐름을 타고 흘러 온 한 해, 2019년은 이젠 배웅해야 합니다. 그리고 2020년이란 주어진 시간을 다시 살아야 합니다. 보냄과 계획이란 교차의 주제를 갖고 오늘 순례와 걸음 여행의 도반들이 모이는 날입니다.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새벽 3시 58분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준비해 두었던 백펙을 다시 점검 후 줄을 동여매었습니다. 약속된 차가 도착하고 인사를 나누고 장 데레사 댁으로 가 주부식을 챙겨 차를 실은 후 늘 만나는 장소로 이동하여 모두 만났습니다.
그리고 1시간 30여분 후 도착한 만뢰산 서남방향 중턱 생태공원, 바람은 잠들고 기온은 초봄 정도의 날씨, 걷다보면 전부 물러 갈 정도의 겨울날씨였다. 늘 그렇지만 날씨는 오늘 계획의 기준으로 본다면 최적이다. 믿는자들의 의식으로 늘 하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오늘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할 도반은 모니카 자매님! 바이칼 이후 무릎 통증으로 고생중이신데 오늘 참여하신 것이다. 걷는 동선에 신경써야할 부분이다.
공원후미 자락에 붙어 오르면 능선으로 가장 빠르게 올라설 수 있어 그리로 가려다 포기 하였다. 무리가 따를 것 같다는 늦은 판단에 포기하고 마을 뒤로 새로 만든 등산로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육산이라 길은 부드럽지만 세번의 경사지를 넘어야 비로서 임도가 나온다. 대열 선두에 서서 내달렸다. 길은 외길이라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멘트로 포장한 구비구비 임도 첫길보다 이 주능이 걷기에 너무 편한 곳이다. 그러나 조금은 비탈, 초반에 이런 길을 걸어두면 몸이 빠르게 풀리고 적응이 된다.
세 언덕 중 마지막 비탈구간이다. 힘이 들다는 것은 목적지에 대한 집념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뜻 이다. 누구에게나 힘든 구간이지만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넘어설 수 있다.
모두 올라 섰다. 모두 머리부분에 열기가 서렸다. 오름에서 활동량이 많았다는 증거다. 활동량이 많으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 인체의 조건이다. 그 부산물이 바로 땀이다. 체온을 적정선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가 땀을 배출하는 것이다. 잠시 머물다 얕으막한 언덕을 넘어 임도에 도착하였다. 자주 걷는 길이다. 도시생활에 염증이 마음에 끼기 시작하면 흘쩍 도시를 떠난 이부근으로 내려와 머물며 자주 걷는 길이다.
언덕길에서 길드려진 몸, 임도걷기에서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산 허리를 절개하여 만들어 놓은 동과 서의 외길, 정적이 깊이 숨어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때로는 혼자 걷기도 하며 스스로 생을 찬미하기도 한다.
숲 길 얼마든지 사색을 이어갈 수도 있는 길이다. 사려가 깊으면 깊을수록 삶의 여정에 혜안에 힘을 입게된다.
계절은 이미 화려함을 내려 놓고 깊은 정적에 갇혀 있지만 그들은 한 시도 쉬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무 가지 곳곳에 매달려 있는 움은 새새명의 주머니다. 이 움을 자연은 겨울내내 만들어 간다. 그러다 생명이 살기에 적당한 계절이 짐작되면 움의 껍질을 조금씩 열다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터트려 꽃을 피우거나 새싹을 보여 주는 것이다. 숲은 잠시도 잠들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들의 복음적 사려는 잠들지 말어야 한다.
겨울의 정적과 인간의 발걸음~~ 상관은 조화의 바탕이 보인다
보무가 좋다! 경쾌함이 깃들어 있다.
발 끝에 가을의 추억이 맴돌듯 낙엽 밟는 소리에서 가을을 고독을 느끼며 찍어 보고......
여럿이 발 구르는 소리에서 가을의 깨알을 줍는다.
잠시 등을 돌려 걸어 온 길을 바로 보며 쉼의 여백에 반가움을 느끼는 것이 바로 삶의 정취다.
다시 길은 겨울의 모퉁이를 보여주고 겨울에 다가가려다 다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 바로 계절에 기대는 마음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는 모습이 사라지기 전 다른 걸음이 도착하였다.조화를 선택하여 손빠르게 누름단추를 눌렀다. 겨울의 끝을 알기에 벌써 봄향기가 느껴졌던 도반들이셨다.~~^&^
그리고 늦게 도착한 인연도 합석하고 다시 또~~~
반갑다는 마음, 그것은 오래토록 자리를 비웠다는 공간에 대한 아쉬움이다.
몇년간의 봉사를 총무께서는 따봉이라 정리해주었다. 따지지말고 봉사하라는.... 그러나 그럴수가 있나 그것은 본능의 상실이지!
하긴 본능을 죽이고 사는 일, 즉 나를 내려 놓는 일이 바로 믿음의 시작이고 끝이다. 아무튼 반가운 두 사람! 새해에도 더욱 더 건강하시고 평안을 빌어 봅니다.
동행~~ 두 분의 동행은 오랜 시간이 숨어 있다. 계절도 이와 같이 시간과 동행함으로서 계절의 의미가 깊어진다.
점점 잃어가는 자연의 본 모습처럼 설 자리가 희미해 간다. 같은 뿌리을 갖고 있는 나무가지들.. 뿌리가 썩으면 모두 생존은 불가능해 진다. 서로 존중하면 사랑을 잉태하고 서로 사랑하면 삶의 가치가 풍요를 더하여 서로가 행복해 진다. 남과 여! 구별이 있으되 상생의 부조화는 없어야 한다. 가치가 다르지만 역활은 공동선이 존치되어야 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각고의 고통과 노력으로 표현되는 작가들의 작품 처럼 남여의 모든 상황을 경험하고 이겨낼 때 비로서 사랑의 가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흩뿌린 겨울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겨울의 표현력을 지닌 눈, 반가운 마음에 마음과 눈에 담으려는 순간, 의문에 행동이 보였다.
저 앞에 무엇이지?
앗 ! 나무 잡목들이 나 뜅굴고 길을 막아섰다. 난제다. 산판이 개판이다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새나왔다.그리고 난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난마(亂麻)란? 어지럽게 뒤얽힌 삼가닥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어떤 일이나 상황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얽혀서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글로선 快刀亂麻(쾌도난마)라는 언어가 있어 전환은 용이하지만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어지러운 나무가지와 몸통은 도저히 건너갈수 없는 장애 였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길, 아주 고약한 길을 인내의 결기로 극복하기로 하였다. 흡사 한 해를 살아오면서 고통과 난간이 있다면 모든 것을 극복하둣이 넘기로~~~~
진천 백곡에는 많은 숯가마가 존재한다. 아주 오래된 숯가마들, 옹기를 굽고 숯을 구워 지게에 올려 놓고 방방곡곡을 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고 신자들의 삶을 살피고 박해에 대한 실정도 파악하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했던 조선 말기 천주교인들.. 그들은 백곡 겹겹산 마다 숨어들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숯가마가 유난히 많은 곳이 백곡이다. 숯체험관 까지도 생겼다. 참나무가 서있는 곳은 일정한 성장이 이루어진 곳은 여지없이 벌목허가 나오고 벌채 후 다시 나무가 심어지는 곳이 이곳이다 참나무 숯이 형성된 곳 중심으로 벌채나무가 너브러져 있는 것이다.
쉽지 않아! 쉽지 않아!
그래도 이 난마를 넘으면 이 경험으로 앞으로 혹시 있을 난마 정도는 쉽게 풀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쉽지 않고 엄정한 어려움이 다가 올 경우가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으면 낭패다. 사랑으로 오신분은 더 큰 사랑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항상 시련을 주시는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힘겹게 넘어 섰더니 다시 또 난마가 다가 왔다. 헤쳐 왔던 경험이 있으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조심조심!
모니카 자매님의 미소는 늘 소녀같다. 그렇게 사셨기에 가능하신 분이시다. 가능하신 일을 참 많이 하신분이셨다.
무사히 빠져 나간 산나는 몸짓으로 난마에 갖힌 이들을 희롱하고 있다가 사진에 붙잡혔다.
마지막 주자를 끝으로 난마는 결국 쾌도난마에 굴복하고 말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내려선 길에서 사이 길을 선택하였다. 잔가지는 약간의 부담을 주지만 어느가문의 묘택을 밟을 수 있는 길을 포기하려고 하였다가 말섞임이 싫어 돌아서서 그 길로 내려왔다. 봄에 경험할 수 있는 진흙으로 감싼 신발, 성당시설내부에 들어서기애 적절치 않아 나름대로 제거작업에 긴시간을 .... 그러다 결론은 신발을 벗고 입당하기로 하고 올케와 시누이로써 순교하신 두 여인 앞에 섰다. 설명을 청취하고 입당하려다 선종하신 신자를 위하여 연도차 나오셨던 지역신도 형제가 그냥 입당하라고 권하여 입당하였다.
단순하고 무식하다 스스로 자각하신 우리의 영원하신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하고 겸손된 영성이 확하고 다가 오는 성전, 들어서면 평화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만히 앉아 기도를 드린 후 묵상의 시간을 갖고 일어섰다. 한 해를 보내며 드리는 마음기도는다음과 같았다. 용서하소서 나의 모든 잘못을... 깨닫게 하소서 나의 복음적 삶의 반한 삶을... 이루게 하소서 사랑과 자비심의 실천을... 사랑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을 경배드리며 이 세상의 모든 잘못들이 바로잡히기를 염원합니다. 아멘.
평화! 평화의 정체성은 평화 그자체다. 겸손할 수 있다면 자신을 가난한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가난하려면은 작음을 지향해야 하고 어느상황에서나 작음을 실천하고 어느 누구에게나 작은 자로 다가갈 수 있다면 평화는 그 사람 것이된다. 참 평화는 지속적인 실천이 얻어낼 수 있는 결과다. 서로의 이기심이 사라졌을 때 가능한 일이다.
다시 광장에 모여 성모님을 배경으로 마음 기도를 드리며 2019년 한 해의 삶을 정리해 보았다. 함께 하신 형제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다시 오는 또 한 해를 함께하며 형제적 친교로 늘 서로에게 작은자가 될 것을 생각하며 또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었다.
늘 감사합니다. 서로에게 감사해 하며 아기예수 오심을 축하드립니다. 거룩한 밤!! 고요한 밤~~^&^
ps. 이어서 산막에서 작은 회식나눔의 시간을 갖었습니다. 친교의 나눔이지요. 이 자리를 위하여 수고해 주신 모든 형제 자메님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평화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늘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