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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흥과 개혁 원문보기 글쓴이: 장경선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설교’는 다 같은 ‘설교’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설교’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성도들의 모임이나 집회에서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가 성경 말씀을 펼쳐두고 담론를 펼치는 광범위한 뜻을 가진다. 그러나 주일 공예배를 제외한 모든 모임에서 행해지는 ‘설교’는 주일 공예배시 교회 앞에 선포되는 '설교'와 확연히 구분된다. 주일 공예배에서 성례 및 축도와 연관된 설교는 다른 집회에서의 ‘설교’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공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설교는 예언적 성격을 띤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매우 신중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는 곧 설교 자체가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말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가운데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예언적 기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자 개인에게 주어진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사역이다. 진정한 설교는 교회에 속한 온 성도들이 동일한 말씀을 나눔으로써 삶을 공유한다. 나이 어리거나 신앙이 어린 성도들도 언약의 백성이라면 성숙한 성도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해야 한다. 설령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교훈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함께 있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해야 한다. 설교자는 그 어린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 지나치게 의도하지 않아도 된다. 즉 성도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지나치게 애쓸 것 없이 성경에 기록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성도들에게 차등없이 동일한 언어로 주어진 사실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어린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공예배 시간 이외의 다른 시간을 별도로 할애 할 수 있다. 공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신앙적 성숙도가 다양하다 할지라도 설교자가 말씀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신앙의 성숙과 관계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의미를 들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도 성경을 읽어야 하고 노인들도 읽어야 한다.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성도도 성경을 읽어야 하고 공부를 많이 한 철학박사도 읽어야 한다. 이처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어야 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면 도리어 복음이 변질되어 전달될 우려마저 따른다. 이는 마치 잔치집에 음식을 차리면서 아직 치아가 나지 않은 영아나 아직 나이 어린 아이들이나 장성한 청년이나 연세 많아 치아가 온전치 못한 노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일한 잔칫집에 초대되어 그 음식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과 유사하다. 동일한 음식을 앞에 두고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서로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다.
설교시간은 목회자의 종교적 신념이나 소신을 밝히는 시간이 아니며 정치,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히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강요하는 시간이 아니다. 또한 자기의 신앙적 체험이나 종교적 성공담을 늘어놓아서도 안 된다. 설교자는 민족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되며 시대의 상황을 해석하는 논평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을 꼭 말할 필요가 있다면 설교시간이 아니라 공부시간이나 다른 교육의 기회를 통해 말할 수 있다.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설교와 그 이외 모임에서 말씀을 가르치거나 교육하는 것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난다.
또한 공예배에서 목사가 전하는 설교와 강도사, 전도사가 전하는 설교 사이에는 차이가 난다. 그것은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언약적 의미의 차이다. 한국 교회의 특별한 임시직분인 강도사는 목사의 감독 없이 설교할 수 있는 직분이라는 말이다. 강도사는 한국교회의 특이한 임시직분으로 이제는 불필요한 직분이다. 목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 일부 교단에서 목사의 감독 없이 독자적으로 말씀을 전할 직분자로서 강도사 제도를 두었으나 지금은 무의미한 직분이다.
목사나 강도사가 있지 않은 미조직 교회에서 전도사가 설교할 때는 원칙적으로 목사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이는 목사와 강도사, 전도사 사이의 직급상 높낮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목사의 입을 통한 말씀선포가 성례 및 축도와 본질적으로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개혁주의 교회의 모든 공예배에는 말씀선포와 성례 및 축도가 있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직분상 말씀 선포를 위임받은 목사는 설교와 함께 성례를 집행하며 언약의 축도를 고백적으로 선포하게 된다.
우리가 공예배에서의 설교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경 본문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전달하여선포해야 한다. 설교자는 종교적 목표를 달성할 목적으로 강단에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설교자는 오로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 가운데서 기록된 말씀을 언약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임무는 자기의 생각이나 체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며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설교와 성경본문
중세 종교개혁 시대 이후부터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본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공교회에 의한 페리코프(pericope) 조직이 생겨나게 된다. 이는 일년 동안 설교하게 될 성경 부분을 규정, 설계해 놓고 그에 따라 설교한다. 그래서 해마다 정해진 주일에는 교회력을 기준으로 하여 동일한 본문이 등장한다. 이것이 일부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에서는 예배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당시 쮜리히(Zurich)의 쯔빙글리(Zwingli)는 연속적 성경본문 설교를 했다. 그는 마태복음, 사도행전, 디모데전서, 갈라디아서, 베드로전서, 히브리서 등 성경 전체에 대해 연속적으로 설교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제네바에서도 채택되었다.
설교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설교자는 기록된 성경본문을 교회 앞에 그대로 선포하여 드러내야 하며 온 교회는 그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청교도 신학에 있어서는 이점이 매우 강조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설교는 대개 특정한 상황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상황에서 설교의 끝을 맺으려는 경향성이 극도에 달해 있다. 설교자는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며 인간들의 생활의 필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성경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설교자가 본문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는데 따르는 위험성이다.
매주일 마다 여기 저기를 뒤적이며 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환경의 변화나 유행의 추이에 따라 자기 판단을 하며 종교적 목적을 위해 본문을 고르게 될 상당한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본문은 당회가 기도의 삶 가운데서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회의 논의에 따라 구약이나 신약의 한 서책을 선택해 매주 지속적으로 설교함으로써 설교자 개인 중심의 편향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 설교자가 자기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중단하는 것이 옳다. 설교자가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매주 본문을 선택하게 되면 목적을 위한 설교를 하게 될 우려가 따르게 된다. 예를 들어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그 일을 잘 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를 한다든지, 교회의 행사나 종교적 사업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본문을 선택해 설교하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한 교인들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본문을 선택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결론을 미리 결정하고 준비하는 설교는 이미 자기의 목적을 향하고 있으므로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점은 동일한 본문을 설교한다면 어느 목사가 설교한다고 해도 그 언약적 의미가 대동소이하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동일한 본문을 선택했다면 전체적으로는 동일한 말씀의 의미가 선포되어야 한다. 물론 신약 본문을 설교하면서 구약을 인용하고 구약본문을 설교하면서 신약을 인용하겠지만 결국 본문의 의미를 교회 앞에 밝히 드러냄으로써 전달하며 선포한다. 동일한 본문을 설교하면서 설교자들마다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무관하여 진정한 말씀선포가 될 수 없다.
또한 설교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해야할 점 가운데 하나는 설교하기에 덜 효과적이거나 부적합한 본문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그렇게 보이는 본문일수록 더욱 신경을 써서 설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장 앞부분에서 이름들이 되풀이되는 본문이라든지, 역사서에서 숫자가 되풀이되는 듯한 본문, 마태복음 1장의 여러 이름들이 되풀이되는 듯한 본문 등은 결코 설교하기에 부적합한 본문이 아닌 것이다.
성경 속의 비유들은 순전한 계시의 말씀들이다. 설교를 하면서 예화를 사용 하다 보면 성경본문의 직접적인 교훈은 사라지고 재미있는 예화만 더욱 생생하게 기억에 남게 될 우려가 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주객이 전도되어 그 예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우는 일이 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설교자의 외형이나 말솜씨가 성도들의 관심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엉뚱한 것들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실제보다 훨씬 작게 머리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그런 설교를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선포라 할 수 없다.
물론, 설교의 현장성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며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할 점은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주장을 합리화 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매우 불경한 행위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또한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경륜에 순종하며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선포라는 점을 잘 깨달아야 한다. 설득을 강조하게 되면 설득을 위해 설교자의 인본적이며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포는 설교자의 주관이 최대한 배제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게 된다.
설교자는 자기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재구성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 준비의 명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구성해 보려는 시도는 하나님보다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하려는 심각한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다. 말씀의 의미를 교회 앞에 잘 드러내기 위해 성경의 다른 본문을 통해 의미를 확인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하여 말씀을 편집해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성경이 왜 조직신학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각 항목을 정해두고 그에 따라 의미 해석을 하는 방식으로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설교는 기록된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전달함으로써 선포되어야 한다. 그렇게 선포된 말씀을 통해 성도들은 조직적인 깨달음을 가지게 된다.
신앙이 어린 성도들에게 특별한 도움이 필요할 경우 교회의 교사들은 공예배 시간 이외 다른 시간을 활용해 정리하여 교육할 수 있다. 설교자는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본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교회 앞에 말씀의 양식을 진설해야 한다. 장로교의 설교 전통은 바로 거기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 낙스는 성경본문의 한 구절을 읽고 해석하고 또 한 구절 읽고 해석하는 것을 가장 바람직한 설교로 이해했다.
설교자가 자신의 언술을 통해 명설교를 하려고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설교자가 자기의 웅변술로써 성도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행위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의 귀를 의식해 미사여구를 사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성경 말씀이 현란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자 자신의 현란한 언어구사를 통해 성도들에게 진리를 전달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따라서 설교를 연습이나 웅변술을 통해 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교인들을 꾸짖을 수 없다. 설교자가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의 성도들 즉 교회를 함부로 책망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설교자 자신은 마치 온전한 듯 행세함으로써 다른 모든 성도들 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인식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설교를 하면서 욕설을 섞거나 비속어를 사용하면서 분위기를 장악하려 해서도 안 된다. 또한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을 웃기거나 재미있는 만담을 하면서 교인들의 흥미를 북돋우려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교인들은 점차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간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자기 분위기에 맞추어 예배를 이끌어 가려고 하여 성경말씀을 빗대어 자의적 해석을 하려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도리어 설교는 기록된 성경 본문 말씀만을 전달하며 선포함으로써 일반적인 재미나 즐거움이 배제되어야 한다. 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던 사실(출 12:8; 민 9:11)과 더불어 유추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누룩없는 맛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억했던 것이다. 우리는 설교에 대해서도 순전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 가운데 선포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출처 ; 기독교 개혁신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첫댓글 정말 설교다운 설교를 듣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