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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종사찰 순례기 4 여행기
2008. 2. 8. 15:02
http://blog.naver.com/eunam03/50027680011
제6일(8월17일) 강서성 등왕각. 우민사. 보봉선사. 진여선사.
*등왕각(騰王閣) 누각에서 만난 서강과 마조스님의 법음
강서성의 수도 남창시(南昌市) 외곽을 가로질러 흐르는 감강(江)변에 등왕각이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광을 그리며 우뚝 서 있다. 등왕각의 7층 누각에 서서 바라보는 감강의 긴 물길과 남창시의 풍경이 아름답다. 누각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마조스님의 행화도량 우민사(佑民寺)의 전각이 고도(古都)의 긴 역사와 함께 아침 여름햇살에 빛나고 있디. 옅은 안개를 안고 유유히 흐르는 감강의 멀고 긴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마조스님의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를 생각한다. 감강은 강서성 최대의 강인 서강(西江)의 별칭이기도 한데, 운남성 동부에서 발원하여 귀주, 광서성을 거쳐 남해로 흐르는 총길이 2200km의 중국 제4의 강인 주강(珠江)의 젖줄이다.
방(龐)거사(?-808)는 어느 날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스님을 하직하고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스님을 찾아간다. 거사는 마조스님을 친견하자마자 바로 “만법에게 짝이 되어주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여쭈었다. 이에 마조스님은 “그대가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一口吸塵西江水) 그 때 가서 말해 주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거사는 마조스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불법의 현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마조스님의 “一口吸塵西江水(일구흡진서강수)”는 훗날 선가(禪家)의 유명한 화두가 되었다.
등왕각(騰王閣)은 남창시 감강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중국의 유명한 3대 누각(무한의 황학루, 악양의 악양루, 남창의 등왕각)의 하나로서, 당나라 현경4년(653년) 태종 이세민의 아우 이원영 등왕(騰王)이 홍주(洪州:지금의 남창) 도찰로 임명되었을 때 만든 송나라 건축양식으로 된 누각이다. 황실에서 태어난 이원영은 홍주도찰로 있을 때 만든 등왕각에서 거주하였으며, 등왕으로 책봉 받았기에 누각의 이름을 <등왕각>이라고 불렀다. 등왕각은 강남의 대시인 왕발(王勃:650-676)이 쓴 <등왕각서(騰王閣序)>로 더 유명하다.
<등왕각서> 중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등왕각 강가에 높이 솟아 있건만(騰王高閣臨江渚)/ 그 곱던 노래와 춤은 그쳐버렸네(佩玉鳴鸞罷歌舞)/ 단청 고운 기둥 구름이 흘러가고(畵棟朝飛南浦雲)/ 주렴을 걷으니 서산에 빗긴 빗발(珠簾暮捲西山雨)/ 한가한 구름 못에 그림자 드리고(閒雲潭影日悠悠)/ 수도 없이 바뀌고 뒤집힌 세월들(物換星移度幾秋)/ 등왕각 노닐던 이 지금은 어디에(閣中帝子今何在)/ 난간 너머 장강만 쓸쓸히 흐르네(檻外長江空自流)”
등왕각은 1108년에 훼손되어 보수한 바 있고, 그동안 28차의 성쇠를 겪어 1983년에 재건축된 것으로, 전체 높이 57.5미터(건물높이 25미터), 전체 건축면적 1,3000평방미터, 누각면적 5600평방미터이며, 박에서 보면 3층 건물이나 실제내부는 7층으로 되어있으며, 7층까지 엘리베이터나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 감강과 남창시를 조망할 수 있다.
*우민사(佑民寺)와 마조스님의 “평상심시도 즉심즉불(平常心是道 卽心卽佛)”
남창시 감강과 등왕각에서 가까운 곳에 마조스님께서 18년 간 주석하시면서 행화를 펼친 우민사가 있다. 남조양천감년(南朝梁天監年:502-519년)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상란사(上蘭寺), 당조시에는 개원사(開元寺)라고 불렀다. 대력(大曆)4년(769년)에 마조스님이 개원사에 오셔서 설법을 하실 때 강남의 불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받아들인 제자만 139명으로서, 개원사가 당시의 강남불학중심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승천사(承天寺), 능인사(能仁寺), 영저사(永寺) 등으로 불리다가 , 청나라 순치년에 우민사라고 고치고 지금까지 그대로 부르고 있다.
마조스님께서는 마경대(磨鏡臺:수행도량), 우민사(행화도량), 보화사(선법전수도량), 보봉선사(입적도량) 등에서 주석하시며 수행과 행화, 전법을 하시고, 입적하실 때까지 강서를 중심으로 교화를 펴시었는데 호남의 석두희천스님과 더불어 선계(禪界)의 쌍벽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악(南嶽)에서 육조혜능선사의 2대제자인 회양(懷讓:677-744)스님에게 찾아가 ‘남악마전(南嶽磨)’의 기연(機緣)으로 심인을 얻은 후 여러 사찰에서의 수도와 행화를 거쳐 769년부터 18년 간 우민사에서 선종의 황금시대를 여는 행화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마조스님의 “평상심시도 즉심즉불(平常心是道 卽心卽佛)”의 심지법문(心地法門)이 우민사에서 펼쳐져 당시 수많은 선객들을 깨우쳤는데, 수행으로 부처가 되겠다고 하던 스님들의 얽매인 수행관에 일격을 가하여 새로운 수행풍토를 조성하였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마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馬祖錄에서)
대매법상(大梅法常:752-839)스님이 마조스님을 처음 참예하고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바로 마음이 부처(卽心卽佛)이니라.” 대매스님은 그 자리에서 깨닫고는 그 때부터 대매산에 머물렀다. 마조스님은 법상스님이 대매산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한 스님을 시켜 찾아가 묻게 했다. “스님께서 마조스님을 뵙고 무엇을 얻었기에 갑자기 이 산에 머무십니까?” “마조스님께서 나에게 ‘바로 마음이 부처다’라고 하셨다네. 그래서 여기에 머물고 있다네.” “마조스님 법문은 요즘 또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십니다.”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돈 시키는구나. 너는 네 마음대로 비심비불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 말씀드렸더니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실(梅實)이 익었구나.” (馬祖錄에서)
우민사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건너편에 동불전(銅佛殿)이 보인다. 동불전에 들려 전각의 천장이 닿을 정도로 키 큰 동불입상(銅佛立像)에 참배를 하고나서, 구리빛이 선명한 부처님의 높은 얼굴 모습을 뵈려고 십여 발자국 물러선다. 강서성의 보물로 지정된 동불전의 부처님은 몇 해 전에 엄청난 양의 구리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동불전 뒤 쪽에 위치한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반야심경을 봉송하고 나서, 전각 안의 벽을 둘러 장엄한 나한상께 합장하며 우민사에서 펼친 마조스님의 행화를 생각한다.
대웅전을 물러나오자 바로 스님들께서 예불을 올리는 모습을 합장하여 지켜보고 도량을 돌아 나온다. 당시 마조스님의 주석 때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설법을 듣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우민사 대법당으로 몰려들었는데, 지금도 법회 때마다 3만내지 4만 명의 대중이 모이는 강남제일의 도량으로 옛날의 “마조도량”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우민사의 방장 일성스님은 현재 중국불교협회 회장으로서 중국 불교의 재건과 융창을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고 주지 순일(純一)스님이 말씀하신다. 방장실을 둘러보고 방장실 안에 걸려있는 순일스님의 글 “자항보도(慈航普渡)”를 보면서 마조스님의 전법정신이 그대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산문으로 나오는 길에 만난 마조서림(馬祖書林)이 마조스님의 20여 년 행화도량 우민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입차문원위유연래(入此門原爲有緣來)”라는 주련이 걸린 도량의 산문을 나서며 전생인연으로 마조스님의 행화도량을 참배하여 “평상심시도 즉심시불”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 또 인연이 있어 다시 찾아 올 날을 부처님께 합장 발원하면서, 마조스님의 원적도량인 정안현 석문산 보봉사(寶峰寺)로 향한다.
*보봉선사(寶峰禪寺)와 마조스님의 사리탑(舍利塔)
강서성 정안현(靖安縣) 동북쪽 22Km지점의 보봉진(寶峰鎭) 석문산(石門山) 보주봉(寶珠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강남고찰 보봉선사는 마조스님의 원적도량이다. 우민사 방장으로 18년을 주석한 후 마지막에 석문산에 올라가서 골짜기의 평평한 땅을 둘러보시고 ‘이 늙은 사람의 육신을 옮길 때가 되었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보주봉 아래에다 보봉선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당시 유담사(潭寺), 후에는 법림사(法林寺)라 하였고, 석문산에 있다하여 “석문고찰(石門古刹)”이라고도 불렸던 보봉선사는 보주봉을 기대고 북하수(北河水)를 마주하고 있으며, 사찰 좌우에 두개의 산을 포옹하고 정면에는 일곱 개의 봉우리가 달려오고 있는 듯한 형국이어서 예부터 구룡(九龍)이 모이는 곳이라고도 하였다.
남창시의 우민사를 떠나 창구(昌九)고속도로를 달려온 지 약 1시간 30분 만인 오전 10시50분 경, <寶峯禪寺>,‘石門古刹’이라고 쓰인 현판이 붙어있는 산문 앞에 도착하여 머리를 숙여 합장한다. 산문의 주황색 정문이 닫혀있어 “大千世界” “不二法門”이라고 쓰인 양 쪽 문을 통해 도량으로 들어서서 대웅보전으로 향한다.
대웅보전 앞에 큰 촛불을 꼽고 기도드리는 큰 놋쇠향로가 놓여있고, 아랫부분에 ‘寶峰禪寺’의 글씨가 선명하다. 대웅보전 삼존불에 합장하여 삼배를 올린다. 먼 곳으로부터 마조스님의 원적도량에 찾아 와 삼배를 드리는 불자들의 가슴에 환희심이 가득해 진다. 스님의 화두인 ‘즉심즉불(卽心卽佛) 비심비불(非心非佛)’의 글씨가 붙어있는 대웅보전의 기둥을 만져보면서 마조록(馬祖錄)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을 참예한 후에 물었다.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卽心卽佛’이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어린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 그러네.” “울음을 그쳤을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非心非佛‘이지.” “이 둘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지도하시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겠다.” “그 가운데서 홀연히 누군가 찾아온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무엇보다도 큰 道를 체득하게 해주겠다.”
대웅전을 물러 나와 ‘선종법문불이(禪宗法門不二)’라는 주렴이 걸려있는 선당(禪堂), ‘자항보도(慈航普渡)’ 현판이 붙어있는 전각과 장경루(藏經樓)를 지나 법당(法堂) 앞에 서 본다. ‘홍범삼계(弘範三界)’가 말해주듯 마조스님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선법을 드날린 수많은 제자들의 치열했던 구도역정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아 자세를 바로하고 합장한다.
법당 뒤편 석문산 아래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마조스님의 사리탑 앞에 서서 삼배를 올린다. 당나라 정원4년(서기 788년) 보봉선사에서 입적하신 마조스님의 골사리를 서기 791년에 사찰 뒤에 석탑을 세워 모셨다. 마조스님이 입적하시고 62년 후인 서기 850년에 당선종이 ‘보봉(寶峰)’이라는 액자를 하사하시면서 보봉사라 부르게 되고, 1735년 청나라 옹정황제가 마조스님을 “보조대적선사(普照大寂禪師)”라 호칭하고 사찰을 대거 보수하여 보봉사의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리탑 안에는 120여 개의 사리가 모셔져 있으며, 전면에는 ‘마조도일대적선사사리지탑(馬祖道一大寂禪師舍利之塔)’이라고 금색글씨가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마조스님의 화두인 ‘심외무별(心外無佛) 불외무별심(佛外無別心)’이 쓰여 있다. 사리탑은 여러 번 훼손되고 복원되었으며, 특히 문화혁명 때 심하게 파괴되었던 것을 1993년에 4면 단층 백옥사리탑으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중국 선종8조로 추앙받고 있는 마조스님의 좌상을 모시고 있는 조당(祖堂)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옥불전(玉佛殿)에 계시는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남천8조(南天八祖)”현판이 빛나고 있는 조당 안에 앉아 계시는 조사스님께 삼배를 드린다. 입적하신 지 1200년이 흘렀지만, 스님의 선사상과 법맥은 그대로 큰 강이 되어 중국 선종의 강을 가득 채우고 있고, 우리나라 선종에도 뿌리 깊게 자리하여 그 법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 감사한 마음을 올린다.
오관당(五觀堂)에서 점심공양을 하기 위해 스님과 도반들이 보봉선사의 공양주스님의 안내를 받아 식탁에 나란히 앉는다. 중국 선종사찰 순례 중에 사찰음식을 공양받기는 처음이라서,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두 개의 발우에 담아주시는 밥과 반찬을 부처님께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공양한다. 오관당 중앙 벽면에 공주규약(共住規約)과 오관게(五觀偈)가 붙어있어 농선(農禪)을 수행의 기본으로 하고 있는 중국 선종의 대중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대법당으로 옮겨 주지스님의 배려로 30여 분간 정진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 받았다. 선원장스님을 모시고 법당에 놓여있는 좌복에 가부좌하고 정진을 한다. 중국 선종사찰의 선방을 방문해 보지는 못했어도, 이렇게 여름 한 낮 산사의 바람소리와 매미소리가 어울려 감도는 법당에서 처음 가져보는 정진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감사하며 일어선다.
석문산 석문고찰 보봉선사(寶峰禪寺)의 참배를 마치고, 영수현(永修縣)에 있는 운거산(雲居山) 진여선사(眞如禪寺)로 달려가는 차창에 석문산과 도량의 풍경이 가득하다. 다시 한번 마조도일선사의 법문을 떠올려 마음에 담으며 보화선사, 우민사, 보봉선사의 융창과 선종의 무궁함을 부처님께 발원한다.
“지금 하는 일상생활과 인연 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이 모든 것이 도(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이며 나아가서는 항하사만큼의 오묘한 작용까지도 이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심지법문을 말하며, 무엇 때문에 다 함 없는 법등을 말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일체법은 모두가 마음법이며, 일체의 명칭은 모두가 마음의 명칭이다. 만법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왔으니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
*운거산 진여선사(眞如禪寺)와 허운화상(虛雲和尙)의 행화
강서성 영수현(永修縣)의 진여선사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좁은 산길이었다. 버스 한 대 겨우 지나가기에도 힘든 좁은 산길을 50여분이나 천천히 올라가 약 800여 미터 높이의 운거산 풍경구 오로봉(五老峰) 고개를 넘고, 또 30여분 가량의 내리막길 끝에 펼쳐진 꽤 넓은 분지 가운데에 있는 들판 너머에 진여선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도량으로 가기 위해서 조주관(趙州關)을 통과하고 들판을 가로지른 돌길을 20여 분 이상 걸어가면서, 중국 근대의 불교를 중흥시킨 허운고암(虛雲古巖:1840-1959)화상이 세납 120세로 입적하시기 전 주석하시며 마지막까지 쇠락해 가던 중국 불교의 선풍을 지키던 도량임을 생각하고, 멀리 보이는 도량을 향해 머리 숙여 합장하였다.
“천상운거(天上雲居)”라는 글씨가 선명히 박혀있는 산문 앞에서 푸른 들판, 벼논에서 일하는 스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국 선종의 농선(農禪)현장을 정말 확인한 것 같아서 반갑기도 하고, 저렇게 일하고 수행하며 구름과 더불어 마음비우고 살았으면서도 때로는 선종의 위기를 맞아 서릿발 같은 경책으로 불교계를 나무라시던 허운화상의 모습과 <참선요지(參禪要旨)>의 한 말씀을 떠올려 숙연한 마음이 된다.
“송대(宋代)에 와서 사람들의 근기가 점점 하열해지자 조사스님들이 그 증세에 맞는 약을 베풀게 되어 화두를 참구하는 방편법문을 열게 되었지만, 실은 화두도 망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독(毒)으로써 독을 공격하는 것(以毒攻毒)’이니,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로써 잡념을 대적하여 꾸준히 밀고 나가면 점점 주관(能)과 객관(所)이 함께 없어지고, 나타나는 업과 흐르는 식(識)은 끊어지며, 헛된 마음(偸心)이 다 소멸되는 때에 도달하여, 어떤 경계나 인연을 만나게 되면, 기관을 움직이는 손잡이를 건드리듯, 홀연히 허공이 부서지고 대지가 가라앉으면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볼 것이다.”
<진여선사(眞如禪寺)> 산문 앞에 스님 한 분이 기다려 계시다가 선원장스님과 도반 일행을 방장실로 먼저 안내한다. 현재 중국 불교협회장인 일성(一誠)화상의 상좌스님이신 순문(純聞:36세)스님께서 반갑게 맞아 합장하여 인사를 나누신다. 안국선원 선원장스님과 많은 신도들이 사찰을 방문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운거산 진여선사의 역사와 허운화상, 일성스님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나서, <종경록적록일성노화상수초본(宗鏡錄摘錄一誠老和尙手抄本)>을 스님께 선물로 주신다. 방장실에 붙어있는 “의발료규약(衣鉢寮規約)”과 “백장선사총림요칙(百丈禪師叢林要則)”이 지금도 선칠(禪七)제도를 유지하며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선종사찰의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방장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일행과 함께 대웅전과 허운화상 사리탑으로 향한다.
일년 사계절 흰 구름이 걸려있는 험준한 운거산 오로봉 아래, 사면에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가운데, 넓은 논밭과 호수가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진여선사는 당나라 선종 때인 서기808년에 도용(道容)이라는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약 1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도용스님이 사찰을 세운 후 스님의 두 제자 전경(全慶), 전해(全海)스님이 약 70여 년 동안 전법하였으며, 당 희종(僖宗)중화3년(883년)에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스님의 법제자인 운거도응(雲居道膺:?-902)선사가 칙명을 받고 운거산으로 와 주석하여 수많은 제자를 모아 가르침을 폈다. 그 이후 당 희종이 용창선원(龍昌禪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북송 때 진종(眞宗)이 ‘진여선사’라는 이름을 내려 지금까지 그대로 불려오고 있다.
1953년 당시 중국불교협회 명예회장이었던 허운화상이 불교계의 요청으로 1959년 입적할 때까지 6년 동안 주석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사찰을 중건하고 수백 명의 학인들을 가르쳤으며, 불교선종의 하나인 조동종(曹洞宗)의 발원지라고 일컬어지는 진여선사에 위앙종(仰宗)의 법맥을 받아들여 위앙종 도량으로 만들었다. 허운화상의 사리탑과 탑원, 허운화상의 스승인 홍각(弘覺)감산덕청(山德淸:1546-1623)선사의 탑이 있어 매년 세계 각국의 불자들이 참배를 한다고 한다.
대웅전에는 10여 명의 스님들이 오후예불을 하고 있다. 옆 자리에 조용히 서서 부처님께 합장하여 삼배를 올리고 허운화상 사리탑이 있는 “허운화상탑원(虛雲和尙塔院)”으로 향한다. 사리탑 윗부분에 “위앙종제8세조(仰宗第八世祖)”, 양편에 “허공현보월(虛空懸寶月), 운해현전신(雲海現全身)”이라는 글이 적혀있는 사리탑을 참배하고 나와, 탑원 옆에 세워져 있는 탑비(塔碑) 앞에 서서 화상의 소개 글을 읽으며 감사한 마음이 된다.
<허운탑(虛雲塔)은 1983년 7월에 건립되었으며, 광서(光緖)황제가 하사한 불감(佛龕)에 약간의 사리를 내장하고 있다. 허운화상의 속성은 초(肖), 자(字)는 덕청(德淸), 법명은 고암(古巖) 또는 연철(演徹), 자(自)는 허운(虛雲)이라 하고, 별명으로 ‘환유노인(幻遊老人)’이라 불리었다. 호남 상향인(湘鄕人)으로 19세에 복주의 고산 용천사(溶泉寺)로 출가하였고, 이후 100여 년간 전국의 명산고찰을 참방하여 수행과 경전강의, 전계(傳戒) 등 중생교화와 가람의 중건불사에 일생을 바쳤다. 광서황제는 불자홍법대사(佛慈弘法大師)라는 시호를 내려 허운화상의 공덕을 기렸다.
해방 후 중국불교협회 명예회장의 중책을 맡아 쇠락하는 중국불교를 중흥시켰는데, 97세부터 103세 까지는 육조스님의 행화도량인 남화선사에 주석하고, 이듬해부터 수년 간에 걸쳐 운문종의 개창도량인 운문사를 복원하였으며, 1953년 운거산에 와서 인민정부의 지원 하에 진여선사를 중수하였다. 1959년 10월13일 진여선사에서 120세를 일기로 원적에 드셨다.>
허운화상탑원 옆에 있는 <허운화상 기념당>에서 화상의 진영을 참배하고, 기념당 바로 앞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며, 방장실에 붙어있던 공주규약(共住規約)과 백장회해스님의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생각한다. 지금도 약 80여 명의 스님들이 사찰내책임생산제 하에서 넓은 벼논과 밭에서 직접 경작하여 자급자족하고도 남아 이웃 사찰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허운스님의 “근신위의동정(謹愼威儀動淨) 노력역서경운(努力力鋤耕耘)”의 선지와 선칠제(禪七制)가 오랜 세월을 지나도 식지 않고 그대로 스님들의 수행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합장한다.
사찰 뒤편 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 부도탑이 있다고 알려주는 안내스님을 따라 탑전에 선다. <홍각선사탑(弘覺禪師塔)>이다. 홍각선사는 허운화상의 스승인 감산덕청(1546-1623)대사의 시호로서, 입적(1623년) 후 청나라 순치연간(順治年間:1644-1661)에 황제로부터 내려진 것이다. 홍각선사탑을 참배하고 발아래 펼쳐진 들녘과 운거산 오로봉에 걸려있는 흰구름을 바라보며, 마을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에 도량을 세우고 수행할 수 있었던 선사님들의 구도역정을 생각한다. 허운화상사리탑과 기념당에서 뵈었던 화상의 진영에 아직도 형형하게 빛나던 “환유노화상(幻遊老和尙)”의 삶과 가르침을 아직도 너무나 잘 모르고, 진여선사를 떠나 다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불자의 마음이 너무나 작음을 느낀다. 조주관을 나서다 푸른 벼논 멀리 보이는 진여선사에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며. 허운화상의 심지법문을 떠올린다.
“선(禪)이란 최고의 일이며, 모든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다. 이 일은 말로 표현할 수도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음으로 생각으로 미칠 수가 없다.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셔서 ‘문자를 주장하지 않고, 곧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으니, 만약 어떤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버리면 곧 법왕의 사랑하는 아들이 될 것이다.
앞으로는 인연을 따라 과거의 업을 녹이고 다시 새로운 재앙을 짓지 말라. 타고난 비공(鼻孔)이 털끝만큼도 모자람이 없거니, 자신의 옷 속의 구슬을 어찌 일찍이 잃어버림이 있겠는가? 원래 찾을 것이 없다.”(‘參禪要旨’에서)
제7일(8월18일). 호북성 황매현 사조사(四祖寺), 오조사(五祖寺). 구강나루터.
강서성 구강시(九江市)에서 호북성 황매현에 있는 사조사와 오조사로 가기 위해 구강장강(九江長江)대교를 건넌다. 지금으로부터 약 1350여 년 전 육조스님이 오조스님을 친견하기 위하여 황매현으로 가던 때, 그리고 법을 받고 오조스님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려 고향이 있는 강남땅으로 가던 시절에는 나룻배로 강을 건너 어렵게 오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창구(昌九)고속도로를 달리고 긴 다리를 건너 쉽게 찾아 참배를 하게 되었으나, 그 어렵던 시절에 비해 구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스승을 찾아 떠나려는 사람도 줄고, 인욕하며 수행의 끈을 놓지 않는 학인의 숫자도 확연히 적어진 것 같아서, 구강장강대교를 건너가는 차창으로 바라보이는 강 건너 어느 만큼에 혜능거사가 노를 저어 건넌 구강나루터가 있을까 생각하며, 너무 쉬운 순례여행을 하는 스스로를 자책하였다.
*사조사(四祖寺)와 도신(四祖道信)스님의 진신탑(眞身塔)
호북성 황주부(黃州府) 기주(州) 황매현 서북쪽 40리에 있는 쌍봉산(雙峰山)에 자리하고 있는 사조사는, 당 무덕7년(624년)에 4조도신(580-651)스님이 창건하여 30년 동안 대중을 교화한 도량으로서 약 1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창건 당시 ‘정각선사 쌍봉사(正覺禪寺雙峰寺)’로 불리었던 사조사는 당나라 때 개산된 이후 청나라 때까지 향불이 끄진 날이 없었고, 당송의 전성기에는 800칸에 항시 천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던 대찰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네 번이나 조서를 보내어 도신스님을 국사로 모셨고, 당 대종은 대의선사(大醫禪師)라고 책봉하였으며, 송진종은 ‘天下祖庭’액자를, 송신종은 ‘天下名山’액자를 하사하였다. 사조사는 북으로는 선종조정인 하남성 소림사, 안휘성 이조사, 삼조사를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지장도량 구화산, 오조사, 광동성의 육조사(남화선사)와 이웃함으로서 위치상 중국 선종사찰순례의 중심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조사는 오조홍인스님이 머문 동산(東山:憑茂山)에 대하여 서산(西山)이라 하고, 4조산(祖山)이라고도 한다.
“사조도량(四祖道場)” “불광보조(佛光普照)”라는 글씨가 쓰인 일주문을 들어서서, 쌍봉산을 배경으로 의젓한 장부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산문을 지나 대웅보전으로 향한다. 4조산이라 불리는 쌍봉산 아래에 천왕전, 대웅보전, 관음전, 지장전, 화엄전, 조당, 장경루, 종고루 등 30여 동의 전각이 꽉 차 있는 넓은 도량을 바라보면서, 상상했던 옛 날의 고색창연한 사찰분위기는 아니었어도, 폐불사태와 문화혁명을 거치며 폐허로 변하다시피 했던 사조사의 복원이 고맙기만 하여 부처님께 감사하였다.
사조전(四祖殿) 입구에 붙어 있는 “선문태두(禪門泰斗)”의 현판을 읽고 전각 안에 계시는 도신스님께 삼배를 올린다. 사조전의 벽면에 초조달마대사를 비롯하여 육조혜능스님까지의 진영과 간단한 소개 글이 붙어있다. 사조, 오조, 육조스님의 진영을 바라보고 스님들의 일생을 읽으면서, 오늘날 스님들의 행화와 전법으로 하여 살아 움직이는 선종의 숨결을 북돋아 당시보다 더 활짝 꽃피우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였다.
사조전을 참배하고 나오자 사조사의 방장스님이신 정혜(淨慧)화상께서 선원장스님과 신도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2년 전 서울안국선원을 방문한 바 있는 정혜스님은 허운화상의 제자이며 현재 중국불교협회 부회장으로서, 문화혁명 때 승려의 신분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도록 감내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10여 년을 사찰부근에서 탁발하며 인연을 기다려 끝내 사조사로 다시 돌아와 도량을 재건하신 분이다. 방장실로 안내하여 안국선원의 근황을 묻고 사조사의 역사와 중흥, 앞으로의 중창에 대해 상세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점심공양 시간이 되어 정혜스님의 안내로 오관당(五觀堂)으로 자리를 옮긴다. 200여 명 이상이 동시에 공양을 할 수 있는 공양간 중앙 벽면, 공주규약(共住規約)이 걸려있는 높은 자리에 방장스님이 좌정하자 여러 명의 스님이 공양을 위한 의식을 거행한다. 약 10분의 공양의식이 끝난 후 오관게를 봉송하고 방장스님의 공양을 시작으로 대중들이 함께 공양한다. 두개의 발우에 담긴 밥과 반찬, 나중에 물을 받아 공양을 마치면 다시 공양을 마무리 하는 간단한 의식이 있다.
보화사의 점심공양 때보다 엄숙한 사찰전통의 의식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농선(農禪)으로 수행하는 스님들이 공주규약과 도신스님의 선농일여(禪農一如)정신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조도신스님은 상당법문을 하실 때마다 “노동하면서 좌선하라. 좌선을 근본으로 하되 15년은 해야 한 사람이 먹을 것을 얻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느니라.”고 선농일여(禪農一如)를 강조하셨다. 백장청규보다 1백년 기량 앞선 가르침으로, 훗날의 백장청규와 함께 선종사찰의 생활기본이 되어오고 있다.
사조스님(580-651)의 속성은 사마(司馬)이며, 호북성 광제현 출신으로 13세 때부터 3조승찬(僧瓚)스님에게 10여 년 동안 참학하고 3조의 선법을 이었다. 이후 강서성의 여산 대림사(大林寺)에서 10년을 머물다가 쌍봉산 사조사를 개산하여 30년간 주석하며 문하에 5백여 명의 제자를 가르쳤는데, 여기에서 쌍봉도신(雙峰道信)이라는 명칭을 얻고,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초조로 숭앙 받았다. 당 영휘 2년(651년) 세수 72세로 입적, 당 대종(代宗)은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조스님이 사미로 있던 14세 때(592년) 천주산에 은거하고 있던 3조스님을 친견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원하옵건데, 자비를 베풀어 해탈법문을 들려주십시오.” “누가 너를 묶어 놓았다는 말인가?” “ 저를 묶어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묶은 이가 없으니 이미 해탈인이 아닌가. 어째서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은 이 한마디에 크게 깨닫고 3조스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수행을 하여, 9년째 되던 23세 때에 가사와 발우를 받고 4조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16년 동안 삼조사에 머물며 학인들을 제접하고 가르쳤다.
4조스님의 진신(眞身)이 모셔져 있다는 사조진신탑(비로탑)으로 오른다. 사조탑은 사조사 도량 오른 편으로 30여 분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곳에 쌍봉산의 전경을 안고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높이 11미터, 사방 11미터 단층 정방형으로 된 사조탑은 현존하는 당나라 때의 탑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고 한다. 출입문이 잠겨있어 내부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조스님의 진신을 모신 곳과 그 옆자리에 도신스님의 진영과 6명의 수제자 진영이 음각된 돌비석이 서 있다고 한다. 수제자 중에 신라의 법랑(法朗)스님의 진영도 함께 있다는 안내인의 설명에 다시 한 번 사조탑에 합장하며 머리를 숙인다.
법랑스님이 신라 선덕여왕 재위 연간(632-646)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4조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법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신라에 최초로 선법을 전하였다. 호거산(虎踞山)에 은둔하며 전법에 힘을 쏟았으며 법랑스님의 법을 배운 제자들이 훗날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암사 희양산문을 열게 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산문인 가지산문보다 백년 가량 먼저 사조스님의 법맥이 전해진 것이다.
사조탑에서 바라보는 쌍봉산이 아름답다. 쌍봉산 아래 새로운 전각이 여름 햇살을 받으며 파란 하늘에 떠있는 것 같다. 전법동(傳法洞)이다. 사조스님께서 홍인스님에게 법을 전한 곳으로 천년 세월에 허물어진 조그만 전각을 몇 해 전에 높은 곳에 새로 불사를 하였다고 한다. 홍인스님은 법을 전해 받은 후 쌍봉산 동쪽 빙무산(憑茂山:東山)으로 건너가서 오조사를 열고, 제자를 가르치며 법문 선포에 힘을 쏟아 사조스님 문하와 함께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이루게 된다.
사조탑에서 내려다보는 사조도량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쌍봉산을 배경으로 붉은 전각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있는 전각배치가 편안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도량 앞에 펼쳐진 들녘과 마을들이 농선일여(農禪一如)를 평생의 수행지침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던 사조스님의 모습이 바로 저 아래 사조도량에 지금도 살아계신 것 같아, 도량을 향해 합장하여 머리를 숙인다. 사조사에서 100여리 떨어진 곳에 오조사가 있다고 한다. 사조사를 중심으로 그만한 거리에 이조사, 삼조사, 사조사, 오조사가 100여 년간 선법을 중흥시키고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전법함으로써, 지금처럼 선종이 현대인의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주신 조사님들의 은혜를 부처님께 감사를 올린다.
*사조도신스님의 “수일불이(守一不移)” 법문
사조스님의 가르침 가운데 정수는 ‘하나를 지켜 움직임이 없는 것(守一不移)’, 즉 ‘중생과 제불이 둘이 아닌 중도일미(中道一味:中道佛性)를 잘 지켜서 움직임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를 지켜 움직임이 없다’라는 것은, 이 공정한 눈(空淨眼)으로 하나의 사물에 주의하기를, 밤낮으로 간단없이 이어가며 오로지 힘써 항상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이 흩어져 달아나려고 하면 급히 거두어들이는 것이 마치 새의 다리를 끈으로 묶어 두었다가 날아가려고 하면 끈을 잡아당겨 잡는 것과 같이 하며, 온종일 끊임없이 보면 고요하여 마음이 스스로 정에 들게 된다. <유마경>에 말하기를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攝心)이 도량(道場)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법(攝心法)이다. 사조스님이 주장한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수행법인 ‘섭심법’은 뒷날 간화선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형식적 모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看話正路’에서)
*오조사(五祖寺)의 오조진신상(五祖眞身像)과 ‘수본진심(守本眞心)’
오조사는 호북성 황주부 황매현 동북쪽 20리에 있는 빙무산(憑茂山:東山.五祖山)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명 동산사(東山寺), 동선사(東禪寺)라고도 한다. 오조홍인스님(594-674)이 당 선종시(654년)에 처음 백련봉 정상에 건립한 사찰은 선정사(禪定寺)였으나, 당 대중2년에 황제의 칙명으로 현재의 오조사 자리로 도량을 옮겨 크게 확장하고 대중동산사(大中東山寺)라는 편액을 하사 받았다.
송나라 영종, 휘종황제가 각각 ‘천하조정(天下祖庭)’, ‘천하선림(天下禪林)’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원문종 지순2년(1331년)에 다시 사찰명이 ‘동산오조사(東山五祖寺)’로 바뀐 후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어지고 있다. 오조사는 중국 선종 오조홍인스님의 도량이며, 육조혜능스님이 오조스님으로부터 가사의발을 전해 받아 선종의 꽃을 피우게 된 성지로서, 사조사와 함께 동산법문을 이루어 수많은 학인들에게 선법을 가르친 곳이다.
사조사를 출발한 지 1시간 쯤 되는 곳에 오조대도(五祖大道)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20분가량 더 달려 일주문을 만난다. 일주문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오조사(五祖寺)’ 편액이 붙어있는 산문이 있다. 대웅전과 성모전, 진신전과 육조전으로 가기위하여 천왕전 입구에 선다. 천왕전 정문 좌우에 “오조증보리(五祖證菩提)” “동산영자기(東山迎紫氣)”가 걸려있다.
진신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성모전(聖母殿)에 오조스님의 생모이신 주씨 부인상이 모셔져 있다. 성모전은 길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홍인스님을 훌륭한 조사로 키워내신 공덕을 기려 훗날 스님의 제자들이 만들었고 소동파가글을 쓴 비석이 있다. 성모전을 지나니 “종풍(宗風)”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전각 입구 양쪽에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라는 육조스님의 게송 일부가 적혀있다.
진신전(眞身殿)에 오조스님의 진신이 모셔져 있는데 합장하여 삼배를 올리며 가까이에서 바로 친견하는 마음이 된다. 본래의 오조진신불은 1927년 병화로 일부 훼손되고 또한 문화혁명 때 상당부분 더 많이 손상되었는데, 지금의 진신상은 손상된 상을 덧씌워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진신전 안쪽에 법우탑(法雨塔)이라고 쓴 편액이 보이고, 전각 천장에 “의발친전(衣鉢親傳)”이 걸려있다. 그리고 아래쪽에 “수본진심(守本眞心)”이린 글씨기 노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쓰여 있다.
<“수본진심(守本眞心)”은 오조홍인스님의 핵심사상으로서, 4조도신스님의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오조스님은 ‘다만 행주좌와 가운데서 항상 요연히 본래 진심을 잘 지켜(守本眞心)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멸한 바를 깨달으니 일체 만법은 스스로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수행이라는 것은 응당히 스스로 본래청정의 진심을 깨닫는 것이므로 ‘수본진심’ 혹은 ‘수본정심(守本淨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홍인스님은 수본진심을 하기 위한 수행법으로 수시로 제자들에게 선문답을 유도함으로 해서 깨달음을 일깨우고 있는데, 이러한 선문답은 뒷날 조사선의 전형적인 수행법으로 정착하게 된다.>(‘看話正路’에서)
진신전과 법당을 지나 육조전으로 가는 긴 회랑(回廊)이 정원을 안고 전법 천년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이 회랑은 당시 오조스님께서 <능가경> 변상도(變相圖)와 오조혈맥도(五祖血脈圖)를 그려 넣으려 했던 곳이고, 신수스님이 게송을 지어 써놓고 오조스님이 보시기를 원했던 곳이다. 회랑 뒤편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묵언으로 그 때의 일을 말해주듯 바람에 흔들리며 내려다 보고 있다. 회랑 벽에 신수스님의 게송(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과 혜능거사의 게송(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이 붙어있고, 중국 선종법맥도가 그려져 있다.
긴 회랑을 통과하면 육조전이 나온다. 육조전은 당시 혜능거사가 8개월 동안 디딜방아를 찧으며 오조스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던 곳으로, 육조상이 모셔져 있고, 디딜방아가 그 때의 모양대로 재현되어 혜능거사의 어려웠던 구도행을 짐작케 한다. 천장에는 신수와 혜능의 게송을 적은 휘장이 걸려있다. 디딜방앗간에서 오조당까지의 거리는 이십 보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계신 오조스님을 다시 친견하여 깨달음을 얻는데 8개월이나 걸렸구나 생각하며, 지금 이 자리에 서서 옛날 조사님들의 목숨 건 구도과정을 바라보는 불자들은 너무나 쉽게 훌륭한 스승을 만나 공부하고 있음을 느끼고 스승님께 감사하였다.
*전법(傳法)과 스스로 건너는 구강(九江)
“혜능거사의 게송을 보신 오조스님이 삼경에 혜능을 몰래 오조당으로 불러<금강경>을 설해 주셨는데,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하는데 이르러 언하에 대오하니 일체만법이 자성(自性)을 여의지 않았더라. 드디어 혜능이 오조스님께 말씀드리기를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구족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육조단경’에서)
혜능이 깨쳤음을 아신 오조께서 돈교(頓敎)와 의발(衣鉢)을 전하시고 선종제6대조로 삼으시고, 이르시기를 법의는 다툼의 실마리가 될 터이니 육조에게서 그치고 뒤로 전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해칠까 우려하여 강남땅으로 떠나 인연이 이를 때가지 숨어 지내라고 말씀하시고, 새벽녘에 함께 구강역(九江驛)까지와 “마땅히 내가 너를 건네주리라”하시며 배에 올라 노를 잡으신다.
이에 육조혜능이 “미혹한 때는 스님께서 건네주셨거니와 깨친 다음에는 스스로 건너겠습니다. 건넌다는 말은 비록 하나이오나 쓰는 곳은 같지 않습니다. 혜능은 변방에 태어나서 말조차 바르지 못하옵더니 스님의 법을 받아 이제는 이미 깨쳤아오니 다만 마땅히 자성으로 스스로 건넬 뿐입니다.”
오조사를 떠나 구강시로 가는 황소(黃小)고속도로를 지나, 구강장강대교를 통과하면서 유장하게 흐르고 있는 강물을 바라보며 오조스님이 육조혜능을 떠나보내며 말씀 나누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장면과 서로 주고받는 말씀 한마디 한 마디가 스승과 제자를 넘어 피를 나눈 아버지와 아들 같은 마음을 느끼게 한다. 구강 쪽 대교를 건너서 강변에 있는 누각, <쇄강루(鎖江樓)> 3층 누각에 올라 넓은 강 건너를 바라보며 육조께서 떠나오던 구강나루터를 찾아보지만, 이제는 강을 건너는 나룻배도 간 곳 없고 뿌옇게 보이는 강변에 손 흔들고 서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미혹한 때는 스님께서 건네주셨거니와 깨친 다음에는 스스로 건너겠습니다.” 오조스님께 올리는 육조의 당당한 이 한 마디 말씀만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구강장강의 하늘을 넘나들며 미혹한 중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글/사진 : 은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