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신 명 기 33 : 24 - 29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원합니다. 신혼부부가 두 손을 꼭 잡고 ‘우리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도 하고 맹세도 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행복을 찾지 못하고 얼마 가지 않아 불행하다고 합니다.
‘복’과 ‘행복’은 같은 것 같지만 다릅니다. ‘복’은 자신이 가지고자 하는 것을 가졌을 때 ‘복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재산을 가졌을 때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가진 것을 만족으로 느끼며 감사하며 즐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았음에도 행복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별로 없어도 만족하게 여기며 감사하며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복하다는 사람을 보면 넉넉하거나 부자가 아닙니다. 재물도 많지 않고 건강도 좋은 것도 아닌데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들이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졌음에도 잠을 편히 자지 못합니다. 권력이 있고 재산도 있고 건강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미쓰 코리아와 사는 사람은 행복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오두막집에 살아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때가 어느 때이겠습니까?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귀와 명예를 가져도 엄마 품에 안긴 그 아기만큼 행복하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피난을 하는 중이라도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불안도 공포도 모릅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가장 행복한 것은 엄마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은 다 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자식을 더 귀히 여기는 엄마가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복을 오래 오래 누리면 좋겠지만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아기가 자라면서 차츰 엄마의 행복한 품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그러한 행복은 점점 멀어집니다. 세상은 엄마 품처럼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위험한 것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거짓과 속이는 세상입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29).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행복을 찾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행복은 모두가 원합니다.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는지를 알아봅시다.
본문은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면서 마지막으로 각 지파마다 축복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맨 나중에 아셀에게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셀은 ‘기쁨’이란 뜻으로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창30:13).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라고 모세가 축복했습니다(24). 아셀은 야곱의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아 형제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발이 기름에 감길 것을 축복했습니다.
후일에 아셀은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때 모세의 축복대로 기름진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수19:24-31). 기름진 옥토를 분배 받음으로 형제들보다 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셀이 사는 날까지 능력이 있을 것이며 죽는 날까지 안식과 평안을 누릴 것이라고 모세는 축복했습니다. 아셀이 기름진 옥토를 가지고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안식하며 평안을 누리는 복을 받았지만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름진 옥토를 가지고 사는 날 동안 건강하고 평안하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첫째로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는 아셀에게 ‘너 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 누구냐’ 라고 하며 아셀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사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돈도 중요합니다. 건강도 중요합니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구원이 더 중요합니다.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로 인해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되는 것으로부터 행방되는 것입니다. 지옥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 값으로 지옥 형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지옥 형벌입니다. 돈으로도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빌고 빌어도 지옥 형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구원’만이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봅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성도는 구원을 얻은 백성입니다. ‘구원을 얻을 백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얻을 백성’이라고 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을 얻을 백성’이라고 했다면 구원을 얻을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행16:31). 예수를 구주로 믿는 나와 여러분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한 지옥 형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여러분의 죄를 속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옥 형벌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으니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얻은 백성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하나님)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9).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불행할 것입니다.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능력있는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성도는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도와주십니다. 사람들은 어려울 때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떤 능력있는 존재를 찾고 그에게 도와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도와달라고 빌기도 합니다. 우상을 만들고 섬기며 도움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들이나 우상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천지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방패시오 칼이십니다.
26절에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수룬’이란 ‘의롭다’, ‘정직하다’는 뜻으로 ‘의인’에 대한 별명입니다. 속죄함을 받은 성도는 ‘의인’이요 ‘여수룬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도우시려고 하늘을 열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해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 궁창을 열고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자 대비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돕는 방패가 되시고 영광의 칼이 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나와 여러분을 돕는 방패가 되시고 영광의 칼이 되셔서 대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에 불안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성도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이 처소가 되시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 ‘하나님이 처소가 되신다’ 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성도들이 행복한 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무한한 은혜요 축복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팔에 안아주시고 안전하게 거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십니다.
사탄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시험하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처소가 되셔서 팔에 안아주시고 대적을 쫓아 멸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처소에 거하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둥지에 어린 새들은 지켜주는 어미 새가 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뱀이 새끼를 잡아 먹으려고 기어 오지만 어미 새가 뱀을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독수리 날개 아래 새끼를 보호하듯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로 품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 하나님이 처소가 되시고 대적을 쫓으시고 멸하셔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소에는 야곱의 샘이 있습니다. ‘야곱의 샘’은 물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교회에 야곱의 샘이 있습니다. 생명수가 흘러내리는 샘물을 마시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물이 없으면 동식물이 다 죽습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야곱의 샘이 있는 여호와의 처소에 거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처소는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입니다(28). 교회는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입니다. ‘그의 하늘이 내리는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은혜를 이슬같이 내려 주십니다. 교회에 거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처소에 서하는 성도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싸움에서 이겨 승리하므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9). 하나님은 성도들을 도와주실 뿐 아니라 대적을 복종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대적하는 자들을 발아래 꿇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에게 복종하게 하시므로 그 칼을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십니다.
축구 경기를 할 때 선수들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승리하였을 때 피곤을 느끼지 않습니다. 새로운 힘이 솟아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서로 안고 딩굴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패한 사람들은 땅을 치며 얼굴을 들지를 못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사는 동안 악한 사탄 마귀들과 싸웁니다. 그러나 성도의 싸움은 승리를 보장받은 싸움입니다. “네 대적이 내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대적이 복종하게 될 것이며, ‘높은 곳을 밟을 것이라’는 말씀은 대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힘이 있어 대적을 복종시키고 대적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돕는 방패가 되시고 칼이 되시기 때문에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므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대적과 싸워 승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도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