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즈모(出雲)의 진실
일본 고대문화 발상지의 하나이다. 무로마치[ 室町]시대에 시장 마을로 시작하여 에도[江戶]시대에는 산인카이도[山陰街道, 산인가도]의 역참·시장으로 번영하였다. 산인혼센[山陰本線, 산인본선]이 개통된 후 재래의 양조·농기구·유지·도기 등의 공업 외에 제사공장이 진출하여 섬유공업이 성하고 상업도 활발해졌다. 일본 고대신화(神話)와 관련된 명소와 고분이 많다.
일본이 6일 요코하마(橫浜)에서 진수식을 갖고 공개한 항공모함급 헬기 호위함인 '이즈모 함'을 공개했다. 이즈모 함은 길이 248m, 폭 38m, 최대 배수량 2만7천t(기준배수량 1만9천500t) 규모로, 대잠 헬기 14대를 탑재할 수 있다.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열린 새 헬기호위함 '이즈모 호'의 진수식 모습
이즈모라는 이름은 일본 시마네(島根) 현의 옛 지명입니다.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가결시키는 등 우리나라와 독도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어 이름이 익숙한 바로 그 시마네 현입니다. 이 함선의 이름을 지명에서 따오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이즈모라는 이름을 가진 배는 이번 헬기호위함이 첫 번째가 아닙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건조된 일본의 제 1호 순양함의 이름도 이즈모였습니다. 20세기 초 세계열강과의 이권 다툼에 나섰던 일제는 '6대의 전투함과 6대의 순양함을 만들자'는 구호 아래 지난 1900년 영국에 첫번째 순양함 발주를 맡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첫 순양함이 바로 이즈모 호. 길이 132미터, 폭 21미터, 최대 배수량 1만 톤인 이즈모 호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기대를 한 껏 받으며 1900년 9월 25일 진수 됩니다.
▲ 1937년 일본 순양함 이즈모 호가 중국 상하이 항에 정박해있는 모습
일본의 대표적 학자 중 1인이라는 '우메하라 다케시' 교수는 이런 말을 합니다.
" 나는 이달 『이즈모(出雲 : 현재 시마네현) 왕조~매장된 왕조』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이즈모 왕조의 창립자는 한국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이즈모 왕조의 창립자는 한국계라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이즈모 왕조의 유적에서 동탁(銅鐸)이 나왔다.
동탁의 기원은 한국의 귀족들이 쌍두마차에 붙이고 다니던 방울이다.
한국을 다시 재조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대 일본에 한국은 문명국이었고, 여러 문화를 알려준 은인이었다."
또한 이 기사에서 '미무라 아키오' 신일본제철 회장은 이런 말을 합니다.
" 철의 경우 4~6세기께 백제에서 후쿠오카(福岡), 신라에서 이즈모(出雲), 고구려에서 쓰루가(敦賀: 현 후쿠이현 부근)로 ‘다타라 제철’이 전수됐다.
사철(砂鐵)을 사용해 목탄을 넣고 만드는 기술이다.
역으로 1968년에는 한국에 포항제철이 세워졌을 때 일본의 야하타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 등 3개 회사가 적극 도왔다.
일본이 은혜를 갚은 것이다.
야하타와 후지는 합병돼 신일본제철이 됐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109529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제철문명 일본으로 전해지다. <- 관련글
이처럼 이즈모(出雲)라는 지역은
고대 일본에 한국의 금속문명이 전해진 대표적 지역 중 한 곳이라 하겠습니다.
금속문명만 전해진게 아니라 당시 한국의 선진문명이 종합적으로 전해졌겠죠.
그래서 이즈모(出雲)라는 지역은 일본고대문명의 대표적 지역 중 하나이고
고대 한국의 문명이 전해져서 일본이 급격한 발전을 이룬 예 중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즈모(出雲)라는 말은 일본이 '갑작스러운 발전'을 이룬다는 상징으로 쓰여진 말 중 하나이고
근세에 '급격한 발전'을 원한 일본이
1900년도에 만들어진 (영국이 만들어준) 일본 최초의 순양함도 '이즈모'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번 일본 최초의 항공모함에도 '이즈모'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겠습니다.
위에 '우메하라 다케시' 교수는
"고대 일본에 한국은 문명국이었고, 여러 문화를 알려준 은인이었다."고 했고
'미무라 아키오' 신일본제철 회장은
" (포항제철 건립을 도운 것은) 일본이 은혜를 갚은 것이다." 했는데
일본이 진짜로 은혜를 갚을 생각이 있다면
행여 앞으로 군사적으로 한국을 위협할 생각같은 것은 추호도 하면 안되겠죠.
이미 우리 한국의 국력이 일제강점기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을 해서
일본에 대해서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고요.
그리고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상처를 입은 중국과
역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당한 아픈 기억이 있는 미국도
일본군의 재무장을 그냥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고
만약 일본군이 재무장을 한다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그 때쯤이면 우리 한국의 국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본이 고대에 한국의 선진문명을 전해받아서 고대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근거가 많기 때문에 많은 일본학자들도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겠는데
'중국문명이 한국을 통해서 전해졌다'는 식으로 저기하는 일본인들도 많지만
근래 만주서부 요하유역에서 홍산문명 등
황하문명보다 앞선 한민족문명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어서
고대문명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한국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중국당국이 '만주고대사 납치(동북꽁정)'라는 무모한 짓을 감행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죠.
만주의 고대문명이 황하문명보다 더 앞선문명이었고
황하문명은 만주문명이 전해서 생긴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확연히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죠.
요하(홍산)문명과 소호(少昊)와 소전(少典) <-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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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이즈모 進水 다음날… 中 해경선 4척 센카쿠 무력시위
中 “순찰 임무중 日우익선박 몰아내”… 센카쿠해역에서 첫 28시간 체류日 “힘으로 상황 반전 시도” 반발… 中 “해상분쟁 강력대응”… 긴장 고조
중국은 8일 일본이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에서 중국 해경선이 일본 우익 선박들을 몰아냈다고 밝혔다. 또 사상 처음으로 해당 해역에서 만 하루 이상을 체류하며 순찰 활동을 벌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중국 해경선이 일본 선박을 몰아냈는지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채 “힘을 배경으로 한 현 상황 반전(反轉) 시도”라며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는 중국이 해상 순시 전담기구를 설치한 데 이어 일본이 역대 최대 규모의 호위함 ‘이즈모’를 진수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발생한 사건이므로 추가 충돌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
중국 국가해양국은 7일 홈페이지를 통해 “중국 해경선 2350, 1126, 2102, 2166호 편대가 7일 우리의 댜오위다오 영해에서 주권수호를 위한 순찰을 했다”고 전했다. 해양국은 “해경선 편대는 주권을 침해한 일본 선박을 발견해 댜오위다오 영유권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을 엄정하고 분명하게 설명한 후 해당 선박을 몰아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환추(環球)시보 등 중국 언론매체들은 “일본 순시선을 몰아낸 것은 지난달 중국해경국 설립 이후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선박’을 순시선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주일 중국대사관은 8일 홈페이지에서 “일본 우익 선박들이 불법으로 중국 영해에 들어와 주권을 침해했다”며 “중국 해경선이 우익분자들을 감시하고 쫓아냈다”고 전했다. 중국이 일본 선박을 댜오위다오 해역에서 쫓아냈다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가해양국은 지난해 10월 31일에도 자국 해양감시선이 일본 배들을 퇴각시켰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중국 해경선 4척 중 3척은 7일 오전 7시 30분경 센카쿠 영해에 진입했다. 그 후 1척이 더 영해에 들어왔다. 해경선들은 한때 센카쿠 섬에서 2km 떨어진 곳까지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순찰에 투입된 중국 해경선. 중국은 지난달 해경국을 출범시킨 뒤 화력이 강화된 해경선을 운용하고 있다.
해경선 4척은 센카쿠 영해에서 약 28시간을 머문 뒤 8일 정오 무렵 영해를 빠져나가 접속수역(영해기선에서 12∼24해리·22∼44km)을 항해했다. 지난해 9월 일본이 센카쿠 열도 국유화를 선언한 이후 중국 해경선이 수시로 센카쿠 영해를 드나들었지만 하루를 넘겨 체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엔 올해 2월 2일 중국 해양감시선이 센카쿠 12해리 수역에서 14시간 16분간 항해한 것이 최장 기록이다.
중국 매체들은 일본 선박을 몰아내고 댜오위다오 영해에서 하루를 머문 사건이 7월 22일 중국해경국 출범 이후 처음이라고 전했다. 해경국은 국가해양국 산하 해감총대가 공안부의 해상 경비 및 변방 순찰, 농업부의 어업지도, 해관총서의 해상 밀수 단속 업무 등을 흡수 통합한 방식으로 설립됐다. 기존 국가해양국은 해경국을 통해 해상 경비 업무를 집행한다. 해경선으로 바뀐 해감선과 어업관리선은 기관총 등을 갖춰 이전보다 무장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해상 분쟁에 더 강력히 대응할 뜻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해경국의 집행 능력을 선전함과 동시에 전날(6일) 일본이 항공모함급 호위함 이즈모를 진수한 데 대한 무력시위 차원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중국의 실력행사에 대해 일본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외무성의 이하라 준이치(伊原純一)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8일 한즈창(韓志强) 주일 중국대사관 공사를 불러 중국 해경선의 센카쿠 영해 진입에 대해 항의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은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이번 중국 공무선의 최장 시간 침범에 대해 일본은 극도로 유감을 느낀다”며 “힘을 배경으로 현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현 국제사회에서 결코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