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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과 의주녀(5)
난리의 징후… 민란에 앞장선 제주 여인들
▲한말 최고의 문장가이자 개혁과 개화에 앞장서며 진보적인 삶을 살았던 김윤식은 묘비에 관직을 새겨 넣지 않도록 했다.
이재수란 발발·경위 전 과정 기록 사료가치 높아 최근 학계서 진보적 삶·학문적 업적 재조명 작업
유배인들이 호의호식했을 정도라면 이들에 대한 관리 책임을 지닌 제주목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목사 박용원 역시 '조운(朝雲)'이라는 이름의 애첩에게서 아들을 얻는다. 김윤식의 기록에 따르면 심지어 이재수란이 발발해 곳곳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제주군수는 해가 낮이 되도록 기녀를 끼고 누워 있다가 대정군수 채구석의 핀잔을 듣고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이 백성의 고혈을 쥐어 짤 때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유배인 신분이긴 했으나 당대를 풍미했던 정치인들이 변방 제주에서 현직 목사와 경쟁이나 하듯이 온갖 풍류를 구사하며 탕진하던 이때 큰 변란이 발발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변란이 터지기 전에는 곳곳에서 그 징후가 나타난다. 김윤식의 일기를 보면 이재수란이 발발하기 전 해인 1899년 정초부터 제주성 안팎에서 광견병에 걸린 개들이 출몰했다. "성 안에는 세초(歲初)부터 개들이 서로 잡아먹는 변이 있었는데 점점 더 미친개가 되어 사람을 함부로 물어뜯으니 길가에는 아주 위험했다." 미친 것은 개뿐만이 아니었다. 미친 소가 날뛰다 총에 맞아 죽고, 또 어떤 미친 말은 소와 말을 물어뜯다 저절로 죽었으며, 어느 고양이는 자기 꼬리와 네 발을 물어뜯었다. 관덕정 앞에 선 돼지시장에는 머리에 꼬리가 돋아난 새끼돼지가 출현했으며, 죽성(竹城·제주시 오등동) 민가에서는 알에서 나온 지 사흘 된 병아리가 날개를 치며 길게 '꼬끼오~'하고 울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제주목사는 3일 안에 성 안의 개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외무대신으로 한말 각종 국제 조약을 이끌었던 김윤식은 뜻하지 않게 유배지에서 이재수의 난을 목격하고 속음청사에 이를 기록한다. 이 사료가 발굴되기 전 이재수난은 제주도 향토사학자들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김윤식의 기록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 발생 경위와 전 과정을 기술해 이재수란 연구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그리고 난이 끝나자 정부는 유배인들이 민란에 개입했다며 제주에 있던 유배인들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 67세의 김윤식도 이 때 전라남도 지도(智島)로 이배돼 3년 6개월간의 제주 유배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김윤식은 제주 여인들에 대해 웬만한 남자들은 가까이하길 두려워할 만큼 모질고 독한 사람들로 기록하고 있다. 이재수란을 직접 목겼했기에 그런 생각은 더욱 굳혀졌다. 이재수란 발발 당시 천주교도들이 강력한 화력을 믿고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에 저항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천주교도들을 제압해 민군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성문을 열어줬던 이들이 바로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윤식이 제주 여인들에 대해 "본디 악하고 사나워 싸우기를 좋아하여 남자들도 두들겨 패는 사람들이었다"거나 "이 고장 여풍은 참으로 몹시 사납다"고 했던 것은 일견 바로 본 듯하지만 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을 놓친 해석이기도 하다.
이재수란에 대한 그의 기록 역시 난의 발발 및 전개 과정을 서술한 유일무이한 문서로 사료적 가치를 지니면서도 지배층의 시선에서 바라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말 외무대신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했던 김윤식은 1886년 6월, 프랑스 성직자들의 선교활동을 자유롭게 한 한불수호통상조약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들의 행패에서 비롯된 이재수란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이 조약을 체결한 주역이라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똑같은 난을 목격해놓고도 제주의 향토사학자들이 이재수를 영웅호걸로 기억하는 것에 반해 그는 어리석고 우둔한데다 잔혹한 인물로 묘사했다.
사실 김윤식은 상당히 진보적 의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가 과부의 재혼을 금지한 과부재가금지법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됐지만 이는 선언에 불과해 1950년대까지도 과부는 재혼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과부재가금지법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서자가 대통을 잇지 못하게 한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죽기 1년 전인 87세의 나이에 아들과 손자를 각각 중국과 일본에 유학을 보낼 정도로 앞날을 내다보는 식견도 있었다.
한말 최고의 문장가였던 그는 영선사로 중국에 가서 새로운 문물을 습득하고 민생 안정과 군비 증강을 역설했다. 외부대신을 지내면서 영국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의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개화와 개혁에도 몰두해 유교를 기반으로 개혁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교육은 구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현대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학계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을 연구하고 삶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진행돼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끝>
2012년 9월 24일 <한라일보>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이재수 난(李在守 亂)
1901년 제주도민들 간의 경제적 이해 대립관계와 종교적인 갈등, 일본인 수산업자들과 프랑스 선교사세력들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民亂이다.
신축교의 난, 제주교난(濟州敎亂), 제주민란이라고도 한다. 당시 제주도에는 아라카와[荒川留十郞]를 비롯한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활동했는데, 대정군수였던 채구석(蔡龜錫)과 유림 오대현(吳大鉉), 관노출신인 이재수 등은 상무사(商務社)를 설립하고, 일본인 업자들과 결탁하여 어로독점을 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파견된 제주도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이 프랑스 선교사, 천주교도들과 결탁하여 상무사측에 대규모 잡세를 부과하고, 어로독점에 제동을 걸면서 강봉헌측과 상무사측이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강봉헌은 일반 도민들에게도 엄청난 잡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관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만도 점차 고조되었다. 그런데 강봉헌은 잡세의 징수에 천주교도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제주도민들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적대감도 점차 싹터 갔다. 더구나 천주교도들은 신당(神堂)과 신목(神木)을 불사르는 등, 제주도 전래의 전통을 무시했기 때문에 적대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01년 2월 9일 제주도민 오신락(吳信洛)의 죽음이 천주교도들의 소행이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5월에 들어 상무사측이 천주교도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상무사측은 누적된 제주도민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대대적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5월 16일 이재수의 지휘 아래 수천 명의 도민들이 제주성을 포위하고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천주교도들과 제주관청은 성문을 닫아걸고 대항했지만, 5월 28일 제주성이 함락되었고 수백 명의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에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봉기군을 진압하고 강봉헌·채구석·이재수 등을 잡아 서울로 압송했다.
한편 프랑스 신부들은 뮈텔 주교를 통해 프랑스 함대의 개입을 요청했는데, 프랑스 함대는 난이 진압된 후에 도착했다. 프랑스는 신부들의 피해와 천주교도들의 죽음을 이유로 서울로 압송된 자들의 처벌과 배상금을 요구했다. 이 요청에 따라 조선정부는 10월 9일 이재수 등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프랑스는 또한 죽은 천주교도들의 묘지를 안장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1903년말이 되어서야 사라봉(沙羅峰) 아래 황사평(黃沙坪)에 안장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또한 5,160원의 배상금이 프랑스에 지급되었으며, 배상금의 이자인 722원은 제주도민들의 탄원으로 석방된 채구석이 도민들로부터 걷어 지급했다.
▲ 이정재가 열연한 영화 '이재수의 난' 속의 이재수
이재수는 본관은 고부(高阜)이며, 아버지는 이시준(李時俊)이고 어머니는 송씨이다. 본래 대정군의 관노였으나 갑오개혁 이후 노비제가 폐지되자 관아의 급사이면서 향청의 우두머리인 오대현(吳大鉉)의 하예(下隸)가 되었다. 칼과 활 등 무예에도 뛰어났다.
1901년 5월 봉세관(封稅官)의 과중한 세금과 이와 결탁한 천주교도의 작폐가 심각하여 대정읍 인성리에서 주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민군(民軍)의 주장(主將)이 되어 민란을 지휘하였다.
민란은 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확산되어 제주성을 둘러싼 민군과 천주교도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부녀자들도 천주교도를 반대하는 궐기를 일으켰으며, 제주성 밖에 숨어 있던 천주교도들이 민군 측에 의하여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은 진압군을 파견하게 되었고, 프랑스 함대와 일본 군함까지 출동하였다. 민란 발생 당시 이재수는 인성리 이강(里綱)으로 있었으며 민란의 2차 봉기 때 오대현이 붙잡히자 뒤를 이어 서진장(西陳將)으로서 비타협적 무력 투쟁을 강행하였다. 민란은 정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고, 이재수는 6월 13일 정부군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10월 9일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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