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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달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씨알
「대한계년사 2」의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끝(전문)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조선왕조 말기의 역사 기록이다. 고종1년인 1864년부터 1910년 한일병탄의 역사를 시기별로 저술하였다. 이 책은 일제 침략자에 대한 항거와 독립협회 운동을 중심으로 시대를 기술하고 있으며 저자가 직접 경험한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서 특별히 독립협회에 대한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에도 불구하고 사가로서의 역사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결여 되어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 책에 나오는 동학 관련 기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학 지도자들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12개조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성숙한 민권의식과 평민들의 위대한 개혁정신을 보여준다.
1.동학교도와 정부 사이의 오래된 혐오감을 씻어 내고 서민을 위한 정사에 협혁할 일.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알아낸 후 엄밀히 징계할 일.
3. 횡포한 부호 무리는 엄히 징계할 일.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무리의 못된 버릇을 징계할 일.
5. 노비 문서는 태워버릴 일.
6. 일곱 가지 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패랭이는 벗도록 할 일.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일.
8. 명칭도 없는 온갖 세금을 모두 없앨 일.
9. 관리 채용은 지체와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일.
10. 왜적과 간통하는 자는 엄히 징계할 일.
11. 공채와 사채를 막론하고 기존의 빚은 모두 없앨 일.
12.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할 일.
1894년 5월 동학농민들은 일본군의 조선 진주 사실을 알고 '전주화약'으로 점령하였던 전주 감영을 떠나며 초토사인 홍계훈에게 폐정개혁안을 제출하였다. 개혁안의 내용이 당시 유교의 주자가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히 혁명적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농민운동을 이끌어간 지도자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개혁안에 내포되어 있는 그들의 정의와 평등에 대한 염원 그리고 토지 균등 분배에 대한 신념에 감동하였다. 좋은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잘 사는 대동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조상들의 처절한 분투에 감사하며 그런 조상들이 계셨음에 깊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자주 선각자인 동학농민지도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이 누구에게 그런 혁명적인 사고의 씨앗을 받았는지? 그런 사상이 어떻게 그들 안에서 계속하여 성장하였는지? 어떻게 신념으로 생명을 불사하는 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를 묵상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동학과 시대적 상황과 호남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동학농민혁명의 시대를 산 사가들과 지식인들이 쓴 역사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배운 12개조의 폐정 개혁안을 찾았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추적해 보니 천도교인 ‘오지영’이 쓴 <동학사>라는 소설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으로 나왔다. 소설을 아무리 역사를 근거하여 썼다고 해도 사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동학 농민혁명을 영웅적으로 기술하고 싶은 우리 사가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소설의 기록을 마치 진짜 1차 사료인 것처럼 그대로 사용하였고 우리 후손들은 그 사실에 놀라며 자부심을 가지고 배웠다. 12개조 폐정개혁안이 소설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알면서 농민혁명의 선각자들에 대한 감탄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1894년 농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의 의미와 인내천사상에 공감한 농민들의 의식이 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과거 역사를 미화시키기 위해서 허구를 팩트로 기술한 사가들의 의도이다. 왜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허구를 팩트화시켰는가 말이다. 이런 역사 첨가와 과장이 비단 이 사건에만 있었겠는가? 이런 역사 왜곡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일제는 동학농민혁명을 조선 농민들의 항일전쟁으로 보지 않고 처음부터 사교(邪敎)동학비도들의 난으로 치부해서 농민들의 항일운동을 역사에서 지우고자 하였다. 이런 심각한 왜곡 때문에 우리는 일제 침략에 저항한 조선 농부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참전을 지금도 교조신원운동과 부패한 조선 정치 개혁의 측면에서, 반봉건의 입장에서 접근하게 된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역사왜곡이나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처음부터 부패한 양반사대부를 겨냥하였기 때문에 개혁의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양반 지식인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제의 심각한 역사 왜곡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역사 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왜곡이라고 지탄하는 중국의 동북 공정과 일본의 고대사는 억지와 허구가 너무 심한 것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제국의 역사, 독재국가의 역사는 억지와 왜곡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허구를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은 은 민족의 미래를 생각할 때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러나 우리 민족,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드에 우리 모두가 젖어 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역사 왜곡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황현 저 ⌜오하기문⌟과 ⌜매천야록⌟, 윤효정 저⌜대한제국아 망해라⌟, 정교 저 ⌜대한계년사⌟를 읽었다.
아래는 정교 저 ⌜대한계년사 2⌟에 나오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부분을 조금씩 발췌하였다.
책에 써진 순서대로 발췌해서 단순하게 정리해본다.
1894년 여름 4월
○ 호남의 동학 무리들이 봉기하다.
이때 전라도 고부<서울에서 6백 리이다>군수 조병갑이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음이 더욱 심했다. 백성들이 원한을 이기지 못하여 무리를 모아 소요를 일으켰다.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해 실정을 자세히 조사해 밝히도록 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태편스럽게 놀면서 시간만 헛되이 보냈고, 또한 이 기회를 이용해 백성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니, 도리어 민심이 더 소란해졌다. 이에 시골 백성들이 전(前) 녹도만호 전봉준을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드디어 3월 25일 동학의 무히 모두 5~6만 명과 함께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누런 깃발을 들고 4개항의 명문을 내걸었다.
“하나,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재물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둘, 충•효를 함께 갖추어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
셋,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 없애고, 성인의 도리를 맑고 깨끗이 한다.
넷, 군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을 모두 없애버린다. 기강을 크게 떨치고 명분을 바르게 세워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다.”
○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동학 무리들을 치다.
홍계훈은 초토사로 임명되어, 장위영 병사 8백 명을 데리고 난리를 일으킨 무리를 토벌하여 가게 되었다. 4월 2일 전주를 향해 떠났다. 청나라 군한 청원호, 또 우리나라의 증기선 창룡호, 한양호 2척( 주세로 걷은 살을 운반하기 위해 외국에서 구입했는데, 모두 노후하여 썩어 있었다)를 거느리고 갔다. 청나라 사신 원세개가 서방걸에게 따라가서 사정을 엿보도록 시켰다.
○ 고부 군수 조병갑은 되가 있어 감옥에 가두고, 안핵사 이용태도 죄가 있어 김제군에 귀양 보내며 전라 감사 김문현은 죄를 물어 관직을 삭탈하였다.
○ 김학진을 전라 감사에 이원회를 양호 순변사에 임명하다.
임명한 바로 그날 조정에 하직 인사하도록 해다.
○ 엄세영을 삼남 안렴사에 임명하다.
백성의 폐단을 물어가며 찾아내, 그때그때 바로 고고하도록 했다.
○ 동학 무리가 전주를 함락하니, 전 감사 김문현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이때 동학의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전운사 조필영은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당아났다. 난민들은 마침내 관곡 수천 석을 탈취하고, 무기를 거두어 모아들였다. 28일(4월)에 전주를 함락하니, 김문현은 황급히 달아났다. 서울에서는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 난리를 일으킨 무리들이 전주의 남문에 방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형세를 살피건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걸출한 병사와 용맹한 장수들은 각각 정해진 지역을 지키고, 각 고을의 재주있는 선비들은 임금을 위해 충성을 가 바친다는 사실을 먼 곳까지 글을 띄워 전하라.
대개 나라의 형세를 말하자면,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이고, 밤새도록 하는 일은 단지 자기를 살찌우는 방법만을 궁리할 뿐이다. 자기 당파의 무리를 각 고을에 나누어 퍼뜨려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짓을 일삼게 했으니, 백성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초토사 홍계훈은 사람됨이 본래 무식할 뿐만 아니라, 동학의 위세에 겁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병하였다. 어질고 착하며 공이 많은 김시풍을 망령되이 죽이고 공을 구하려하이, 이는 반드시 벌을 받아 죽어야 한다.
가장 애석한 일은 3년 안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동학이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한다.”
○ 김문현의 죄를 물어, 거제도에 안치하다.
지시하였다.
“한 지역을 맡은 책임자로서 완부(완산)는 중요한 곳인데, 처음에 소란이 시작될 때 금지하여 그치게 하지 못했고, 느닷없이 난입할 때 막지 못했으며, 마침내 성까지 버리고 경계를 넘어 달아났다. 한 지역을 맡은 신하는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죽어야 마땅하다. 그 의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 죄를 범한 것을 따지자면 자연 해당하는 형벌이 있겠지만 형량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거제부에 안치하도록 하라.”
이 조지치는 대간이 올린 글에서 거듭 귀양보내라고 한 때문이었다.
1894년 5월
○ 조병갑을 죄주어 섬에 귀양 보내다.
5월 4일이었다. 도학 무리의 난이 조병갑 때문에 시작되었는데도 그를 섬으로 귀양보내는 데 그치자, 당시의 사람들이 매우 분하게 여겼다.
○ 청나라 장수 엽지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도와주려고 아산에 이르다.
이보다 앞서, 민영준은 동학 무리의 난리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까 두려워해서 성기운과 함께 모의하여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청나라의 주일 공사 왕봉조가 일본 외무성에 청나라 군인이 조선의 요청으로 번복인 조선의 동학난을 토벌하러 1822년 임오군란때 처럼 원정을 간다고 아래와 같이 알렸다.
“… 지금 조선에서 보낸 전보를 받아보니, ”동학 패거리가 전라도에서 난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파괴했습니다. 그 형세는 북쪽으로 전주를 침범할 것 같습니다. 저희 나라는 군대를 보내 죄인들을 잡아 다스리려고 했으나 조사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만일 시일이 오래되어 더욱 널리 퍼진다면 이는 바로 상국에서 우려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 광서 8년 임오년과 광서 10년 갑신년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저희 나라 땅에서 도적들의 위험이 있었을 때, 황제께 의뢰하자 대신 소탕해 주었습니다. 감히 이러한 전례에 따라 급히 천자의 군대를 일으켜서 하루바삐 동쪽으로 보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변란을 철저히 평정하고 즉시 개선하신다면 천자의 군대를 오래도록 수고롭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
이때 이홍장은 직예제독 엽지초와 정예병 4천 명을 해안• 해정•도남•공북 등 네 척의 군함에 나누어 실어 보내고 또 수송선 네 척을 거느리고 갈 수 있도록 황제에게 아뢰어 요청했다.
5월 6일, 엽지초와 섭사성 등이 아산에 도착하여 정박했다. 조정에서는 이중하를 영접사로 임명하고 가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청나라의 조회에 대하여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1885년에 맺은 천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도 군인을 파송하겠다고 답하였다.
○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다.
…
5월 6일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인천항에 내려서 일본 영사관에 머물렀다. 우리 정부에서는 외무참리 민상호에게 인천으로 가서, 일본 공사를 만나 군대를 철수하도록 타이르게 했다. 민상호는 인천에 이르렀으나 밤이 이미 깊어 오오토리 게이스케를 만나지 못했다.
이튿날 7일,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길을 떠나 마포에 이르렀다. 우리 정부는 참판 이용직에게 오오토리 게이스케를 도중에서 만나 군대를 철수하라고 말하게 했다. 오오토리 게이스케는 ‘우리는 일본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다. 우리는 황제의 명령이 아니면 군대를 철수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마침내 그는 헌병대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와 일본 공관에 주둔했다. 이날 오후에 일본 병사 1백 50명이 각각 격림포(개틀링 기관총)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왔다. 또 병사 1백 명이 인천과 서울 사이에 있는 높은 산의 주요지점 및 강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까지 곳곳에 군막을 설치하고 주둔하면서, 망원경으로 사방을 관찰하였다.
○ 관군이 전주를 되찾다.
5월 8일, 홍계훈 등이 동학의 무리를 격파하고 전주를 되찾자 동학의 무리가 김제로 물러갔다.(동학농민군이 홍계훈 장군에게 폐정개혁안을 제출했다고 하는데 대한계년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책들은 27개조 요구를 제안하였다고 나온다. 그 내용은 크게 분류하면 탐욕스런 부패 관리 징계, 전정, 환곡, 군포의 세제 개선과 부당한 징세 철폐 그리고 외국 상인의 불법 활동 금지였다.) ○ 이때에 청나라 군대가 아산에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집을 내주어 그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한 경우가 많았다. 또 대규모의 군대가 연대에 구름처럼 모여 군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강함에 권총 자루와 탄약 10만발을 싣고 계속해서 왔다. 이홍장은 서울에 돌아가 경솔하게 싸움의 꼬투리를 일으키지 않도록 군령을 내렸다. 우리나라는 영국과 독일 두 나라 공사에게 청나라와 일본의 잘잘못을 가려주도록 요청하려 하였다.
7일, 청나라 제독 엽지초가 전주성 안 곳곳에 고시문을 걸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엽지초가 깨우치도록 타이른다. … 원세개가 전보로 보낸 조선 정부의 공문 내용을 따르자면 “전라도 관할 각현에서 도둑떼들이 변란을 일으켜 고을 십여 곳을 공격하며 함락시키고 또 북쪽으로는 전주를 함락시켰습니다. 삼가 북양 대신 이홍장에게 조선을 구원할 방안으로 황제께서 장수들에게 군대를 출동시키도록 명령을 내려 대신 평정할 주청해줄 것을 전보로 말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황제께서 번복(藩服)을 생각하시어 요청한 것을 굽어 살펴주셨습니다 라고 했다.
본 군문은 이러한 명령을 받고 도둑떼의 소탕을 독려하고자 이미 밤을 새워 바다를 건너왔다.
…
너희 위협받은 선량한 백성들이 즉시 해산토록 노력하거나, 혹 군영으로 와서 스스로 투항하면, 본 군문은 관대하게 처리하고 결코 깊이 캐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너희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기를 버리고 조를 뉘우쳐 투항해 온다면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끝내 어리석게 고집을 피우며 잘못을 위우치지 않고 관군에게 맞서 반항한다면 본 군문은 오직 극형으로 소탕하여 천토를 펼칠 것이다.
…
너희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목숨을 생각하여 도적의 우두머리에게 어리석게 붙지 말라. 위엄을 갖추고 특별히 위와 같이 타이르니 모두 알아듣도록 하라.
광서 20년 5월 7일.
5월 8일 섭사성 또한 같은 내용으로 충청도 공주감영의 문 앞에 고시문을 붙였다.
○ 일본의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키가 우리 대군주(고종)께 상소문을 올리다.
.....
생각해 보건대 우리 일본과 귀국은 동양에 함께 위치해 있으며 국토가 매우 가까워서, 실로 광대뼈와 잇몸,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할 뿐 만 아니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지금 여러 나라들의 대세를 볼 때, 정치를 하고, 백성을 가르치고, 법을 세우고, 재정을 관리하며, 농사를 권하고, 상업을 장려하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스스로 장점을 모두 드러내며 능력을 한 군데 집중시켜서 세계를 굽어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만들어진 법에만 굳이 매달려 임시 변통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세력을 다투어 스스로가 주인이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어찌 여러 나라들이 둘러보는 가운데서 서로 맞서서 자립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 조정은 또 저에게 귀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모여 이 방법을 검토하고 밝히도록 지시했습니다. 부강해지기를 위한 내실있는 정치를 애써 펼치고자 하는 목적은 두 나라가 운명을 함께 하는 우의와 서로 밀접히 돕고 의지하는 국면을 처음부터 보전하여 잘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판리대신이 저와 함께 모이도록 지시를 내리시어 그 말을 모두 다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 대황제께서 이웃 나라와 돈독히 지내려는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한다면, 외교적큰 틀을 이루는 데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메이지 27(1894)년 6월 26일 삼가 아룁니다.
○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다섯 가지 조항의 글을 올리다.
5월 23일,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5강령 26조목을 우리 정부에 보내어 모든 정사(政事)를 바로잡아 바꾸자고 요청했다.
“제1강령 서울과 지방의 쓸데없는 관원은 헤아려 줄이고, 그중에 반드시 줄일 수 없는 관리는 재주와 거망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하되 문벌을 따지지 않는다.
제 1조목 각 관직의 직분은 칙서에 자세히 기재한다. 내치와 외교를 총괄하는 큰 권한은 정부가 모두 관장하고, 정부 아래에 육부를 두어 예전의 육조와 같게 한다. 왕실 안에서 부리는 관직은 정부와 뚜렷이 서로 구별하며, 정부의 조치에 왕실 내의 관리들은 간여할 수 없다.
제 2조목 국정과 통상 업무는 현재 ldf의 형세에 대단히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마땅히 세상일에 통달한 사람들을 가려 뽑아 타협하여 처리한다.
제 3조목 정부에서 꼭 필요한 관원은 비록 수가 많더라도 남겨두고, 직무없이 한가로운 관청은 비록 적더라도 반드시 없애거나 또는 잘 헤아려 합치도록 한다.
제 4조 목 팔도는 그 안에 현으로 나눈 것이 너무 많으니, 마당히 줄여서 경비를 절약한다. 다만 이 일은 신중히 하여 지방의 관리들이 역량은 발휘하지 못하는 우려가 없도록 한다.
…
제 3강령 법률은 공평타당하게 정리하여 유감이 없도록 한다.
제 19조목 옛 법률 중 현재에 맞지 않는 것은 없애거나 고쳐서 새로운 법률에 추가한다.
제 20조목 재판하는 법은 공평하게 명백해야 한다.
제 4강령 군율을 정돈하고 군사의 수를 증가시켜, 내란을 진압하고 백성의 안정을 보장한다.
5강령 학교에 관한 법규는 가장 마땅하게 정한다.
제 21조목 무관은 마땅히 지난날의 태도를 바꾸어 글을 읽음으로써 한갓 용맹한 혈기만 믿지 않고, 문무의 재질을 겸비하도록 한다.
제 22조목 해군과 육군은 현재 남아 있는 군대로 다시 대오를 짜고, 국고 가운데 재정의 넉넉함과 부족람을 생각해, 해마다 군량을 약간씩 마련하여 병사의 숫자를 정한다.
제 23조목 범죄를 단속하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서울과 지방 각 요충지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 모집한 순경들은 일정한 기일 동안 훈련시킨다.
제24조목 학생들이 마땅히 읽어야 할 책은 그 사용여부를 분별한다. 각 도에 유학당(幼學堂)
을 세원 아이들을 교육한다.
제25조목 유학당을 세운 뒤 다시 중학교를 세우며, 서운에 해당하는 전문학교는 잠시 늦추고, 때에 맞추어 증설한다.
제26조목 나중에 전문학교를 세워 그 중에 뛰어난 학생들을 뽑아 다른 나라로 보애 공부시켜 견문을 넓히도록 한다.” 등등이었다.
7일을 기한으로 답을 보내달라고 했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어수선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의 정치를 바로잡아 고치는 데에 어찌 다른 나라의 간섭을 허용하겠는가?”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 그 충고는 따를 만하다.’ 했다. 이에 좌포도청대장 신정희, 예조 참판 김종한, 행호군 조인승을 개정위원에 임명하여, 그들이 결정하여 대답하도록 했다.
이튿날,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우리 외서에 조회하여 우리나라가 이전부터 독립국이었는지 아니면 청나라에 부속되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를 질문하고, 24시간을 기한으로 그 안에 회답해 달라고 했다. 대개 일본은 프랑스가 베트남에 썼던 옛 계략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 대회의가 열렸다. 일본이 이미 여러 나라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천명했으니 당연히 이것으로써 대답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또 우리나라와 청나라는 관계된 일이 있어, 역사에서 확인해보면 '독립'으로 대답하기 어렵다는 논의도 있었다. 이논의는 좌의정 조병세가 앞장서 주장하였는데, 우의정 정범조, 돈녕부사 김병시가 뒤따라 맞장구쳤다. 그러나 논의가 오래되어 결론이 나지 않자 전보로 청나라 이홍장에게 의논했다. 이때 의주에서는 전보가 불통이었기 때문에 안경수를 일본 공사관에 보내 답변 기한을 연기해 주도록 요청하고 또 이튿날 외아문 주사를 보내 다시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
이홍장은 "자신의 역량을 다하여 법을 만들어 온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내정은 상국도 간여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왜는 주변국이 아닌가? 결코 속지 말고,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일본 공사에게는 자주독립국으로 대답하는 것을 허락한다." 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그는 일본의 꼼수를 간파하고 조선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므로 '독립국'이라는 말을 써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
이때 형조 참의 이남규와 부사과 이설이 동학 무리와 농민들이 저항하며 난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수령과 관찰사들의 탐욕과 강탈, 전운과 균전과 잡세 등에서 나온 폐단임을 지적하며 바로 잡으라는 것과 도성으로 군대를 이끌고 온 일본의 내정 간섭을 탄식하며 일본이 결코 조선의 우방이 될 수 없다는 상소가 잇달아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은 내정 간섭을 단호히 물리치며 나라 일을 스스로 결정할 힘이 없었다.
이때 동학 무리들이 퇴각하여 장성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전라 감사 김학진에게 13조의 요구사항을 보내어 결재하여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전운사를 혁파하고, 옛날대로 읍에서 상납하게 할 것.
균전어사를 혁파할 것.
탐관오리들의 못된 버릇을 징계하고 내쫓을 것.
각 읍에서 많은 돈을 헛되이 써버린 아전들은 그 자신민을 죽이고 가족들에게 족징을 하지 말 것.
봄•가을 두 번 바치던 호역전(戶役錢)은 옛날의 예에 따라 호당 1냥씩 배정할 것.
각종 항목의 결전은 돈으로 거두되 부담을 균등하게 나누고 과도하게 나누지 말 것.
각 포구에서 사사로이 쌀을 교역하는 일을 엄금할 것.
각읍의 수령이 그 지방의 산에 매장하거나 장토를 구입하는 해위를 엄격하게 금지할 것.
각국 상인들은 각 항구에 매매하도록 하되, 서울에 들어와 시장을 설치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여러 곳으로 나가 제멋대로 행상하지 못하게 할 것.
행상과 보부상은 폐단이 많으므로 혁파할 것.
각읍의 아전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길 때, 뇌물을 받치지 못하게 하고 쓸 만한 사람을 골라 일을 맡길 것.
간사한 신하가 권력을 제 마음대로 휘둘러 국가의 일이 나로 그르치게 되니 그들의 관직 매매를 경계하여 다스릴 것.
국태공(대원군)이 국정에 간여한다면 민심은 거의 다스려질 것.
1894년 6월
○ 교정청을 대궐 안에 설치하다.
6월 7일, 고종이 일본의 제안에 따라 모든 정사를 개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영의정 심순택, 영중추부사 신응조, 판중추부사 김홍집, 영돈녕부사 김병시, 와의정 조병세, 우의정 정범조를 총재관으로 임명했고 지중추부사 김영수와 호조판서 박정양을 비롯하여 15명의 당상관을 임명하였다. 그들이 날마다 모여 상의하고 보고하여 시행토록 했다.
6월 12일, 신정희, 김종한, 조인승 등이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와 함께 남산 옛 병영 안에 있는 노인정에 모였다. 이튿날 다시 모여 폐단 개혁에 관한 다섯 가지 조항을 사리에 맞게 처리하는 일에 대해 의논했다.
제 1조 중앙 정부의 제도에서 지방 제도에 이르기 까지 적절히 고려하여 고치고, 인재는 빨리 선발한다.
제 2조 재정을 정리하고 부의 원천을 개발해야 한다.
제 3조 법률을 정돈하도 재판법도 마땅히 잘 살펴 정해야 한다.
제 4조 군비와 경찰은 서둘로 마땅히 바르게 고쳐 국내의 변란을 진압하도, 아울러 국가의 안녕을 보전하고 유지해야 한다.
제 5조 학교의 각 업무는 헤아려 정해야 한다.
6월 17일에 또 모여 의논했다.
○ 청나라 공사 원세개 등이 돌아가다.
원세개 등은 분위가가 좋지 않음을 보고 스스로 의구심을 품었다. 15일에 드디어 상민(商民)들을 거느리고 줄지어서 인천 제물포에 나아가 바다를 건너 자기 나라로 돌아가버렸다.
○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군대를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가다.
청나라는 일본에게 ‘군대 철수’를 권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와 일본이 함께 힘을 합하여 한마음으로 정치를 대신 처리해준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며 청나라와 함께 조선을 내정을 개혁을 제시하였다.
이때 심순택 등은 교정회의 때마다 은밀히 민영준의 지휘를 받고, 모호하게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 한 가지 일도 교정하지 않았다.
○ 6월 21일 새벽,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군대를 이끌고 광화문(경복궁의 정문)과 영추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지키던 병졸들이 깜짝 놀라 총을 쏘았으나 마침 누군가가 손을 흔들어 막았다.(고종이 사알을 보내 중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본 병사들이 합문으로 들어와 주위를 삥 둘러 겹겹이 에워싸고서 각 문을 지키자 안팎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부하를 보내 대원군이 대궐로 들어오는 행차를 맞이하도록 했다. 대신 김홍집 등 몇 사람이 비로소 대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위문을 드렸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들은 대권ㄹ 밖에서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는데 그 수를 다 셀 수 없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힘을 합해서 조선의 내정개혁을 돕자고 제안하였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고종이 거주하고 있는 경복궁 침범이었다. 그들은 국권의 상징인 왕을 인질로 삼고 대원군을 추대하여 친일파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로서 동학농민군을 부패한 관료와 양반 사대부를 일소하는 반봉건투쟁에서 방향을 바꾸어 침략자 일본에 대한 항일투쟁으로 결연히 돌아선다. 북접이 2차 봉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북접과 남접의 협상도 있었겠지만 일본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불타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전 조선 농민들로 하여금 총궐기하여 치열한 항일투쟁에 나서게 만들었다. 전라도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가 전 조선,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남부지역까지 확산된 것은 임금이 잡혔으므로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전 조선에서 공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 민영준를 죄주어 임자도에 안치하다.
일본군이 궁궐에 들어왔을 대 민영준은 궁궐 안에서 도망하여 숨어 있었다. 청나라로 가라는 왕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는 도망하던 중에 칠산의 백성들에게 붙잡혀 묶인 채로 평양에 있는 청나라의 군대에 넘겨졌다. 그러나 청나라 장수가 그를 석방했다.
○ 총제영을 혁파하다.
김윤식을 강화 유수로 임명했다. 지시하기를 “각 나라의 사례를 보건대 그 군사 업무는 모두 친왕에게 두어 관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해군과 육군의 군사업무는 대원군께 나아가 결정한다.”고 했다.
○ 일본인이 청나라 군대를 풍도에서 습격하여 패배시키다.
○ 궁궐 안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참고로 군국기무처는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가 발의하고 대원군과 친일파 개혁 관료들이 참여하여 성립되었으며 7월 12일에 설치되어 개혁 추진이 끝난 1894년 12월 17일에 폐지하였다.)
○ 일본 군대가 청나라 군대를 성환에서 공격하여 패배시키자, 청나라 장수 엽지초가 등은 평 양으로 달아나다.
○ 관제를 고쳐 2부 8아문을 설치하였다.
6월 28일 군국기무처가 2부 8아문으로 고쳐 정하고 그 명칭을 궁내부, 의정부, 내무아문, 외무아문, 군무아문, 탁지아문, 농상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이라 했다.
○ 군국기무처가 또 회의 안건을 보고했다.
(참고로 군국기무처는 최고정책 의결기관으로 폐지될 때 까지 제 1차 개혁 기간에 약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하였다. 청일전쟁 기간이었으므로 비교적 개혁파 인사들의 주장이 많이 반영되었다.)
1.공사 문서에 개국기년을 사용한다.
2.청나라와의 조약을 개정하고 각 나라에 전권공사를 특별히 파견한다.
3.문벌, 양반과 상민 등의 등급을 없애고 인재를 뽑아 쓴다.
4.문관과 무관의 높고 낮은 구졀을 폐지하고 단지 품계에 따른다.
5.죄인은 자기에게만 연루되며, 본인 이오의 친족에게 연좌되는 법률은 폐지ᅟᅪᆫ다.
6.정실 부인과 첩 모두에게서 자녀가 없는 경우에만 비로소 양자를 허용한다.
7.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후에 결혼한다.
8.부녀자의 재혼은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따지지 말고 그의 자유에 맡긴다.
9.공사노비의 법을 혁파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한다.
10.평민 중에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군국기무처에서 글을 올려 여러 사람의 논의에 부칠 것을 허가한다.
11.중앙 관리 의복제도는, 임금을 볼 때 입는 공복은 사모, 장복, 반령착수를 사용하고, 평상복은 옻칠한 갓, 답호, 실띠를 사용한다. 일반 백성들은 옻칠한 갓, 두루마기, 실띠를 쓴다. 병사들은 근래의 제도를 따르되, 장수와 병사는 마땅히 다른 복장을 하지 않는다.
12. 각 관공서의 관제는 7월 20일에 정한다.
15. 역인, 창우, 피공은 모두 면천을 허락한다.<나머지 2조는 생략한다>
1894년 7월
○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전쟁을 선포하는 조서를 반포하다.
7월 1일, 청나라가 전쟁을 선포하는 조서를 내렸다.
같은 날 일본도 전쟁을 선포하는 글을 내렸다.
○ 동학의 무리가 다시 일어나다.
이때 동학의 무리가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KS 무리가 충청도 이인역에서 모이자 관리를 보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진정시켰다.
○ 김홍집을 총리대신에 임명하다
○ 청나라 제독 위여귀, 총병 좌보귀 등을 보내어 평양에 주둔하게 하다.
조정에0서는 비록 새로운 곤제를 제정했으나, ㅁ두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ㅇ가 평양에서 벌이는 전투의 승패로써 대세의 움직임을 점치려고 했다. 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과 모의하여, 몰래 전 교리 이용호를 평양에 보내어 청나라 진영과 내통했다. 또 내부 주사 박세강, 전 도사 박동진을 호서지방의 동학 무리에게 보내 군사를 몰아 북진케 하여 반역을 도모했다.
궁중에서는 전 교히 송정섭, 무관 출신 황재현을 보내 충청 감사 박제순돠 호서 지방의 수령들에게 임금의 비밀 명령을 전달하고, 호서•호남 두 지역의 동학 무리와 함게 힘을 합해 북상하도록 했다. 이는 평양의 청나라 군대와 함께 <민영준은 벌써 청나라 장수에게 비밀 명령을 전했다> 힘을 합쳐 일본 군대를 격파하고 새 정부를 뒤집어엎고자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새 정부는 유명무실해지고 궁궐과 정부 사이에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이 생겼다. 얼마 되지 않아 정누는 궁중과 대원군의 계략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박제순에게 몰래 지시를 내려 박세강과 박동진을 붙잡아 금강 나루에서 목베어 죽였다. 송정섭과 황재현을 도망쳐서 죽음을 면했다.
○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다.
“대조선국과 대일본국 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철수 사안을 조선국 서울 주재 일본국 특병전권공사에게 맡기고 그가 대신 힘을 다한다는 사항에 대해 진심으로 조약을 맺었다. 이후 두 나라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이미 서로 도와 공격과 수비를 함께 하기로 입장을 세웠다. 관련된 사실들의 원인을 분명히 드러내고 아울러 두 나라가 함께 하는 일이 분명히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뜻에 따라 아래의 두 나라 대신은 각각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조관을 의논하여 결정한다.
제1조 이 맹약은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국경 밖으로 물리쳐 조선국의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고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누리는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일본국은 이미 기꺼이 청나라에 개한 공격과 수비를 다투는 전쟁을 떠맡기로 했으니, 조선국은 일본군대의 수시 진퇴에 따라 미리 군량을 마련하는 등 마땅히 처리해야 할 여어 가지 사항을 잘 헤아려, 반드시 도움을 주고 편의를 제공하는 데 모든 힘을 다 한다.
제3조 이 맹약은 청국과 화약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려 파기한다. 이를 위하여 두 나라 전권대신이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어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 개국 5백3년 7월 26일. 외무대신 김윤식.
대일본 메이지 27년 8월 26일, 특명전권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
○일본과 청나라가 평야에서 크게 싸웠다. 청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총병 좌조귀가 죽고, 제족 엽지초, 총병 섭계림, 풍승가, 위여귀, 마옥곤 등이 모두 도망을 가다.
1894년 9월
○ 박영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그 죄를 풀어주었다.
○ 일본과 청나라가 평양에서 크게 싸웠다. 청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총병 좌보귀가 죽고 제독 엽지초, 총병 섭계림, 풍숭가, 위여귀, 마옥곤 등이 모두 도망가다.
○ 장수를 보내 동학의 무리를 치다.
이때 동학의 무리들이 크게 번성하여 여러 고을에서 멋대로 날뛰면서 수령들을 살해했다. 삼남도 또한 그 피해를 입었는데, 곧바로 안산과 죽산을 침범하자 영관 이두황, 성하영 등를 보내어 그들을 쳤다.
○ 순무영을 설치하다.
동학의 무리들이 걷잡을 수 없이 날뛰자 순무영을 서울에 설치했다. 신정의를 양호 순무사D 임명하고 모든 군대를 지휘하여 상황에 따라 토벌하거나 달래도록 했다.
1894년 10월
○장수를 보내 동학의 무리를 치다
신정희가 별군관 이규태를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동학의 무리들을 치자고 요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규태는 통위영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청주로 향했고, 공주 중군은 대규모의 군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어 출발해 나아갔다.
( 참고,
일제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일본군 후비 제19대대 3개 중대를 투입하였다.
1중대는 ‘동로’인 대구가도, 즉 일본군 병참선이 토하는 가도를,
제2중대는 ‘서로’인 공주가도를 서해안을 따라 전라도로 향하는 길로 남하하였다.
제3중대는 ‘중로’로 북접의 본거지인 보은군으로 진행하는 청주가도로 남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남서부로 몰아서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일본군들은 조선 정부군과 민보군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을 몰살하였다.
일본군은 장차에 조선 통치에 방해가 될 항일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군은 조선을 전복시킬 수 있는 반군 세력을 타도하기 위하여,
민보군은 감히 양반 사대부에게 칼을 겨눈 상놈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함께 나란히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 김학우(개화파)를 암살하다
이보다 앞서(6,7월쯤이다.) 통위사 이준용은 동학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인심이 흉흉해진 때를 틈타 군무 참의 박준양, 전 참판 이태용, 내무 주사 정인덕 등과 은밀히 의논하고, 내무 주사 박세강전 도사 박동진 등을 보내어 동학 무리와 함께 모의하여 서울 습격토록 했다.
만약 서울 백성들이 놀라 동요하고 임금님의 가마가 난리를 피해 궁궐을 옮기면, 이준용이 한편으로는 그 부하 군대로 대군주와 왕태자를 시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수하의 흉악한 무리들을 지휘하여 정권을 잡고 있는 고위 관리인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살해하여 정부를 뒤엎고 임금 자리를 찬탈하려고 한 것이다.
정인덕이 그 음모를 전 주사 임진수, 의정부 주사 김명호, 우생 허엽에게 알렸고, 허엽은 음모를 자기 친구인 전북한, 관성장 이승휘에게 얘기했는데, 이승휘가 반란 모의를 신정부에 고발하였다. 유길준 등이 이승휘와 허엽을 가두고 심문했지만, 허엽은 사실대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참고, 김학우는 김홍집 내각에서 법무아문 대신 서리로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다. 갑오개혁을 반대하는 이준용이 자객을 보내 암살하였다.)
그 후 동학의 무리는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때마침 일본은 오오토리 게이스케를 소환하고, 그를 대신하여 일본 내무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를 전권굥상에 임명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원군이 신정부와 서로 알력이 있으며, 몰래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와 장수와 내통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알리고 대원군이 장악한 권력을 빼앗고 그의 자택 운현궁으로 돌아가게 했다. 박세강, 박동진은 충청 감사 박제순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문에 이준용의 반역 모의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에 그의 패거리인 전동석이 먼저 정권을 잡고 있는 고위 관리 여러 사람을 죽여 일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에 3일 밤 술시에 최형식에게 칼을 품고 김학우(당시 법무협판이었다)의 집으로 가서 찔러 죽이게 했다. 고치홍, 이여익, 서병규, 이영배, 김한영, 장덕현, 최형순도 차례로 그에게 손을 댔다.
……
이보다 앞서 궁궐에 있던 대원군은 자신이 부리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김학우에게 보내면서 수령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군국기무처에 있었던 김학우가 여러 사람들에게 소리쳐 말하기를, “이 어른이 다시 구습을 밟으려 한다.”하고 결국 허락하지 않았다. 대우너군을 이것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것이다.
동학 무리가 처음 일어났을 때, 유길준, 기학우 등은 기회를 틈타 여러 민씨들이 잡고 있던 정권을 뒤엎고, 그들을 대신하려고 은밀히 동학 무리와 내통하여 모의했다. 또 사람을 화도 <제물항 부근에 있다>별장 김계현에게 보내 그 계획을 알리고 함께 힘을 합하자고 했으나 <당시 김계현의 부하병사는 100여 명이었다>, 김계현은 따르지 않았다. 유길준 등이 이것을 마음에 품고 있다가 서울과 지방의 관제 개혁을 할 때에 화도진을 없애버렸다.
○일본이 청나라 구련성을 빼앗다.
9월 26일과 27일,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군대가 압록강에서 전투를 벌렸는데, 청나라 군대가 도망갔다. 9월 29일, 일본 군대가 구련성에 이르렀다. 이달 10월 3일, 청나라 수비병이 어지럽게 도망쳐 흩어지자, 일본 군대가 드디어 구련성을 빼앗았다. 또 봉황성을 빼앗고 금주로 진격하자, 청나라 부도통 연순은 겁을 집어먹고 어지 할 바를 몰랐다. 제독 서방도가 스스로 전투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포대를 지키던 조희업, 복건 제독 정지위가 모두 힘껏 도와주지 않자, 서방도는 결국 고군분투하다가 크게 패해 금주를 잃었다.
……
10월 24일, 일본이 드디어 여순을 빼앗았다. 천연의 요새로서 비록 천군만마가 공격해도 결코 빼앗지 못할 곳을 불과 열아홉시간도 지켜내지 못했다. 청나라 해군 부제독 헨너켄은 “여순 항구는 산과 고개가 첩첩이 겹쳐 있어 하늘이 내린 험준한 요충지이며, 또 기계식 포대를 갖추고 있다. 만약 적이 길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막는다면, 지키는 자를 굶겨 죽이는 방법 외에는 감히 넘겨다 볼 수 없다”라고 말했었다. 그 군량과 무기는 3년은 충분히 버틸 만한데도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 홍주 목사 이승우를 겸토포사에, 지중추원사 박제관을 호서위무사에, 전라 감사 이도재를 겸호남위무사에, 선무사 이중하를 영남위무사에 임명하다.
(참고로 이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국군기무처가 다 동학농민들을 토벌하거나 아니면 회유시키는 직책들이다)
○관군과 일본군이 공산에서 동학의 무리를 공격해 격파하다.
(참고,
정교는 우금치에서 일어난 농민군의 사활을 건 두 번의 대 전투를 "관군과 일본군이 공산에서 동학의 무리를 공격해 격파하다."라는 한 마디로 정리하였다. 이 한 마디에서 우리는 당시 진보 지식인들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을 읽어 낼 수 있다.
당시 농민군은 수만 명에 이르렀지만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하였고 일본군 후비 제19대대 3개 중대는 전체 약 600여 명이 이었으나 개틀링 기관총과 크루프제 야포와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한 근대식 군인이었다. 농민군 200명을 일본군 1명이 대적할 정도로 양군 간의 화력의 차이가 컸으며 게다가 겨울이어서 농민군은 혹한에 시달렸다. 수만 명이던 농민군은 전투를 치르며 3천명으로 숫자가 줄어 들었고 수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남기고 패퇴하였다. 최소한 3만 명의 농민군이 전사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아직도 전사자의 숫자는 명확하지 않다.)
○승선원 공사청을 혁파하다.
종전의 공문 반포규정도 지금부터 폐지한다. 호위 부장 및 통위사, 장위사, 총어사, 경리사의 네 자리를 모두 없앤다.(모두 다 조선의 수비를 담당했던 기관들의 대표직이다)
○ 박영효를 내무 대신에. 조희연을 순무 대신에, 서광범을 법무 대신에, 신기선을 공무 대신에 임명하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갑신정변의 주동자들이나 이노우에 공사의 중재로 고종에게 정변을 일으킨 대역무도죄를 용서 받았다. 일본이 갑오개혁을 완수하고자 두 번째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해 그들을 기용하였다.)
1894년 11월
○ 일본이 청나라 봉천을 공격하자, 수장 송경이 맞부딪쳐 싸웠으나 패배하다.
○ 일본이 청나라 복주를 빼앗다.
(참고로 전봉준이 인솔한 농민군은 11월 8일에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였다. 11월 27일 태인 전투에서 패배하자 전봉준은 자신을 따르던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1894년 12월
○ 일본이 청나라의 우장을 빼앗다.
○ 동학의 무리 전봉준을 체포하다.
전라 감사 오도재가 동학 무리의 우두머리 전봉준을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했다. 그 뒤에 전봉준을 처형했다.
(참고로 전봉준은 12월 10일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한 전봉준은 1894년 12월 2일 순창 복흥산 피노리 마을에서 옛 동지의 신고로 지방 민병대의 습격을 받아 붙잡혀 관군에게 넘겨졌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음력)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경선과 김개남은 12월 1일에 체포되었고 손화중은 11일에 고창에서 체포되었다. 김개남은 전주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 종묘에 자주독립을 고하다. (홍범 14조 선포)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개국 503년(1894년) 12월 12일에 조선의 대를 이은 왕모가 감히 역대 조상 임금의 신령 앞에 고합니다.
생각건대 내가 어린 나이로 우리 조상의 큰 왕업을 지켜온 지 오늘까지 31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오직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제도를 그대로 지켜 어려운 형편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그 남긴 위업을 그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하늘의 마음을 잘 받든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겠습니까. 진실로 우리 조상들이 돌보아 주고 도와준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 왕조를 세우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 지도 어언 503년이 되는데, 나의 대에 와서 시운이 크게 변하고 문화가 개화했습니다. 우방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니, 오직 자주독립을 해야 우리나라를 튼튼히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찌 감히 하늘의 시운을 받들어 우리 조상이 남긴 왕업을 보전하지 않으며, 어찌 감히 분발하고 가다듬어 선대의 업적을 더욱 빛내지 않겠습니까.
……
나는 이에 14개조 조목의 홍범을 하늘에 있는 우리 조상들의 신령 앞에 고합니다. 조상이 남긴 업적을 우러러 능히 공적을 이룩하고 감히 어기지 않을 것이니, 밝은 신령은 굽어살피기 바랍니다.
하나,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세운다.
하나,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과 외척의 본분과 의를 밝힌다.
하나, 임금은 정전에 나와서 정사를 보되 정무는 직접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재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하나, 왕실에 관한 사무는 나라 정치에 대한 사무와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
하나,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와 권한은 명백히 제정한다.
하나 백성들이 내는 세금의 총액은 법령으로 정하 ㄴ비율에 다르고 함부로 명목을 더 만들어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다.
하나,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일과 경비를 지출하는 일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
하나, 왕실의 비용을 솔선하여 줄이고 절약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 관청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
하나, 왕실 비용과 각 관청 비용은 1년 예산을 미리 정하여 제정의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하나, 지방 관제를 조속히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하나,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 익히도록 한다.
하나, 장관을 육성하고 징병법을 적용하여 군사제도의 기초를 확정한다.
하나, 민법과 형법을 엄격하고 명백히 재정하여 함부로 감금하거나 징벌하니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하나, 인재 등용은 문벌에 얽매이지 말고 관리들을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이튿날 조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 독립과 내정 개혁에 관한 일을 널리 알렸다.
○ 의정부를 개편하여 내각으로 만들다.
○총리대산 김홍집 등이 왕실의 존호를 아뢰다
주상전하는 대군주 폐하, 왕대비 전하는 왕태후 폐하,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 왕세자 저하는 왕태자 전하, 왕세자빈 저하는 왕태자비 전하로 부르고 전문은 표문이라 칭하자는 E 대해서 모두 그대로 승인했다.
○ 소의문 밖에서 동학 무리의 우두머리 김개남의 시체에 다시 참형을 가하다.
(참고, 김개남은 12월 2일 강화 진무영의 군사에게 사로잡혔으나 이도재가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즉결 처분으로 머리를 베어 죽였다. 그리하여 12월 16일에 김개남의 시체를 서울로 가져와 참형을 가하고 시체를 이틀간 거리에 매달아 전시를 하였고 다시 전라도 지방으로 보내 전시하게 하였다.(고종실록 31년 12월 2일, 16일, 25일)
○ 순무영을 혁파하다.
남쪽 지방의 동학도가 차례로 평정됐기 때문이다.
(참고로 순무영은 순무사의 임시 군영으로 고종 31년 동학교도 등을 토벌하기 위하여 설치하고 신정희를 양호 순무사로 임명하였다.)
○ 일본이 청나라 개평성을 격파하다.
이 달 14일 청•일 양군이 개평성 밖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4시간 만에 일본 군대는 개평성을
빼앗았다. 또 금주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청나라 군대는 장성 밖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전 조선을 공황상태로 몰고 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끝났다.
⌜대한계년사2⌟를 읽으며 동학농민군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넑혔다. 대원군과 농민군 지도자들의 관계를 알게 된 것도 큰 소득이다.
정교의 ⌜대한계년사2⌟는 김옥균이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것으로부터 시작함으로서 1월에 있었던 고부 농민봉기는 누락한다. 그리하여 그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기술은 자연스럽게 3월에 있었던 무장에서의 1차 동학농민군의 무장봉기부터 시작된다. 그는 봉기의 원인을 제공한 부패 관리 조병갑, 이용태, 김문현의 탐욕을 고발한다. 그러나 동학농민군들의 전투나 조직, 그들의 거사 동기 등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이었을까? 그 기술이 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구한말 관료로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하며 조선의 개화를 위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던 정치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일본군의 조선 상륙과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조선의 청나라와의 관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갑오개혁의 내용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고종을 인질로 삼은 사건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조선의 농민들의 제2차 봉기도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1년간 계속된 동학 농민들의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저항과 반봉건 세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부패한 관료와 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개혁정신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이나 평가 없이 친일 개화파들이 만들어낸 홍범 14조를 끝으로 1894년 마무리하고 1895년 역사 기록으로 넘어간다. 아마 식민지 시대에 역사를 기록하는 한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의 관계 그리고 갑오개혁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사건에서 드러난 세 개의 얼굴을 임을 가늠할 수 있도록 기록해주었음이 감사하다. 식민지 시대에 역사 기록의 1910년 한일늑탈 이후로 이리(익산)로 낙향해서 살았으며 1925년 사망하였다.
나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몇 가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제우 사망이 1864년인데 짧은 30년 만에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기록들이 말하는 대로 교도들이 몇 백만이 될 수 있겠는가?
당시 조선 인구가 1,100만 명도 안되는데 인구 3,4명 중의 1명이 동학교도라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
사망자가 최소한 3만 명에서 30,40만 명이라고 하는데 과연 가능한 숫자인가?
2차 봉기 때 삼례에 집결한 숫자 1만 명 정도라고 하였는데 과연 삼례가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들과 순 동학도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2차 봉기 때 함경도를 제외한 전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일어나 일본군과 관군과 전투를 벌인 실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일본군과의 전투가 대부분의 조선 반도에서 일어났고 전본준 장군이 이근 우금치전투와 태인전투 이후에 있었던 종곡전투, 대둔산전투, 연산전투, 장흥전투, 진도전투를 치룬 동학농민군들은 누구인가?
제 1차 봉기에 무장투쟁을 도가 아니라며 반대한 북접이 제 2차 봉기에 참여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북접의 지도자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연합해서 우금치전투를 이끌어간 손병희는 어떻게 조선의 관군과 민보군과 일본군의 살벌한 칼날을 피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수 천 수 만 명이 움직이는 동학농민군들의 무기와 의식주 해결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대원군과의 동학 지도자들의 관계가 농민군 봉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고종이 인질로 잡힌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까?
동학 지도자들은 조선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았을까?
김개남의 경우는 그런 의지가 있었고 손화중이 선운사 뒤 암벽에서 비결을 꺼낸 뒤 거사 도모에 참여했다고 하는 것은 정씨의 출현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등
대원군과의 관계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의 북상 원인이 되었을까?
스스로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찾아서 정교의 ⌜대한계년사2⌟와 황현의 ⌜매천야록⌟과 ⌜오하기문⌟까지 읽게 되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어떤 의구심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2차 봉기가 전 조선적으로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배경과 이유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권력다툼으로 조선의 상황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지만 조선의 상놈들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과 고종을 위협한 사건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침략만행에 분노하며 일제와 싸워서 일본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과 위기감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반봉건, 반부패의 구호를 멈추고 척왜양이를 부르짖으며 무장 투쟁으로 항일전투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통해서 조선을 보며 한국을 본다.
일본과 청나라를 보며 오늘의 중국과 일본을 본다.
동북아 삼국이 함께 살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나의 의구심이 다 정리될 때까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탐구고자 한다.
2024.4.18.화,묘시
우담초라하니 수정하다.
참고문헌
정교 저, 조광 편, 변주승역주,⌜대한계년사2⌟,소명출판,2004년
P . S
정교는 동학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술을 하면서도 당시 농민들이 처해진 상황이나 동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 기술에 인색하다. 그의 농민혁명에 대한 부정적 기록이 ⌜대한계년사1⌟에 나온다. 역사는 동학농민혁명에 대원군이 개입된 것을 부정하거나 침묵하고 있지만 정교는 대원군의 관련설을 밝히고 있다.
⌜대한계년사1⌟권에 1893년 여름 4월
○ 선유사 어윤중을 보내어,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 무리들을 널리 깨우다
철종 장황제 14년(1863년) 계해년에 경주의 최제우<어릴 적 이름은 최복술이다>라는 사람이, 사악한 도로써 무리를 불러모아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의’라는 열세 글자의 주문을 외고, 붓을 들어 귀신을 내리게 하고 칼춤을 추며 하늘로 날았다. ‘동학(東學)’이라 이름하여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여 속이니, 경상도에 명하여 잡아 보내도록 하고 조사한 끝에 처형했다.
이때에 관리와 유생들이 최시형 등이 유생이 올리는 상소라 칭하며 글을 대궐에 바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 무리 수만 명을 불러, 서울에서 모임을 갖고 모반을 괴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추대하여 했는데 이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에 관리와 유생들이 최시형을 베어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그 무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이어 보은<충청도에 속하며, 서울에서 3백 80리이다>에 무리를 모아 진을 치고 웅거하였다. 성을 쌓고 깃발을 세워, ‘서양을 물리치고, 왜놈을 물리친다’고 칭하였다. 여기적서 호응하여 세력이 점점 커졌다. 이에 어윤중에게 빨리 달려가 민심을 무마하도록 했다. 이어서 윤음을 내려 널리 깨우쳤다. 임금이 이르기를,
“너희 무리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어주기 바란다. 우리 역대 훌륭한 임금님들께서 모범이 될 만한 교훈을 크게 드러내시어, 떳떳한 도리를 밝혀 사람이 해야 할 길을 세우고, 정학(正學)을 높이어 나라의 풍속을 이끌었으므로 사농공상들이 각자 그의 직업에 편안히 종사한 지 이제 어언 5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세대가 지나면서 풍속이 투박하여져, 취향이 제각기 다르므로, 터무니없는 무리들이 저주하는 술책으로 온 세상을 속이고 꾀어 우리 여러 백성들을 그르치고 있다. 술에 취한 듯 넘어진 듯 치달리는데도, 붙잡아 줄 수도 깨어나게 할 수도 없다.
…생략…
너희들은 지금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깃대를 꽂아 서로 호응을 하면서 감히 ‘의병을 일으키자’는 글자를 써서, 혹은 통문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방문(榜文)을 내걸기도 하며 인심을 선동하고 있다. 너희들이 비록 사리에 어둡고 고루하다고는 하더라도, 어찌 세계의 대세와 조정에서 맺은 조약을 들어보지도 못하였는가? 그런데 감히 말을 핑계 내어 화를 빚어내려 했으니, 이것은 의병을 일으키는 행동이 아니라 곧 난리를 일으키는 짓이다.
…생략…
또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하여 곤란하고 괴롭게 만든 탓이다. 탐관오리들은 곧 징계를 할 것이다. 나는 백성들의 부모된 자로서 백성들이 스스로 불의에 빠진 것을 모니 불쌍하게 여겨져 몹시 슬픈 생각이 드는데, 어찌 어두움을 깨우쳐 밝게 인도할 길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에 호군 이윤중을 선무사로 임명해 내 대신 그곳으로 급히 보내어 이 윤음을 널리 알리는 바이다. 이 또한 형벌을 시행하기에 앞서 먼저 교화를 시키는 뜻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서로 알려 해산하도록 하라.
협박을 당하여 억지로 따라간 무리들은 모두 양민이다. 지금 만약 그 괴수를 잡아 바치거나, 그 정보를 몰래 알린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라 큰 상을 줄 것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뉘우치지 않고 해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가 마땅히 큰 처분을 내릴 것이니, 너희들은 확실히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고쳐서 스스로 국법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했다.
이에 도둑의 무리가 물러가 흩어졌다.
○ ‘척사윤음’을 전라도와 충청도에 내리다.
(앞의 척사윤음과 같은 내용이지만 일부 문장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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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달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씨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