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크지 않은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필자가 주일학교까지 설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보다 더 훌륭한 주일학교에 대한 교육전문가들이 많이 계시지만, 그러한 전문가를 모실만큼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기에, 필자가 최선을 다해 주일학교까지 설교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설교가 아니라 공부이다.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쌍방적 대화이다.
많은 분들이 아이들의 뇌를 '스펀지'에 비유하곤 한다. 즉, 옳고 그름을 스스로 분별치 않고(못하고), 정보와 지식들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재적 지식과 경험으로 구성된 마음의 구조에 따라 그것을 다시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기억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논리적이지 않고 전혀 엉뚱한 질문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동문서답을 하며,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 대화들이 럭비공처럼 방향성 없이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분별과 통합을 익혀가며, 개념들을 정리하고 이해하는 듯 하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대화하기란, 대단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기독교 발달교육의 필요성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명제적 정의를 기억하기보다는 이야기와 스토리를 더 잘 기억한다. 그래서 어른들도 목사님의 설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도 예화는 잘 기억한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도 이것을 잘 아신 것 같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비유와 이야기들을 사용하여 설명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가 경험하기로 고등학생부터 이론적 교육이 가능하지만, 중학생까지는 성경에 나오는 주제들에 대한 개념적 교육이 매우 어려웠다. 가르치는 사람도 힘들고, 배우는 학생들도 매우 어려워하고 재미없어 하다 거의 대부분 포기한다. 정보 전달식 교육이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필요성과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뇌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주일학교를 과감히 그냥 이야기(대화)를 하거나 수준에 맞는 책을 선정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식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중학생 정도 되어야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니 초등학생 저학년이 문제이다. 사실 프로이트가 5세나 8세 이전 모든 심리와 성격구조가 형성된다고 한 것은 경험적으로 매우 일리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10살이 넘으면 자주성과 독립성이 나타나면서 권위에 대한 믿음과 순종, 신뢰보다는 의심과 저항, 분별로 전환이 일어나 종교적 교육에 흥미를 잃고, 의심하고, 다른 이론들과 비교하고, 저항하고 불신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 즉, 우리나라 나이로 10살 이전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느냐에 따라 '수용적 방향으로 갈 것인가?, 거부와 저항적 방향으로 갈 것인가?'가 1차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5세부터 10세까지의 신앙교육이 아이들 신앙생활의 미래를 판가름하는 1단계 관문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성경적 지식을 전달하려는 방식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 아이들은 개념이나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신앙생활, 성경은 재미없고 어려운 것'이라는 이미지와 각인을 심어줄 수 있다. 교육의 역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바깥 세상에 대해 매우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는 시기이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이 되기 이전까지는 오감(몸)을 통해 경험되는 지식들을 축적하는 시기이다. 즉, 몸을 통한 오감을 활성화시켜 몸과 정서, 몸과 인지의 신경망을 발달시켜야 한다. 즉, 경험과 체험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미지의 중요성
이미 많은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으며, 특별히 스포츠과학에서 보고되고 있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경기를 생각으로 상상할 때 놀랍게도 실제 운동경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이 몸의 신경과 근육들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부터 유대인들이 신명기 6장에 말씀하고 있는 '쉐마' 교육법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묵상'의 히브리 사전적 의미는 '반복하여 읊조리다, 반복하여 되뇌이다'이다.
한때 '성경 암송법'이 유행한 적이 있다. 분명 '암송법'을 통해 유익한 경험들을 했지만, '외운다'는 것이 주 목적이 되면서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어려워하고 힘들어하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다. 그 이유는 외워야 할 내용들에 대한 내용의 의미를 모르고, 그 내용에 대한 이미지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념을 기억하기보다는 이미지를 더 잘 기억한다. 그래서 외우는 것을 힘들어하고, '백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주로 보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볼 수 있는 것들보다 더 많다. 특히 기독교(모든 종교)는 더욱 심하다. '믿음', '예수님', '하나님', '소망', '사랑', '구원' 등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 내용들을 어떻게 이미지화 할 것인가?
그 답이 바로 '비유'와 '은유', '상징'이다. 믿음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면, 창의력이 뛰어난 작가는 그려낼 것이다. 그러나 그 그림은 '비유', '은유', '상징'적 기법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매우 뛰어난 작가가 탁월하게 그림으로 '믿음'을 표현하였다 할지라도, 10살 난 아이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그때 '우화', '동화', '이야기'라는 스토리는 매우 탁월한 도구가 된다. 분명 '우화, 동화, 이야기'는 연구 보고서나 논문이 아니다. '우화, 동화, 이야기'는 이미지이다.
아이들과 같이 읽고 대화하라
본서는 19개의 창작동화가 나온다. 필자는 읽으면서 아이들의 관심과 이해수준에서 모티브를 찾아내 신앙과 인격의 교육적 이미지를 그려내는 탁월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중2 막내 딸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했는데, 2시간 만에 뚝딱 읽어내더니 "이 책 참 좋아요. 쉽고 재미있어요"라고 대답했다.
주일학교 설교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지만, 주일학교 목회자들이 읽고 설교로만 써먹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같이 읽고 토론하는 책으로, 집에서 부모님과 읽고 대화하는 책으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든다. 보고서와 논문은 '한 가지'를 이야기 하지만, 상징과 이미지는 그 것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미 주일학교에서 이 책을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아이들은 하나님에 대해, 사랑에 대해, 사랑과 섬김에 대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성실함과 책임에 대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
출처: https://ijukyo.tistory.com/69 [주일학교에 필요한 자료들을 나누는 곳입니다.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