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찰사 이만견(李晩堅)
[생졸년] 1666년(현종 7)~1717년(숙종 43) / 향년 51세
[문과] 숙종(肅宗) 25년(169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23/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사동(士冬), 호는 관가정(觀稼亭). 증조부는 이할(李劼), 조부는 이유겸(李有謙)이고, 부친은 이핵(李翮), 생부는 우의정 이숙(李䎘)이며, 형은 이조판서 이만성(李晩成)이다. 외조부는 이영언(李英彦)이고, 처부는 윤가적(尹嘉績)이다.
고양(高陽) 하도면(下道面) 도개리(陶開里) 출신이다. 통덕랑(通德郞)으로 1699년(숙종 25) 기묘식년문과(己卯式年文科)에 병과(丙科) 13등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 ‧ 수찬(修撰)‧헌납(獻納)‧교리(校理)‧집의(執義)‧응교(應校)‧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이르렀고, 외직으로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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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부 관찰사 부군 묘표(季父觀察使府君墓表)
이만견(李晩堅) 공은 자가 사동(士冬)이다. 처음에는 광주(廣州) 구천(龜川)에 있는 8대조 관찰사 길배(吉培)의 무덤 남쪽에 안장하였다가 12년 뒤 무신년(戊申年,1728, 영조4) 죽주(竹州) 구봉산(九峰山) 아래로 이장하고 부인 칠원 윤씨(漆原尹氏)를 합장하였다. 형의 아들 재(縡)가 다음과 같이 묘표를 쓴다.
우리 이씨(李氏)는 우봉(牛峰)에서 나왔다. 고려에서 시중을 지낸 공정(公靖)부터 관찰사 길배(吉培)까지가 7대이다. 그 이후 6대 후손이 참의 휘 유겸(有謙)이고, 그 장남 돈녕부 도정 휘 핵(翮)은 효로 정려(旌閭)되었다. 도정의 중형(仲兄)은 우의정 휘 숙(䎘)이고, 우의정의 부인 나주 박씨(羅州朴氏)는 첨지중추부사 호(濠)의 딸이다. 이분들이 공을 낳았는데 도정공이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공은 어려서 병치레가 많았으나 장성해서는 발분하여 학업에 힘썼다. 숙종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 반제(泮製)에서 1등하여 이듬해 전시(殿試)에 응시하였다. 계사년(癸巳年,1713)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시강원 설서ㆍ겸사서ㆍ문학ㆍ보덕, 예조ㆍ병조ㆍ이조의 낭관, 사간원 정언ㆍ헌납ㆍ사간ㆍ대사간, 사헌부 집의, 홍문관 수찬ㆍ교리ㆍ응교, 의정부 사인, 군자감 정, 승정원 승지, 호조 참의, 장례원 판결사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과천 현감(果川縣監), 광주 부윤(廣州府尹),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숭정(崇禎) 병오년(丙午年,1666, 현종 7) 11월 을유에 태어나 정유년(丁酉年, 1717, 숙종 43) 6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배위 윤 부인(尹夫人)은 감사 가적(嘉績)의 딸로 유순하여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공이 죽은 지 8년 뒤에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수(綬)는 현감을 지냈고, 유(維)는 문학과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딸은 대사성 윤급(尹汲), 진사 원경후(元景厚), 홍재(洪梓), 유각(柳愨)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명민하고 정밀하였으며 만년에는 더욱 온화하였다. 양가(養家) 대부인의 나이가 팔십이었는데 힘써 그 뜻에 맞추어 공경히 받들었고, 과부가 된 누이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고 아버지를 잃은 생질을 길러주어 그들을 모두 더없이 기쁘게 하였다. 남과 교류할 적에는 진실하여 꾸밈이 없었다.
역사를 담론하기 좋아하였으며 주자의《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매우 해박하였다. 의론(議論)이 엄정하여 삼사(三司)에 있을 때에는 성상의 덕을 바로잡고 사림(士林)을 부지하는 것을 한결같이 중시하였다. 관직 생활은 깨끗하고 신중하였으며 부임하는 곳마다 관리와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
벼슬에 나아간 때가 적고 물러난 때가 많으며 낮은 관직에서 전전한 것은 공이 겸손하여 자처하지 않은 탓에 세상에서 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정사의 재주에 대해서만 알았기 때문이다. 8대조 관찰공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오랫동안 알지 못했는데 공이 그만두지 않고 정성껏 수소문하여 마침내 찾았으니, 선조를 받드는 데 독실함이 이러하였다.
소자가 이 묘표를 지음에 있어 감히 털끝만큼도 과장됨이 없는 것은 공의 겸손한 덕을 손상시킬까 염려해서이며 또 응당 신도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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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계부 …… 묘표 :
이 글은 이만견(李晩堅, 1666~1717)의 묘표이다. 이만견의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사동(士冬)이다.
[주02] 처음에는 …… 안장하였다가 :
본서 제46권〈계부 관찰사 부군 묘지(季父觀察使府君墓誌)〉에 따르면, 이길배의 무덤이 광주(廣州) 구천(龜川)에 있었는데, 백
년간 무덤을 찾지 못하였다가 이만견이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을 적에 수소문하여 체직되어 돌아온 뒤에 마침내 찾았다고 한
다. 이만견(李晩堅)이 기이한 꿈을 꾸고서 항상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묻으라.”고 하여 마침내 구천에 장사 지냈다.
[주03] 반제(泮製) :
반궁 제술(泮宮製述)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행한 제술 시험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