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우리 소망이요
181202 눅 7:11-17
1. 귀신 들린 사람들
(1) 술의 신, 주신(酒神)에 사로잡힌 여인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한 알코올 중독자에 관한 사연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기가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둘이나 둔 젊은 아주머닌데 20년간 술을 먹었답니다. 오전부터 집에서 막걸리를 먹기 시작하는데 앉은 자리에서 12통이나 먹습니다. 체구도 그리 크지 않고, 겉으로 보아 괴팍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그 술로 말미암아 집안이 큰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두 번 결혼에 실패했습니다. 첫 번째 남편은 잦은 도박과 폭력으로 헤어졌고, 나중에 만난 두 번째의 남편은 생후 20일된 아이를 사망 신고 해 버리고 나갈 정도의 무책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는 아이가 둘인데, 큰 아이는 청소년 아들이고, 둘째는 초등학생 딸입니다. 엄마가 막걸리 마시는 것이 싫지만 그러나 아직 엄마를 말리지 못하는 나이의 아이들이었습니다. 큰 아이는 인터뷰에서 말려서 될 것 같으면, 안 말리겠느냐고 했습니다. 말려서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딸아이는 그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가 술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20년 동안 계속된 알코올 중독! 증세가 심해져 이제는 술이 취하면 거실에서 징을 치기 시작합니다. 아들은 엄마가 징을 치지 못하게 하려고 깊이 숨겨둡니다. 징을 찾아 치려는 엄마와 실랑이를 하지만 결국 술 취한 엄마를 이기지 못합니다. 취재진의 도움으로 알코올 전문병원에서 진단한 결과 이 여인의 알코올 중독 정도가 밝혀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직 40세가 채 되지 못한 이 아주머니의 혈관 나이는 65세였습니다. 게다가 혈관의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뇌출혈의 위험이 매우 높았습니다. 진단한 의사의 처방은 분명했습니다. 치료방법은 첫째 금주, 둘째 금주, 셋째 금주였습니다. 이 여자의 뇌 검사결과는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뇌의 기능이 현저히 약해져, 조금만 더 진행되면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도 상황파악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엄청난 음주를, 자기 외적인 요인, 즉, ‘술 신이 내게 들어와서 안 마실 수가 없다.’는 주신(酒神)의 빙의(憑依)로 변명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서 마련해준 진단과 처방을 다 듣고, 친정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이제는 마시지 말아야지요.” 다짐하면서 돌아갔지만, 성공적으로 금주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정도의 중증 알코올 중독은 무슨 습관이나 나쁜 버릇이 아니라 병이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은 ‘뇌 질환’입니다. 이 아주머니가 금주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제발 잘 이겨내서 온전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2) 뭇 귀신들
이 여자는 술 귀신 때문에 고생합니다만, 그러나 우리 주변의 귀신이 어디 술뿐입니까? 우리를 황폐하게 하는 것이 어찌 술뿐이겠습니까? 알코올 중독처럼 눈에 띠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모두 스스로의 중독들이 있지요.
늘 남을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옷을 입어도 내가 중심이 아니라 남이 중심입니다. 내가 좋고 편한 게 문제가 아니라 남이 어떻게 볼까가 걱정입니다. 사실 나만 편하면, 남 괴롭게만 안 하면 괜찮은 건데, 너무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겁니다. 남의 눈, 남의 시선, 남의 평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 주변에는 늘 남을 탓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남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사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늘 ‘내 불행의 원인이 너에게 있다.’는 식입니다. 여기에서 ‘너’란 ‘가난해서 공부 못시켜 준 돌아가신 부모님’도 되고요, ‘지겹게 시집살이를 시킨 시어머니’도 되고요, ‘가난한 수입과 방탕으로 날 고생시킨 남편’도 됩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계속 남 탓만 하며 살면 도저히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남 탓 귀신에 사로잡힌 겁니다.
늘 오늘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은 행복할 수 없다. 오늘은 행복할 수 없다. 내일이고 모레고 그 어느 날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슬픈 사실은 전연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그 생을 마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는 유보의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술 신은 아닐지 몰라도, 중증이든지, 경증이든지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귀신 들려 있습니다.
2. 본문 이해
(1)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한 젊은 부부가 살았습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고 살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게 되고 이 두 부부는 기쁨과 소망에 찹니다. 그런데 이런 단란한 집안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이 여인의 남편이 죽은 것입니다. 갓난아이와 자기만을 남겨 둔 채 남편이 갑자기 떠나 버린 것입니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해도 아무래도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고통이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여인은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보면서 이겨낸 것입니다. 비록 아이는 작고 어리지만,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 작은 생명의 존재, 그 자체가 이 여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얘야, 잘 자라라. 어서 커라. 네가 자라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네가 자라면 나중에 이 어미의 모든 사연을, 그토록 안타깝던 이야기들을 다 들려주마.” 어머니의 소망을 알기나 한 것처럼 아이가 자라납니다. 돌이 지납니다. 젖을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을 지납니다. 아이들하고 노는 것을 보니 똑똑한 것이 그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흐뭇합니다. 청소년으로 자랍니다. 청년으로 자랍니다. 이제 직장을 가져야 하고, 결혼도 시켜야 합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감당해왔던 어려웠던 살림도 이제 어느 정도 형편이 필 것이고,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손녀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답고 즐거운 가정도 이룰 것입니다. 이런 꿈과 소망으로 지내던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모든 소망의 대상이었던, 이 어머니의 삶의 기반이 되었던 이 아들이 그만 돌연사하고 만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어머니는 넋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유족이라고 해야 할까요, 단 한 명의 가족인 어머니가 넋이 나가 주저앉아 있으니 무슨 장례가 되겠습니까? 그저 시신을 앞에 둔 채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겁니다. 그저 안타깝게 바라보던 이웃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장례를 준비합니다. 한 쪽에서는 넋이 나간 어머니를 위로하며, 한 쪽에서는 속히 장례를 진행합니다. 시신을 수습하고, 관에 넣고 운구 행렬이 나갑니다. 장례란 모두 슬픈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불쌍한 장례라 많은 이들이 애도하면서 따라 나갑니다. 비탄과 슬픔에 빠진 장례의 행렬이 동구 밖을 지나 나아갑니다. 슬픔의 행렬, 절망의 행렬, 그리고 한숨의 행렬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2) 두 행렬의 만남
그런데 이 행렬이 예수의 행렬과 만납니다. 이 행렬은 겉보기에 별로 볼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차려 입은 행세도 그렇고, 뽀얗게 뒤집어 쓴 먼지에, 얼른 보기에도 별로인 그런 행렬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보잘 것 없는 이 행렬의 중심에는 예수께서 계셨습니다. 생명의 화신, 생명의 불꽃인 예수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의 행렬이 예수의 행렬과 맞닥뜨렸을 때 생명의 행렬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장례의 행렬로 다가가 이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관에 손을 대니 행렬이 멈춰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이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관의 젊은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젊은이를 그 불쌍한 어미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눅 7:16입니다.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께서는 죽음의 편이 아니라 생명의 편입니다. 예수께서는 슬픔과 괴로움에 빠진 자들을 홀로 두지 않는, 아니 홀로 두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슬프고, 아프고, 약하고, 외롭고, 괴로운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는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3. 주는 우리 소망이요!
(1)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 서울에 오신다네.’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서울에 오신다면 어디로 가실까요? 저는 아까 말씀드린 술 귀신 들린 그 아주머니에게는 꼭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아주머니의 병을 고쳐주시고, 그 불쌍한 자녀들에게 그 어머니를 돌려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대림(待臨)절은 말 그대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기쁨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저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내려오시는, ‘임마누엘’의 절기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잉태한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지요. “주님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2) 대림절에
이 대림절에 우리는 모두 내 안에 숨은 귀신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귀신에게서 풀려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 다져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요. 알기는 아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죽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나 혼자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전세역전이지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겁니다. 이처럼 하늘의 주님께서 불쌍한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기 위해 내려오십니다. 그러니 너무나 위로가 되고 기쁜 것입니다. ‘주는 우리 소망이요 힘과 위로되시니…’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 마음이 평안합니다. 더 이상 내가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의 소망이요, 힘과 위로가 되시는 주님에게 모두 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도와 묵상, 찬송으로 우리의 소망이 되는 주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큰 위로와 평안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