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6일 (막12 하나님의 것).hwp
2018년 9월 16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마가복음 12:13-17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한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대부분 그 성의 주인노릇을 하던 사람들과의 대립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란 당연히 이모저모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그 당시 로마 총독의 하수인들, 그리고 정치력에서는 사두개파들과 종교력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의 주인노릇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의 배열을 따라서 11장부터 읽어보면,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는 “난동”을 부리고 나서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일갈하십니다. 그때부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고 마가복음은 말합니다.
그들 사이의 결정적인 대화는 다음의 비유 때문에 뒤틀어지고 맙니다. 약속된 포도원 소출의 세금을 받으려고 포도원 주인이 보낸 사신들을 소출을 내지 않으려고 작정한 소작농부들이 모두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마지막에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포도원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으로 아들마저 죽여 포도원 밖에 던져버렸다는 비유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인용한 구약성경이 시편 118:22인데,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때 예수의 대적들은 이 농부들이 자기들을 지칭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예수를 잡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를 말로 책잡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쳐야합니까? 바치지 말아야합니까?”(막12:14) 저도 종종 이렇게 무턱대고 들이대는 황당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대개 그런 경우는 어떤 의도가 그 질문 뒤에 숨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 강연을 다 들은 후에 던지는 이런 질문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이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이런 질문은 대개 양자택일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당장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거기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습니다. 지금 주님도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해도 걸리고, 바치지 말라고 해도 걸리는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인들은 이런 종류의 세금을 주전 6년 경 부터 로마제국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 유명한 황제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때입니다. 이것은 정복자가 피정복민에게 요구하는 세금입니다.
하지만 이 세금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에도 바치기 싫은 세금입니다. 그러니 로마세금을 대신 걷어주는 세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가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로마동전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만지거나 가지고 다니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동전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이 그들에게 보여 달라고 한 데나리온 동전에는 주후 14-37년을 재위한 디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이 새겨있고, 거기에 “신이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라고 새겨있었습니다. “신으로 숭배하여야할 존엄자 황제의 아들 존엄자”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데나리온으로 세금 바치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생각했습니다.
찾아온 사람들이 처음에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주님께 아첨을 하는 말을 합니다. “선생님은 진실한 분이시고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분이시며,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조심해야합니다. “당신은 공정한 사람이요.”라고 칭찬해 놓고는 그가 한 답변으로 얽어매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벌어지는 일입니다. 앞뒤 문맥은 다 잘라내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을 강요합니다. 그러고 나서 필요한 해석을 덧붙입니다. 만일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주님이 말하면, 그는 그 전에 납세거부 운동에 앞장섰다가 처형당한 갈릴리의 유다와 같다고 당국에 신고할 것이고, 반대로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우상숭배를 조장했으니 유대 종교법으로 다스리라고 성전에 신고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매우 난감한 지경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 읽었으니 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들이 여기서 두 가지 잘못된 해석을 이끌어내고는 만족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지혜를 강조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대답을 주님의 “대단한” 지혜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경탄을 하고 돌아갔다고 기록했으니까요.
더 옳지 않은 다른 해석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했으니, 세상 통치자에게 복종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로운(?) 주님은 위기를 모면하고 안 잡혀가려고 세상권세를 인정하는 대답을 내 놓았다.”는 해석이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는 이 대목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여기에 로마서 13장 1절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덧 붙여, 통치자의 부정과 불의에 대하여서도 침묵하고 계속 복종할 것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무력과 권력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던 시절이라면 모르거니와,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아는 오늘의 시대에는 무엇인가 정말 의미 있는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과 함께 불의한 지도력에 대하여서도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여 결국에는 커다란 파국을 맞게 된다면, 그 모든 책임을 예수님께 돌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일까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시험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은 바리새파와 헤롯당원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종교적인 이유로 이방인의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집단이고, 헤롯당원을 헤롯가문의 통치를 지지하는 정치적 당파로써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하기 때문에 정통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마찬가지 집단입니다. 서로 싸우면 싸웠지 함께 할 수 없는 이 두 부류가 “한 목적”을 위해서 뭉친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예수를 제거할 목적으로 연합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리 지혜가 부족해도, 이런 부류가 함께 몰려온 것을 보면, 속임수를 쓰러 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처한 상황은 그다지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지요.
또 그 사람들은 세금으로 바칠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달라고 주님이 요구하자 그것을 가져 옵니다. 한 데나리온은 꽤 큰돈입니다. 노동자 하루치 품삯이니까요. 세 복음서의 내용을 다 비교해보면, 돈을 보여주는데 시간이 걸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에 보면.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전대에서 데나리온을 꺼내서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큰돈을 손쉽게 전대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재력이 눈에 강하게 보이는데, 제가 읽은 주석에서 그들은 로마화폐를 평소에 사용하고 다니는 친로마적 부류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라는 주님의 대답이 매우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뒤 흔들어 또 다시 반로마 반란을 일으키게 할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을지 모릅니다. 바리새파 입장에서도 반란과 반란진압으로 겪는 약탈과 피해는 피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개역성경은 “바치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을 보면 “돌려드린다”(αποδιδωμι, reddo)가 맞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로 돌려드려라.”
바리새파와 헤롯당원들은 주님의 앞의 말만 귀담아 듣고 돌아갔습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돈이니 황제에게 바쳐도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그래서 “그 데나리온 동전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구나.”하고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지혜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당신은 어떤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까? 당신이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당신의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시는 주님이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저는 “소나기가 오겠다.”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103회 교단 정기총회가 열린 화요일에 헌법위원회가 세습을 인정한 헌법해석을 표결에 붙여 849 대 511로 부결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849명 총대의 양심으로 세찬 소낙비는 당장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총대들의 양심을 의심했던 저는 제 “믿음 없음”을 사과합니다.
전체 투표자는 1360명이었는데, 그중에 세습을 반대하는 표는 62.4%입니다. 찬성하는 511명은 37.6%입니다. 1500명 총대가운데 140명이 불참했거나, 투표 전에 자리를 떴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추어 이 문제를 보면,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할 것을 자기가 차지하려는 것이 <교회세습>입니다. 그런데 511명의 찬성자는 여전히 교회가 자기 것인 줄 안다는 의미가 남아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황제의 것은 맘몬이즘(Mammonism)을 의미합니다. 부의 신인 맘몬을 섬기는 배금주의입니다. 맘몬은 물질을 포함한 모든 권력입니다.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군림하려는 모든 힘입니다. 그래서 맘몬은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총회의 결정이 있은 그 다음날 세습을 한 “그” 교회의 새벽기도회에서 “그” 아버지 목사가 설교했습니다. 거기서 총회가 마귀의 역사에 의해서 움직였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십자가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거센 소낙비를 몰고 올 검은 구름은 아직 흩어지지 않았나봅니다. 저는 더 큰 교회로 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아들 목사가, 아버지가 평생 목회하던 작은 시골교회 목사로 부임하는 것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십자가를 물려준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도 없어서 못가는 목사들에게는 그 역시 부러움을 살 일인지 모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찾아와 시험하던 바리새파와 헤롯당원들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깨달은 줄 착각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 목사로 살아도, 아무리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녀도 자기의 신앙을 착각하면, 그것은 주님의 옷깃만 스치고 마는 삶을 산 것입니다. 금력과 권력을 상징하는 황제의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내 것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은 황제에게 돌려줄 것을 내 속에 계속 차지하고픈 마음을 지워나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은 황제의 것과 다른 종류의 은화나 금화 같은 맘몬이아니라, 우리의 속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마음이 자라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의 여정을 아름답게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