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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14 -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 부터서 독립을 하다(제3-A형)!
말레이시아는 13개 주와 3개 직할구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로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섬 북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지만, 연방정부는 푸트라자야에 있는데 헌법상 정식
수도는 아니고, 한국의 세종특별자치시 처럼 정부 청사가 소재한 행정 도시로 쿠알라룸푸르
와 푸트라자야는 1개 주와 같은 위상을 가진 직할시이며 다리를 통해 싱가포르와 연결됩니다.
푸트라자야는 세종시 이전의 과천시라 보면 되니 쿠알라룸푸르에서 25km 떨어져있는데,
한국으로 치면 서울시청에서 분당구청과 비슷한 거리이니 서로 인접한 시군의 중심지
거리 정도라 볼수 있고, 또 말레이시아의 국토 면적이 한국의 3배가 넘고 그것도 바다
를 사이에 두고 두 부분으로 분할되어 있다 보니 25km 면 붙어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인을 의미하는 'Malay' 에 그리스어 접미사로 땅을 의미하는 '-sia(-σία)' 가
붙은 것으로 말레이어로 '[məlejsiə](멀레이시어)', 영어로는 '[məˈleɪʒə](멀레이저)' 라고 합니다.
'말레이(Malay)' 라는 표현은 '믈라유(Melayu)' 라고도 하는데 둘 다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니
타밀어로 산을 의미하는 Malal 과 도시, 땅을 의미하는 ur 의 합성어로 추정되며
유럽 국가들의 동남아 식민지배 이전 부터 말레이인들은 스스로를 melayu 등으로 칭했습니다.
영국 식민지 이후 말라야 연합이 세워질 때 말레이인들은 국호로 Malay 와 랑카수카(Langkasuka)
중 고민하다가 Malay 를 선택하여 말라야 연합이 되었으니 싱가포르주와 보르네오섬 북부
사라왁, 사바의 연방 가입이 이루어져 국가를 개편한 1963년에 국호를 말레이시아로 고쳤습니다.
한자 음차로는 마래서아(馬來西亞) 혹은 말래서아(末來西亞)로 중국어 명칭의 경우 전자를 사용하는
데, 한국에서는 연방국가이므로 '연방' 을 붙인 줄임말 마련(馬聯) 또는 말련(末聯)이라고도 하며
말레이시아 또는 말레이로 약칭하지만 말聯 이라 검색하면 말레이시아 관련 기사가 많이 표시됩니다.
말레이시아는 수많은 독립국들로 나뉘어져 통일을 하지 못한 가운데 16세기 초에 포르투칼의
침략을 받았고, 그후 네델란드인들이 침공해 포르투칼을 쫓아내고 차지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영국이 승리해 식민지로 만들었다가 1941년 말에 일본에 점령됐으며... 1945년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환원됐으나 공산독립군의 독립 투쟁을 거쳐 1957년에 영국에서 독립을 하였습니다.
남인도 촐라 왕국 상인들이 정착해 인도 문화가 전파됨으로써 국가의 기틀을 다진걸로
추정되니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랑카수카 왕국(Langkasuka, 2세기?–15세기),
적토(赤土 Tanah Merah, 2세기?–7세기?), 단단(丹丹) 등으로 파타니, 클란탄,
트렝가누 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8세기 후반에 스리위자야에 정복당했습니다.
중국에 6– 7세기에 여러차례 공물을 보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이 국가
들은 6세기 부터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데, 중국 남조 국가들이 남방과의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덕분이라고 여겨지니 말레이 반도 북서부의 크다 지역과 페락
지역은 고대 인도양 무역로와 가까운 관계로 고대부터 중계 무역지로 번성하였습니다.
페락 지역에 2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존재하였던 강가 왕국(Gangga Negara) 은
19세기부터 고고학 연구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브루아스(Beruas)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그릇, 항아리, 주화, 대포, 도검 등)은 중국과 무역에 대한
직접 증거가 되며, 가장 오래된 유물은 제작 연도가 5–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후 스리위자야(7– 11세기), 다르마스라야 왕국(12– 14세기), 마자파힛 제국(13– 16세기)등
해양 제국들이 있었으며, 전성기에 이들은 말레이 반도 지역을 세력권 안에 두었고
마자파힛의 경우는 보르네오 북부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스리위자야와
다르마스라야의 중심부는 수마트라섬 동부이고 마자파힛의 중심부는 자바섬 동부였습니다.
인도양에서 활동한 이슬람 상인·선교사의 영향으로 말레이 반도는 수마트라 북부·동부와 함께
12–15세기에 이슬람화되어 갔으니 지역에 따라 파사이 술탄국처럼 군주의 개종이 이른시기
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인도네시아에 속하는 자바, 술라웨시 보다는 빠른 편이었으나,
수마트라 북부 바탁, 수마트라 내륙, 말레이반도 내륙은 끝내 이슬람화되지 않은채 남았습니다.
15세기에 말레이 반도 및 수마트라 북부·동부에서 말라카 해협 교역로를 장악하고
군사적, 상업적 패권을 획득한 것은 믈라카 중심의 믈라카 술탄국이었으니,
“믈라카”는 오늘날의 페락, 파항, 클란탄, 트렝가누, 슬랑오르, 느그리슴빌란
등지 및 수마트라 동부의 리아우 등지를 지배하거나 속령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보르네오 북부에서는 브루나이 술탄국이 마자파힛이 약화하고 붕괴되는 시점에 독립 세력
으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이후 한때 보르네오 북부 전체를 지배했던 적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19세기까지 영국이나 영국계 세력이 보르네오 북부를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고 오늘날 브루나이는 수도 인근의 작은 영토만을 보유한 군소 국가가 되었습니다.
믈라카 술타국의 건설자는 5대이자 마지막 왕 파라메스와라(싱아푸라 국왕 재위 1389–1398,
믈라카 국왕 재위 1400–1414)' 였다는데 파라메스와라는 마자파힛의 제5대 황제
위크라마와르다나가 보낸 자바의 대군이 싱아푸라를 공격해 함락하자, 싱아푸라의 잔당을
이끌고 말레이반도 안쪽으로 북상해 오늘날의 믈라카 지역에 믈라카(말라카) 왕국을 세웁니다.
믈라카 술탄국은 해상 국가이자 무역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는데, 국제 상인들의 안전을 보장
하는데 주력했으니 해적을 물리쳤으며 교역 시설을 확충하여 화재 및 도난 방지를 위해
지하 창고까지 지었으니 무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법과 행정이 정교하게 짜여져
상인들의 신뢰를 얻을수 있었으니 덕분에 믈라카 술탄국은 100년 넘게 흥성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511년 향료를 찾아나선 유럽의 포르투갈인들이 향료를 독점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곳으로서 “믈라카”를 침공했고 믈라카는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나 결국
멸망하니.... 포르투갈인들은 믈라카 내부의 이반과 우세한 함대 전력의 해상
포격을 활용하여 고작 천명의 병력만으로 2만 병력이 지키던 믈라카를 정복했습니다.
믈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말라카' 로 개칭하고 구 믈라카의 교역망을 그대로 접수
하려 하였으나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이후 16–17세기, 말라카는 1641년 네덜란드–
조호르 연합군에 최종적으로 탈취당할 때까지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자바, 네덜란드
세력의 침공을 받았고 포르투갈인들은 말라카의 방어를 위해 상당한 자원을 소모하게 됩니다.
믈라카 술탄국이 포르투갈의 침입으로 붕괴한후 믈라카의 잔당들은 말레이 반도 남부의 조호르로
내려가 조호르 술탄국을 수립하였으나, 조호르는 이전의 믈라카 처럼 압도적인 세력이 되지는
못하고 페락, 파항, 클란탄 등지에 있던 믈라카의 옛 봉신국들이 독립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유럽인들의 직접 지배는 1786년 페낭이 영국 동인도 회사령이 되기 전까지는 말라카
및 인근과 화물 집산지로 쓰이는 말레이 반도 서부 소규모 항구에 국한되었으며
조호르 술탄국, 파타니 왕국 및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 팔렘방 술탄국,
잠비 술탄국, 시악 술탄국 등이 세력 경쟁을 벌였으니 통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포르투칼을 쫓아낸 네덜란드는 18세기에 조호르를 비롯한 말레이 반도를 직할령으로 합병
하지는 않았고 지역 통치자와 좋은, 때로는 강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페락의 주석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는 데 만족하였는데 18세기 전반에는 남술라웨시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해양민족 부기스인의 세력이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에서 정치적 파란을 일으킵니다.
부기스인들은 아체, 조호르, 클란탄, 슬랑오르에서 18세기에 군주 또는 실권자로 집권에 성공했으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항구적 위협 요인이었는데, 1756년 부기스 세력은 네덜란드령 말라카를
포위 공격하다가 격퇴되기도 했으며 1781년에는 부기스 세력이 페락의 네덜란드 상관을 점령합니다.
네덜란드 세력은 반네덜란드 군사 행동을 성공시킨 부기스인 부왕이자 장군인 라자 하지(Raja Haji
재위 1777–1784)가 틀룩크타팡(Teluk Ketapang)에서 전사한 1784년이 되어서야 부기스
세력을 간신히 저지하고, 부기스인 부왕이 실권자로 집권한 조호르 술탄국을 굴복시킬수 있었습니다.
18세기 말까지 네덜란는 조호르, 페락, 슬랑오르를 정치적·군사적으로 간신히 굴복시키고 편입
하는데 성공하는데, 나폴레옹전쟁 등으로 네덜란드 세력은 수마트라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19세기 초에는 영국 세력이 말레이 반도에 침투하는 가운데, 19세기 후반 아체국은 네덜란드
식민 세력과 오랜 전쟁을 했으나 결국 20세기 초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불안정하게 통합됩니다.
17세기 중반 이래 말라카는 포르투칼을 쫓아낸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영국령이 되었으며, 포르투갈이 쫓아낸 믈라카 술탄국의 잔당은 남하하여
조호르 술탄국을 세우고 포르투갈 및 아체 술탄국, 시악 술탄국, 파타니 왕국
등과 군사적, 상업적으로 경쟁하는데, 이후 조호르는 1885년 영국의 보호국이 됩니다.
태국 남부에서 말레이시아 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은 동남아시아의 해양 세력과 대륙부 동남아시아
대륙 세력이 접하는 변경 지대로서, 여러 말레이–타이계 군소 왕국들이 존재하였으니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탐브랄링가 왕국과 파타니 왕국,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진 크다 술탄국이 주목할만 합니다.
태국 남부 나콘시탐마랏 지역은 스리위자야의 최북단 변경이었으며 말레이계 탐브랄링가
왕국은 12세기까지 수마트라계 세력의 속령이었는데 탐브랄링가 왕국은 13세기 중반의
찬드라바누왕 시대에 스리랑카 북부로 진출하고 자프나 왕국을 한때 정복하고 영유했습니다.
탐브랄링가의 북스리랑카 지배는 1270년대말 인도 판디아 왕조의 마라와르만 쿨라세하라 1세
원정으로 축출되어 종식되었으며,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전반, 탐브랄링가 지역은 남하한
수코타이 왕국 또는 타이계 세력의 원정군에 점령되어 수코타이의 속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293년 람캄행 왕이 시탐마랏(탐브랄링가) 지역을 점령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레이 반도의 첫 정착민은 검은 피부를 가진 네그리토로 추정되니 2~3세기경 그들은 무역항과
해안 마을을 건설했으니 인도 및 중국 문화가 현지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힌두교와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2세기 무렵 말레이 반도 북부에 랑카수카 왕국이 번창하기 시작해
15세기까지 존속했으며 7~13세기 말레이반도 남부 해안지역은 스리비자야 제국의 일부였습니다.
수마트라섬의 스리비자야 제국 멸망후 등장한 마자파힛(Majapahit) 제국은 말레이 반도와
말레이 제도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14세기 무렵 아랍 상인들이 이슬람교를
소개하면서 퍼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가 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15세기초 구 스리비자야 제국의 왕자였던 파라메스와라는 마자파힛 왕국의 침공을 피해
말레이 반도를 전전하다가 1402년 믈라카 해협의 '오랑 라웃'(Orang Laut) 이라고
불리는 바다 백성들의 협력을 얻어 “믈라카”를 건국했으니, 말라카 지역에 말레이
반도 최초 독립국가로 간주되는 이슬람 말라카 술탄국은 국제 무역항으로 번영했습니다.
말라카(믈라카)는 당시 소규모 어촌이었지만 명나라의 영락제가 파견한 제1차 정화 함대
가 내항했으니 남중국해와 인도양에서의 통상 패권을 목표로 하는 정화 함대는
믈라카를 근거지로 하여 기반을 닦았고, 믈라카는 명나라에 몇번이나 조공
사절을 보냈으며 파라메시와라는 이슬람 상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합니다.
이렇게 하여 명나라 정화 함대의 보호하에 믈라카(말래카)는 동서무역의 중계항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파라메시와라등 왕들은 정화 함대에 동승해 수차례 중국을 방문했는데,
무자파르 샤는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타이 아유타야 왕조의 침공을 물리쳐 말레이
반도 전역과 수마트라섬 동해안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 번영합니다.
다음 대의 만수르는 믈라카 국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술탄이라고 칭하였고, 아유타야의 속국
인 파항을 함락하고 자와섬 북안에 성립한 드막(Demak), 자파라(Japara), 투방(Tubang),
수라바야 등의 이슬람 항구 도시와 협력해서는 마자파힛 왕국을 한층 더 약화시켰습니다.
제8대 술탄 마뭇 샤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 믈라카는 최성기를 맞이하니 인도의 구자라트
이슬람교 지역이 무역 상대였으며, 남인도의 타밀인이나 자와섬이 뒤를 이었고 금지령
을 어기며 내항하는 중국인 밀무역 상인도 적지 않았으며 인도 면직물, 말루쿠제도
향신료, 수마트라섬 금과 후추, 중국 비단과 도자기, 티모르섬 백단등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예수회의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1542년 5월 인도 고아에 도착해 기독교 전도를 시작한후 1545년에
말레이반도로 가서 포르투갈의 거점도시 말래카를 방문해 선교하던 중에 일본상인들의 마을에서
일본인 안지로를 만나 전도하는데 일본상인들은 중국 영파와 베트남의 호이안, 태국의 아유타야
와 말레이의 말래카 그리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 일본인 촌을 건설하고 무역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5백년간 단 한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못했으며, 단 한명의 상인도 개인적으로 무역에
나서지 못했으니,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돈을 내고 신청해 따라가는데 걸어서 베이징에 도착해
사신 숙소로 찾아온 중국인들과 교역하고 유리창에 들러 몇가지 물품을 사서 돌아오다가 의주에서
품목과 수량을 검사받았으며 상품 일부는 부산의 왜관으로 찾아가 일본인들과 교역한게 전부입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1549년 10월 일본인 안지로등 3명과 함께 배를 타고 일본 규슈 가고시마에
도착해서 기독교를 전도했고 이런 노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장교와 병사 대부분이
천주교도로 십자가를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했으며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등 많은 다이묘들
이 예수교도였으니, 진해 웅촌 왜성에서는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가 일요일이면 왜군들과
미사를 드렸던 것이니 1846년 김대건 신부 보다 250년 더 빨리 복음이 조선에 전해진 것입니다.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는 1584년에 영세를 받았으니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 인데,
아버지는 요나단이고 어머니는 막달라이며 처는 쥬스타이고, 대마도(對馬島)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였으니 신앙심이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
으로 믿음의 가족 이었는데 조선 고아소녀를 양녀로 받아들여 순교하니 오다 줄리아입니다.
1642년 싱고라의 술탄 술라이만 샤가 시암(태국)에서 독립을 천명하고 이어 세차례에 걸쳐 시암
원정군을 격퇴했으며 1668년 술라이만 샤를 계승한 장자 무스타파의 치세에는 인근 지역에서
약화된 파타니와 우세한 입장에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1680년, 시암이 본격적인 원정하자
싱고라는 점령당했고, 도시는 약탈되고 파괴되었으며 독립국으로서 싱고라 술탄국도 소멸합니다.
흥미롭게도 1685년 시암은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싱고라 항구를 넘기려고 제안하기도 했는데,
당시 말레이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불려가며 시암에도 위협적이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이 싱고라를 재건하고 완충 지대를 마련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프랑스는 이 지역에 흥미가 없어 싱고라 양도는 불발되었습니다.
랑카수카 왕국 말레이인들이 이슬람화되어 세워진 파타니 왕국(1457?–1902)은 근대까지 이어지는 문화
와 기록 유산을 남겼으니 파타니 왕국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네명의 여왕이 통치하는 시대에
경제적, 정치적 전성기를 맞았으니 남하한 아유타야 왕국의 명목상 종주권을 받아들이며 반독립 상태
를 유지하였으나, 때로 시암의 간섭에 반발하였고 징벌을 위해 파견된 시암 원정군을 물리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암과의 전쟁으로 파타니는 국력을 소모하여 네 여왕 가운데 마지막 여왕인 라투 쿠닝의 치세
에는 쇠퇴하였으며 이때 파타니의 전성기도 끝났는데 17세기 후반, 파타니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하던 인접한 말레이계 국가 클란탄의 침공 및 간섭을 받아 파타니의 왕조가 클란탄 왕조로 교체됩니다.
라투 쿠닝(재위 1635–1651?)은 라투 웅우의 딸로 조호르의 압둘 잘릴 샤 3세와 결혼했던 파타니
의 공주였으니 라투 웅우가 벌인 시암과의 전쟁으로 파타니의 무역은 큰 타격을
받은 상태였고, 라투 쿠닝의 치세가 시작된 1636년 시암이 파타니에 대한 재침공을
준비하자, 파타니는 결국 시암과 평화 협정을 맺고 형식적인 주종 관계를 회복해야 했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아프리카의 남단 희망봉을 경유하여 인도에 내항하던 포르투갈인들이
동방에 관심을 가지면서 향신료의 원산지인 말루쿠 제도를 정복하려고 했으니....
그래서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중계지가 되는 "믈라카" 는 가장 탐이 나는 대상이었습니다.
1509년 9월 11일 디오구 로페스 세케이라가 인솔하는 포르투갈 원정대가 믈라카에 처음 도착했지만
인도양에서 포르투갈 해상세력과 대립하던 이슬람계 상인이 선동했기 때문에 왕국은 포르투갈인과
대립하여 포르투갈의 침입을 저지하니 포르투갈 함대는 몇명의 포로를 남기고 인도로 돌아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1511년 7월, 19척의 군함과
1,400명의 포르투갈 병사를 인솔해 믈라카 정복에 나서, 수개월의 공방전을 벌인 뒤
마침내 믈라카를 함락했고 술탄 마뭇 샤는 말레이의 밀림으로 피해 남쪽으로 이동
하여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으니...... 그 자손은 조호르등 말레이 각지의 술탄이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이 침공한 궁극적인 목표는 경제권을 확장하는 한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였으니
말라카 주민들은 포르투갈의 통치에 강력하게 저항했는데, 1641년 이 지역을 노린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포르투갈의 지배도 끝이 나고 네덜란드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나,
1786년 크다의 술탄이 피낭을 영국령 동인도 회사에 양도하면서 대영제국의 지배가 시작됩니다.
1767년, 버마의 침공으로 아유타야(태국)가 점령당해 왕국이 멸망하자 파타니는 독립을 선포
하고 잠시 독립국이 되었으나, 곧이어 새로 들어선 태국 짜끄리 왕조의 라마 1세가
1785년 파타니 지역을 다시 평정하고 시암의 지배력을 확립하였으니 짜끄리 왕조의
시암은 1810년 부터 파타니 지역을 일곱 개의 말레이 소왕국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습니다.
크다 술탄국은 믈라카–조호르 세력과 거리를 두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인접 랑카수카 왕국
처럼 힌두–불교 왕국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슬람의 전파에 따라 크다의 군주가 15세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크다의 군주는 술탄위를 칭했으니 15세기 후반부터
교역이 본격적으로 체제를 갖추고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16세기 전반에는 독자 주화를 제조합니다.
16세기 크다 치하의 랑카위에서는 후추 플랜테이션이 번성하였는데, 17세기 전반 전성기를
맞아 말라카 해협에서 패권을 획득한 아체 술탄국은 말라카 해협의 후추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랑카위를 공격하여 후추 플랜테이션을 파괴하니 크다는 포르투갈 세력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쿠알라바항 지역에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1619년 아체가 쿠알라바항을 공격하여 크다와 포르투갈 수비군을 내쫓고 요새를 파괴합니다.
아체는 크다를 점령해 술탄 술라이만 샤 2세를 아체로 압송하였지만 크다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아체의 강한 통제를 받지 않았고, 술라이만 샤 2세의 아들인 리잘루딘 무하맛
샤는 아체의 패권에 대응하려 시암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친선 관계를 구축하려 시도합니다.
17세기 후반 무히딘 만수르 샤의 치세에, 크다는 인접한 파타니 왕국처럼 시암(아유타야 왕국)
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1660년 9월 시암에 대한 신종의 상징인 붕아 마스
(Bunga Mas, 금꽃)가 처음으로 크다에서 시암으로 보내졌으니 18세기 무하맛 지와
자이날 아딜린 2세의 치세인 1735년에 오늘날 크다의 주도인 알로르스타르가 건설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 압둘라 무카람 샤의 치세 초기에는 버마의 침공으로 1767년 아유타야 왕국(태국)
이 멸망하고, 버마와의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시암에 톤부리 왕국이 들어섰다가 다시
1782년에 짜끄리 왕조 라따나꼬신 왕국이 개창되는 혼란스런 상태가 이어지자
압둘라 무카람 샤는 붕아 마스를 보내지 않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힘을 빌려 시암에 대항합니다.
이에따라 압둘라 무카람 샤는 영국 탐험가 프랜시스 라이트와 교섭하여 페낭에 영국군 주둔을 허용
하는 대신에 시암이 침공하면 영국 동인도 회사가 크다를 보호하도록 하는 약속을 얻어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국 동인도회사가 크다를 무시했으니 크다는 결국 페낭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지아딘 무카람 샤 2세는 1800년 페낭의 섬 지역뿐만 아니라 인접한 말레이 반도의 작은
영토 스브랑프라이 지역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에 넘기는 대가로 영국 동인도 회사
와 친선 관계를 맺었지만, 크다의 노력도 무색하게 크다에 대한 시암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고 지아딘 무카람 샤 2세는 시암의 압력으로 퇴위해야만 했습니다.
시암(태국)은 크다를 분할 통치하려 크다를 쪼개 북부에 스툴과 프를리스라는 시암 종주권
을 인정하는 별도의 라자(Raja)가 통치하는 속국들을 창설하는데, 아맛 타주딘 샤 2세는
1820년 버마가 시암을 침공하려 계획하자 매년 보내던 붕아 마스를 끊고 버마에
시암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타진하니 시암은 1821년 11월 크다를 침공해 직접 통치합니다.
크다 점령으로 인해 말레이인들이 영국 영향권으로 피란을 가자 영국 세력도 이 문제에 주목
하니 1826년 영국과 시암 간 버니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시암은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영국의 동맹이었던 관계로 양국 간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며, 조약에서는 구
크다 지역과 말레이시아 북부 2개 주 및 파타니 왕국 지역에 대한 시암 종주권이 인정됩니다.
19세기에 분할된 파타니계 말레이 소왕국 가운데 르만 왕국이 있으니, 페락과 19세기에 1826년의 페락–
르만 전쟁이래 여러차례 국경 분쟁을 벌인 것으로 1826년의 페락–르만 전쟁에서는 페락이 일시적으로
승리하였으나, 그후 여러차례의 국경 충돌에서는 대체로 르만이 우위를 점했으니 1899년 국경을 확정
하기 위한 경계석이 세워졌는데 이 국경 분쟁은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국경을 확정하는데 기초가 됩니다.
19세기후반 르만 왕국을 비롯한 말레이 소왕국들과 크다 지역에 말레이 민족주의가 득세하였고, 문화가
다른 시암으로 부터 말레이/파타니 지역의 완전한 자치 또는 독립을 확보해야 한다는 분리주의가 지역
지식인들과 지배층에서 세를 얻자 방콕 정부는 경계하여 탄압을 시작하였고, 1902년 파타니를 비롯
남부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개시하여 분리주의 운동을 억누르고 파타니 소왕국들의 자치권을 회수합니다.
1906년에는 구 파타니와 구 크다 지역을 중앙정부 관할의 4개 주로 편입하였는데 그러나 말레이 반도를
지배한 영국은 이 지역의 말레이계 국가들이 영국령 말라야에 속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영국과 시암
간의 교섭으로 1909년 영국–시암 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사이부리주는 영국령 말라야로 새로 편입된
크다 및 프를리스가 빠져나와 해체되고 남은 스툴(Setul) 지역만이 사뚠주로 시암(태국)령에 남았습니다.
시암 영향권에 속했던 북부 4개 주(크다, 프를리스, 클란탄, 트렝가누)는 조호르를 제외한 말레이반도
의 영국 산하 국가들이 연합하여 결성하였던 말레이 연방에 새로 가입하지 않고, 남부의 조호르주
와 함께 다섯 말레이 비연방주를 구성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일본 제국이 영국령 말라야
를 점령한후 태국을 일본의 동맹으로 끌어들일때 1943년 10월 18일 점령한 북부 4개
주를 태국으로 양도하였으나 전쟁이 끝난후 1945년 9월 2일 다시 영국령 말라야로 반환됩니다.
네덜란드가 17세기에 말라카, 마나도, 암본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력권을 잠식하고 자바에도 거점
바타비아를 확보하자, 라이벌 해양 강국 영국도 뒤따라 도서부 동남아시아에 진입하려 했으나 17세기
에는 네덜란드의 강력한 진입 방해로 식민지나 상관을 거의 확보하지 못했으니 영국인들은 일시적
으로 진입에 성공하여 상관을 설치한 여러 지역에서도 네덜란드의 간섭으로 손을 털고 나와야 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18세기 말까지 네덜란드를 피해 안정적으로 획득한 곳은 경제적·지리적으로 매력이
떨어지는 수마트라 서남부의 븡쿨루 정도였으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식민제국은 18세기 중반
부터 인도양에서 세력이 정체되고,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식민지 획득에 성공하니 인도를
교두보로 삼은 영국 세력은 동남아시아를 중국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계지로 고려합니다.
최초로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영국령이 된 것은 페낭이었으니 1786년에 프랜시스 라이트 장군은
크다국 술탄에게 페낭에 영국군 주둔을 허용받아 지배하였으니 크다가 침공받으면 영국 동인도
회사가 군사 원조를 제공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남하한 시암 세력이 파타니를 점령하고
크다를 위협하자 영국 동인도 회사에 약속한 군사 원조를 요청했으나 동인도 회사는 거부합니다.
거부 사유는 군사 원조는 크다와 프랜시스 라이트 개인간의 약속(?)이지 크다와 동인도 회사간 약속
이 아니라는 것이었으니 크다 술탄은 어처구니없는 협잡에 당한 것을 알고 시악, 리아우, 슬랑오르
등의 도움을 받아 페낭에서 영국인들을 축출할 해군 함대를 준비하였으나, 1791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크다를 선제 공격하여 술탄을 굴복시키고 화평 조약으로 페낭을 공식적으로 합병합니다.
18세기말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급진전했으니 네덜란드가 나폴레옹
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하고, 왕은 영국으로 망명해 1795년 네덜란드 식민지 지배권을 영국에 위임
했으니 이에 따라 네덜란드령 인도, 수마트라, 말라카, 암본은 영국령이 되었으며 자바 등 일부
지역에서는 한동안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며 프랑스 치하에서 네덜란드 통치 체제가 존속합니다.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공격적으로 식민지 경영에 착수하여 19세기초 결국 마나도와 자바(1811)
를 침공해 접수했으며, 나아가 향료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제해권을 장악했는데 독립국이었던
아체 술탄국에서도 정치 공작을 벌여 친영파 술탄을 잠시 집권시키는데 성공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후 영국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등을 네덜란드로 돌려주었습니다.
영국은 페낭을 거점으로 1819년 래플스의 주도로 싱가포르를 건설하기까지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영향력
을 증대해 갔으니 동남아시아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세력권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의 이곳
저곳에 산재해 있었고, 말레이반도에도 네덜란드령(말라카)이, 수마트라에도 영국령(븡쿨루)이 있었습니다.
양 식민 제국의 세력권은 충돌의 여지가 많았으니 결국 양국의 협상으로 1824년 런던 협약이 체결되어
수마트라, 자바섬 등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영국이 관할하기로 결정
되고,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는 영국으로 양도되었으며 수마트라의 븡쿨루는 네덜란드로 양도되었습니다.
영국은 1826년에 말레이 반도에서 보유한 세 식민지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를 한데 묶어 '해협
식민지를 창설하였는데 아직 말레이 반도의 토착 국가를 직접 지배하려 하지는 않았으니
이때까지 영국의 관심은 무역로 장악이었을 뿐이고 '중국으로의 길' 이었으니 해로상의
거점을 장악한 것으로 말레이 반도에서 수익성 높은 자원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계 세력의 직접지배는 해협식민지를 제외하면 말레이반도 보다 보르네오 북부에서 빨리 시작
되었는데, 1841년에 영국인 모험가 제임스 브룩 선장이 사라왁에서 터진 다약인의 반란을 진압
하여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라자' 칭호를 받아 사라왁을 통치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니
영국 보호령이 된 1888년 이전에도 1860년대부터 영국은 보르네오 북부에 주목하기 시작해
1846년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라부안(Labuan)을 취득해 왕령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중반까지 보르네오 북동부(사바주)는 브루나이 및 술루 술탄국의 영토였으니 최초로
토지를 획득한건 미국인들이었는데, 브루나이에 주재하던 미국 영사 찰스 리 모지스는
1865년 8월 브루나이 술탄에게서 보르네오 북동부 일부 지역을 10년간 조차받는 데
성공하였으니 북보르네오의 조차지는 광물과 후추등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보였습니다.
미국인 조지프 윌리엄 토리와 토머스 브래들리 해리스 및 동업자인 중국인 투자자 리 아싱, 퐁 암퐁은
보르네오 아메리카 무역 회사를 설립하고, 1865년 10월 사바 키마니스 지역에 본격적인 식민지
'엘레나'(Ellena)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니 1865년 11월, 브루나이 술탄은 공식적으로
보르네오 아메리카 무역 회사의 사장 토리를 '암봉(Ambong)과 마루두(Marudu)의 라자' 로 봉합니다.
엘레나 식민지는 아무도 찾지않아 곧 황폐화되었으며, '라자' 였던 토리는 브루나이 술탄으로 부터
얻은 권리를 매각할 사람을 십년간 찾아다녀야 했으니 마침내 토리는 새로운 투자자 오스트리아
사업가 구스타프 오버베크를 홍콩에서 만나, 북보르네오에 대한 권리를 1876년 1월 1만 5천
달러에 전부 매각하였고 토리는 북보르네오에서 손을 떼고 시암에 주재하는 미국 부영사가 됩니다.
1885년 영국, 스페인, 독일 제국간 합의로 북보르네오를 영국세력의 관할로, 술루 제도를 스페인세력
의 관할로 확정하고 1888년, 북보르네오는 대영제국의 보호령이 되자 위기감을 느낀 네덜란드도
보르네오 북동부에서 1880년대부터 팽창 정책을 펼쳐 사바 아래의 불룽안 술탄국 지역을
네덜란드령으로 편입하니 영국령 북보르네오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국경선은 1915년에 확정됩니다.
영국은 19세기 전반에도 말레이 반도의 토착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해협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1870년 이전까지 토착 국가들 간의 문제에 불간섭 정책을 유지하며 직접지배를
시도하지는 않았는데 19세기 후반, 신제국주의의 시대가 되자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의
세력확장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으니 계기가 된 것은 토착 왕국들의 내전과 혼란이었습니다.
파항국은 조호르 술탄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반독립적인 라자가 통치하는 지역이었는데 파항의
라자 툰 알리가 리아우링가 술탄국의 분리로 인한 조호르의 약화를 틈타 1853년 조호르의
종주권을 거부하고 파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857년 툰 알리가 사망한후 왕위를 계승
한 툰 알리의 아들 툰 무타히르와 동생 완 아맛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놓고 분쟁이 벌어집니다.
분쟁은 파항 내전(1857–1863)으로 발전하였고, 인접한 여러 세력은 이해관계에 따라 두 왕자 중
하나를 지지하였으니 조호르는 툰 무타히르를 지지하였고, 트렝가누와 짜끄리 왕조 시암은
완 아맛을 지지하였으며 영국 세력은 초기에 양편을 중재하려다 실패하자 툰 무타히르
를 지지하였는데 트렝가누가 1862년 파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는 등 전쟁은 격렬하였습니다.
영국은 전쟁 후반까지 군사적으로 크게 간섭하지 않았으나 외국의 간섭은 견제하여 포함으로
트렝가누의 수도 쿠알라트렝가누와 쿠알라트렝가누에 정박한 시암 군함을 포격하여
트렝가누군과 시암군을 물러나게 하는 일도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1863년 툰 무타히르가
사망한후 내전은 완 아맛의 승리로 끝나지만 파항은 국력을 크게 소모하여 피폐해졌습니다.
페락 지역에서는 1861년부터 1874년까지 '라룻 전쟁' 이라 불리는 네차례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며 영국 세력도 이권에 따라 개입하는 혼란상이 벌어졌으니 1873년의 제4차
라룻 전쟁은 영국 세력이 개입한 페락 술탄국의 계승 전쟁이 되었으며 페락 술탄
압둘라 2세는 영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영국에 페락의 보호국화를 요청합니다.
1874년, 압둘라 2세가 페락 술탄위를 계승하고 영국인 페락통감이 페락궁정에서 술탄의 협조를 받아
자문을 수행한다는 팡코르조약이 영국과 페락 간에 체결되어 페락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으니
영국이 말레이 반도 국가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하는 역사적 기점이 되었는데
영국의 간섭에 반발하여 페락 전쟁(Perak War)이 발발하였으나 영국군은 어렵지 않게 승리합니다.
슬랑오르에서도 술탄 압둘 사맛 치세에 내전 '클랑 전쟁' 이 벌어졌으니 이때 슬랑오르 지역은 술탄 외에도
여러명의 지방 군벌이 분점하는 형세였는데 술탄위 계승 경쟁에서 탈락한데 불만을 품은 압둘 사맛의
종손자 라자 마디는 더 많은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클랑 지역의 통치자 라자 압둘라와 술탄 압둘 사맛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켜 전쟁 초기 라자 마디는 성공을 거두어 라자 압둘라의 세력 중심 클랑을 점령합니다.
파항 내전, 라룻 전쟁, 클랑 전쟁은 영국 세력이 불간섭 정책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와 같은
내전이나 계승 분쟁은 중앙집권 체제가 강고하지 못하고 계승권이 정리되지 않은 말레이 문화권의
국가들에서는 역사적으로 흔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말레이 반도가 안정되지 않은채 이렇게 격렬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지역에서 영국의 경제적·정치적 이권이 안전할지 장담할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팡코르 조약으로 페락을 보호국화한 직후 슬랑오르에도 개입해 술탄 압둘 사맛을 설득해
1875년 슬랑오르에도 영국 통감을 두고 슬랑오르를 보호국화 하였으며 영국은 1873년
이권 보호를 위해 느그리슴빌란의 내전에도 개입해 보호령으로 삼았고 1879년
조호르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영국은 빠르게 개입하여 술탄 편에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말레이 국가 가운데 파항과 조호르는 1880년대 초까지도 영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유지하였으나
1885년 조호르 1886년 파항도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새로 보호령으로
만든 말레이 국가들(파항, 페락, 슬랑오르, 느그리슴빌란)을 묶어서 영국이 연방을 총괄하는 통감
을 두는 식민지 말레이 연방을 창설하고 수도를 당시 슬랑오르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강한 조호르는 말레이 연방에 가입하지 않았고, 다른 말레이
보호국들 보다 조금 폭넓은 자치를 유지하였는데 조호르의 술탄 아부 바카르는 1895년
4월 14일, 말레이 반도의 토착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조호르의 헌법을 반포
하였으니 점차 불붙기 시작하는 말레이 민족주의와 자치운동의 구심점 중 하나가 됩니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에 19세기 후반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경제적으로 지역의 주석을
획득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니 주석을 이용한 함석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석 광산의 운영에 세 집단이 관련되어 있었으니 첫째는 주석 광산을 보유한 술탄이었고, 둘째는
운영하는 영국의 자본가들이었으며, 셋째는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말레이반도로 온 중국인들이 뛰어난 교육열과 부지런함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의 공무원들이 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면서 소외된 말레이계 사람들과 반목하게 되니 영국인들은
말레이계열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단순하고 게으르며, 중국인들은 능력있지만 영악하다고 평가
했는데 화교의 급증으로 원주민인 말레이인들은 농어촌으로 밀려났고 민족갈등이 점차 싹텄습니다.
19세기 말부터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한 고무 플랜테이션 역시 말라야의 경제에 큰 역할을 했으니
20세기 초가 되면 고무가 말라야의 주 수출품목으로서 주석과 경쟁하게 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 면적이 전 세계 고무 농장 면적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는데 주석의 생산을 주로 중국계 광산 노동자들이 담당했다면,
고무 생산은 주로 계약이민으로 넘어온 남인도 출신 타밀족 농장 노동자들이 담당하였습니다.
19세기말 전란이 종식되고 영국 지배하에서 안정된 말레이 반도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으니
1901년 서말레이시아(싱가포르 제외) 인구는 173만명이었고, 싱가포르 인구는 23만명이었으므로
두 지역을 아울러 인구는 200만명으로 1830년대에 비해 2~3배 증가하였고 20세기에 말레이
반도에서는 인구가 10배 이상 증가하였는데, 서말레이시아 지역의 2000년 인구는 천 9백만명 입니다.
동말레이시아에서는 사라왁 보다 사바의 인구가 더 빠르게 증가하였으니 1900년 무렵 사라왁 인구
는 50만, 영국령 북보르네오(사바)의 인구는 30만으로 추산되는데 2000년, 사라왁의 인구는
2백만명이고 사바의 인구는 260만명으로 사바의 인구가 사라왁의 인구를 역전하여 26% 많았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역사는 18세기 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된 말레이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은 해협식민지로 불리었고, 다른 곳들은 보호령이 되었는데
1946년 말레이반도의 주들이 연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세웠고, 1948년 연합을
재편성해 말라야 연방이 설립되어 1957년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1963년 말라야연방은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와 연합해 Malaya 란 이름에 si 를 추가해 Malaysia
가 되었으나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 싱가포르는 정부와의 마찰로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었으며 고무, 주석등 천연자원이 풍부한지라 50년동안 GDP 성장률이 평균 6.5% 에 달합니다.
국왕은 9개 주에 있는 술탄에 의하여 5년에 한번씩 호선으로 선출하며 정부의 장은 수상이고 정부는
웨스트민스터 체제에 가까우니 법체계는 영국의 법에 기초하는데 말레이시아는 민족과 문화가
다양하고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치니 국교는 이슬람교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는 최남단 지역인 탄중피아이가 있고, 적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열대기후 국가이니 다양한
동식물군이 있어 생물 다양성이 큰 국가로 ASEAN, 이슬람 회의 기구의 창립멤버이며, APEC, 영국
연방, 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인데 2018년 현재 말레이시아의 구매력 평가는 1인당 $31,000 로 평가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일본의 침공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는 해체되고 일본제국의 영내로 편입
되었으며 1942-1945년에 걸친 일본의 말라야와 보르네오 싱가포르 지배는 잔인했으니,
중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일본은 이 지역 중국인들까지 무자비하게 살해했고 중국인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청년들은 태국을 거쳐 미얀마까지 이어지는 철로를 건설하는데 동원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막노동에 영양실조로 희생되어 미얀마에 이르는 철로는 '죽음의 철로' 라고
불리게 되었고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으며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음으로써
경제난에 시달렸으니 이때 "독립전쟁" 이 일어나 공산주의자들의 산악전이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인종적 긴장상태 및 민족주의가 성장하였으며 민중의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영국은 1946년 싱가포르를 제외한 영국령 말라야 지역에 직할 식민지인 말라야 연합을 건설했으니
말라야 연합의 이민법은 출생지주의를 강조했는데, 중국인(명나라, 청나라 출신) 및 인도인
(영국령 인도 출신) 등 외족도 1942년 2월 15일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으면 시민권이 주어졌습니다.
이민법 그 자체는 모든 민족에게 평등했지만 교육과 경제등에서 전반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던 말레이인
들은 이 결과로 중국인이니 인도인등 외국인의 힘이 세져 자신들 지위가 더 추락할까봐 두려움을
느꼈으며, 말레이인들의 상징이었던 술탄제를 폐지함으로써 말레이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됩니다.
말라야 연합은 해체되었고 1948년 말라야 연방이 결성되어 말레이인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
들이 시작되는가 하면 영국의 보호 아래 말레이 주의 지도자들의 자주성을 회복시켰는데
이 무렵 말라야 공산당(PKM) 소속 중국계 게릴라들이 영국을 자국에서 축출하는
목적으로 영국군과 무장투쟁을 시작했으니 그러자 1948년에 말라야 비상사태가 선포됩니다.
인도네시아처럼 영국 연방 국가들의 병력을 동원해 이들 공산 독립군들을 진압하였으며
비상사태는 독립 후인 1960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럼에도 말라야의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져 결국 1955년에 총선이 실시되었고, 1957년 8월 31일 영국
으로 부터 독립하는데 저런 투쟁이 없었다면 영국의 식민통치는 더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1957년 말라야 연방을 수립했으나 나라 안은 말레이인과 중국인등 민족간 갈등이 심한데다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될 만한 자원이 부족했고, 원주민 수가 부족해 말레이인들을 우대하는데 크게
불리했는데 마침 영국의 또다른 식민지였던 북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 브루나이
에서도 독립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말라야 연방 정부는 이 지역에 자국에 가입할 것을 권유합니다.
브루나이가 먼저 동의함으로써 1961년 말라야연방에 가입했으나, 석유라는 최고의 경제적
조건을 갖춘 브루나이는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쇠퇴할 것을 우려해 1년만에 탈퇴했고
북보르네오(사바), 사라왁, 싱가포르는 당초 이를 고사했으나 싱가포르가
가입을 결정하니 싱가포르와 깊은 인연이 있던 북보르네오와 사라왁도 가입을 결정합니다.
1963년에 세나라 모두 영국으로 부터 독립해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니 같은 해 9월 16일 이들을 포함
하여 연방제의 틀 하에서 말레이시아가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통일말레이 국민조직의 지도자 툰쿠
압둘 라만이 초대 수상이 되었으며, 느그리슴빌란 주의 술탄 투앙쿠 압둘 라만이 초대 국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년후 싱가포르가 예전에 이주해왔던 중국계 정책 문제로 인해 연방에서 축출된 것으로 지금의
국경이 완성되었으니 연방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1960년대 초에 인도네시아와의 대립
국면과 소규모 국지전이 발생하였고, 1969년의 인종 폭동으로 인해 비상사태가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말레이시아 연방은 입헌군주국 체제를 취하는데, 1970년 이래 통합 말레이 국가 조직이
주도하는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이 연정을 통해 입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2018년 4월 총선에서 Pakatan Harapan 야당이 승리해 첫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국민전선 정부는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여 1990년대까지 말레이시아 국민의 삶의 질을 극적으로
변화시켰고, 영어와 더불어 말레이어의 사용을 촉진했으며 마하티르 수상은 인구는 다수이나
경제적으로는 중국계에 비해 열세였던 말레이인/무슬림을 중심으로 약자 우대정책을 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