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 문학사에서 에드거 앨런 포, 에밀리 디킨슨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꼽히는 월트 휘트먼. 그는 1855년 출간한 시집 『풀잎』을 통해 자유시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면서 미국 문학사에서 혁명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가 미국의 혁명시인, 국민시인, 민중시인이라 불리는 진짜 이유는 시의 형식이 아닌 그 내용에 있다. 휘트먼은 영혼과 육체에 대한 동등한 존중, 열린 정신, 정치적 자유의 향유를 노래했고, 이전까지 영웅을 노래하던 시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을 자신의 시와 글 속에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에 할애하는 한편, 생계유지를 위해 인쇄공, 저널리스트, 교사 등으로도 일하며 평범한 사람들과 교유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시간들이 시와 글 한줄 한줄에 담겨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면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가 남긴 단 두 권의 책 『나 자신의 노래』와 『풀잎』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저작이다. 그가 미국 역사학자들이 선정한 '미국 역사 형성에 큰 영향력을 끼친 100인' 중 22위를 차지한 것도 그의 삶이 담긴 시와 글들이 세기를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월트 휘트먼의 일기『나 자신의 노래』는 다른 일기문학과 구별되는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른 일기문학이 작자의 사후에 출간된 것과 달리 이 책은 휘트먼이 스스로 그의 손으로 정리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관해 휘트먼은 "독자들에게 내가 쓴 모든 일기를 제공했어야 한다. 내가 겪은 모든 사건과 추억들을 낱낱이 보여 줬어야 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 작업은 내가 보여 주고 싶은 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그의 생각과 의도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나 자신의 노래』의 근간은 그가 쓴 일기와 메모들이다. 휘트먼은 평소 일기 쓰기 외에도 늘 손에 들고 다녔던 수첩에 순간순간의 단상들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결과 남겨진 수십 권의 수첩과 일기가 이 책의 기초가 된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을 정리한 시기가 중풍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넘긴 후인 60대 중반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온 후 두 달여의 기간 동안 피로 얼룩지고 비에 젖은 수첩들을 뒤적이며 과거의 시간들을 정리하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이 시대의 역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속을 거닐었고, 이 경험이 내 영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다녔던 작은 수첩에 나의 삶을 주관했던 거대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손때로 더럽혀진 페이지마다, 우연히 끼적거린 짧은 글귀마다 내가 살아온 시대와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음성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 구겨진 종잇조각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휘트먼의 자선일기 『나 자신의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남북전쟁에 관한 기록과 대자연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그리고 앞뒤로 젊은 시절에 대한 회고와 이 책을 마무리하는 시인의 고백이 담겨 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벌어진 남북전쟁의 기록은 그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워싱턴의 군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면서 기록한 글들이다.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과 그 광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휘트먼은 동시에 그 어둠의 시간에도 희망의 빛을 발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 주목한다. 자신보다 더 아픈 병사를 위해 간이침대를 양보하는 부상병, 아픈 병사들을 위해 선뜻 거액을 기부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 젊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군의관과 간호사들, 부상당한 북군을 치료해 주는 남군 장교,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치는 이름 없는 병사들. 휘트먼은 피와 광기로 물든 남북전쟁의 전장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보았다. 이를 통해 그는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 비극을 치유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서 휘트먼의 대표 사상인 인격주의가 태어난다.
글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그가 뉴저지 주 캠던에 정착하여 자연 속에서 생활하게 된 1870년대 중반으로 이어진다. 그는 캠던에서의 일상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매일 반복되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간들 속에서, 때로는 비가 오고 때로는 햇살로 물드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든든히 그의 곁을 지켜주는 풀, 새, 벌레, 바람, 나무, 별 들 속에서 그는 자연의 생명력과 경이로움을 새삼 깨닫는다. 이 시기를 지나오면서 휘트먼에게 자연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해 주는 생명의 원천이자 인간만큼이나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 진리를 깨달았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존중해야 한다는 진리, 즉 모든 생명은 살아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존귀하다는 진리가 그것이다. 마침내 그의 인격주의가 인간을 뛰어넘어 자연까지도 끌어안아 완성된 것이다.
책속으로
그날 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고, 오랜만에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었다. 첫여름의 풀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 이 풀 향기가 비릿한 피비린내로 바뀌었다. 첫여름을 고대했던 여린 풀잎들 위로 군화와 포탄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여 본 적 없는 젊은이들이 난생 처음 만난 이웃마을 젊은이에게 대검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후려갈겼다. 포병들은 아군과 적군이 뒤엉킨 들판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포탄을 쏘았다. 이 포탄에 친구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천국은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했다. 1분마다 수십 명의 젊은 영혼들이 하늘로 올라갔다. 곳곳에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간 팔다리가 나뒹굴고, 시뻘건 젊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숲에 불이 나 다리에 총을 맞은 병사들은 꼼짝없이 불에 타 죽었다. 이 참상을 견디다 못한 하늘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타오르는 포탄의 불길을 끄지는 못했다. 도처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보름달이 지고 태양이 떠올랐다. 지친 병사들은 반쯤 미쳐 버린 눈으로 총구를 조준했다. 총알이 떨어진 병사들은 온몸으로 싸웠다. 후커 장군도 칼을 빼들고 백병전에 뛰어들었다. 서로 똑같은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도 병사들은 피를 뒤집어쓴 상대방을 악마라고 생각했다. (중략) 누가 그날의 전투를 역사에 기록할 수 있을까? 누가 그날의 전투를 기억하고 싶어 할까? 그 잔인한 백병전과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치러진 총격전, 끊임없이 불을 내뿜는 대포,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비명과 저주와 진격 나팔 소리를 알고 싶어 하겠는가? 인간이 악마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스스로 증명해 냈다. 오후의 해질녘보다 더 시뻘겋게 물든 들판에서 젊은 병사들은 만물을 비추는 은색 달빛과 마주했다. 그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누가 묘사할 수 있는가? 난생 처음 보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에게 단도를 쑤셔 넣는 젊은 영혼의 혼란을 누가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_ 108~110쪽
연대 병사 중 서른이 넘은 병사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적게는 열세 살, 많아야 스물세 살 남짓이다. 얼굴은 다들 창백했고 표정은 지쳐 있다. 군복은 꼬질꼬질했고, 소총과 배낭 외에 프라이팬이나 빗자루 같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다. 그들은 아직 세상을 모른다. 세상을 알기도 전에 사람부터 죽이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의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인간에 대한 혐오스런 폭력은 참을 수가 없다. 저 평온한 얼굴들이 들판과 숲에서 사람을 죽였다. _ 177~178쪽
100만 명. 4년 동안 100만 명의 젊은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 합중국 정부가 새롭게 만든 국립묘지에는 7,000개의 묘지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이 전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니는 모든 길에 그들이 묻혀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모든 곳에서 그들이 썩고 있다. 나무와 꽃, 새와 짐승들이 우리 젊은이들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다. 저 들판에 여무는 보리 한 톨, 정원에 핀 한 송이 꽃, 내가 들이마시는 한 가닥 호흡에도 북부와 남부의 전쟁터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_ 231~232쪽
떡갈나무 잎사귀에 의지해 소나기를 피하고 있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유폐된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스스로 선택한 유폐다. 하늘은 여전히 납빛 구름에 덮여 있다. 한쪽에는 연못이, 한쪽에는 풀밭이 펼쳐져 있다. 풀밭에는 야생당근의 유백색 꽃이 잔뜩 피었다. 멀리서 도끼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이런 지루한 경치 속에서―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나는 혼자 행복해 하는 것일까. 왜 난 행복한 걸까. 이 행복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방해하도록 허락하고 싶지 않다. 나의 감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 싶다. 나는 혼자다. 인생을 살다 보면 반드시 그런 날이 찾아온다. 나는 혼자다.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그 시간이 찾아왔다. 인간이 스스로 단독자임을 고백하는 순간, 인간은 저 거대한 자연이 된다. 자신의 모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_ 301쪽
꽃과 나무와 전쟁터를 지켜보던 그 눈으로 휘트먼이라는 인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의 삶엔 [나]라는 존재가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 점에서 생각했을 때 나의 지난 삶을 신뢰해도 괜찮을 것 같다. 기억의 편린과 추억의 나날들이 눈에 선하다. 슬픔과 고통과 번민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 모든 시간들 속에서 나는 살아왔다. 독자들에게 한 인간의 방황과 감정과 사상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 손으로 직접 이 일기들을 정리했다. _ 4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