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531호 http://cafe.daum.net/dongcheon21 포덕 159년 5월 8일(화요일)
시 일 소 식
포덕 159년
5월 둘째주 화요시일
발행처:천도교 동천교구 / 발행인:강병로 / 편집인: 배영진/ 주소:부산남구못골번영로105(대연동) /전화(051)628-1300 FAX : 624-0519
시 일 식 순
집례 : 기암 신원기 교무부장
▶ 청 수 봉 전
▶ 개 식 심 고
▶ 주 문 3 회 병 송
▶ 경 전 봉 독 -- 동경대전 ‘수덕문’(50~56쪽) ---- 이효원 학생동덕(2)
▶ 천 덕 송 합 창 ---------제5장 몽중노소문답가(14쪽, 1~2절)
▶ 설 교 ‘ 경전 간행의 과정와 의의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 천 덕 송 합 창 ---송가, 목적풀이(천덕송 70쪽, 1~2절)
▶ 폐 식 심 고
* 음악준비 : 이서준 학생동덕(2)
경전 간행의 과정와 의의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봄 날씨가 변화무쌍합니다. 이 속에서도 한울님 자취를 느낄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간행 경과와 출판의 의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전은 종교의 구성 요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종교의 교의를 담고 있어서 교인들은 경전을 통해 신앙심을 확립합니다. 천도교 경전의 특징은 우선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직접 지으셨다는 점입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창시자가 죽은 이후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졌지만 천도교의 경전은 창도자가 직접 지었습니다. 다음으로 한문과 한글로 된 두 종류의 경전이 있습니다. 한문 경전은 <동경대전>, 한글 경전은 <용담유사>입니다. 지금 천도교 경전은 이 두 가지와 함께 해월신사법설, 의암성사법설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경전은 동학이 창도된 지 약 20년 만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해에는 경전 간행과 함께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포덕21년(1880년) 4월 5일에 해월신사께서는 처음으로 동학의 창도기념제례를 거행하였다. 그때까지 해월신사는 10월 18일의 수운 탄신제와 3월 10일의 순도제만 지냈고 창도기념제례는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해월신사는 인등제를 시행하면서 창도기념제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창도 20년만인 1880년 처음으로 기념제례를 거행하였습니다. 당시 해월신사는 창도기념제례를 각 접에서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부터 시행된 수운의 창도기념제례는 제3세 교조 의암성사 의해 천일기념일(天日記念日)로 이름이 바뀌어 천도교단의 제일 큰 기념일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경전 간행은 교세가 신장되어 경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동학의 교세는 강원도의 영월, 인제, 정선, 그리고 충청도 단양, 경상도 상주, 청송 등을 중심으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늘어나는 도인들이 경전을 요구하자 붓으로 쓰는 필사(筆寫)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경전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자 해월신사는 목판본을 만들어 경전을 대량으로 간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젊은 시절 해월신사는 10여 년간 제지소에서 종이를 만들어 인쇄 과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서 수운대신사께서 살아있을 때 해월신사에게 자신의 경편들을 간행해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천도교 역사서인 <도원기서>를 갈무리한 해월신사는 포덕21년(1880년) 4월 하순에 본격적으로 경전 간행 작업에 돌입하였습니다. 경전 간행에 필요한 경비는 각 접에서는 나누어 마련하였는데 경상북도 상주의 윤하성이 40금(金), 정선접에서 35민(緡, 돈꾸러미), 인제접에서 130금(金), 청송접에서 6민(緡)을 염출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금이 마련되자 각판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해월신사는 5월 9일 경전을 만들 각판소(刻版所)를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김현수(金顯洙)의 집에 설치하고 11일부터 본격적으로 각판에 착수했습니다.
인제군 갑둔리는 홍천에서 인제에서 방향으로 가는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신남을 조금 못 미쳐 있는 다물교차로에서 446번 국로로 빠져나와 상남 방향으로 난 고갯길을 약 5㎞ 가면 나타납니다. 갑둔리는 인제관아와 홍천관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관의 지목을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응봉산록에 위치한 갑둔리는 첩첩산중으로 인적이 드물어 다른 사람의 왕래가 없어 조용히 각판 작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또한 갑둔리에는 김현수를 포함해 동학도인들이 많아서 수십 명이 모여서 작업을 해도 비밀도 보장되었습니다.
강원도에서는 2016년 10월 <동경대전>을 간행한 갑둔리 김현호의 집터(갑둔리 351․ 375번지)를 ‘동경대전 간행터’라 명명하여 강원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안타가운 점은 현재 갑둔리는 군 작전구역이어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군 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갑둔리와 이어진 마을이 성황거리인데 이곳의 이명수의 집에서 해월은 “저 새 소리도 한울님의 소리이다.”라는 유명한 법설(法說)을 한 곳입니다. 갑둔리를 지나면 김부리인데 이 지명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김부(金傅)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곳에는 경순왕의 사당인 대왕각(大王閣)이 있습니다.
갑둔리 김현수의 집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있어서 수십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생활하기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또한 많은 물이 필요한 판각 작업을 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5월 11일에 시작한 판각 작업은 해월신사께서 직접 주관하였습니다. 각판 작업에 참여한 인원은 해월신사는를 포함해 30명이었습니다. 해월신사는 이들에게 각각 역할을 맡겨 일사분란하게 작업을 진행하였다. 여기에는 해월이 청년기 제지소에서 일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판각 작업은 한 달 만에 마무리되었습니다. 6월 14일 해월신사는 드디어 목판본 <동경대전(東經大全)> 100부를 완성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5일 해월신사는 경전 간행을 스승에게 고하는 봉고(奉告) 제례를 올립니다. <도원기서>의 마지막에서 해월신사의 경전 간행에 대한 소감과 공헌한 이들의 ‘별공록(別功錄)’이 적혀 있습니다.
아. 선생(先生, 수운을 가리킴)의 문집(文集)을 판각해서 만들려고 한지 오랜 세월이 이미 지났다. 이제 경신년(庚申年, 1880)을 맞아 강시원(姜時元)・전시황(全時晄) 및 여러분과 더불어 장차 판각을 간행하려고 발론(發論)하였다. 각 접중에서는 다행히 한가지로 나와 의논하여 각소(刻所)를 인제 갑둔리에 정하였다. 뜻한 대로 일을 마치니 비로소 능히 책으로 만들어 선생의 도와 덕을 분명하게 하였다. 이 어찌 흠탄(欽歎)하지 않겠는가. 각 접중에서 비용을 성출(誠出)한 이들에게 특별히 별록(別錄)을 만들어 그 공을 차례대로 기록한다. 경신년 중하(中夏) 도주(道主) 최시형(崔時亨)이 삼가 기록한다.
해월신사는 수운대신사께서 지은 경편을 책으로 엮어내어 비로소 스승의 도와 덕을 분명하게 밝히게 되었다고 경전 편찬의 의의를 밝혔습니다. 목판본 <동경대전> 인쇄는 동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습니다. <동경대전>의 간행은 첫째, 뒤이어 수운의 한글 경전인 <용담유사>의 간행과 수차의 경전 간행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동경대전> 간행이 성공함으로써 한글 경전의 간행도 촉발시켜 이듬해인 1881년에 이를 간행하게 됩니다. 이후 경전 간행은 수차 이루어졌는데 이는 갑둔리에서의 성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둘째, 경전 간행을 통해 도인들이 동학의 교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경전은 필사를 통해 소규모로 전해졌지만 오탈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경전의 수가 적어 해월신사나 교단 지도부가 직접 각지를 다니면서 동학의 교의를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전의 대량 간행으로 도인들이 쉽게 경전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기본적인 교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경전의 간행은 도인들의 신앙심을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셋째, 동학이 확산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식자층은 <동경대전>을 통해 동학의 교의를 이해할 수 있었고, 부녀자들과 한글 해독자들은 <용담유사>를 통해 동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즉 민중들이 쉽게 동학 경전을 통해 동학을 이해하였고 이는 교세의 확장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880년대 중반부터 삼남 일대에서 동학의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여기에는 경전 간행이 기반이 되었습니다. 경전 편찬은 도인들에게는 자부심이 되었고, 식자층에게는 동학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해월신사께서 이때 간행한 경전은 출판한 해인 1880년의 간지를 붙여 경진판 <동경대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해월신사는 이후 몇 차례 <동경대전>을 더 간행했기 때문입니다.해월신사가 해월이 간행한 <동경대전>은 경진판 이외에 계미중춘판(1883년 봄), 계미중하판(1883년 가을), 무자계춘판(1888년) 등이 있는데 각각 간행한 간지를 붙여 부릅니다. 1880년대에는 총 4차례 경전이 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해월이 최초로 간행한 1880년 간행한 경진판 <동경대전>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 윤석산 교수가 경진판으로 추정되는 판본을 발견해서 소개하였지만 아직 검증 중에 있다고 합니다.
1883년 여름에 간행된 계미중하판을 보면 <동경대전>은 크게 경문(經文), 시문(詩文), 통문(通文)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선 경문(經文)은 수운이 신비한 종교체험을 통해 깨달은 천덕(天德)을 이 세상에 펴는 이유를 밝힌 ‘포덕문(布德文)’, 동학의 교의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논학문(論學文)’, 동학의 수행 방법을 밝힌 ‘수덕문(修德文)’, 인식 가능의 세계인 기연(其然)과 인식 불능의 세계인 불연(不然)을 통해 궁극적 실재가 무엇인지 묻는 동학적 사유체계인 ‘불연기연(不然其然)’의 4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은 시문(詩文)으로 ‘축문(祝文)’, ‘주문(呪文)’, 입춘(立春)시(詩), 절구(絶句), 강시(降詩), 화결시(和訣詩),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등 각종 시문으로 이루어졌고. 마지막으로 수운이 도인들에게 각종 소식을 전한 ‘통문(通文)’과 각종 의식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천도교의 경전은 수운대신사께서 직접 저술하셨고 해월신사께서 보따리 속에 품고 20여년을 간직하다 목판본으로 찍어 간행하였습니다. 어렵고 힘든 과정에서도 스승님의 뜻을 이루려고 정성을 다했던 해월신사의 마음이 경전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경전 속에는 마음을 다시르고 도를 통하는 글들이 가득합니다. 경전과 친해지는 천도교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사계명(四誡命)
1. 번복지심(飜覆之心) 두게 되면 이는 역시 역리자(逆理者)요,
2. 물욕교폐(物慾交蔽) 되게 되면 이는 역시 비루자(鄙陋者)요,
3. 헛말로 유인(誘引)하면 이는 역시 혹세자(惑世者)요,
4. 안으로 불량(不良)하고 겉으로 꾸며내면 이는 역시 기천자(欺天者)라.
임사실천 십개조(臨事實踐 十個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