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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2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1:4-5절
1: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1: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주제 : 진리와 사랑가운데서 행하는 자
강론
요한2서는 사도 요한이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1:1)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성경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가 누군지 밝히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요한2서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택하심을 입은 부녀”를 교회로, “그의 자녀”를 성도로 적용을 시킨다 해도 잘못은 아닌 것입니다. 요한2서는 오늘 성령께서 우리들의 가정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2서의 중심주제는 “진리와, 사랑”입니다. 전체가 13절에 불과한 짧은 서신 안에 “진리”가 4번, “사랑”도 4번 강조되어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은 요한2서뿐만이 아니라 요한1, 2, 3서의 공통적인 주제요, 이는 교회의 두 기둥과 같은 요소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3번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2서를 통해서 한국교회와 가정과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려는 말씀은 분명한 것입니다.
㉠ 첫째는 4절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한 진리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 둘째는 6절입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6)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2서는 “진리” 가운데 행하지도 못하고 “사랑”도 잃어버린 한국교회에 어느 서신 못지않게 적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① 요한2서는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1:1)하고 시작이 됩니다. 최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택하심을 받은 부녀”라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 이는 최고의 사랑이요 은혜요, 축복이요, 출발점인 것입니다.
㉠ 말라기서의 첫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말 1:2)하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고 퉁명스럽게 대꾸를 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면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입니까”하고 자신들의 처지와 형편에 대한 불평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물질적으로 측정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사업이 잘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고 시련이 닥치면 사랑하시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이것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첫 말씀인 것입니다.
㉡ 저들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자 하나님은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즉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이 최고의 사랑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언제 택하셨는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라고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창세 전”이라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창세전에 세워졌기 때문이요, 여러분을 그 구원계획에 포함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은혜입니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의 “택하심”을 증언한 후에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1절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요, 참으로 사랑하심을 받는 자들”(1)이라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요한2서의 말씀을 받는 우리들의 신분인 것입니다.
② “택하심을 받은 부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말한 요한은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1하)하고 “진리”(眞理)를 말씀합니다. 그러면 “진리를 아는 모든 자”란 누구들이겠습니까? 주님은 요한복음 8: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름 아닌 “진리”를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 그러면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요한2서만으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설명하고 있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부녀”가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그 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사도 요한이 먼저 기록한 요한복음으로 가보아야만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진리”가 24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고 묻는데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현들이란 “진리가 무엇인가”를 탐구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다, 저 것이 진리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내가 진리다”라고 말한 사람은 유사이래(有史以來)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진리”가 되시는지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주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8:33-34)하십니다. 주님은 철학적인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롭게”하는 구원과 결부되는 신학적인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를 통해서 율법의 죄가 “탐심”(貪心)이라는 마음의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가능했겠습니까?
로마서 7:19절에서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합니다. 왜 그런가?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 7:14)고 자백을 합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주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자유롭게 해주셨는가? 애굽 바로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방도로 자유롭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심으로 자유롭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점을 로마서 8:2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심은 비 진리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1편에서는 “그(하나님)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의 백성을 속량”(시 111:7-9)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믿는 자들이 사도 요한이 말하는바 “진리를 아는 모든 자”(1:1) 곧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는 이 복음이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③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이 중요합니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합니다. 첫 절에서는 “진리를 아는 모든 자”라고 말씀했는데 4절에서는 “진리를 행하는 자”라고 말씀한다는 점을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 먼저는 “진리를 알아야”합니다. 다음은 “진리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찌하여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했는지 아십니까? 베드로는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했기”(갈 2:14)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고 말씀하는데 “심히 기뻐하실” 분은 우리를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 “진리”와 결부한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행하는 자”가 됨으로 우리 주님을 “심히 기쁘시게”해 드릴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안다 하면서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으로 책망을 받을 것인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도 귀합니다만 “진리를 행하는 자”가 더욱 중요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나 자신은 어떠합니까?
④ 다음은 5절입니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하고 “사랑”을 말씀합니다. 사도는 먼저 “진리”(眞理)를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행하면” 다음엔 무엇이 와야 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자”하는 “사랑”이 와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진리와 사랑”이 짝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사랑”은 교회의 두 기둥이요, 그리스도인의 신분증과 같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장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진리”는 보수했으나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반면 두아디라교회는 “사랑”은 있는데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하고는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5)합니다. “서로 사랑하자”는 것은 새삼스런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9:18절에 보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옛 계명인 셈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하십니다. 어찌하여 “새 계명”이라 하시는지 아십니까?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조건(條件)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대신 죽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라 하신 것입니다. 양을 제물로 드리던 구약의 사랑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어주신 신약의 “사랑”은 차원이 다른 “새 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하신 사랑을 받은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하심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골로새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등에 “믿음과, 사랑”(엡 1:15, 골 1:4, 살전 3:6)이 있음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사랑”은 형제 상호간의 유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입니다.
㉢ 1:6절입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하고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합니다. 6절 안에 “행하는 것이요, 행하라 하심이라”고 “행함”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점을 요한1서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3:18)고 말씀합니다.
⑤ 이처럼 “진리와 사랑”을 굳게 세운 후에 1:7절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하고 이단에 대한 경계를 합니다. 아가서 2:15절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합니다. 그러면 미혹하는 자는 어떤 자들인가?
㉠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7하)합니다. 요한1서 4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고 말씀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그리고 앞으로도 “예수가 누구신가”하는 기독론에 의하여 참과 거짓이 구별이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대속교리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한 선지자의 예언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아는 “영적인 지식”(靈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육신을 입고 오실 수가 있단 말이냐 아니다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가현(假現)설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잘못을 범하게 되었는가?
㉡ 1:9절입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지나치다”는 말은 앞질러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말하고 멈추는 데서 멈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구속사라는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을 확대하여 원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곡해하는 데서 이단이 생겨납니다.
㉢ 1:9절 안에는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와, 교훈 안에 거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단은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요, 진리를 아는 자는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거하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하다”의 반대는 “지나쳐”라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이단이 되는가? “진리” 안에 거하지를 않고 “지나쳐” 옆길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2:24절에서는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거하지 않고 새롭고 신비스러운 것을 찾다가 미혹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 1:10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합니다. 11절에서는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고 단호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사랑하라”하더니 어떻게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한단 말인가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이는 이단사상이 그만큼 전염성이 강하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사랑의 사도라는 요한이 한 경계임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것저것 다 좋다는 식이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을 진리를 통해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편협한 자, 독선자, 근본주의자”라고 매도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길은 여럿이나 목적지는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극단주의자들이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댈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주신 복음을 훼손하는 일만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아는 자도(1), 진리로 말미암음도(2),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3)하는 자들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랑하는 “부녀”가 이단의 위험성에 직면에 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집니다.
⑥ 끝으로 1:12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합니다.
㉠ 이점에서 주목할 점은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1차적으로는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부녀”에게 하는 말이지만 기록된 말씀이 선포될 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도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몬 1:22)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한 말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까?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 오늘에 다시 오신다면 부끄러움 없을까
잘 하였다 주님 칭찬하며 우리 맞아 주실까
재림하시는 주님을 “대면”(對面)하게 될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 요한2서는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13)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문안하는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을 성도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도는 “택하심”(1)으로 시작하여, “택하심”(13)으로 마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요,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우리의 정체성을 망각하지 않는 점이 중요합니다. 요한2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으로 부탁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하십니다.
㉯ “서로 사랑하자”(5)하십니다.
㉰ “교훈 안에 거하라”(9)하십니다.
㉱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한다”(12)하십니다. 왜 이렇게 권면하시는가?
㉢ 마지막 말은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2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는 주님을 대면하여 뵙게 되는 날, 우리의 기쁨이 얼마나 충만할 것입니까! 이 소망을 가진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행하고, 진리에 거하면서, 서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요한2서를 통하여 택하심을 받고 참으로 사랑하심을 받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진리와 생명 되신 주 이 몸을 바치옵니다
믿음과 소망 사랑에 한 마음 되게 하소서 아멘 (63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