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66)
묘향산에서 만난 서산대사의 발자취.
김삿갓은 영변(寧邊) 약산(藥山)을 돌아보며,
약산(藥山)이야말로 천혜(天惠)의 명산(名山)이라는 것을 절실(切實)히 느꼈다.
또 약산동대(藥山東臺)는 옛날부터 진달래의 명소(名所)로 이름난 곳이다.
진달래꽃이 한창 피어날 때면 산속을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과 옷 색깔이
진달래 빛으로 붉게 물들어 마치 신선(神仙)이 도원경(桃源境)을
거니는 것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아쉽게도 봄철이 아닌 가을철에 왔기에 진달래의 절경(絶景)을
구경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약산성(藥山城)은 조선(朝鮮) 태종(太宗) 11년에 도절제사(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축조(築造)한 성(城)으로,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둘레가 이십 리(二十里)가 넘게 거대(巨大)하다.
게다가 성안에는 곳간이 서른네 칸이나 있어,
여러 고을에서 모아들인 조세미(組稅米)를
보관(保管)하며 군량(軍糧)으로도 쓰고
빈민(貧民)을 먹여 살리는 구휼미(救恤米)로도 써왔다.
약산성(藥山城)이 축조(築造)된 태종(太宗) 16년 도체찰사(都體察使)였던 황희(黃喜)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약산성(藥山城)은 하늘이 내려 주신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이오니,
이 성(城)을 북방(北方) 수비(守備)의 군진(軍鎭)으로 지정(指定)해 주시옵소서.“하고
청원(請願)하자, 임금은 기꺼이 윤허(允許)하였다.
약산성(藥山城)은 그때부터 북방(北方) 수비(守備)의 요충지(要衝地)가 되어 온 것이다.
성(城)이 완공(完工)되기까지는 북방(北方) 오랑캐(돼 놈들의 조상 놈)들이
수시(隨時)로 압록강(鴨綠江)을 넘나들며 우리나라를 침범(侵犯)하여 약탈(掠奪)을 해왔었다.
그러나 약산성(藥山城)이 완공(完工)된 그 뒤로는 감히 침범(侵犯)을 못 해왔으므로,
백성(百姓)들은 안심(安心)하고 이 성안으로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여진족(女眞族)의 침범(侵犯)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윤덕(崔潤德)이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있을 때 북방의 이살만(李撒滿)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약산성(藥山城)으로 쳐들어오기도 했지만 모두 참패(慘敗)했고 결국(結局)은
모두 성(城) 아래서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降伏)을 한 일도 있었다.
약산성(藥山城)은 이처럼 견고(堅固)하게 만들어진 성(城)이라 백성(百姓)들은
약산성(藥山城)을 “철옹성(鐵壅城)“이라고 불렀으며 지금(只今)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대명사(代名詞)로 쓰이게 된 것은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다.
김삿갓은 약산성(藥山城)을 모두 돌아보고 발길을 묘향산(妙香山)으로 돌렸다.
묘향산(妙香山)은 금강산(金剛山), 한라산(漢拏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명산(名山)의 하나다.
그래서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일찍이 이 세 산(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評)한 일이 있었다.
『금강산(金剛山)은
수이부장(秀而不壯)하고,
금강산은 빼어나지만 장엄하지 못하고
한라산(漢拏山)은 장이부수(壯而不秀)하다.
한라산은 장엄하다.
한라산은 장엄하나 빼어나지 못하다.
그러나 묘향산(妙香山)은 수이역장(秀而亦壯)하다.
묘향산은 빼어나고 장엄하다.』
영변(寧邊)에서 묘향산(妙香山)으로 가려면
첩첩(疊疊)의 태산준령(泰山峻嶺)을
백삼십 리(百三十里)를 걸어 넘어야 했고
가도 가도 험준(險峻)하기만 하였다.
산속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태산준령(泰山峻嶺)을 걸어 넘으려니
숨이 가빠 걷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그러나 곧 묘향산(妙香山)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서서인지 가슴은 설렜다.
그러기에 자기(自己)도 모르게 즉흥시(卽興詩) 한 수가 읊조려졌다.
평생소원자하구 (平生所願者何求)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었던고
애의묘향산일유 (每擬妙香山一遊)
묘향산을 한 번 구경하는 일이었노라
(묘향산에서 한 번 노니는 것이었지)
산첩첩천봉만인 (山疊疊千峰萬仞)
산은 첩첩 모든 봉우리 한없이 높고
(산은 첩첩이오 천만 봉 머나먼 길에)
노층층십보구휴 (路層層十步九休)
길은 층층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어야 하네.
(길 겹겹이라 열 걸음에 아홉 번 쉬네)
묘향산(妙香山)에는
보현사(普賢寺)를 비롯해 절이 자그마치 삼 백 육십 개(三百六十個)나 있었다.
고려(高麗) 말(末)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그의 기문(記文)에서
"묘향산(妙香山)에는 향(香)나무가 유난스럽게 많이 있다." 하였다.
이렇게 향(香)나무가 많았기에 산(山)의 이름도,
”묘향산(妙香山)”이라 불린 것인가!
묘향산(妙香山)은 산세(山勢)가 험준(險峻)하고
가는 곳마다 절도 많아 어느 산골짜기나
비경(秘境)이 아닌 곳이 없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에
간간이 염불(念佛) 소리와
목탁(木鐸) 소리가 어우러져,
묘향산(妙香山)은 인간(人間) 세계(世界)가
아니라는 느낌조차 들었다.
김삿갓은 묘향산(妙香山) 속으로 들어서며
우선 보현사(普賢寺)부터 구경하기로 하였다.
보현사(普賢寺)는
그 규모(規模)가 웅대(雄大)하기로는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장안사(長安寺)나
유점사(楡岾寺)의 류(類)가 아니었다.
법당(法堂) 하나만도 육백(六百) 칸이 넘는
어마어마한 거찰(巨刹)인데,
절을 사방(四方)으로 에워싸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산봉우리는
한결같이 웅장(雄壯)하고 숭고(崇高)하여,
자연환경(自然環境)만으로도 부처님의
위력(偉力)을 말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김삿갓은 묘향산(妙香山)을 구경하며,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법명(法名) 휴정(休靜),
그는 태백산 기슭인 안주(安州)에서 태어나
묘향산(妙香山) 속에서 자랐고,
수도(修道)와 득도(得道) 또한, 묘향산(妙香山)에서 하였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를 “서산대사(西山大師)”라 불러오고 있다.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고 나라의 운명(運命)이 위태(危殆)롭게 되자,
산중(山中)에서 수도(修道)에 전념(專念)하고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결연(決然)히
구국(救國) 운동(運動)을 폈다.
그리하여 전국(全國) 사찰(寺刹)에서 모여든 1700여 명의 젊은 승려(僧侶)들로 만들어진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 달려가 크고 작은 전투(戰鬪)를 벌였는데
특히 모란봉(牡丹峯) 싸움에서 왜적(倭敵)을 크게 물리쳤다.
이때, 평양(平壤)에 몽진(蒙塵)하고 있던 선조대왕(宣祖大王)은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나라 형편(形便)이 이 지경(地境)인데,
승려(僧侶)인 그대가 능(能)히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는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즉석(卽席)에서 대답(對答)했다.
"나라가 망(亡)하면 불도(佛道)를
어찌 유지(維持)할 수가 있으오리까?
그러하니 늙고 연약(軟弱)한 중들은 절에서 부처님을
봉양(奉養)하게 하는 것이 도리이옵고,
승(小僧)은 젊은 승려(僧侶)들과 함께 왜적(倭敵)을 무찌르겠사옵니다."
이때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나이가 이미 62세였으니 그의 기개(氣槪)가 얼마나
웅건(雄健)했던가를 가히 짐작(斟酌)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승군(僧軍)으로 왜적(倭敵)을 크게 무찔렀다는 소문(所聞)이
널리 알려지자, 평소(平素)에 그를 존경(尊敬)해 오던
젊은 중들이 전국(全國)에서 구름처럼 몰려와,
승군(僧軍)의 수효(數爻)는 오래지 않아 오천여 명(五千餘名)으로 불어났다.
그에 따라 아군(我軍)의 사기(士氣)가 크게 앙양(昂揚)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태(事態)가 이쯤에 이르자 적(敵)의 사기(士氣)는 땅에 떨어져,
승군(僧軍)은 가는 곳마다 승리(勝利)에 승리(勝利)를 거듭하게 되었다.
승려(僧侶)의 몸으로 전쟁(戰爭)에 직접(直接) 가담(加擔)하여 커다란 전공(戰功)을 세운 것은
일찍이 어느 나라 불교사(佛敎史)에도 없는 일이므로,
이는 불교사(佛敎史)에서 매우 특이(特異)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일이다.
전쟁(戰爭)이 날로 치열(熾烈)해지자,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서
수도(修道) 중(中)이던 사명대사(泗溟大師)와
처영(處英) 스님도 서산대사(西山大師)에
호응(呼應)하여 왜적(倭敵)에게
양면(兩面) 공격(攻擊)을 퍼부음으로써
마침내 왜적(倭敵)을 궁지(窮地)에 몰아넣는데,
결정적(決定的) 이바지를 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났을 때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나이는 이미 69세였다.
선조대왕(宣祖大王)을 한양(漢陽)으로 모시고
올라온 서산대사(西山大師)는 대왕(大王)에게,
"신(臣)은 이미 너무 늙었으므로
모든 군무(軍務)를 사명(泗溟)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 노승(老僧)은
묘향산(妙香山)으로 돌아갈까 합니다."하고
청원(請願)을 하니, 선조대왕(宣祖大王)은 그의 전공(戰功)을 크게 치하(致賀)하며,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 총섭, 부종수교, 보제등, 계존자"라는
특별(特別) 칭호(稱號)를 내리며, 귀산(歸山)을 허락(許諾)하였다.
(주*
아래와 같이 21자 붙여쓰기임.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그리고 그는 불도(佛徒)로서 하지 말아야 하는
살생(殺生)하였음을 참회(懺悔)하면서
윗대부터 전해오는 일체(一切)의 법통(法統)과
그것이 주는 권위(權威)를 받지 않았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전쟁(戰爭)에서도
전략(戰略)과 전술(戰術)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명나라의 장수(長帥) 이여송(李如松)은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다음과 같은 시(詩)로 칭송(稱頌)한 일이 있다.
무의도공리 (無意圖功利)
공리를 생각하지 않고
전심학도선 (專心學道禪)
전심으로 선을 배웠네
금문왕사급 (今聞王事急)
이제 나라가 위급함을 알고
총섭하산령 (摠攝下山嶺)
총섭께서 산에서 내려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