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2장 13-21절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 왜냐하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2). 무엇보다 복음이 감추인 것을 드러나게 하며, 숨긴 것을 알려지도록 하기 때문에(3) 제자들의 복음 전파는 그들의 외식을 더욱 드러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까지 일어나게 되느냐? 복음에 대해,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 박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12장 4절과 5절입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즉 복음에 대해 박해하는 자들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을 죽이거나 지옥 불에 넣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박해의 가장 센 형태가 무엇인가? 육신의 생명을 빼앗는 일입니다. 하지만 영혼을 건들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육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에 박해, 혹은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육신의 상함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박해하는 자가 머리털 하나라도 건들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는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복음을 반대하는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복음을 반대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요구를 하게 됩니다. 13절을 보시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아마도 이 사람은 자신의 형이 외식하는 자와 같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형이 그 유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예수님이라면 균등하게 나눌 뿐 아니라 자기 형으로 하여금 유산을 나눠 가지게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내용도 있느냐? 하나님과 인간이 단절됨으로 인해 나타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도 해결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직무로 있습니다. 율법의 요약에서 잘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내용으로 있다면, 그 사랑이 이웃 사랑에까지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이루어야 할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형제간에 물질로 인하여 다툼이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그것을 거절하고 계십니다. 왜 그런가? 칼빈에 의하면 몇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는데, 약간 참고하여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일단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나라가 지상에 세워지는 나라라고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구원은 정치적 메시아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나고 있는 오병이어 사건 이후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최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 땅의 임금 삼기를 원했습니다(요6: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으로 하자면 표적을 본 까닭에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에, 철저히 썩을 양식만을 구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요6:26). 이런 점에서 보면 그들은 육적 구원을 꿈꾸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무엇으로 나아오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께 나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고, 그런 오해를 주지 않기 위해 거절하셨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정치적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구분된다는 걸 알리길 원하셨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본문의 내용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재판을 따라 물질을 균등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한 마디로 말씀의 권세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이 믿는 자들 속에 칼처럼 들어가 그들의 모든 생각과 사상을 자르고,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변화되는 권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상의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해 주는 것으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인 사람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그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육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을 위해 오셨으며, 영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 아래만 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육적인 문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에는 있었지만 모든 관심은 어디 있느냐? 육신의 문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비록 물질에 대해 나눠주십사, 그것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 균등하게 나눠주십사 부탁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무엇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하고 있는가? 탐심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앞서 교훈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절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외식이란 말은 한 마디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하자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는 것 같지만, 실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칠 뿐,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는 자들이 아닙니다(마15:8-9, cf.사29:13). 그런데 그런 말씀을 듣고 있는데도 무리 중 한 사람이 뭐라고 요청하는가?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 이렇게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자신은 공평하게 나눠주길 원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을 통해 공의가 시행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 속은 어떤가? 탐심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기억해야 될 것은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다 그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 알고, 자신에게 그 말씀에 비춰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했다면 나 자신은 그런 자로 있는 건 아닌가 돌아봐야 합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그 말씀을 심어주셔야 합니다. 이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깨닫는 바가 있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있다면 깨달은 자신이 괜찮아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영의 역사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도 듣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핑계 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이 그와 같습니다. 분명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말씀을 자신에게 비춰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완악함이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탐심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그의 요구 자체는 외적으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거절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14)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이것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다양하게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목적과 다른 것이라면 거절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구분하셔야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것을 위해 오셨다면 믿는 자들은 아프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도 고치고 귀신 들린 자의 귀신도 쫓아내는 등 마치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처럼 보이는 일도 하셨지만, 그것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적인 문제와 관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됨으로 결과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단절된 것을 화목하게 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주님을 찾는다면, 예를 들어 의식주 문제만으로 주님께 나아와 구하는 일이 있다면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그리고 왜 죽으셨는지, 또 왜 부활하셨는지 모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인생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탐심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이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항상 들어 있는 마음의 상태라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 할지라도, 그리고 복음을 시인하는 자라 할지라도 탐심을 물리치지 못하고,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을 시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사적 이득을 얻는데 수단으로 사용하고 자신의 탐욕을 그리스도의 권위 뒤에 숨기는 데 수단으로 삼는 행위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보편화된 병폐이다”
그럼 칼빈 시대만 탐심이 보편화되어 있었는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탐심이 있지만, 믿는 사람들도 탐심이 있습니다. 성도만이 아니라 목회자들 마음에도 탐심이 있습니다.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탐심이 있습니다. 좀 더 좋은 것에 대한 탐심이 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하는 것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만족함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거기에 탐심이 자리하게 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이런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누가복음 12장 22절과 23절입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그리고 28절 이하로 넘어가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눅12:28-3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아무런 염려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길러지고 있다면 하물며 그것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는 너희를 책임지시지 않을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따라 사는 자들만이 하는 그런 근심을 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하느냐?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처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나 동시에 오늘 본문에서처럼 우리 마음에 탐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말씀으로 하자면 주께서 주신 것에 대해 자족함,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요, 좀 더 쌓아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한 부자처럼 쌓고 또 쌓아 더 이상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쌓아두어야지만 그제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 때문입니다. 본래 이런 사고는 어떤 사람들의 사고냐? 세상 사람들의 사고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이후에 예수님은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앞서 오늘 본문에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그 질문에 대하여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특히 여기 보면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쉽게 이해하자면 생명의 참된 가치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생명을 지키거나 연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느냐?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만 넉넉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삶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 버렸느냐? 물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사고 아래 온통 그것이 초점인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사람들이 물질에 전전긍긍하며 사는가?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넉넉함은 무엇과 같은가? 행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본래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이 물질이라는 것과 맞물려 무엇까지 하게 되었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질을 모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소유가 많다고 해서 생명의 가치가 제대로 발휘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소유가 많다고 해서 생명을 지키거나 연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비유를 드시는데, 16절 이하 19절을 보면 한 부자에 대한 비유를 하십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지금 이 부자의 모든 방향은 물질에 있습니다. 정확하게 물질이 곧 행복이라는 세상적인 공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모읍니다. 물질을 모으되 그가 준비한 창고에 가득 찰 정도로 모읍니다. 아니 모으다 보니 그가 준비한 창고로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게 되느냐? 근심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나?” 그리고 결정을 하게 됩니다. 지금 있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으리라. 그리고 심중에 뭐라고 말하느냐?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여기까지만 보면 물질이 곧 행복이라는 세상 공식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모아두면 평안히 쉴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 앞에 어떤 일을 말씀하시느냐? 20절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일단 생명의 주인이 누구냐 할 때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취하고자 하시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마치 생명이 연장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역사 이면에 누가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늘 우리는 소위 가까운 원인, 먼 원인이라고 할 때 가까운 원인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먼 원인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고, 먼 원인이 있다는 것은 먼 원인, 가까운 원인이라고 해서 둘 다 원인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실제로 둘 다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 원인만이 유일한 원인임을 아셔야 합니다. 가까운 원인은 먼 원인의 수단일 뿐입니다. 아무리 의학이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말씀하시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있고, 지금 내가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내 생명을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명은 철저히 하나님만이 쥐고 계십니다. 생명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창조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조차 섭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취하신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을 통해 생명을 취하시기도 하십니다. 다만 이때 우리가 주의할 것은 그런 방식으로 있을 때 그 일은 무엇과 같은가?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성격으로 있을 뿐입니다. 자살이라는 방식이 성경을 통해 성령의 열매로 증거 된 바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생명에 대한 옳은 자세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런 방식을 통해 생명을 취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과도 같은 성격으로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육신을 위해 힘쓰고, 애쓴 모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면 육신을 위해 힘쓰고, 애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물질을 모았는데, 비유의 표현대로 하자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기 위해 물질을 쌓아두었는데,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불러 가신다면 그것을 위해 살았던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이 되겠느냐? 그 물질을 모으기 위해 고생만 한 것이 아니냐?
결국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생명의 가치는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둠으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그런데 모든 인생이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느냐? 이 방향을 위해 가고 있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둠으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 인생을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어리석은 자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말씀하시기를, 21절에 보시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무엇과 무엇이 연결되고 있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것과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었다는 것은 무엇과 상관이 없느냐?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있습니다. 인생의 가치가 자기에게 있을 뿐,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느냐?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인생,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이 다 인줄 알고 그것만을 위해 사는 인생, 그 삶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뭔가 이루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고, 힘써 이루어낸 일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뭔가 남긴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인생은 어리석다고 하는 평가 외에 들을 말이 없습니다.
시편 14편에도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성경은 누구를 어리석다고 하는가? 세상 지식이 부족한 것을 어리석다고 하지 않습니다. 정직해서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자들이냐? 부패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부패로 인하여 그 행실 역시 선을 행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이 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패한 그들의 죄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선이라고 할 만한 어떤 일을 한 일이 있는가? 전혀 없었습니다. 혹 많아 쌓아 둔 것 중 일부를 나누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선이 되는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 선행에 관한 마지막 항목(7항)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일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하게 이용되어질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믿음으로 정결케 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말씀에 따라서 올바른 방법으로 행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올바른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죄악된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은혜를 받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행을 게을리 하는 것은 더욱 죄악된 것이요,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자는 하나님 앞에 선이라고 할만한 어떤 것을 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 있을 뿐이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러 가실 때 그의 인생 자체를 어리석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한 가지 더 유심해 봐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부자가 물질의 풍부함이 보장되었을 때 어떤 말을 하느냐 하면 ‘내 영혼아’ 이렇게 말 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나 이 땅에서 물질의 넉넉함으로 사는 것이 영혼이 참된 안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인생은 결국 지옥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안식은 어디에 있는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최종적인 자리에 있습니다. 개인적인 죽음에 이를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가 안식의 자리이고,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것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난 뒤에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가 안식의 자리입니다. 그럼 이 땅에서는 그것을 전혀 맛보지 못하며 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어리석은 자로서 지적이 되고 있다면, 반대로 재물이 없더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지혜로운 자요, 거기에 참된 안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방향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의 넉넉함을 위하여 사는 인생이 아니라, 물질은 좀 부족할 수 있지만 무엇에 있어서 만큼은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 대해서만큼은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방향이 성도의 방향인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오늘 본문 이하에 보면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런가? 너희는 세상의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앞서 본 29절과 30절을 다시 보시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관계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인식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신 주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렇게 믿음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심으로 때가 되어 우리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불러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우리 인생 가운데 간섭하신다는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앎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대해 칼빈은 ‘땅의 것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돌보심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이런 자들은 풍부하건 궁핍하건 문제 삼지 않는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이들은 일용할 양식을 신실하게 하나님께 구하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 오늘 이후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그런 염려를 없애기 위해 소유의 넉넉함을 위해서만 인생을 살지 마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 인생이 그것만으로 사는 자로 있다면 오늘 본문의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라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런 방향이 아니란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민수기 11장으로 가시면 이스라엘의 원망, 불평 중 이런 내용도 만나게 됩니다. 4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민11:4-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을 맛보아 아는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특히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만나와 관련해 이런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에서 이스라엘이 불평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만나가 언제 그쳤느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쳤습니다. 광야에 있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항상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을 때 명령하시기를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매일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다음날 거두기 싫어서 좀 많이 거두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느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명령도 하시는데, 안식일의 경우 일상의 모든 일을 멈추어야 했기 때문에 안식일 전에는 각자 분량의 두 배를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보통은 하루만 지나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던 것이 안식일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만나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만 공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을 맛보아 알도록 하는 은혜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신명기 8장 3절로 하자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만나를 주신 목적입니다. 그것을 먹고 육신적으로 만족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말씀 없이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자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시는 것은 우리의 육적인 필요를 따라 주시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알리시는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매일 매울 거두도록 하시고, 안식일 하루 전에는 안식일까지 거두도록 명하셨던 겁니다. 즉 순종하는 것이 복이요,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것이 복이요, 그런 복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복으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11장에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탐욕을 품었다고 말씀합니다. 탐욕을 품으니까 뭘 비교하느냐?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비교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로서 살아가기 보다는 무엇을 더 그리워하는가?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가 더 나았다고 합니다. 무엇이 참된 복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나 이방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참된 복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들이 하는 말일 뿐입니다. 성도는 그런 자로 있어선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임을 아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 만나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만나가 언제 그쳤느냐?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그쳤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성도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간섭과 은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 17절과 18절에서는 어떤 말씀도 하시느냐?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만나와 같은 기적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만나의 기적만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우리의 열심과 노력에 대한 결과는 우리의 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되 100%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내용으로 있습니다. 유일한 원인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가까운 원인, 먼 원인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노력은 가까운 원인이고 하나님의 역사는 먼 원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노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원인이라는 것이고, 그 원인에 따른 결과 혹은 수단이 우리의 노력입니다. 이런 노력에 대하여 원인을 돌릴 수 있는가? 하나님이 원인인 이상 엄밀하게 말하면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마치 우리의 열심의 결과처럼 돌리기도 합니다. 돌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인으로 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건 이 사실을 아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들에 대해 자족하는 자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생명의 참된 가치가 어디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분명 하늘나라는 아닙니다. 이 땅에서 두 발을 딛고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먹고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부름 받은 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소유의 넉넉함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물질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방식이 참으로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딤후3:1-2).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이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재물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재물과의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싸움을 하셔야 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탐심을 버리는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질의 소유가 좀 적어질 때 불안해하지 마셔야 합니다. 불안해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로 지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으로 물질의 소유가 좀 많아질 때 그것으로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처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로 지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통장에 잔고가 넉넉하고, 또 나부터 시작해서 아내, 자녀들 보험을 부족함 없이 들어놓은 것으로 안심을 한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와 같습니다. 먼 원인을 보지 못하고 가까운 원인으로 만족하고 안심하는 것,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것이 있든, 없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6절과 7절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외적으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넉넉하게 채워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신 것처럼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계시느냐? 자기 백성들에 대하여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늘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하는 분으로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가장 최고의 복이요, 상급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자, 그리고 이 고백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면서 인내하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다. 이런 부요한 자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본 설교는 130811설교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다시금 설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