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지와 번영
410년에 로마가 서고트족에 의해 약탈당할 때, 동방에서도 훈족이 도나우 강 북쪽까지 다다라 있었다.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삼중 성벽을 건설하여 413년에 완성하였다. 마르마라에서 황금 뿔 위쪽 구역까지 뻗은 이 성벽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도시 성벽으로 남아 있다. 이후 로마의 급속한 쇠퇴와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계속 불어났고, 시내에는 황제의 궁전이나 하기아 소피아 등의 교회, 공중 목욕탕이나 극장 같은 공공시설이 많이 건설되었고,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네포스가 사망한 480년에는 동로마 사람들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은 제2의 로마’ 이자 ‘두 번째 수도’라는 의식이 자리잡았다.
훈 족의 아틸라, 아라비아 제국, 러시아 등이 여러 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지만 1204년 4차 십자군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가 입고 물러서고 말았다. 일단 도시를 이루는 삼각형의 양변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기에 육지 쪽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게다가 당대 어떠한 공성병기로도 뚫을 수 없다는 삼중 성벽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도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수많은 이민족들을 모조리 트라키아 땅의 양분과 해협의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삼각형의 양변이 접한 바다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니 전시가 아닌 평시상황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가 될 수 있는 땅이었다.
비잔티움은 흑해의 출입구를 장악하고 있었고, 소아시아의 주요 종착점과 좁은 수로를 그 사이에 두고 있었다. 시리아와 이집트가 처음에는 페르시아에게, 나중에는 사라센에게 굴복하게 되었을 때, 소아시아를 경유하는 대상로는 동방과 연결되는 유일한 교통로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간의 전체 교통망의 병목으로서 티레와 시돈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어렵게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고수하여 사라센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성공한 7세기에, 비잔티움이 해상무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독점적 지위는 확고해졌다. 사라센인들은 비록 해상 무역업자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해적들이었다. 그들의 해적 선대는 비잔틴의 상선대를 제외한 다른 상선대를 바다에서 싹쓸이해 버렸다. 이제 동방의 물품은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해야만 서유럽의 여러 나라로 유입되었다. 이는 모두 강력한 제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상선단에 의해 행해졌다.
콘스탄티노플은 거의 천년 가까이 유럽 최대의 도시이자 고대 도시의 마지막 생존자, 동서양이 만나는 최대의 교역지 그리고 가장 부유한 도시로 군림했다. 6세기 초반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대에 이르면 이 도시의 인구는 무려 75만에 달했으며, 9세기경에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서 로마의 전성기 인구인 백만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