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Croatia
11 문명과 자연이 만나는 곳, 크로아티아(3)
밖으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단체 여행을 하는 사람들,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 그리고 남녀가 한 쌍이 되어 다니는 모습들이 보였다.
나는 엘레나에게 프란체스코 성당 앞에 있는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저 돌이 왜 명소가 되었는지 아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모든 게 무너지고 상실감에 젖은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여 무엇을 해야 할지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한 독일 여성이 이곳에 와서 상의를 벗고 손을 벌려 얼굴을 벽 쪽으로 향한 채 소원을 빌 것을 젊은이들에게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명소가 되었다는군요.”
엘레나는 나에게 “혹시 정교회와 가톨릭의 차이를 아세요?”하고 물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만큼은 알죠.”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하고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정교회와 가톨릭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일반적인 차이는 먼저 정교회는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의자 없이 서서 미사를 드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가톨릭에서는 결혼을 할 수 없지만 정교회에서는 신부 서품을 받기 전에는 결혼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교회 신부님은 수염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 중의 찬양은 정교회에서는 오로지 육성만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정교회 미사 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악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그들의 찬양은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의 목소리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런데 세르비아 정교회는 아직까지 옛 슬라브어로 미사를 진행합니다. 그래서 사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군요. 반면 가톨릭은 1960년대까지 라틴어로 미사가 진행되었지만 지금은 현지어로 미사를 진행합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정교회와 가톨릭의 삼위일체에 관한 차이를 아시는지요?”
엘레나는 나를 보며 이야기하였다.
“기존에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보내어진다고 되어 있었으나, 성자의 위격도 새로운 중요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7-8세기경 니케아 신경에서 수정이 되었어요. 즉 성령은 더 이상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 보내어진다고 수정하게 되었고, 한 세기가 지나며 가톨릭(서방교회)에서 이를 받아들였으나 정교회(동방교회)는 이를 가톨릭의 독단이라 여겨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차이로 더욱 심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체와 성혈에 관한 이야기인데 빵과 포도주가 각각 예수님의 살(성체)과 예수님의 피(성혈)가 되고 이것들이 성직자와 신도들에게 배분됩니다. 여기에 가톨릭과 정교회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교회에서는 성체와 성혈이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배분됩니다.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신도들은 빵인 성체만 먹고 성혈인 포도주는 성직자들만 마십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정교회에서는 성찬예식 때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성체와 성혈을 취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성직자들만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는 반면 평신도들은 성체만 먹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차이점을 이야기해 보면 가톨릭이나 정교회 둘다 성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정교회는 가톨릭과 달리 조각이나 동상 등은 만들지 않고 오직 그림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엘레나는 나에게 성당 벽면 입구 쪽 위에 새겨져 있는 피에타를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피에타에 관해 이야기를 하였다.
“프란체스코 성당 벽면에는 많은 부조들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고 문 위에 피에타 조각상이 남아있습니다. 이 피에타 상은 지진에도 파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당이 15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지진 후 바로크식으로 재건하였고 측면 외부 피에타는 현지인 석공에 의해 만들어졌죠. 그리고 좌측 인물은 성제롬으로 성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인물이며 탈마티아 전역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우측은 세례 요한입니다.”
우리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292미터의 플라차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거리 사이로 보이는 골목은 빨래가 널려있고 카페의 음악 소리가 들리고 계단이 있었다.
엘레나는 나에게 “두브로브니크가 어떻게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었는지 아세요?”하고 물었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세르비아 군이 3개월 동안 공격을 하였죠. 그래서 두브로브니크의 여러 곳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 이방인인 프랑스 학술원 회장 ‘장 도르메종’이 나서게 됩니다. ‘유럽문명의 상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은 팔짱만 끼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유럽의 지식인들을 비난합니다. 그래서 유럽의 지식인들이 힘을 합쳐 인간 사슬을 만들어 내면서 지킨 게 바로 두브로브니크입니다.”
플라차 거리를 엘레나와 함께 걸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연인과 함께 온 느낌이랄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좋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플라차 거리의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갔다.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곳 건물들의 1층은 대부분 식당입니다. 부엌은 일반적으로 맨 위층에 있는데 90퍼센트 이상이 그렇다고 합니다. 이유는 연기와 투숙객 때문이라는군요. 화재 시 대피하기 쉽고 날시가 좋으면 밖에 나오기 쉽게 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귀족들은 대로 주변이 아닌 건물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귀족 저택을 보면 중앙 홀이 있고 각 코너에 방이 있는데 층마다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상에 부엌이 위치해 있죠. 지진 이후에는 주 도로 주위의 건물을 아주 단순하게 지었다고 합니다.”
엘레나와 나는 골목에서 플라차 거리로 나왓다. 따가운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천천히 걸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때 엘레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곳에서 도시국가의 모습이 사라지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아세요?”
“글쎄요.”
“도시국가의 모습이 사라지게 된 것은 1806년 나폴레옹이 이곳을 침입하고 2년 후입니다. 1814년부터 약 100년 정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죠. 이때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크로아티아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가고 19세기까지 100명의 귀족이 있었지만 이후 귀족의 숫자는 6명으로 줄어들었다는군요.”
엘레나와 나는 거리를 걷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폰자 궁전쪽으로 가는 왼편 골목길들은 계단이 있는 오르막길이었다. 골목에는 레스토랑과 바가 있었다. 지진 전에는 현지인 건축가가 설계해서 건물을 지었지만 지진 이후에는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건축가를 초빙하여 건물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베네치아와 로마식 바로크 양식을 볼 수 있었다.
엘레나와 나는 스폰자 궁이 있는 로자 광장에 왔다. 그곳에는 창을 들고 서 있는 올란도 동상이 있었다.
“올란도가 누군지 아세요?” 하고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롤랑의 노래’라고 이야기하면 아시는지요. 롤랑은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도로부터 기독교를 지켜낸 영웅이며 카를 대제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중세 최고의 기사로 알려진 인물 로랑이 바로 올란도입니다. 그의 무용담을 담은 프랑스의 영웅 서사시인 ‘롤랑의 노래’가 두브로브니크에 전해지고 그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정신이 높이 평가되면서 이곳에 기둥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롤랑의 이탈리아식 표현이 올란도죠. 하지만 이 기둥은 15세기에 세운 겁니다. 1417년에 국기 게양대로 사용되었던 올란도 기둥이 바로 이것이죠. 보시다시피 올란도의 기둥에 새겨진 왼손에는 칼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검의 요정이 만들었다는 ‘뒤랑달’이라는 명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둥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자유를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있습니다.
당시는 투르크족이 주변 도시국가들은 공격해 올 때였지만 이 도시는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답니다. 그리고 자유무역도시로서 그 상징이 되었죠. 그런데 이 장소는 죄인을 묶어 두거나 고문하거나 처형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는군요.”
“올란도의 오른쪽 팔꿈치에서 손까지의 길이는 ‘두브로브니크의 팔꿈치’라고 불립니다. 기둥 밑을 한번 보세요.”
“기둥 밑의 세로줄은 올란도의 팔꿈치 길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상행위를 할 때 길이를 재는 용도로 이용되었습니다. 두브로브니크가 교역지로 번성하였을 때 거래 시 팔꿈치의 길이인 51.2cm가 길이를 재는 기준이었다고 합니다.”
광장 주변에는 여러 가지 기념물이 있었다.
그중 종탑의 시계는 매 30분마다 종을 친다고 한다. 매시 정각에는 그 시간만큼, 또 30분이 지난 후 같은 횟수로 종을 친다. 종탑의 문어 시계는 시간만 알려준다. 황금빛은 보름달, 그리고 은빛은 달의 모양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스폰자 궁과 렉토르 궁전 사이에 있는 구 시청사 앞으로 왔다. 나는 엘레나에게 옆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시내를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커피든 와인이든 한잔 하자고 하였다.”
“구 시청 건물이 지금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아세요?”
그녀는 “글쎄요.”라고 아주 짧게 대답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엘레나의 아주 짧은 대답이 왠지 나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구 시청 건물은 지금 시의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일부는 시민을 위한 카페와 극정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그리고 그 옆의 작은 오노프리오 샘은 1520년 오노프리오가 만들었는데 1667년 대지진 대 피해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죠. 샘 윗부분에는 돌고래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은 관광객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성 블라이세가 어떻게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이 되었는지 이야기해 드릴게요.”
“10세기 후반이죠. 971년 어느 날 밤 그는 베네치아 함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이곳에 들어오며 내세운 이유는 중동으로 가기 위해서 성 플로렌스 성벽에서 하룻밤 정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죠. 그는 시민들에게 그들을 절대 믿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루 만에 돌아가고 그 후 그는 도시의 자유를 지키는 수호성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플라차 거리의 끝은 여러 갈래의 시작점과 끝점이기도 하다. 구 항구를 통해 렉토르 궁전과 대성당 그리고 성벽으로 올라가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항구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 위치한 스폰자 궁은 이곳 두브로브니크에서 아름다운 건물로 꼽힌다. 이 건물은 1516년부터 1522년까지 그 당시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던 라구사 공화국(Republic of Ragusa)의 모든 무역을 취급하는 세관으로 지어졌다. 건물의 양식은 후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모습이다. 플라차의 거리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유지되어온 건물이다.
나는 다시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주변을 보세요. 르네상스식으로 아치와 주변 장식이 되어 있고, 고딕은 맨 위층에서 볼 수 있죠. 지진이 잦았으므로 지상은 안정적인 르네상스식으로 만들어서 유럽 건축미술에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저기 중앙 홀은 이전에 많은 무역상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속 건물은 문서보관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에 관한 7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의 문서, 그리고 17개의 언어로 써진 10만 장의 서류가 있으며 수많은 학자가 이곳에 연구 목적으로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엘레나와 나는 스폰자 궁전과 시청 사이 아치문을 통해 구 항구로 갈까, 아니면 렉토르 궁으로 갈까 하고 망설였다. 우선 플라차 거리를 보고 항구로 가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