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성씨의 뿌리공원-6
01.능성구씨 02.영양천씨 03.대구서씨 04.수원백씨 05.연안김씨
06.밀양손씨 07.진주하씨 08.함양박씨 09.자료없음 10.충주석씨
11.죽산박씨 12.양주조씨 13.창녕성씨 14.청주곽씨 15.영광김씨
16.신주강씨 17.전의이씨 18.신평이씨 19.현풍곽씨 20.안악이씨
21.옥천전씨 22.부안김씨 23.영일정씨 24.진주강씨 25.연안차씨
26.가평이씨 27.영산김씨
[01]
시조는 구존유이며 관직은 검교상 장군에 이르렀다. 구존유의 장인인 주잠(朱潛)은
송나라 한림학자로서 송나라가 몽고에 패망하자 1224년(송 희정7년) 구존유와 함께
망명하였다. 주잠이 릉성에서 살며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이 구존유에게 출가하여
릉성에서 살게되자 구존유가 릉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 묘소]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있었으나 없어졌다.
[02]
영양 천씨(潁陽千氏)의 시조(始祖) 천 암(千 巖)은 중국 서촉(西蜀)의
천고봉 만인암(千古峰萬仁巖)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 지명을 따서 성(姓)을 천(千)으로
하고 이름을 암(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영양천씨매헌공가승보(潁陽千氏梅軒公家乘譜)」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
천암(千巖)은 1368년(명나라 홍무 원년) 도총장(都總將)을 지내며 나라에 공훈을 세워
판도승상(版圖丞相)에 이르렀고,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역임하며 영양(潁陽)에
살았으므로 본관(本貫)을 영양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시조(中始祖) 천만리(千萬里)가 1555년(명나라 가정 34)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과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여 황제를 뵙고 후한 상을 받았으며,
1571년(명나라 융경 5) 무과(武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총절사(摠節使)가 되어
북방의 몽고5부병(蒙古五部兵)을 섬멸시킨 공으로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되었다.
그러나 간사한 자들의 무고를 받아 8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뒤에 풀려나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 겸 총독오군수(總督五軍帥 : 궁전 경비 및 전군총사령관)에
승진되었다.
[03]
대구 서씨(大丘徐氏)는 시조(始祖) 한 (閈:자는 인리)이 고려조(高麗朝)에서
군기소윤 (軍器少尹)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달성(達城:대구의 별호)에 정작
세거(定着世居) 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대구(大丘)로 삼았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낭장(郎將)을 지낸 영(潁)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천 서씨(利川徐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추정(推定) 되나 확실(確實)한 고증 자료가 없어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는 없다.
[04]
시조 백우경(白宇經 - 시호는 문경)은 중국 소주 사람으로 황제 헌원의 16세손인
을병의 후손이다.
그는 780년(신라 선덕왕1년) 우리나라에 와서 계림의 자옥산 아래에 정착하여 살면서
신라때에 좌복사공대사도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경명왕(신라 54대)때에 중랑장을 지낸 백창직을 중시조로 하며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본관의 유래는 중시조 백창직의 증손자인 명휘가 고려때 대사마대장군으로 수원군에
봉해졌다는 설과 백창직의 9세손인 백천장이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거쳐 우승상으로
수성백에 봉해지고 고려때 수원백에 봉해져서 수원으로 하였다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
이밖에 남포백씨, 부여백씨, 대흥백씨도 모두 수원 백씨에서 갈려나간 성씨다.
그러나 현재는 모두 수원백씨로 통용되고 있다.
[시조의 묘소]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에 있으며 향사는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에 한다.
[인구] 295,640명이 있다
[05]
연안 김씨(延安金氏)의 시조는 고려 명종(明宗 : 제 19대 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사문박사(四門博士 : 국자감 안에 두었던 교육기간의 정8품 벼슬)를 지낸
김섬한(金暹漢)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신라에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두왕자가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형은 북빈경(北濱京 : 지금의 강릉)에, 아우는 시염성(연안의 옛 지명)으로
유배되었는데, 아우의 후손이 바로 김섬한(金暹漢)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선조(先祖)의 유배지인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 되었다.
[06]
밀양손씨(密陽孫氏)는 서라벌 육부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의
원손으로 효자 보응의 주인공인 손순(孫順)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신라 모량리(월성군 건천읍) 출신으로 아버지 학산(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면서 노모를 봉양했는데, 어린아들이 항상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얻기 어려우니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고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야 하겠소" 하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기슭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다가 석종(石鐘)을 얻었다.
[07]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을 지내고 평장사에 추증되었다.
그는 진주 출생으로, 1010년(현종 1년) 강화 교섭사로 적진에 들어 갔다가 거란군에게
잡혀갔다가 요(遼)나라 왕 성종(聖宗)의 회유를 받았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진주 하씨는 그 계통이 뚜렷하지 않은 대략 3파로 분파된다.
[08]
신라 종성(宗姓)의 후예인 함양 박씨는 경명왕(景明王: 신라 제 54대 왕, 재위기간 : 917 ∼ 924)의 세째 아들 언신(彦信)이
속함대군(速咸大君)에 봉해졌으므로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고, 속함(速咸)이 함양(咸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貫鄕)을
함양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중시조(中始祖) 선(善: 예부 상서를 역임)의 현손(玄孫) 신유가 고려 고종(高宗) 때
김경손(金慶孫)과 더불어 나주(羅州)에서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고, 슬하에 아들 6형제를 두어 검교군기소감(檢交軍器少監) 지문(之文)을 파조(派祖)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와
문원공파 (文元公派: 지빈)·함양군파(咸陽君派: 지량)·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지수)·어사공파(御史公派:지온)·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지영) 등으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09]
자료가 부족해서 다음에 올리기로 한다.
[10]
석씨(石氏)는 본래 중국(中國) 무위(武威 : 감숙성 감량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85본(本)이다.
[11]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신라왕족(新羅王族)의 후예(後裔)로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왕자(王子)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으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
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아들 기오(奇悟)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태조(太祖)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죽산(竹山)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죽주백(竹州伯) 기오(奇悟)의 손자 충숙(忠淑)이
고려 현종(顯宗)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7세손 정유는 고려
예종과 인종대에 걸쳐 20여년 간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왕(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 태자좌빈객(太子左賓客)에 이르렀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육화(育和: 정유의 아들)의 아들로 기사(騎射)에 능했던
인석(仁碩)은 명종(明宗)초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북원(北原)에 은거(隱居)했다가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와 형부 원외랑을 지내고,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 경주(慶州)의 초적(草賊)을 토벌하는 데 공(功)을 세워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12]
양주 조씨(楊州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에 추증된 조 잠(趙 岑)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조선시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고려 때 사람인 군우(君祐)의 손자이며,
경질(景質)의 아들이라 전(傳)하고 있다. 후손들은 잠(岑)을 시조(始祖)로 하고
양주(楊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잠의 증손(曾孫) 계생(啓生)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에 올랐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렸다.
[13]
시조(始祖) 인보(仁輔)는 창녕 지방(昌寧地方)에 호장(戶長)을 지냈는데,
어느해 정월 초 정조의 모임으로 송경(松京 : 개성)에 갔다가 그 곳에서
병몰(病歿)했다.
[14]
시조 곽상(郭祥)은 신라 헌강왕조에 시중(侍中)이 되었고 문장(文章)에 능했으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다고 '甲寅譜'에 쓰여 있다.
그의 선계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고 또 그의 후계도 실전(失傳), 고려 현종15년
형부상서(刑部尙書), 이듬해 추성문리공신(推誠文理功臣)으로 상주국(上柱國)에 책훈되고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뒤 문성(文成)이라 시호(諡號)된 곽원(郭元)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본관을 청주(淸州)로 삼은 것은 그의 10세손 충헌공(忠憲公) 곽연준(郭延俊)이
충혜왕조에 광정대부(匡靖大夫) 판개성부윤(判開城府尹)·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라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世居)하게 된 것이 연유이다.
[15]
시조 김심언(金審言)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설의 4세손이다.
그는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 때 상서내사시랑 평장사를 역임하고 오성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영광으로 하였으나
아들 김윤보, 손자 김극검 이후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없어져서 후손의 파조들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16]
시조 강후(康侯)는, 강성호소록(康聖湖所錄)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무왕의 아우 강숙봉(康叔封)의 둘째 아들이 함께 평양(平壤)에 와 백성의 교화에
공을 세워 강자(康字)로 사성(賜姓)하고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에 봉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위의 소록(所錄)은 제주현감(濟州縣監)을 지낸 강익보(康翊甫)가 가장(家藏)하여 왔던
보첩(譜牒)에 따른 것으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쓴 '평양지(平壤誌)'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己未譜'(1979)에는 시조를 강호경(康虎景)으로 하여 분파도(分派圖)를 만들고
그 13세손인 강지연(康之淵)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물론 앞서의 강후동래설(康侯東來說)
을 전제로 한 계통도(系統圖)인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그 사이
여러 병화(兵火)를 거쳐 승첩(乘牒) 등이 없어져 강후(康侯) 이후는 계대(系代)를 확연히
밝힐 수 없었던 사정 때문이다.
[17]
시조(始祖)는 고려 개국공신인 도(棹)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초명(初名)이 치(齒)로 고려 태조(太祖)가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하러 남하(南下)하여 금강(錦江)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건너게 해 주었으므로 태조가 도(棹)라고 이름을 하사(下賜)하고,
통합삼한삼중대광대사익찬공신(統合三韓三重大匡大師翊贊功臣)으로 벼슬을 내리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해졌다. 그후 그는 전의(全義) 이성산(李城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니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전의(全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그 후손 문의공(文義公) 언충(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 문장공(文莊公) 혼(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18]
시조 인수(仁壽)는 고려에서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고 신평군(新平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일설에는 그가 백제(百濟)에서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역임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를 상고할 수 없다.
[19]
시조 곽경(郭鏡)의 처음 이름은 약노(若魯), 자(字)는 노이(魯以), 호(號)는 암곡(巖谷)
또는 초수(樵叟)이며, 시호(諡號)는 정의(正懿)이다.
그는 본래 중국 宋나라 사람으로 문연각(文淵閣) 한학사(翰學士)가 되었고 고려 인종11년
7명의 학사(學士)들과 우리나라에 와, 인종16년 등과(登科)하여 여러 관력을 거친 뒤
평장사(平章事)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다.
그런데 시조 곽경(郭鏡)에 관한 사정을 알 수 없어 구보(舊譜)에는 생존연대 등의 기록을
빼놓았었다.
그러던 것을 1930년 시조의 묘(墓)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되었고 거기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
[20]
시조는 중국 농서(隴西:중국 진한시대의 군 이름으로 지금의 서역 근처) 사람인
진(震)으로 전한다.
“안악이씨을축종보(安岳李氏乙丑宗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108년(한무제 원봉3)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이 한(漢)에
불공(不貢)하여 무제(武帝)가 출전하여 공(功)을 세워서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으며, 이어 낙랑태수(樂浪太守)로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대명(大命)을 완수했다.
그의 증손 천보(天寶)는 한(漢)나라 선기사 대장군(善騎射大將軍)으로 흉노토벌(匈奴討伐)
에 공을 세워 양산후(楊山侯) 겸 낙랑태수(樂浪太守)로 봉해졌으므로 양산이씨(楊山李氏)
로 하였다가 낙랑(樂浪)이 망하자 후손들은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등지로
이거(移居)하며 대(代)를 이어왔다.
[21]
옥천 전씨의 관조 전 유(全 侑)는 환성군(歡城君) 전 섭(全 攝:전씨의 도시조)의 27세손으로 고려 충숙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관성(管城:옥천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적하여 옥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22]
시조 김일(金鎰)은 신라 경순왕의 첫째 아들이며 마의태자로 잘알려졌다.
김일은 신라의 국운이 쇠퇴하자 처자식을 데리고 개골산(금강산)에 들어 갔다가
5세손 김경수(金景修)가 세상에 나와 고려 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김경수의 아들 김춘이 부안부원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부안으로 하고 김경수를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중시조는 김구(金坵, 1211~1278, 자는 차산, 호는 지포, 시호는 문정)이며 평장사를
지냈다.
부안김씨을 부령김씨라고도 하는데 조선 태종때 부령현과 보안현을 통합해 지금의
부안이 되었으므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묘소는 전북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23]
영일정씨(迎日鄭氏)의 원류에 대하여는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이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육촌중(六村中) 자산(觜山) 진지부(珍支部)의 촌장이었던 지백호(智伯虎)가
유리왕(儒理王)9년(서기32년)에 정(鄭)씨로 사성(賜姓)되었던 것이 이 성씨의
연원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정(鄭)씨는 후대에 여러 갈래로 갈라져 본관을 달리하나 모두 이
지백호(智伯虎)의 후예들인 셈이다.
[24]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8년)에 수문제가 침략할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왕은 군신을 모아 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 할 때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이에 수긍하고 싸울것을 명하자 군사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할 때 중신회의에서 요동성 일부를 떼어주고 강화할것을 논의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싸울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대파하는 등 공을 많이 세웠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진주)군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 금천, 안동, 백천 등 9본이 있으나 모두가 대종인 진주강씨의
지파로서 현재 진주 단일본으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된다.
강이식 묘소는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으며,
음력 4월 10일에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25]
시조 차효전은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인 유차달(문화 유씨의 시조)의 첫째 아들이다.
유차달의 5대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사냥가는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유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유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유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유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유씨도 없앨 수없다."하며 유차달의 첫째 아들
차효전에게는 대광백에 봉하고 연안을 식읍으로 하사 하고 차씨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유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26]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신라(新羅) 때 완산 호장(完山戶長)을 지낸 이인보(李仁輔)를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8세손 기문(起文)이 조종(朝宗 : 가평의 옛 지명)에 이거(移居)하여 본관(本貫)을 조종(朝宗)으로 삼았다.
그 후 29세손인 춘계(椿桂)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그의 증손 형손(亨孫)이 조선 세조(世祖)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한 공(功)으로 가평군(嘉平君)에 봉해졌으며 지명의 변천으로
조종(朝宗)이 가평(加平)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本貫)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27]
시조 김영이(金令胎)는 신라 신무왕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때 전객서령(典客署令)을 지내고 죽은 후에 공신으로 검교도첨의찬성사에
추증되고 영산군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 김길원은 공민왕 때 판도판서에 이르렀으며 홍건적을 토평한공으로
영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산(현 영동)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충북 영동군 남기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