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 개악을 반대하는 2020 부산 동네서점 비상대책위원회 성명서’
올해 11월 20일은 3년 주기의 일몰제법인 ‘도서정가제 재검토’ 시한입니다.
지금까지 도서정가제는 창작자와 독자, 출판계와 서점계, 도서관과 교육계를 잇는 책문화 생태계가 그나마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방파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시한을 얼마 남기지 않은 채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1년간의 논의를 번복하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4개 기관으로 ‘도서정가제 보완 및 개선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작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총 16차례에 걸친 회의에서 도출한 합의안을 번복하는 행위를 주도해왔습니다. 이는 절차의 정당성을 무참히 짓밟은 행위입니다.
이에 더불어 청와대는 책문화에 대한 책임 있는 통찰과 검토를 거치지 않고 ‘소비자 후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원점에서 재논의하라고 지시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이는 비단 동네책방만의 문제가 아니라 책문화 생태계를 파괴하는 선언과 같습니다.
이에 전국 곳곳에서 작가, 출판사, 독자, 도서관을 비롯해 서점이 “책문화 생태계를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도서정가제에 대해 바르게 알고 이를 지키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이 성명서에 뜻을 함께한 부산의 26개 동네책방 역시, 책문화 생태계 파괴 위기라는 사태의 엄중함을 깨닫고, 지난 8월 24일 ‘도서정가제 개악을 반대하는 부산 동네서점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하나, 우리는 책을 문화적 공공재라고 생각합니다.
도서정가제 논의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책을 일반 상품으로 볼 것인지 공공재로 볼 것인지에 대한 입장 차입니다. 청와대가 ‘소비자 후생’의 차원에서 도서정가제를 다시 논의하려는 점이나, 도서정가제 자체가 소비자의 권익과 공정한 시장 원리를 해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점을 보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청와대나 혹자의 생각처럼, 도서를 단순히 시장논리에 맡기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과거 시장논리에 따라 책이 판매되던 때, 자본을 앞세운 대형·온라인 서점의 난폭한 도서할인 판매로 책 생태계에 혼란이 초래됐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지금의 불완전한 도서정가제나마 확립된 지난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책은 한 인간의 정신을 담고 한 사회의 시대정신을 담습니다. 책에 담긴 가치를 가격으로 모두 표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책의 적정 가격을 소비자가 희망하는 가격으로 떨어뜨린다면, 다양한 책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조건마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곧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없는 사회로 추락할 것입니다.
이미 책이 일반 상품과는 다른 문화적 공공재라는 사회적 합의가 바탕이 되어 오랫동안 도서정가제 논의가 있어왔고, 문체부를 중심으로 도서관, 학교, 작가, 출판사, 서점과 연계한 정책에 예산을 투여해왔습니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다시 후퇴하여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는 것은 독서문화진흥에 일관성이 없는 정책을 늘어놓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책이 일반 상품이 아닌 ‘문화적 공공재’임을 주지하여 지금의 사안이 일관성 있게 논의되기 바랍니다.
하나, 동네책방은 가장 가까이서 지역 주민을 만나는 골목문화공간입니다.
도서정가제가 사라지면 동네책방이 사라진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책이 문화적 공공재라면 동네책방은 그 책을 각 지역 곳곳에서 살아 있게 돕는 실핏줄 역할을 합니다. 도서정가제를 기반으로, 동네책방은 이웃 곁에서 환하게 골목을 밝히며 책문화가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생활문화공간으로 자리해왔습니다.
동네책방 하나하나는 시민의 손으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졌으며, 2018년 책의 해에 ‘생활문화시설’ 범위에 추가되어 지역생활독서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동네책방을 지원하는 사업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이 한시적이고 개별적인 지원에 불과합니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도서정가제를 개선하는 것만이 자생적인 골목문화공간을 지키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 도서정가제의 원래 목적은 책 생태계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책이 단순히 시장논리로 취급되는 상품에 불과하다면 애초에 도서정가제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서정가제는 책 생태계 전반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작년 12월 12일에 박양우 문체부 장관이 발표한 ‘도서정가제 폐지 국민 청원’에 대한 답변에서도 도서정가제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자본을 앞세운 대형, 온라인 서점 및 대형 출판사의 할인 공세를 제한해 중소규모의 서점이나 출판사도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서정가제의 기본 취지입니다. 도서정가제는 프랑스, 독일 등 다양한 국가에서도 같은 취지로 도입 및 시행하고 있습니다.”
청년정책, 중소기업정책, 소상공인정책, 농산어촌정책, 다문화정책, 장애인정책 등 포용과 다양성의 가치에는 각각의 특성에 따른 배려와 지원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배려와 지원은 책 생태계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책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유통 구조는 책 생태계를 유지하는 모든 노동자를 소외시킵니다. 혼신을 다해 콘텐츠를 만드는 작가에게서, 퇴근도 휴일도 반납하며 일하는 출판노동자에게서, 화학약품이 가득하고 위험한 기계들이 굴러가는 현장에서 일하는 인쇄노동자에게서, 화장실 갈 틈도 제대로 없이 일하는 택배노동자에게서, 세상에 숨어 있는 멋진 책을 독자들의 손에 닿게 하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마다하지 않고 일하는 책방 주인들에게서 정당한 대가를 빼앗아 갈 것입니다.
우리는 문체부가 수많은 노동자의 손길로 꾸려온 책 생태계를 지킬 수 있는 도서정가제의 본 목적을 똑바로 주지하여주기를 바랍니다.
하나, 문체부는 투명한 논의와 일관성 있는 정책기조를 가지기 바랍니다.
문체부는 일부 단체의 도서정가제 폐지 국민 청원을 근거로 합의안을 무시하고 현행 도서정가제를 전면 재검토하라는 통보를 했다고 보도된 바 있습니다. 소비자 후생을 도서정가제 재검토의 이유로 들고는 있지만, 도서정가제의 본래 취지에 대한 입장과 재검토의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는 문체부가 전자콘텐츠 관련 거대 기업들과 따로 면담하였다는 소문마저 공공연하게 돌고 있는 실정입니다. 논의 과정의 공정함, 절차의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린 현 상황을 직시하고, 밀실논의라는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기 바랍니다. 다가오는 11월 재개정 시한까지는 모든 논의를 투명하게 진행하고, 관련 정책에 관한 일관된 정책 방향을 세워주기를 바랍니다.
하나, 법을 개정하는 주체인 해당 상임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는 국회의원은 현행 도서정가제의 원래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국회의원이 발의하고 표결하여 제정하는 모든 법안은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때문에 입법이라는 큰 권한에 걸맞는 책임 있는 의정활동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연구와 검토 없이 졸속으로 법안을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현 도서정가제는 18년의 시간을 거친 논의의 결과물이지만, 그간의 시행착오가 고스란히 누적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형태는 매번 협의체 각 구성원의 의견을 조율하기에 급급했던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도서정가제의 본래 목적을 제대로 연구하고 검토한 법안이 도출되기를 바랍니다. 철학이 있는 정책만이 공동체 전체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일몰법이 아닌 100년을 내다보는 출판문화를 진흥할 수 있는 법이 우리 사회에 필요합니다.
하나, 전자출판물 역시 장기적으로 성장 산업 분야의 건강한 생태계를 위해 시대상황을 반영한 정책 개선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전자출판물, 웹툰과 웹소설 등 온라인 미디어 콘텐츠 또한 보호받아야 하는 창작물입니다. 그러나 쉽게 접하고 쉽게 소비되는 매체의 특성상 그 가치가 오인되는 일도 많습니다. 이들 매체는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으나, 소외되고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 역시 늘어나고 있습니다.
종이책 생태계가 겪어온 고난의 과정이 온라인 미디어 콘텐츠 시장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어서는 안 됩니다. 창작물로서, 새로운 문화로서, 전자출판물 온라인 미디어 콘텐츠 산업 역시 건강한 생태계를 토대로 성장해야 합니다.
현재 책문화 생태계를 살리는 정책은 3년마다 소멸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정가제는 ‘수명이 정해진 기간이 돌아오면 자동으로 소멸되는 규정’인 일몰제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서정가제를 존치하는 일은 책문화를 가꾸고 발전시킴에 있어 국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미래유산 안전망’입니다.
정부는 공존의 문화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마땅한 책임을 인지하고 맡은 역할을 바로 지금 시작하기 바랍니다.
도서정가제 개악을 반대하는 2020 부산 동네서점 비상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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