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 사상 최장수 연재중, 소설의 감칠맛을 배가시킨 또 하나의 역작 탄생, 2차례에 걸친 연속 수상, 제정 이래 최초의 부부 수상…. 숱한 화제를 낳은 2007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상. 무엇보다 ‘강력한 서사의 뒷심’으로 우리 만화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그 주인공인 <만화 토지>의 오세영 작가, <프린세스>의 한승원 작가, <고양이 제트>의 변기현 작가를 만났다.
만화가 예술일 수밖에 없는 이유 <토지>(1부 1~7권 출간중, 마로니에북스) 오세영 작가
“지금은 우리 만화시장이 대여점이나 대본소에서 서점시장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만화 <토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고, 그런 의미에서 주는 상이라 생각한다.”
본래 방대한 원작 소설을 만화로 쉽게(?) 완독할 수 있는 교육만화로 기획됐었지만 그러나, 한국 리얼리즘 만화계 대표주자인 오세영 작가가 맡게 되면서 작업은 끝도 없이 커져갔다. 1부에만 170여 명, 전체 600명도 넘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옷깃 하나, 반닫이 하나에도 고증이 따랐다.
풀컬러 작업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엄청난 작업량 때문에 별수없이 그는 어시스트를 썼는데,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을 때면 호통을 치기도 하고 때론 달래기도 하면서 완벽을 추구했다. 그러다 그만 도망가버리는 어시스트들도 여럿이었다.
그렇게 꼬박 3년을 안성 깊숙한 산자락 아래에서 만화 <토지>를 그렸고, 마침내 지난 6월 1부가 출간됐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는 관심이 쏟아졌다. 만화를 ‘만화같은 것’이라 여겼던 박경리 선생마저도 오세영의 <토지>에 반해버렸다. 특히 탁월한 각색과 데생실력에 감복한 박경리는 뜨겁게 두 손을 맞잡았다.
만화 <토지>는 컷마다 배인 만화의 힘을 보여준다. 구한말과 해방 전후에 천착하며 그즈음의 이야기에 몰두해온 그의 특기가 빛을 발한 것이리라. 가을 초가집 이엉에서 나던 냄새, 심지어 밭에 뿌려진 똥냄새까지 모두 다 그려내는 그가 아니던가.
<토지>를 통해 원작의 감동은 물론 만화의 새로운 영역 또한 보여주고 싶었다. 보고 느끼고 냄새 맡는 만화. 만화가가 되기도 전인 20대 때부터 언젠가 꼭 <토지>를 만화로 그려보겠노라 결심했으니 그 소망은 이제 얼추 반은 이뤄진 것도 같다.
“상까지 받았으니 이제 정말 설렁설렁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전체 5부 16권을 목표로 이제 갓 2부 각색 작업을 마친 상태. 마침내 완성된다면 우리 만화의 지평은 또 얼마나 넓어질까.
탄탄한 스토리와 빼어난 감성 수작 <프린세스>(1~28권 출간중, 대원씨아이) 한승원 작가
가상의 약소국 ‘라미라’를 배경으로 3대를 이어오는 가슴아픈 사랑 그리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프린세스>. 라미라의 왕 ‘비욘’이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신분의 벽을 넘어 유모의 딸 ‘비이’를 선택, 나라를 잃고 떠도는 가운데 주변의 각 적대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1995년 12월 순정만화잡지 <이슈>를 통해 첫 선을 보인 이래 현재까지 ‘순정만화 사상 최장수 작품’으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전극진·양재헌의 <열혈강호>가 유일한 경쟁자라면 경쟁자. 그러나 <프린세스>의 대단한 매력은 단순한 방대함에서 오지 않는다. 12년 전 첫 회의 복선이 10여 년 후에야 실마리가 풀릴 만큼 탄탄한 스토리와 한승원 특유의 빼어난 감성 표현은 단연 특별하다.
기나긴 연재 가운데 스토리가 막힐 때면, 또 직업병인 오른쪽 어깨 통증이 심해져 더러 마음에 드는 펜선이 나오지 않을 때면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나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연재를 시작하고는 늘 <프린세스> 안에 살았다. 단 하루도 작품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얼마 전에는 주요인물인 비이가 죽고 “자식을 잃은 듯한 마음에” 섧게 울었다는 그녀.
이번 수상으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은 새로운 진기한 기록을 또 하나 보유하게 됐다. 그녀의 남편 김동화 작가가 <빨간 자전거>로 2003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해 1999년 상 제정 이래 최초로 부부 수상자가 된 것.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좋은 상을 받게 돼 기쁘다. 제 작품을 오래도록 봐주고 사랑해준 독자분들과 함께 받은 상이라 생각한다.”
<프린세스>를 읽으며 성장한 소녀들은 어느새 아이 엄마가 됐다. 진정한 대서사시로서 순정만화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프린세스>. 변치 않는 노력을 기울이는 작가와, 오랜 세월 무한한 애정을 잃지 않고, 기다려온 팬들이 만들어낸 것이리라.
‘고양이 제트’가 고발하는 현실 또는 디스토피아 <고양이 제트>(전 2권 완결, 길찾기) 변기현 작가
“주인공인 ‘고양이 제트’에는 정성을 들였지만 다른 서브 캐릭터들은 너무나 평면적으로 형성된 것 같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많은 성과를 얻지 못한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상까지 받게 돼 조금은 부담스럽다. 앞으로 더욱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진정 상복이 많은 것인지, 유난히 오늘의 우리만화상과 인연이 깊은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작가 변기현에게 분명 뭔가 있는 거다. 생애 첫 단편집 <로또 블루스>로 2005년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받았던 그가 이번에는 첫 장편 <고양이 제트>로 같은 상을 받게 됐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선정한 2006년 우수만화 창작지원 선정작이자, 지난해 8월부터 올해 4월까지 미디어다음을 통해 인기리에 연재된 <고양이 제트>는 한 놀이동산에서 발생하는 무자비한 어린이 폭행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성적으로 벌어지는 있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에바랜드’에 테마파크 협력사원으로 근무하는 현영. 2년째 그곳에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영웅물의 인형옷을 입고 박봉에도 묵묵히 일하는 한 사내를 알게 된다. 사내는 남들 앞에서는 항상 한물 간 인기 캐릭터인 ‘고양이 제트’ 인형옷을 입는 괴짜다. 현영은 이 사내와 함께 악당 P와 대결을 벌이는 상상의 세계를 매일밤 펼치는데, 바로 그 무렵 에바랜드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무자비한 연쇄 폭행사건이 발생한다.
<로또 블루스> 등 여러 단편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냉소적이면서도 애정어린 시각으로 보아냈던 변기현의 시선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관리직 근로자가 파견직 근로자를 괴롭히고, 물리적으로 강한 어른이 약한 어린이들을 구타하고, 경찰은 놀이동산으로부터 ‘삥’을 뜯는 곳. 그곳은 다름아닌 놀이동산이고, 현실과 판타지가 적당히 뒤섞인 공간에서 연출되는 각종 기기묘묘한 상황들은 더욱 극명히 현실세계를 보아낸다.
“아직 나만의 대안을 찾지 못한 상태다. 내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자리를 차고 앉아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좀더 새로운 것, 나만의 대안을 만드는 노력을 해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