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5. 맺는 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대상화시켜,
그것을 나의 소유로 삼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이러한 요구가 성공적으로 달성될 수 있으려면,
수시로 변화해가는 저 사물 이면의 불변적인 어떤 것을 붙잡아야 할 텐데,
바로 이런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이고
삼세에 걸쳐 항유하는 자성이다.
이런 존재성과 자성에 근거하여 산은 산으로서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산은 산이다’라는 것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존재자성과 자성에만 매달릴 경우,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원초적인 사태나 일체가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연기적 사건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게 된다.
사태의 진상과 실상이 이처럼 존재자성과 자성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충격 장치가 바로 무이고 공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무와 공으로 바라볼 때, 더 이상 산은 종래와 같은 그런 산이 아니다.
이제 산은 장악과 집착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이렇게 철저히 무화되고 공화되는 그곳에서, 산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산은 여전히 산인 것이다.
그런데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이런 근원적인 현출 사태가
장악을 위한 이원화나 집착을 위한 분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호귀속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총체적 관계성의 시각에서
일체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제 이런 시각에서 자연과 세계와 인간과 사유를 규정해 보기로 하자.
불교에서 법성이라는 전일적 총체성을 본성으로 하는 법계는,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키거나 전체를 부분으로 환원시키거나 함이 없이,
부분과 전체가 상즉 상입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편 하이데거에서 존재자의 존재라는 근원적 이중성을 본성으로 하는 퓌지스는,
인간에 의해 처리 가능한 근거나 이유와 상관없이 제 스스로 드러나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법계와 퓌지스로서의 자연은
목적론적 섭리나 기계론적 법칙을 통해 장악될 수 있는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조화를 이루는 전일적 총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에서 사사무애법계는 사건들의 차이성과 원리들의 동일성이 서로 갈등하는 영역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이 발휘되면서도 전체와의 조화를 이루는 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에서 사물(Ding)-세계(Welt)는 주관에 의해 표상되기를 기다리는
고립적 대상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중자들 각각이 끝없이 서로를 반영함으로써
상호 귀속되면서도 각자의 고유함을 누리는 복합적 관여물들의 만남의 장이다.
따라서 사사무애법계와 사물-세계로서의 세계는 차이가 차별을 낳거나 동일이 획일을 낳지 않는,
그래서 고유한 다양성과 총체적 통일성이 상호 균형을 이루는 열린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볼 때,
인간의 본질은 본능적 욕망(愛)이나 분별적 이성(識)이나 맹목적 의지(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 법성과 공성에로의 개방 가능성인 불성에 있다. 한편 하이데거에서 볼 때,
인간의 본질은 동물성과 이성간의 기이한 합성태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 속으로 나가 서 있는 탈존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과 탈존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한 지배의 화신이나
욕망과 의지의 노예가 아니라, 진여법성과 존재의 진리에서 발원돼 나오는
일체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자신이 중심임을 주장하지 않는 탈중심의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자 의욕하는 표상적이고
계산적인 사유를 포기한 채, 존재의 진리가 발현하는 회역의 광장에 자신을 내맡기며(Gelassenheit),
분별 집착하여 머무르는 마음을 내려놓은 채(放下著),
그 어디에도 머물거나 걸림이 없는 무심의 진심인 일심에서 살아간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탈존과 불성을 본질로 하는 인간이 내맡김과 일심의 태도에서 세계를 사물 세계와
사사무애법계로 이해하고 자연을 퓌지스와 일승법계로 수용할 때,
우리도 저 산도 고유하게 드러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산은 여전히 산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이런 대긍정과 조화의 경지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철학과 불교의 사상은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및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동국대 강사.
논문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형이상학의 문제〉 등이 있고,
공저로는 《하이데거와 철학자들》,
역서로는 《불교사상과 서양과학》 《서양철학과 선》 《불교철학사》 등이 있다.
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5. 맺는 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대상화시켜,
그것을 나의 소유로 삼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이러한 요구가 성공적으로 달성될 수 있으려면,
수시로 변화해가는 저 사물 이면의 불변적인 어떤 것을 붙잡아야 할 텐데,
바로 이런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이고
삼세에 걸쳐 항유하는 자성이다.
이런 존재성과 자성에 근거하여 산은 산으로서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산은 산이다’라는 것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존재자성과 자성에만 매달릴 경우,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원초적인 사태나 일체가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연기적 사건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게 된다.
사태의 진상과 실상이 이처럼 존재자성과 자성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충격 장치가 바로 무이고 공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무와 공으로 바라볼 때, 더 이상 산은 종래와 같은 그런 산이 아니다.
이제 산은 장악과 집착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이렇게 철저히 무화되고 공화되는 그곳에서, 산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산은 여전히 산인 것이다.
그런데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이런 근원적인 현출 사태가
장악을 위한 이원화나 집착을 위한 분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호귀속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총체적 관계성의 시각에서
일체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제 이런 시각에서 자연과 세계와 인간과 사유를 규정해 보기로 하자.
불교에서 법성이라는 전일적 총체성을 본성으로 하는 법계는,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키거나 전체를 부분으로 환원시키거나 함이 없이,
부분과 전체가 상즉 상입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편 하이데거에서 존재자의 존재라는 근원적 이중성을 본성으로 하는 퓌지스는,
인간에 의해 처리 가능한 근거나 이유와 상관없이 제 스스로 드러나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법계와 퓌지스로서의 자연은
목적론적 섭리나 기계론적 법칙을 통해 장악될 수 있는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조화를 이루는 전일적 총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에서 사사무애법계는 사건들의 차이성과 원리들의 동일성이 서로 갈등하는 영역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이 발휘되면서도 전체와의 조화를 이루는 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에서 사물(Ding)-세계(Welt)는 주관에 의해 표상되기를 기다리는
고립적 대상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중자들 각각이 끝없이 서로를 반영함으로써
상호 귀속되면서도 각자의 고유함을 누리는 복합적 관여물들의 만남의 장이다.
따라서 사사무애법계와 사물-세계로서의 세계는 차이가 차별을 낳거나 동일이 획일을 낳지 않는,
그래서 고유한 다양성과 총체적 통일성이 상호 균형을 이루는 열린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볼 때,
인간의 본질은 본능적 욕망(愛)이나 분별적 이성(識)이나 맹목적 의지(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 법성과 공성에로의 개방 가능성인 불성에 있다. 한편 하이데거에서 볼 때,
인간의 본질은 동물성과 이성간의 기이한 합성태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 속으로 나가 서 있는 탈존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과 탈존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한 지배의 화신이나
욕망과 의지의 노예가 아니라, 진여법성과 존재의 진리에서 발원돼 나오는
일체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자신이 중심임을 주장하지 않는 탈중심의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자 의욕하는 표상적이고
계산적인 사유를 포기한 채, 존재의 진리가 발현하는 회역의 광장에 자신을 내맡기며(Gelassenheit),
분별 집착하여 머무르는 마음을 내려놓은 채(放下著),
그 어디에도 머물거나 걸림이 없는 무심의 진심인 일심에서 살아간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탈존과 불성을 본질로 하는 인간이 내맡김과 일심의 태도에서 세계를 사물 세계와
사사무애법계로 이해하고 자연을 퓌지스와 일승법계로 수용할 때,
우리도 저 산도 고유하게 드러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산은 여전히 산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이런 대긍정과 조화의 경지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철학과 불교의 사상은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및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동국대 강사.
논문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형이상학의 문제〉 등이 있고,
공저로는 《하이데거와 철학자들》,
역서로는 《불교사상과 서양과학》 《서양철학과 선》 《불교철학사》 등이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요즘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읽고 싶었는데 마음이 통했나 봅니다. ^^ 어릴 적 존재를 실체로 해석하고 비판했던 적이 생각나네요. 하이데거의 사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좁은 생각이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