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碧堂과 月塘先生
이 글은 전주 교동에 있는 한벽당과 이 정자를 지은 월당선생에 관한 글로 2008. 12. 31. 발행된 “전라금석문연구 제12호”에 게재되었는데 글이 발표되자마자 지역문화와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고 우리 전주최씨 일가들도 찬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에 월당선생의 후손인 우리 전주최씨 집안 일가들에게 선조의 소중한 유적을 널리 알려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내용을 더 손질하고 보완하여 여기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자료와 사진도 많이 있으나 지면관계로 여기에 다 싣지는 못했습니다. 이 글 속에는 한벽당, 월당선생과 월당유허비, 한벽당 주변의 암각서, 전주최씨의 연원과 족보, 풍남동 은행나무와 전주최씨종대 등 전주최씨 집안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임금들의 연호사용, 역사인물, 문화재, 조선시대의 관직, 고을 이름의 변천 등 여러가지 내용이 조금씩 언급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만 어떤 분들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하기만하며 자랑만 늘어놓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의가 있거나 충고의 말씀을 해주시면 더욱 고맙게 생각하고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寒碧堂과 月塘先生
글쓴이 崔 炳 哲
요즈음 전주를 찾는 분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는데 한옥마을과 경기전(慶基殿)이다. 한옥마을은 전주시 동남부에 위치한 풍남동과 교동일대에 약 700여 채의 기와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며,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봉안되어있는 전각인데 조선 초기에 전국 3개소(전주, 경주, 평양)에 세운 진전(眞殿) 중의 하나이다.
경기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뿐만 아니라 세종대왕과 고종황제 등 여러 임금의 초상화도 전시되어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하던 전주사고(全州史庫)터와 예종대왕태실비(睿宗大王胎室碑),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선조인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공의 신위를 봉안한 조경묘(肇慶廟)가 경내에 있으며, 한옥마을과 경기전 주변에는 풍남문(豐南門. 문루이름 明見樓)· 전동성당(殿洞聖堂)· 한벽당(寒碧堂)·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 전주향교(全州鄕校)· 학인당(學忍堂)· 전주객사(全州客舍)·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전주최씨 종대(全州崔氏宗垈) 등이 반경 1㎞이내에 위치해 있어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하루에 이들을 모두 다 둘러볼 수도 있으니 관광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얼마 전 나는 전라금석문연구회(全羅金石文硏究會) 김진돈(金鎭惇) 회장과 함께 한옥마을에 있는 전주향교에 들러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향교 앞에 있는 박진(朴晉)효자비를 둘러본 후, 그 근처에 있는 한벽당과 월당선생유허비(月塘先生遺墟碑)를 살펴보고 이 유허비를 조심스럽게 탁본(拓本)한 바 있다.
한벽당은 전주천 상류 승암산 아래 절벽에 세운 정자로 전주인근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한벽당을 창건한 월당선생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 한벽당과 월당선생에 대하여 좀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자세히 소개한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도 있는 바,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전문가들과 전주최씨 일가 여러분들의 항의나 질책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이글을 쓰는 바이다. 월당선생은 나의 22대조가 되는데 역사와 한문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내가 옛 어른들의 글을 잘 못 읽고 또 선조의 행적을 잘 못 전하므로써 선조를 욕되게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많지만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억지로 꾸미거나 선조를 미화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또한 우리 전주최씨 아닌 다른 분들도 이 글을 읽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선조에 대한 경칭은 가급적 자제하고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코자하니 일가분들은 이를 이해하여주시고 혹시 잘못된 점이 있다면 아래의 주소나 전화로 연락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한벽당을 창건한 월당선생은 전주 최(崔)씨로 이름은 담(霮. 1346~1434)이고 호가 월당(月塘)으로 고려 말 충목왕2년 사온서직장동정(司醞署直長同正) 을인(乙仁)의 아들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누이(후에 全州 柳씨 시조인 濕의 아들 柳克修에게 출가)와 함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용봉(龍鳳)이며 충숙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아(崔阿)는 선생의 증조부이다. 부인은 전주 박씨로 경덕재 박종수(經德齋 朴從壽. 字 仁夫)의 따님이자 앞서 말한 효자 박진(朴晉)의 누이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외손녀이며 만육 최양(晩六 崔瀁)의 외종질녀가 된다. 효자 박진의 효행과 효자비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선생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나 학업에 힘써 공민왕11년(1362년)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결혼하였다. 그리고 멀리 서울(松都)에 올라가서 내시부참관(內侍府參官)으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고향에 홀로계신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왕3년(1377년) 32세 때에 대과(大科)에도 급제하였으나 선생은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곧 관직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왔다. 높은 관직에 오르기보다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였던 것이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조선이 개국하고 태조5년(1396년 丙子), 현상(賢相)의 천거로 선생은 봉상소경(奉常少卿)이 되어 관직에 다시 나가게 되었고 1398년(戊寅)에는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라 지진주사(知珍州事)가 되어 전주 가까운 곳으로 벼슬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선생은 관직에 머무는 동안 안평대군(字 淸之, 號 梅竹軒)· 양촌 권근(陽村 權近)·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 만육 최양(晩六 崔瀁)등과 사귀었다.
일부 기록에는 "지진주사(知珍州事)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는 내용을 “珍州事로 중국에 다녀왔다”라고 해석해 놓은 곳도 있는데 이는 후일에 기록한 분들의 착오로 생각된다.
【註 : “珍州事로 중국에 다녀왔다”는 기록에 대한 필자의 고찰 : 烟村遺事(月塘先生諸公讚詩幷序 1436년 鄭坤), 月塘先生遺墟碑(1827년 宋穉圭) 등에 보면 月塘公은 “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還鄕(무인년에 중훈으로 지진주사가 되었고 경진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라고 적혀있고, 감찰공(崔世榮)이 지은 草成一卷譜(1686년)에 보면 “庚辰以知珍州事還鄕(경진년에 진주사로 고향에 돌아왔다)”라고 짧게 적어 놓았다. “中訓”은 “中訓大夫”를 줄인 말로 조선 때 從3品下階의 문관벼슬로 職級이고, “知珍州事"는 職位이다. “知珍州事”에서 “知”자는 “맡아 다스리다”는 뜻이고 “事”는 사람을 나타내며 “珍州”는 고을 이름이다. 따라서 "知珍州事"는 진주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원님이다. 중앙관청인 경연청· 돈령부· 성균관· 의금부· 중추부· 춘추관· 훈련원등의 관청 이름에 “맡아 다스리는 사람”을 뜻하는 “知事”를 붙이면 “知經筵事· 知敦寧府事· 知成均館事· 知義禁府事· 知中樞府事· 知春秋館事· 知訓鍊院事· 知門下府事”가 되어 당해 관청의 우두머리벼슬(정2품관)이 된다. 또 지방관에게 붙이면 “知珍州事· 知金堤郡事· 知咸陽郡事· 知務安縣監”처럼 주· 군· 현(州郡縣)을 다스리는 수령이 된다. 그 사례로 世宗實錄 7년(1425 乙巳) 12월 10일(乙亥) 2번째 기사를 보면 “引見知咸陽郡事崔德之臨江縣監朴枝生···等謂曰 前此只令二品以上守令接見 予詳思之···(지함양군사 최덕지 임강현감 박지생···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전에는 다만 2품 이상의 수령만 접견하였으나 내가 자세히 생각해 보니···)”라는 내용이 있고, 또 世宗實錄 18년(1436 丙辰) 11월 25일(丙辰) 1번째 기사는 “知金堤郡事崔德之獻眞珠一枚 賜內廐馬一匹(지김제군사 최덕지가 진주 1매를 바치니 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知”자처럼 쓰는 글자는 이외에도 “判” “都”자가 있으니, 예를 들면 判中樞府事· 判義禁府事· 判廣州牧使· 都觀察使· 都節制使 등이다. “珍州”는 옛 지명으로 지금의 충남 錦山郡 珍山面과 그 인접지역을 일컫던 말이다. 珍山은 고려시대(1018년)에 進禮縣(現 錦山)에 예속되었다가 1390년에는 高山縣(現 全北 完州郡 高山面)에 예속되어 高山縣 監務가 겸하여 다스렸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그 이듬해(1393년) 太祖의 胎室를 이곳 萬仞山(현 태봉산)에 옮겨안치한 후 이곳을 단번에 郡보다도 격이 높은 州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珍州라 하여 “知珍州事”를 배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1413년 留守府· 大都護府· 牧官이 아닌 “州”자가 붙은 고을의 이름은 모두 “山”이나 “川”으로 고친다는 例에 따라 珍州를 珍山으로 고치고 수령의 품계도 격하시켜 조선말까지 내려왔다(조선왕조실록 태종13년 10월 15일 기사). 그후 1914년 일제시대에 행정구역개편으로 珍山과 錦山 2개의 군이 錦山郡 하나로 통합되었는데 이제까지 계속 전라도에 속해왔던 이곳이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고 1963년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珍州”는 조선초기(1393년~1413년 20년간) 지금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지방의 이름이고 “知珍州事”도 이때 20년간 존재하던 지방관벼슬이었다(동국여지승람 진산편 참조). 만일 월당선생이 "珍州事로 중국에 다녀왔다"면 使臣으로 다녀왔다는 뜻인데 “陳奏使”라는 사신은 있어도 “珍州事”란 사신은 없다. “庚辰以知珍州事還鄕” 또는 “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還鄕”라는 내용은 월당공이 그간 봉상소경으로 중앙에 있다가 무인년(1398년) 중훈대부로 승진하여 全州府의 관할인 珍州고을의 수령이 되었다가 경진년(1400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온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위와같은 내용을 잘 모르는 집안의 누군가가 “珍州事”를 중국에 가는 使臣 “陳奏使”로 오해하고 "珍州事로 중국(明나라)에 다녀왔다"라고 발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은 정종2년(1400년) 지진주사를 사직하고 돌아와 전주 옥류동(玉流洞) 계곡에 정자를 세우고 많은 시인묵객들과 함께 화목시구(花木詩句)로 우유자적(優遊自適)하며 만년(晩年)을 보냈으니 이 정자가 바로 한벽당이다. 선생은 태종16년(1416년) 71세에 또다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호조참의 집현전직제학(戶曹參議 集賢殿直提學)이 되었는데 이는 검교직(檢校職)으로 보인다. 선생은 80세 이후에도 건강하여 말에 오르고 내릴 때도 남의 부축을 받지 않았으며 험한 길을 지팡이 없이 다니고 젊은이나 손자 같은 사람을 만나도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고, 경조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기쁜 잔치에서는 술잔을 들고 일어나 춤을 추고 글을 쓸 때에는 사람을 시켜 종이의 양쪽 끝을 잡고 서있게 한 다음 서서 글자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16년(1434년) 이질(痢疾)에 걸려 9일만에 홀연히 돌아가시니 6월 25일로 향년 89세, 묘소는 전주에서 가까운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주덕산(周德山)에 있다.
선생은 아들만 4명을 두었는데 첫째가 광지(匡之 集賢殿提學. 松崖公), 둘째가 직지(直之 集賢殿提學. 松坡公), 셋째가 득지(得之 典農少尹. 栗軒公), 넷째가 덕지(德之 藝文館直提學. 烟村公)로 모두 학자로 현달(顯達)하였다. 네 아들의 이름은 차례로 “잘 못된 것을 바로잡아주고(匡之), 굽은 것을 펴주고(直之), 스스로 본성을 찾도록 교화해주고(得之), 은혜를 베풀어주라(德之)”는 뜻으로 요임금(放勳)이 하신 말씀인데, 이는 맹자 등문공장구 상편(孟子 滕文公章句 上篇)에 나오는 말로 성인(聖人)이 백성을 걱정하여 가르치고 다스리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나는 월당선생이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네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멋지게 지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註 : 孟子 등문공 장구 上 제 4-1 장에 보면, “后稷이 敎民稼穡하여 樹藝五穀한대 五穀熟而民人育하니 人之有道也에 飽食煖衣하여 逸居而無敎면 則近於禽獸일새 聖人이 有憂之하사 使契로 爲司徒하여 敎以人倫하시니 父子有親이며 君臣有義며 夫婦有別이며 長幼有序며 朋友有信이니라 放勳曰 勞之來之하며 匡之直之하며 輔之翼之하여 使自得之하고 又從而振之德之라하시니 聖人之憂民이 如此하시니 而暇耕乎아” 라는 내용이 있다.】
선생은 많은 시를 지어 남겼는데 이들을 모아 편집한 후 박팽년(朴彭年)선생이 서문(序文)을 쓴 시문집이 있었다고 전하나 망실하여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또 다른 유집(遺集) 1질도 있다고 하나 나는 아래 시 2수를 제외하고는 아직 본 적이 없다.
送李府尹歸洛 서울로 돌아가는 이 부윤을 전송한다
月塘柳色雨餘新 월당의 버들 빛 비온 후 더욱 새로운데
秩秩初筵餞大賓 공경스런 첫 자리에서 큰 손님 보내네
願入岐陽朝罷後 원컨대 중앙에 들어가 조정이 파하거든
湖南須記一閑人 호남의 한 한가한 사람을 꼭 기억해주구려
* 歸洛 : 원래는 洛陽으로 돌아가다는 말인데, 洛陽은 周· 後漢· 魏· 西晉· 唐 등 중국
의 9개 왕조가 도읍했던 곳으로 서울로 돌아가다(歸京)는 뜻으로 사용된다.
秩秩 : 공경하는 모양
岐陽 : 중국 섬서성 기산(陝西省 岐山) 남쪽에 있는 현(縣) 이름. 주(周)나라 발상지
로 이 역시 수도(首都)를 뜻하는 말임.
寄二子匡之德之 두 아들 광지와 덕지에게 부친다
佐郞兄對正郞弟 좌랑인 형이 정랑인 아우를 대하니
參議父懷癡少兒 참의 아비는 어린 작은 아들을 생각한다
珍重聖恩猶未報 진귀하고 소중한 성은을 보답하지 못하니
時時北望苦想思 때때로 북쪽을 바라보며 생각하기 괴로워라
위 “送李府尹歸洛”이란 제목의 시는 전주부윤(李府尹)이 전근되어 서울로 올라갈 때 월당루(月塘樓, 한벽당)에서 가진 송별연에서 월당선생이 직접 글을 써 떠나는 이부윤에게 준 송별시이며, 아래 “寄二子匡之德之”는 장남인 병조좌랑(兵曹佐郞) 광지(匡之)가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아우 예조정랑(禮曹正朗) 덕지(德之)를 대하는 모습을 참의(參議)인 아버지가 생각하면서 지은 것이라 전한다.
월당선생이 관직을 물러날 때 조정의 많은 선비들이 송별시를 지어 선생의 높은 덕을 칭송하였는데 그 중 안평대군(安平大君)· 정인지(鄭麟趾)· 김종서(金宗瑞)· 안지(安止)· 정곤(鄭坤)· 신석조(辛碩祖)· 권맹손(權孟孫)· 안숭신(安崇信) 등 당대의 모든 석학들이 지은 송별시의 일부가 남아있어 한벽당과 월당유허 중간의 대로변에 “월당선생찬시비(月塘先生讚詩碑)”로 새겨 놓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한벽당은 전주시 교동 산 7-3번지 승암산 아래 절벽을 깎아 세운 정자로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있다. 한벽당은 한벽당과 요월대 2채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전주천 건너편에서 바라볼 때 왼쪽 정자가 한벽당이고 오른쪽 작은 정자가 요월대이다. 요월대(邀月臺)란 달을 맞이하는 누대란 뜻으로 승암산위로 떠오르는 달(麒麟吐月)을 이곳에서 맞이하며 노래하였으니 그야말로 한벽당과 함께 풍류가 물씬 묻어나는 이름이다. 또한 한벽당은 예로부터 한벽청연(寒碧晴烟)이라 하여 전주천 맑은 물과 어울려 전주8경의 으뜸으로 쳤으나 지금은 한벽당 바로 앞뒤로 도로가 뚫리고 긴 한벽교가 앞을 가로막아 풍치가 많이 훼손되어 아쉽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남고사의 저녁 종소리(南固暮鐘)와 기린봉 위로 떠오르는 달(麒麟吐月)이 함께 어울려 아직은 그 때의 운치가 조금은 남아 있다. 한벽당에 오르는 계단 왼쪽에는 김문옥이 쓴 한벽당기적비가 세워져있고, 한벽당 정자 안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김진상 등 여러 유명시인 묵객들이 편액에 남긴 시문과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석촌 윤용구(石邨 尹用求)가 쓴 한벽당중수기가 걸려있는데 근래에 4~5개의 편액이 통째로 없어져 보기에도 흉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옛사람들은 한벽당과 오목대 향교 등이 있는 교동일대를 옥류동(玉流洞) 또는 자만동이라 불렀고 이 산자락을 발산(鉢山)이라 하였다. 또 이 발산은 조선왕조를 세운 전주이씨의 발상지라 하여 발이산(發李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주위에는 호운석(虎隕石)· 장군수(將軍樹)· 오목대(梧木臺)· 이목대(梨木臺) 등 역사적으로 조선왕조와 관련된 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1743년에 간행된 전주최씨 대동보(癸亥譜)에 보면 “公之田基在於全州鄕校東寒碧堂右(월당공의 삶터는 전주향교 동쪽에 있는 한벽당의 오른편에 있다)”라고 쓰여 있고, 1827년에 세운 월당선생 유허비에는 “嘗餞府伯于月塘樓上(일찌기 월당루 위에서 부백을 전별하고)”라는 내용이 있는데, 부백(府伯)은 전주 이부윤을 달리 표현한 것이며(古書를 읽다보면 府尹이나 府使를 府伯으로 기록한 곳이 많이 나옴), 월당루(月塘樓)는 한벽당에 월당선생의 호를 붙여서 부른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정자는 “한벽당”이 본래의 이름인데 월당선생이 지어놓고 노닐던 정자라는 뜻에서 “월당루”라고도 불려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한벽당으로 이름이 굳어졌지만 4~50년 전만 해도 우리는 “한벽당”보다는 “한별당” 또는 “한벽루”로 많이 불렀다.
한벽당 앞을 흐르는 전주천은 임실 슬치에서 발원하여 상관의 만마동· 죽림· 신리를 거치면서 공기동· 의암· 원당리 등 여러 계곡의 물을 한데 모아 각시바위와 좁은목을 지나오다가 한벽당 아래 절벽에 부딪쳐 흰 물거품을 일으키고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완산동과 남부시장 사이로 흐르다가 완산교 부근에서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가공원과 도토리골· 어은골을 지나 진북사(鎭北寺) 아래에서 금암천(金岩川)과 합류하고 있다. 그러나 오래전에는 한벽당을 조금 지나 바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금의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과 동부시장 시청부근을 관통하여 흘렀는데, 도시계획에 따라 넓은 평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남서쪽 산자락 아래로 흐르도록 물길을 돌렸다고 한다. 그 증거로 완산동 초록바위 부근과 다가공원 근처는 산자락을 잘라 암벽을 깨뜨리고 쪼아내어 물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뾰족뾰족한 바위가 강바닥에 그대로 드러나 있고, 교동과 풍남동 시청부근은 땅을 조금만 파도 강바닥에서나 볼 수 있는 둥글둥글한 자갈과 모래가 나오는데 언제 이러한 큰 역사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며칠 전 나는 전주와 관련된 고문서와 사진 등 많은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분(전주부사 번역위원 이인철 옹)을 만나 전주천의 물길 방향이 언제 이렇게 바뀌었는지를 물어보니 그 분은 서슴없이 “전에는 전주천에 이런 둑이 없었고 1917년 대홍수 이후 수해복구를 하면서 높은 둑을 쌓아 1923년에 물길이 바뀌었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그 말이 조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같이 높은 둑은 비록 일제시대에 쌓은 것이라 할지라도 동북쪽으로 흐르던 물길을 이처럼 남서쪽 산자락 아래로 흐르도록 방향을 바꾼 것은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의 일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월당유허(月塘遺墟)는 한벽당에서 북쪽으로 월당선생 찬시비를 조금 지나 터널 바로 옆에 있는데 철도와 도로개설로 인하여 지금은 그 흔적만 조금 남아있다. 유허에는 조그만 개울(小溪)이 있고 그 곁에는 “참의정”이란 우물· 연못 터· 유허비각과 비석이 있다. 개울가에 있는 우물의 개석(蓋石)에는 “參議井”이란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이는 월당선생이 참의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2~30년 전 그 조그만 개울에 석축을 쌓고 오솔길을 시멘트로 포장하면서 돌과 시멘트더미에 묻혀버려 지금은 “參議井”이란 글자도 보이지 않고 낙엽과 오물들이 뒤덮여있어 마치 하수구처럼 보인다. 4~50년 전에는 이 유허에 초당(草堂 : 讀書堂)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빈 터에 울타리만 처져있으며 울타리 안은 잡초가 무성하고 낙엽만 수북하게 쌓여있어 쓸쓸하기만 하다.
당시 뜰 안 연못(月塘) 주변에 운치 있게 놓였던 것으로 보이는 큰 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땅속에 반쯤 묻혀있는데 이 돌들과 주변 암벽에는 여러 서체로 “百華潭(篆書) 水風(楷書) 樂水(篆書) 醉裏乾坤 閑中日月(楷書) 崔月塘 寒碧堂(隸書) 邀月臺(楷書) (迎)月巖(楷書) 曳羅砌(楷書) 臙脂坡 尋梅逕 桃花潭 玉流洞 光風霽月 鳶飛魚躍” 등 크고 작은 글자들이 많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玉流洞 光風霽月 鳶飛魚躍 仙洞 詹烟” 등의 글자는 땅속에 묻혀버렸거나 아주 없어져 버렸다. 이러한 글자들이 더 없어지기 전에 매립된 연못 자리를 좀 발굴하고 매몰된 글자와 유적을 찾아내어 보존하는 대책을 세웠으면 좋겠으나 관청에서는 물론 종중이나 후손들도 누구하나 관심을 갖는 이가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바윗돌에 새겨진 글자들의 의미를 보면,
“醉裏乾坤 閑中日月” 은 소강절(邵康節) 선생의 지취(志趣)를,
“光風霽月” 은 주염계(濂溪 周敦頤) 선생의 기상(氣像)을,
“鳶飛魚躍” 은 대자연의 오묘(奧妙)한 도(道)와 활발한 공부를 의미하고,
“百花潭 迎月巖 曳羅砌 臙脂坡 尋梅逕 桃花潭 水風 樂水 簷烟 仙洞” 등은 격물우흥(格物寓興)의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는데 배움이 적은 나로써야 어찌 그 뜻을 다 알 수 있으랴!
요즈음 한벽당 주변의 암벽과 월당선생 유허에 있는 바윗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창암(蒼巖 李三晩 1770~1845)이 쓴 글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이 글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醉裏乾坤 閑中日月이란 큰 글자는 창암서체와 비슷하여 오래전부터 창암의 글씨가 아닐까하고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벽당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글자를 창암이 쓴 글씨로 단정하는 건 문제가 있다. 1864년에 간행된 전주최씨 족보(癸亥譜)에 보면 “參議井上有月塘 塘畔有玉流洞 百華潭 閑中日月 醉裏乾坤 光風霽月 鳶飛魚躍 水風等字 皆公之筆蹟(참의정 우물위에 월당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옥류동 백화담 한중일월 취리건곤 광풍제월 연비어약 수풍 등 글자가 있는데 이는 모두 月塘公의 필적이다)” 라고 쓰여 있고, 그 이외에 여러 문헌에도 모두 그렇게 쓰여 있다. 이보다 60여년이 앞선 1805년에 간행된 을축보(乙丑譜 : 계성제지 종이박물관 소장)가 있는데 나는 이를 직접 열람해볼 수가 없어 확인해 보지는 못했으나 거기에도 위와 같이 “···等字 皆公之筆蹟”(···이런 글자는 모두 공의 필적이다)라는 내용이 있다면, 이때는 창암의 나이 겨우 30대 초반일 때인데 그때에도 이러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는 말이니 창암의 필적으로 보기 어렵지 않겠는가?
나는 "醉裏乾坤 閑中日月"을 제외한 글자 대부분을 월당선생의 필적으로 믿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월당선생의 후손인 전주최씨 일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당대의 명필이던 창암이 이곳 옥류동 월당유허 근처에 살면서 어떠한 사연으로 인하여 이곳에 필적을 남길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 볼 필요도 있다. 월당유허비의 비문은 선생의 16세손 최설(崔偰, 호 麟西齋, 1771~1855)선생이 썼는데 인서재공과 창암은 1살 차이로 같은 시기에 서로 이웃에 살면서 두 분 모두 당대의 명필들이었다. 그러므로 두 분이 서로 친교하며 함께 필적을 남기도록 권유하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창암의 글씨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이 글씨들 모두가 창암이 쓴 글자라고 단정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월당선생의 후손들 역시 이 글자들이 월당선생의 필적이 확실한지 아니면 창암(蒼巖)이나 인서재(麟西齋)공의 필적인지를 연구하고 증거를 찾는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려야 할 것이다.
【인서재(麟西齋. 崔偰)선생은 나의 6대조(崔偰)이다. 전주의 기린봉(麒麟峰) 서(西)쪽에 집(齋)을 짓고 사는 사람이란 뜻에서 “麟西齋”로 號를 지었을 것이다. 인서재공의 글씨는 현재 한벽당 옆에 있는 월당선생유허비(1827년)와 전주향교 명륜당에 걸려있는 명륜당중수기(明倫堂重修記. 1819년), 박진효자비각에 걸려있는 죽정 박공효행유적기(竹亭 朴公孝行遺蹟記. 1838년), 그리고 전주· 완주· 진안지역에 7~8점의 묘갈명이 있으며 유묵(遺墨)으로 문집(필사본) 1권과 묵화 7~8점이 있는데 유묵은 지금 내가 보관하고 있다. 인서재공의 묘는 완주군 상관면 공기동(孔器洞)의 앞산인 수리봉 정상의 연소혈(燕巢穴)에 모셔져 있었는데 1990년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용연마을 뒷산으로 이장하고 묘비도 새로 세웠다. 묘비는 내가 글을 짓고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 김정환(金正煥) 선생이 썼다. 공기동은 창암 이삼만이 만년에 거처하다가 졸한 곳이다. 인서재공과 창암, 이 두 분은 나이 한 살 차이로 함께 옥류동에서 이웃하여 살면서 글씨로 당세(當世)를 천단(擅斷)하였던 분들이다. 인서재공은 창암보다 10년을 더 살았는데 사후에까지 무슨 인연이 있기에 창암이 살던 공기동에 터를 잡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부끄러운 이야기나 5~60년 전 내가 10살도 안되었을 적에 우리 집에는 고서적과 두루마리로 된 서간문 같은 고문서 고서화 등이 많이 있었으나 당시 생계가 무척이나 어려워 할머니와 어머니가 고문서로 벽과 방바닥을 바르고, 깨끗하고 두꺼운 종이는 오려 버선본을 만들고 한복의 동정속에 넣었으며 심지어 폐휴지와 불쏘시개로 이용하는 것을 보고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나는 그 중 크고 두꺼운 종이에 커다란 글자를 쓰고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큰 도장을 찍은 종이 1장, 작은 글씨로 쓴 기다란 두루마리 1장, 기름 먹인 종이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가득한 커다란 책 1권, 그리고 먹으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목단(모란) 석류 파초 등을 그린 그림 몇 점을 골라서 감추어 두었었는데 나중에 장성하여 알고 보니 그것은 나의 고조부가 받은 정3품 통정대부 교지, 송치규선생이 쓴 월당유허비문 원고, 12대 할아버지(崔嶠 호 志節齋)의 문집 필사본 으로 밝혀졌고, 묵화 7~8점은 누구의 작품인지 확인을 못하고 있으나 옛 선조들 및 선조들과 교유하던 분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열 두어살 될 때까지 이런 중요한 고문서들이 아궁이에서 불타 사라졌는데 1937년 할아버지가 50대 때 돌아가신 후 가계가 몹시 어려워졌다고 하니 아마 20여년 동안 그런 일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문서가 없어졌을까 생각하면 가난했던 시절이 원망스럽다.】
한벽당 주변 글자들의 필적을 연구하는데 참고할만한 자료가 또 하나있으니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된 자오집(自娛集)이다. 자오집은 전주 조경묘별검(肇慶廟別檢)· 무안현감(務安縣監)· 좌부승지(左副承旨)· 강원도관찰사· 병조참판 등을 지냈고 순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한익상(韓益相, 호 百拙 또는 自娛, 1767~1846)이란 분의 유집이다. 한익상은 순조7년(1807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쳐 1809년(기사년) 조경묘 별검으로 전주에 내려와 인서재공을 만나보고는 곧바로 친한 벗이 되었다.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 “己巳冬以廟郞來于完 完人稱偰有文行可與游 遂延見余亦往其第拜公 貌粹言謹而禮至歸而語人曰宜有是子(기사년 겨울 조경묘별검으로 전주에 내려오니 전주사람들이 최설이 학문과 행실이 있어 가히 더불어 사귈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마침내 나도 그 집에 가서 어른(인서재공의 아버지 學富公)을 뵙기에 이르렀는데, 모습은 순수하고 언어는 삼가며 예법은 지극하였다. 돌아오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런 훌륭한 아들을 둔 것은 당연하다고 칭찬하였다)”라고 적어놓았다. 그 후 한익상은 인서재공과 평생 벗이 되었고 전라도와 전주에 관한 많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주를 떠난 이후에도 수차례 전주를 찾아와 인서재공을 “崔雅士”라 부르며 함께 시문을 읊고 인서재공의 호기(號記)를 지었으며 인서재공의 아버지 죽림옹(崔學富 1740~1816. 나의 7대조)공이 돌아가시자 묘갈명(竹林翁公墓碣銘)도 지었다.
나는 6대조의 벗인 한익상의 행적(行蹟)을 오래전부터 연구해왔는데 그는 은퇴하여 고향 원주(原州)로 내려가 묘가 강원도 원주에 있고 그 후손들도 원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원주에까지 찾아가 보기가 어려워 고심하던 중, 그의 호를 딴 “自娛集”이라는 문집을 남겼고 이 문집이 규장각에 소장되어있으며 또 이 문집에는 나의 7대조 죽림옹공의 묘갈명(墓碣銘)과 6대조 인서재공의 재호기(齋號記), 그리고 인서재공과 주고받은 수십편의 시문 등이 다수 실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규장각에 소장된 자오집을 복사해 와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이 문집에는 “寒碧堂, 將軍樹, 虎隕石, 肇慶廟, 慶基殿과 太祖御眞, 肇慶壇, 南門樓(明見樓), 此君亭과 弊廬書室, 西歸 李起浡과 玄孫 李汝義, 强翁 李三萬, 竹林翁 崔學富, 麟西齋 崔偰, 孝子 崔儭, 琵琶翁歌詞” 등 전주지역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에 “强翁說”이란 글이 있는데 강옹(强翁)은 이삼만(李三萬)의 호(號)라고 밝히고 한익상이 강옹과 직접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강옹의 성품· 취미· 학문의 깊이· 필법(筆法) 등에 관한 내용을 그대로 기록해 놓았다. “强翁 李三萬”은 “蒼巖 李三晩”이 40세 전후에 쓰던 호와 이름으로 한익상(自娛, 百拙)· 이삼만(强翁)· 최설(麟西霽) 3인이 친교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문집에는 “屛面書 光風霽月 鳶飛魚躍 八字眉篆”이란 글도 있는데, 이것은 한벽당 부근에 남아있던 암각서 “光風霽月 鳶飛魚躍”을 보고 읊은 시이고 여기에 “先生”이란 말도 나오는데 “先生”은 월당선생을 일컫는 말이며, “寒碧樓靑烟”이란 시는 한벽루(寒碧樓)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주천 주변의 풍광을 읊은 시라고 나는 확신한다. 또 “光風霽月 鳶飛魚躍 八字眉篆”이라 했으니 한벽당 주변에 있던 “光風霽月 鳶飛魚躍”이란 8자 암각서가 미전(眉篆 : 眉叟 許穆의 篆書體)이었는지 등이 밝혀진다면 한벽당 주변의 암각서들이 누구의 필적인지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오집에 나오는 한벽당과 관련된 시 두 수(首)를 소개한다.
屛面書 光風霽月 鳶飛魚躍 八字眉篆也 詠二絶 - 韓 益 相 -
(光風霽月) 안개 낀 달의 풍광
潤物和風光自動 윤나는 사물과 온화한 바람이 스스로 빛을 내고
滿天明月霽尤佳 하늘에 가득한 밝은 달이 안개를 더욱 아름답게 하네
至今浩浩無邊處 지금은 너무나 넓어 가에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니
想得先生好底懷 선생이 마음속에 품었을 감정을 떠올려보네
(鳶飛魚躍) 솔개가 날고 물고기 뛰다
其飛其躍靠誰爲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을 뉘라서 흉내 낼까
顯處求微合細推 밝은 곳에서 작은 것을 구하려니 더욱 작아지네
壽考周王千載化 오래 산 주왕은 1천 살이나 되고
海東樂府續新詞 해동의 악부에 이어 새로 시를 쓰네
寒碧樓 靑烟 한벽루의 푸른 안개 - 韓 益 相 -
統閣風光物物供 멋진 누각의 풍광이 온 사물을 받들어
最宜朝暮對村容 아주 흐뭇하게 아침저녁으로 시골 모습 만나네
忽黑俄靑疎樹裏 돌연 검은 기운이 푸르게 변해 숲을 씻으니
宛然活盡淡而濃 완연히 살아 있는 듯 옅어졌다 진해지네
월당공이 살던 옛 집터에 세운 월당유허비는 성균관 좨주(祭酒)와 형조판서를 지낸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 시호 文簡)선생이 찬문(撰文)하고 인서재(崔偰)선생이 근서(謹書)한 것이다. 비를 세울 당시 송 선생이 쓴 그 비문의 원고(原稿)를 지금 내가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나는 이 비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서예가인 김진돈 회장은 유허비의 탁본을 뜨면서 아주 아주 잘 쓴 글씨라고 계속 찬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고, 비석면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줄과 칸을 가리키며 이것은 비석면에 연필로 줄을 친 다음 직접 돌 위에 글자를 쓰고 이를 새겼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자국이 남아있는 것이라는 설명까지 해주어 나는 탁본을 하면서 수백 년 전에 돌아가신 선조들을 직접 만나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 들어갔다.
사실 나는 우리 집에 전해 오는 두루마리로 된 이 비문원고를 어려서부터 보아 왔는데 한문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어렴풋이 옛날 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하였을 뿐 어떤 내용인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넘어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려고 노력하면서 그것은 22대조인 월당공의 유허비문이라는 것과 유허비가 한벽당 곁에 세워져있으며 그 비석의 글자는 나의 6대조인 인서재공이 직접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나의 한문 실력으로는 고문체(古文體)로 쓰인 비문을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었고 35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 비문을 약 5~60번 정도 읽어보았으나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간 내가 讀書不求甚解(글을 읽으면서 그 뜻을 깊이 알려고 노력하지 아니함)하였던가? 아니면 讀書百遍義自見(백번을 반복하여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통함)이라 했는데 아직 독서백편(讀書百遍)을 못해서 그랬던가? 아무튼 이제는 비문의 내용을 모두 해석하게 되었고 비문을 지은 송치규선생의 출생과 이력 등도 찾아보게 되었다. 특히 비문을 쓴 인서재공에 대하여는 행장(行狀)과 필법을 연구하고 유품(遺品)과 유묵(遺墨)을 수집하면서 인서재공은 창암과 함께 당대 완산의 최고 명필이요 시인이며 대 문장가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비석을 탁본해 본 결과 중요한 부분에 원문과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먼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원문 첫머리는 “全州府東門外溪山···”으로 시작되는데 실제 유허비에는 “全州府南門外溪山···”으로 시작된다. 원문의 “동문 밖”이 실제 비석에는 “남문 밖”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벽당은 전주의 동남쪽에 있기 때문에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리 표현 할 수 있으니 큰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비문을 쓰고 세운 시기가 서로 일치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비석에는 분명히 “崇禎四丁亥孟春 恩津宋穉圭撰幷書前面 十六世孫 偰謹書”라고 되어있는 반면 내가 애지중지 보관해 온 원문에는 “崇禎三丁亥孟春 恩津宋穉圭書”라고 쓰여 있고, 1958년에 발행된 전주최씨 세적록(世蹟錄)과 1983년에 발행된 연촌공파족보 등 많은 자료에도 “崇禎三丁亥孟春 恩津宋穉圭書”라 되어 있었으며, 1864년(甲子)에 발행한 족보를 찾아보니 여기에는 “純廟戊子 後孫建閣竪碑於遺墟 碑文文簡公剛齋恩津宋先生穉圭撰幷書前面”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월당선생유허비를 새운 년도가 이처럼 숭정3정해와 숭정4정해로 서로 다르게 되어 있으니 1주갑(周甲) 즉 60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비문을 지은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 1759~1838)선생과 비석에 글씨를 쓴 인서재 최설(麟西齋 崔偰, 1771~1855)선생의 생졸연대를 정확히 적어 놓고, 여러 자료에 나와 있는 숭정3정해(崇禎三丁亥, 1767년)· 숭정4정해(崇禎四丁亥, 1827년)· 순묘무자(純廟戊子, 1828년)를 서력기원으로 환산하여 대입해 본 결과 내가 가지고 있는 원문과 족보 세적록 등이 잘못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결론을 말한다면 송 선생이 69세 때인 1827년(崇禎四丁亥) 맹춘(孟春 : 음력 정월)에 비문을 지었는데, 이 때 “崇禎四丁亥”로 써야 할 것을 “崇禎三丁亥”로 잘못 써 주었으나 인서재공이 비석에 글을 쓸 때 이를 발견하고 “崇禎三丁亥”는 “崇禎四丁亥”로 바르게 고쳐 쓰고 “全州府東門外”도 “全州府南門外”로 써서 비석을 새긴 다음 이듬해 1828년(純廟戊子) 후손들이 비각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해석하지 않고 만일 숭정3정해(1767년)에 월당공유허비를 세운 것으로 본다면 숭정3정해년(1767년)은 비문을 지은 송 선생의 나이가 불과 9살 되는 해이고 비석글을 쓴 인서재공은 태어나기 4년 전 해에 해당되므로 이는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송치규선생이 9살 때에 이 비문을 짓고 전면을 썼으며 인서재공은 태어나기 4년 전에 어떻게 이 비문의 음기를 썼다는 말인가? 따라서 송 선생이 비문을 지은 해는 이보다 1주갑 뒤, 즉 송 선생 나이 69세가 되고 인서재공은 57세가 되는 숭정4정해(1827년)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세적록과 족보 등에 월당유허비를 숭정3정해에 세웠다는 내용과 앞에서 말한 “진주사로 중국에 다녀왔다”는 내용은 앞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비문이 비석을 세울 당시에 송 선생이 직접 써준 원문이 아니고 비석을 세운 이후에 우리 집안의 누군가가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베껴 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비석의 글을 보고 베껴 놓은 것이라면 처음 부분을 비석에 쓰인 그대로 “全州府南門外···”라고 베껴 쓰지 않고 왜 “全州府東門外···”로 써 놓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랜 생각 끝에 나는 원문을 가지고 전주박물관과 강암서예관을 찾아가 그곳에 전시된 송치규선생의 간찰과 내가 가지고 간 원문을 대조하여본 결과 서체가 완전히 일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비문이 비석을 세울 당시 송치규선생이 써준 원고임에 틀림없고 당초 송 선생이 원고에 년도를 잘못 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崇禎연호와 稱元法에 대한 필자의 고찰 : “崇禎”이란 중국 明나라 마지막 황제인 毅宗(재위기간 : 1627~1644)의 年號이다. 조선은 종주국으로 섬기던 明나라가 망하고 淸나라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女眞族이라 무시하던 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合赤)와 그 아들 홍타이지(淸太宗)가 明나라를 滅亡시키고 조선까지 征伐(병자·정묘호란)하여 임금이 청에 굴복하는 치욕을 당하자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나라를 미워하여 청의 연호조차 쓰지 않고 명나라 의종의 연호 “崇禎”을 계속하여 조선말까지 사용해왔다. 연호의 사용은 임금이 즉위하면서 바로 원년(1년)으로 치는 방법(卽位年稱元法)과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치는 방법(踰年稱元法)이 있는데, 踰年稱元法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踰年稱元法은 先王을 예우하는 뜻에서 새로 즉위한 해는 先王의 해이고 다음해부터 새 임금의 1년이 시작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평상 유년칭원법을 적용했으며 開國을 했거나 反正(政變) 기타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선왕을 예우할 필요가 없으므로 卽位年稱元法을 사용하였다. 조선왕조를 창건한 太祖와 王位簒奪· 反正으로 즉위한 世祖· 中宗· 仁祖는 卽位年稱元法을 사용했다. 왕자의 난으로 즉위한 정종과 태종,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즉위한 순종도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으나 실록은 유년칭원법에 따라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설명하기가 복잡하므로 차기에 설명하기로 한다. 유년칭원법을 사용한 경우 즉위한 해는 즉위년이라고 하면 된다. 예를 들면 1418년 8월 11일에 세종이 즉위하였는데 그해 8월 10일까지는 선왕인 太宗18년이 되나 그 이후부터 연말까지는 세종즉위년 ○월 ○일이라 하고, 즉위 익년인 1419년 1월부터 세종원년이 된다.】
전주향교 앞에는 정려(旌閭)가 하나 있고 그 안에 자연석으로 된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이 비는 1398년(태조 7년)에 세운 박진(朴晉)의 효자비로 우리 전라북도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박진은 전주 박씨 종수(從壽, 字 仁夫, 號 經德齋)의 아들인데 월당선생의 손위 처남이고 광지· 직지· 득지· 덕지에게는 외삼촌이 되며, 포은 정몽주의 외손자요 만육 최양의 외종질이 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잠깐 이야기한 바 있다.
박진은 청도(淸道)· 영암(靈巖)군수 등을 지냈는데, 영암군수로 있을 때 여든이 넘은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급보를 듣고 그날로 벼슬을 내놓고 말을 몰아 부친이 계신 전주로 달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전주에 도착하고 보니 여름 장마에 남천(南川)의 물이 불어나 전주사람들도 건너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말을 몰아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박진은 물속에서 물살에 밀려 떠내려가는가 싶더니 잠시 후 이상하게도 강물이 갈라지면서 물속에 길이 났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기적처럼! 물속에서 무사히 나온 박진은 집에 당도하여 부친의 간호에 온 정성을 쏟았다. 눈이 온 겨울철이 되었는데 부친은 화전(花煎)이 먹고싶다고 하더니 수박과 죽순도 먹고 싶다고 하였다. 박진은 목욕재계하고 기도한 후 산골짜기와 눈밭을 헤맨 끝에 눈밭에서 진달래꽃과 수박· 죽순을 구해다 드렸고 또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므로 꽁꽁 언 못(氷沼)의 얼음을 깨자 잉어(鯉魚)가 튀어나와 이를 잡아다 대접하는 등 효도와 정성을 다 했다. “설리구순과 고빙득리(雪裡求筍 叩氷得鯉)”의 고사(故事)가 어찌 맹종(孟宗)과 왕상(王祥)의 효도(孝道)뿐이겠는가? 부친은 효자아들이 지극한 정성을 다한 보람이 있어 얼마 후 병환이 나았다. 쾌차한 부친 경덕재선생은 그 아들의 효행을 시 한 수로 지어 남겼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八十年當臥蟻床 여든의 나이에 병들어 병상에 누워있는데
六旬老子藥先嘗 예순 살의 늙은 아들은 약을 달여 맛을 보는구나
死生有命難避近 생사는 하늘의 명이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니
汝慈墳立壽宮當 너는 모친 무덤 옆에 미리 수궁을 만들어 두어라.
* 蟻床 : 평상, 寢床의 다른 말. 壽宮 :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
부모님의 병 구환을 위하여 급한 마음에 강물속으로 뛰어들자 강물이 갈라졌다는 이야기는 이외에도 전주 효자동 황방산 자락인 추천대(楸川臺)의 “추탄 이경동"과 가르내 이야기, 호성동 신중마을의 "여산송씨" 효자정문 이야기 등 여러곳에 나오는데 시대적으로 보면 박진이 가장 앞선다.
전주부근에는 박효자 효행과 관련된 "수박동, 잉어소, 박과산" 등이 있다고 전하는데, 나는 이들 지명이 실제 어디인지 알아보고자 한벽당에서 동쪽으로 옛 전라선 철길을 따라 가면서 주변 산속을 헤매다가 높은 산 등성이에서 박씨 집안의 묘비 하나를 만났는데 살펴보니 “이곳 수박동(守朴洞)에 선조를 모셨다”고 새겨진 비문을 발견하고는 "수박동"이라는 곳이 실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 앞을 흐르는 전주천에는 "각시바위" 라고 하는 크고 너른 바위가 있어 그 근처는 그 바위로 인하여 물살이 세차게 소용돌이쳐 깊은 소(沼)를 이루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박진이 수박과 잉어를 구했다는 "수박동"과 "잉어소(鯉魚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박과산"은 찾지 못하고 지내왔는데, 어느날 서학동에서 어릴적부터 살아왔다는 한 노인으로부터 좁은목 약수터 윗쪽의 산을 "박산" 또는 "박진산"이라고 불렀다는 말을 듣고 그 일대를 조사한 끝에 드디어 약수터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박진의 묘"를 확인하였다. 이 박진의 묘는 그 후손들도 실전하였는데 최근에서야 알고 몇사람이 찾아와 묘소를 돌보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 노인은 박진의 묘가 있는 이 산(山)을 "박진산(朴晉山)"이라고 하였지만 옛자료를 연구해 보면 원래는 "朴晉山"이 아니라 "박모산(朴某山)"이었다. 이는 박진의 후손과 후세 사람들이 박진을 공경하는 뜻에서 박진(朴晉)의 이름에서 "晉"자를 피휘(避諱)하여 박모산(朴某山)으로 불렀는데 근세에 와서는 박진의 효행과 이름이 세인(世人)의 머리속에서 멀어져 자연스럽게 이름 그대로 "박진산"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는 관계기관의 문화관광 담당부서 공무원들이 "朴某山"의 "某"(아무 모)字를 이와 비슷한 "菓"(과일 과)로 써서 관광안내와 홍보자료를 만들어 선전할 뿐만 아니라, 역사문화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몇 몇 어중이 떠중이들도 이와 비슷한 엉터리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박진이 수박(과일)을 딴 산이므로 "과일 과자(菓)"를 넣어 "朴菓山"이라 했으니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믿게되고,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대학생들까지도 현장교육을 통하여 "박과산"으로 배워 요즘에는 "박진산"이나 "박모산"이라고 하는 사람보다는 "朴菓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니 정말 답답하고 애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진 효자비각에는 아쉬운 것이 하나 있는데 현재 비각 안에는 숭정3을축(1805)년에 후손 필성(必晟)이 글을 짓고 그로부터 33년 후 무술년(1838년)에 외후손(外後孫) 최설(崔偰, 麟西齋公)이 쓴 죽정 박공 효행유적기(竹亭 朴公孝行遺蹟記)와 근대의 최학자인 최병심(崔秉心)이 임오년(1942년)에 쓴 박효자 정려이건기(朴孝子 旌閭移建記)가 편액으로 걸려있다. 그런데 언제인가 효행유적기 편액을 다시 만들면서 편액의 글자들을 그림 그리듯 개칠해 놓아 무슨 글자이고 어떤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어 걸어 놓았는지 효행유적기를 쓴 인서재공의 후손으로써 정말 아쉽고 부끄럽다.】
【박진과 연촌공의 특별한 인연을 생각하며 : 박진은 전주 옥류동 부근에서 태어나 월당공과 가까이 살다가 서로 男妹間이 되었고 월당공의 4남 연촌공(德之)과는 舅甥間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박진은 淸道郡守와 靈巖郡守를 지냈는데 연촌공도 淸道군수를 지냈고 靈巖 규수와 혼인하였다. 나는 이 두 분 사이에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외삼촌 박진이 영암군수를 지낼 때 연촌공의 나이는 15세 정도였는데 연촌공은 전주에 살면서 어찌하여 아무런 연고가 없고 거리도 먼 영암으로 장가들 수 있었을까? 외삼촌이 영암군수로 있을 때 연촌공이 외삼촌을 만나러 가지는 않았을까? 영암군수로 있는 외삼촌의 중매로 영암 규수와 연촌공이 혼인하게된 것이 아니었을까 궁금하다. 여하튼 연촌공이 영암에 사는 趙安鼎의 외동딸과 혼인하게된 것은 영암군수를 지낸 외삼촌 박진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데 이에 대한 관심있는 분들의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첫댓글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 사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요.....다음카페에 사진을 올릴 때 글을 먼저 올리고 이어서 사진을 올리면 첨부는 되지만 원문에서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더군요.... 사지을 먼저 올리고 다음에 글을 올리면 해결되던데..... 좀 귀찮기는 해도......
저의 21대조 호조참의 월당공 휘 담 선조님의 事蹟내용을 잘보고 갑니다 어찌보면 전주최문의 문성공파 증흥기의 기틀을 마련하신 한 부분 인것같습니다 좋은글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참고적으로 문성공 25세손 의령공파 휘 智成 후손 입니다
자료 잘 보았습니다. 그동안 자료 정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월당공의 사적과 한벽당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홍보를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문성공 21세손인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고나서 3년이 지난 어느날 뜻밖에 행운을 얻어 저의 6대조 할아버지(麟西齋 崔偰. 1771~1855)와 5대조 할아버지인 副護軍公(崔啓宇)의 准戶口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166년 전에 작성된 이 戶口文書를 연구하고 번역하여 본사이트 "지식과 상식"난에 "호구단자와 준호구(戶口單子와 准戶口)"란 제목의 글로 올려 놓았으니 호구단자가 어떤 것인지? 호구단자에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면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보 崔炳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