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5일, 그간 음식기행을 하면서 평생 잊지 못할 음식을 접했다. 여수에서 만난 지인을 따라 간 곳은 동네 치킨 집.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 자리 잡고 있는 평범한 치킨 집에서 바비큐치킨과 500cc 생맥주로 여수에서의 밤을 보냈던 것이다. 여수까지 와서 말이다.
맛객 체면이 있지. 명색이 음식기행인데 바비큐치킨과 맥주는 아니다 싶어 배낭에서 물김을 꺼냈다. 완도 시장에서 사온 김이다. 초고추장에 새콤하게 무쳐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무심한 말투로 고추장도 식초도 없단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바비큐가 더욱 맛이 없어진다.
그렇게 밤은 지나고, 전날의 악몽도 달랠 겸 어시장으로 향했다. 여수 어시장으로는 남산시장을 알아준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동시장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새조개와 키조개가 참 많이도 보인다. 대야에는 살아 있는 물곰도 있고 붕장어도 있다.
근처에 집이 있다면 당장에 물곰 한 마리 가져다가 묵은 배추김치 송송 썰어 넣고 한소끔 끓였을 것이다. 흐물흐물한 살점과 함께 떠먹는 국물은 영하의 날씨가 울고 갈 정도로 시원하다. 2월말의 햇살치고는 제법 따사롭다. 덕분에 시장구경을 하는데 짐짓 여유도 부려본다.
칠공주냐? 해변식당이냐?
요기라도 할 요량으로 시장 상인에게 장어탕 잘하는 집을 물으니 칠공주집을 말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해변식당이 더 낫다고 한다.
칠공주냐? 해변식당이냐? 의견이 갈리는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예전에는 칠공주가 나았는데 요즘은 주인이 탕을 끓이지 않고 종업원이 하기 때문에 해변식당이 더 낫다는 평이다. 해변식당을 추천하는 아주머니 말씀과 표정이 하도 진지해 해변식당으로 결정.
장어구이 먹으러 가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밝혀둔다. 맛객은 장어구이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누가 장어 먹으러 가자 하면 마지못해 가긴 해도 먼저 가본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해변식당에서 먹은 며칠 후 구룡포 가서 또 장어를 먹었다.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노래방도 당구장도 마찬가지다. 누가 등 떠밀지 않는다면 평생 갈 일 없으리라 본다.
그런데 여수까지 와서 웬 바람이 불었을까. 제 발로 장어집을 찾은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수에 있는 식당치고 밖에다 장어탕과 서대회 써 붙여놓지 않았다면 중국집밖에 없다. 좀 과장해서 그렇다. 그 정도로 여수를 대표하는 음식이란 얘기다. 그러니 장어요리를 먹지 않으면 왠지 여수에 쓸데없이 온 듯한 기분이고 손해 입은 느낌이다.
"장어백반 주세요." "1인분은 안 되는데요." "헉!"
혼자서 다니는 음식기행의 서러움은 이럴 때다. 뿐만 아니라 몇 만원 넘어가는 음식도 혼자 먹기는 양과 가격 면에서 부담스러워 포기할 때가 많다. 다시 메뉴판을 보니 장어구이백반은 2인 기준이지만 장어구이 1만 원짜리는 1인 주문도 가능하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장어를 그리 선호하지 않은 맛객, 장어구이만 먹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굳이 백반을 원하는 이유는 반찬에서 우연하게 대박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문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식전이라 아직 손님은 없지만 실내가 깔끔하다는 인상을 준다. 시금치, 멸치볶음, 무김치, 배추지, 꼬막무침, 생선포 조림, 무말랭이가 차려진다. 곰삭은 젓갈이라든가 지역 색채가 강한 깊디 깊은 반찬 한두 가지 기대했는데 깔끔스런 것들이다.
▲ 장어구이백반 한 상 1만원. 원래는 2인 이상부터 주문 가능하다.
▲ 양념과 조화를 이룬 장어가 살살 녹는다.
붕장어(아나고)를 구워 빨간 양념을 얹은 장어구이가 나온다. 먹장어(꼼장어)를 제외한 장어류가 대개 그렇지만 붕장어 육질은 무척이나 부드럽다. 씹을 것도 없이 녹는다. 이 때문에 밥 위에 올려 함께 먹거나 깻잎에 마늘과 고추를 곁들여 쌈으로 먹는다.
▲ 쌈으로 먹으면 장어 본연의 맛은 감소하지만 느끼함은 온데 간데 없고 식감과 풍미가 산다.
▲ 밥 위에 올려 함께 먹는다면 재료의 맛이 온전하게 느껴진다.
맛객의 입맛에는 쌈보다 장어를 밥과 동시에 먹는 게 더 맞다. 그러다가 느끼함이 살짝 감돌려고 할 때 쌈으로도 한두 번 먹어 느끼함을 쫓아버리련다.
붕장어구이는 민물장어에 비해 기름기가 덜하기 때문에 그만큼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게 특징이다. 맛객이 아는 장어 맛은 여기까지다. 맛객에게 장어는 언제나 그런 느낌을 준다. '와~ 맛있다'가 아닌 '음…내가 장어를 먹고 있구나…'하는 그런 존재. 그렇다고 해변식당의 장어 맛이 실망스럽단 얘기는 아니다. 장어도 신선하고 양념과 장어의 조화도 훌륭하다.
아직 장어 맛을 알기엔 나이가 너무 어린 탓일까? 아니면 장어를 먹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일까? 언제쯤 장어를 먹으며 그래! 이 맛이야! 외칠 수 있을까. 칠공주집 장어구이를 맛보지 않아 해변식당 장어구이 맛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장어(물 좋은)를 썼구나 정도는 안다.
▲ 백반에 나오는 국물은 장어탕이다. 구수하면서 담박하고 개운하다.
▲ 콩나물이 들어가 해장용으로도 좋겠다.
장어구이백반에는 장어탕이 딸려 나온다.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다. 개운하고 담박하다. 많이 먹어도 속에 부담주지 않게 만들었다. 주인장의 설명에 의하면 장어뼈를 푹 고아 국물을 우려낸다고 한다. 근처에 산다면 입맛 없을 때, 처지고 지칠 때 이 장어탕 한 그릇 먹으러 다니고 싶다.
1인 주문은 받지 않아 아쉽지만 장어구이에 장어탕까지 먹는 장어구이백반은 여수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데 손색없는 맛이다. 또, 전날 호프집에서의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다. 더군다나 맥주 한 병까지 서비스 받았으니 말이다. 다시 시장으로 오니 아까 그 아주머니가 묻는다.
"장어탕 집 갔다 왔소?" "예?"
"장어탕집 갔다 와?" "예!"
"잡쉈소?" "예!"
"맛있읍디요?" "맛있게 해주더라구요."
"어 맛있어~ 칠공주집은 어멈이 해주면 맛있는디 종업원이 해놓으면 안 만나. 그란디 저그(해변식당)는 딱 요리사가 있어 가꼬 그렇게(맛있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