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걷기를 시작하며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일찍이 그의 주저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자기철학의 제1원리로 세운 바 있다. 만약 데카르트가 오늘날 살고 있다면 아마도 그는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소리쳤음직하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 인격, 운명이 차례로 바뀐다는 말이 사회적 통설이니 생각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생각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행동이 인생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동의 근원은 걷는 것이 아닐까. 걷는다! 어디를 걸을까? 물론 아무데나 걸어도 나쁠 것은 없겠으나, 이왕이면 글로벌적인 곳에서 걸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저 유명한 스페인 <산티아고> 길이나 <<와일드>>의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가 걸었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나, 티벳의 순례 길을 홀로 걷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는 애석하게도 아직 용기가 없다.
꿩 대신 닭이라 생각해서 제주올레를 걷고자 함은 아니다. 제주올레는 일찍부터 내가 평생을 두고 걸어야 할 길이라고 점찍은 길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추워진 겨울에 가야 하는가. 특히나 주중 내내 강풍과 폭설로 외출을 자제하라는 일기예보가 최후통첩처럼 텔레비전 자막을 메우고 있는 이 시기에 갔어야 했는가는 나도 의아하다. 더욱이 동행하는 어부인(어렵고 까칠한 부인, 혹은 어질어 빠진 부인)의 볼멘소리를 물리치고 결행한 내 용기에 나도 경탄해 마지않는다.
때는 갑오년도 저물어가는 12월초, 밤 7시 30분에 나는 제주국제공항에 내렸다. 어둠이 깔린 공항에는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바닥들이 눈길을 끈다. 비온 자국이 만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흐릴 뿐 눈이나 비는 오지 않는다. 다행이다 싶어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마중 온다던 이 대표가 얼굴대신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야! 친구야. 길이 얼어 공항 가는 고개를 넘을 수 없다야. 내 차는 사륜구동이 아니라 그래. 체인감은 사륜구동 콜택시를 이용해. 너 배고프지만 좀 참아. 나도 저녁 안 먹고 있어. 제주 흑돼지 삼겹살 사놓고 기다리는 중이야. 얼렁 오랑께!
-뭐 이런!......, 겨울이면 눈구덩이에 살면서 그런 고물차를 타냐. 이런 찌지리......, 하고는.
나는 어부인 앞에서 체면 꾸긴 것이 억울하여 한 소리 치고는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서귀포 방향으로 가는 승강구에 택시들이 몇 대 줄지어 서있다.
-남조로 길 <제주TS 유스호스텔>까지 가는데요?
늙수그레한 기사양반, 우리부부를 쳐다보더니 마땅찮은 듯 입을 연다.
-좀 위험할건데요. 눈도 쌓여있고 길도 얼어서, 스노타이어이긴 하지만도. 이럴 땐 위험수당을 좀 주셔야 될걸요 아마.
남 말하듯 하는 그 기사의 속셈을 내가 모르랴. 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그래 3만원에 갑시다. 했더니 평소에도 3만원인데 하면서 뒷짐을 진다. 결국 만 원짜리 한 장 더 약조하고 차에 탔다. 차가 도심을 벗어나니 차창 밖으론 설국이 펼쳐지고 차의 속도가 줄어든다. 다니는 차들도 없다.
이 사장이 사기 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나는 어부인의 옆얼굴을 훔쳐보면서 안도의 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40분이면 가는 길이라는데 밤 8시 30분이 넘어서야 제주TS에 도착했다. 그 밤에 이 사장과 나는 소주 N+1병을 마셨다. 술잔 주고받으며 그간의 사정도 주고받았다. 직장 퇴직 후 4년간 은둔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는가. 그의 얼굴과 말에서 묻어난다.
그의 꿈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제주올레 이야기로 들어가자. 내가 제주올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서명숙씨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제주올레를 개관하기 전에 나는 제주올레를 개척한 주인공 서명숙씨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와 나는 아직 일면식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책을 통해서 그녀의 영혼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제주올레는 없었다는 숙명에 나는 전율을 느낀다.
제주 성산읍 출신인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사 기자로 23년을 살았다. 그녀의 나이 50세 때인 2006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자리를 박차고 산티아고로 향했다. 36일 동안 산티아고 800킬로를 걸으면서 그녀는 자신 찾기에 성공한 것이다. 유럽에 산티아고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제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으로 오늘 우리가 걷는 제주올레가 탄생하였다. 그녀는 사) 제주올레 이사장 자리를 8년째 맡아 제주올레를 지키고 있다.
원래 나는 어릴 적에 산길을 하도 많이 걸어서 걷는 것이 나의 특기로 생각할 정도로 걷는 데는 자신이 있었고, 평소 바다를 미지의 세상으로 동경한 산골 촌놈으로서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걸어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언감생심 가슴 뛰는 일이였다.
그런 잠재의식이 있던 나에게 기회는 왔다. 직장에서의 은퇴가 그것이었다. 자유인이 된 즉시 나는 퇴직 동기들과 제주도 골프여행을 했다. 그것이 2009년 1월초였다. 그때 만난 것이 제주올레였다. 필드를 걸으면서도 나는 올레를 생각했다. 그래서 서명숙의 그 책을 읽게 되었고, 지금도 가끔씩 보고 있다. 그 후 나는 아예 제주에서 살자고 작정하기도 했었다.
제주올레는 제주도 해변을 일주하는 길이다. 동쪽 말미오름 초입의 시흥초등학교(1코스 시작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돌아 종달바당(21코스 종점)에서 마무리하는 길이다. 길은 21개 코스로 구분한다. 구간마다의 거리를 계산기로 두드려보니 그 합이 346.5킬로미터다. 그러면 제주도 해안은 한 바퀴 도는 셈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제주의 바당을 다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5개 코스를 추가했다고 생각한다. 추가한 5개 코스는 우도.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가파도. 저지곶자왈. 추자도다. 이로서 만 5년 만에 26개 코스에 총길이 425킬로의 현재 제주올레는 완성되었다. 이제 우리들은 이 26개 코스를 놀멍, 쉬멍, 보멍 걸으면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길들이 많지만 제주올레처럼 바다와 마을이 사람과 어우러진 길은 드물다. 그리고 제주올레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다. 걷다가 힘들면 길에서 빠져나오면 되고 사람마다의 취향대로 거꾸로 걸어도 되고 하루에 한 코스를 걸어도 되고 두 코스를 걸어도 상관없다. 그야말로 길 자체가 자유의 상징이다.
길은 행복한 종합병원이라고 서 이사장은 말했다. 동감이다. 데카르트가 ‘의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을 철학의 시작으로 보았다면, 나는 ‘무의식으로 걷는 것’을 인생의 완성으로 보고 싶다. 걸으면서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 아니겠는가. 많은 골퍼들의 소망이 필드에서 생을 마감하고픈 것처럼.
금년 8월, 나는 2년간의 화려한 외도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바로 농사일을 하면서 이 해의 가을을 보냈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겨울이 온 것이다. 겨울은 농촌에서는 농한기요 제주도에서는 비수기라 한다. 비수기에 가면 좀 더 여유롭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제주올레를 찾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4박 5일로 잡았다. 연말이 다가오니 각종 조직들의 한 해 마무리모임이 분주하다. 기간을 짧게 잡은 것은 평소에 소홀했던 모임들의 압력에 영향을 받은 결과다. 4박5일이래야 가는 날과 오는 날을 빼면 3일이다. 하루에 한 코스씩 세 코스를 걸을 마음이다.
나머지 코스는 그 옛날 홍시를 도가니에 두고 겨울 내내 아껴 먹듯이 천천히 걷겠다. 평생을 걸을 길, 두고두고 걸을 예정이다. 걷는 다는 것, 그것은 바로 행복이요, 자신의 꿈을 이루는 영원한 길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참으로 오랜만에 여기에 글을 쓴다. 그동안 무심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앞으로 가끔 쓴 글을 올릴까한다. 오늘 이 여행기는 지난 2일부터 어제까지 제주올레를 걸은 이야기다. 참고로 제주TS유스호스텔은 퇴직동인 이택승 전, 보험기힉부장이 직접운영하는 업소다. 자본금 41억의 중형 숙박업소로서 시설이 고급이고, 경관이 수려하고, 근무하는 직원들이 모두 자기사업처럼 아끼는 사람들이라 마음 편한 여행이 되었다. 구우회 여러분들의 많은 이용을 바라면서....
좋은 여행되세요. 사진도 올려주시고
훌륭한 선택입니다
제주 올레길을 정하고 두고두고 평생을 걷고자 다짐하고 이제 첫발을 내어딛는 프롤로그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래. 한번하고 말 일이 아니면 처음부터 무리하게 시작할 것 없지. 조금씩 남겨두고 부족한듯 힘에 부치지 않게 오래 지속할 일이지,
우리가 살아봐서 알지만 반짝 빛나고 나면 에너지가 한꺼변에 타고 말아 오래 지속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제주에 살겠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데 맘속에 진즉부터 간직하고 있었네그려.
그대 걸음 한 걸음에 바다 생각을 담는 물허벅의 찰랑이는 그릇이기를^^
박 시인,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