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과 인연, 사색이 공존하는
제주 추사유배길을 걷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가을 햇살이 자꾸만 길 떠나기를 부추긴다. 길 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나고 새로운 인연을 맺으며 몸과 마음을 가벼이 비워낸다. 그 시간은 자기 안의 참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나 다름없다.
조선시대 천재 학자 김정희 선생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추사유배길
깊어가는 가을, 추사에게 길을 묻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주 유배길. 지금보다 더 푸르렀을 1840년(현종 6년) 어느 가을날, 조선시대 천재 학자로 꼽히는 김정희 선생은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머나먼 제주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길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에 도착한 곳은 제주 서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대정현.
“대정으로 가는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사람과 말이 발을 붙이기 어려웠고, 절반을 지난 뒤부터는 길이 약간 평탄하였네.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 숲도 있었네. 이것은 육지의 단풍잎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에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아취가 있겠는가.”
유배지에 도착해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간의 고된 여정과 귀양살이 떠난 선비의 쓸쓸한 심정이 담겨 있다. 이곳에서 선생은 약 9년간 위리안치(圍籬安置, 처소 둘레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두는 형벌)의 세월을 보냈다. 견디기 힘든 긴 세월이었지만 그는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생애 역작인 ‘추사체’를 완성하고 그의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를 탄생시켰다. 또 지방 유생들에게 서예와 글을 가르치며 제주 지역 학문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왼쪽]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 유배 시절 책이나 학문 자료들을 구해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작품이다.
[오른쪽]추사관 2층에 놓인 김정희 선생의 흉상. 유배지에서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던 추사 김정희의 삶은 인생이란 끝없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든다. 깊어가는 가을의 길목, 그에게 인생의 길을 묻는다.
1코스 집념의 길 : 제주추사관~대정향교(6.7km)
건축가 승효상 씨가 설계한 제주추사관. 2010년 제주특별자치도 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
김정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추사유배길은 대정성지 안쪽에 세워진 제주추사관에서부터 시작된다. 2010년에 건립된 추사관은 김정희 선생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인고의 세월 속에서도 자기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하며 정진해나갔던 그의 성실한 태도와 높은 이상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추사관 바로 뒤편에는 유배 시절 선생의 거주지가 당시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다. 제주 전통 생활양식에 따라 안거리, 밖거리로 나누어진 민가이다. 좁은 마당이 거닐 만한 공간 전부인 이곳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나마 간간이 찾아온 지인들과 교류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며 외로움을 달랬다 하니 조금 위안이 된다.
추사보다 먼저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정난주 마리아의 묘역
거주지를 나서 유배길 표식인 분홍빛 리본을 곁눈질해가며 한참을 걷는다. 그 길을 따라 송죽사터, 송계순 집터, 한남의숙터 등 오랜 역사의 흔적들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져간다. 정난주 마리아묘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린다.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난주는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추사 선생보다 40여 년 먼저 제주 유배길에 올랐다. 남편이 처형된 뒤 가족이 흩어져 귀양살이를 했으며 자신도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평생 독실한 신자로서 신앙을 실천하는 삶을 살다가 유배생활 중 숨을 거뒀다. 그녀를 존경했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고 근래에 묘역을 성역화해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남문지못에 세워진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아련해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걸어온 만큼 길을 가니 소박한 차림의 추사 선생이 담담한 미소를 짓고 서 있다.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련이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이다. ‘천천히 마음을 비우고 걸으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전해오는 듯하다.
추사체와 같은 기이한 아름다움을 지닌 단산과 동자석이 앉아 있는 방사탑
남문지못을 돌아 나서면 넓게 펼쳐진 제주의 가을 들녘을 만나게 된다. 먹먹했던 가슴이 한순간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이모작을 시작한 들판 너머로 기괴한 형상의 단산과 동자석이 앉혀진 방사탑이 이채롭다. 추사 선생이 거처에서 늘 내다보았을 단산. 왠지 모르게 추사체의 기이한 아름다움과 단산이 많이 겹쳐 보인다.
1코스 종착지이자 3코스 출발점인 대정향교
1코스 종착지는 대정향교다. 추사는 유배 시절 당시 훈장이었던 강사공의 청을 받아 이곳에 ‘의문당(疑問堂)’이란 현판을 써주었다. 이 현판은 현재 제주추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작고 아담한 지방 향교이지만 품고 있는 뜻은 결코 작지 않다. 추사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되짚어 가보는 집념의 길 1코스는 이곳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3코스 사색의 길 : 대정향교~안덕계곡(10.1km)
사색의 길 도로변에 추사의 인장이 새겨진 수많은 전각이 늘어서 있다. 추사는 호가 100개가 넘어 인장 또한 많았다고 한다.
대정향교에서 시작되는 추사유배길 3코스는 사색의 길이다. 비록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았지만 제주목사나 대정현감의 묵시 아래 종종 외출을 했던 추사 선생은 벗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제주 땅에서 마음껏 노닐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코스를 따라가며 당시 그가 보고 느꼈을 제주의 가을 풍경을 두 눈 가득 담아본다.
산방산을 마주하며 걷는 추사유배길 3코스
대정향교를 떠나 넓게 펼쳐진 밭 사이를 지나면 정면으로 우뚝 솟은 산방산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온다. 처음엔 손바닥만 했던 것이 가까워질수록 고개를 한참 쳐들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높아진다. 평평한 지형에 홀로 솟아 있는 산방산은 땅의 정기를 가득 머금은 거대한 종처럼 보인다. 추사는 유배 시절 산방산을 자주 찾았다. 그 덕분일까. 당시 55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려 9년이나 되는 제주 유배생활을 큰 탈 없이 보냈다. 산방산을 한 바퀴 휘감아 도는 유배길은 산방산 둘레길과도 겹친다. 짧지 않은 길을 걷는 동안 산방산이 지닌 힘찬 에너지가 몸안에 스며드는 듯하다.
[왼쪽/오른쪽]바다로 걸어가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길 / 신비로운 제주의 자연과 조우하는 안덕계곡
산방산을 빠져나온 길은 도로변으로 이어진다. 차들이 많이 다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주의하며 걷는 게 좋다. 이 길은 마치 도로 끝이 바다를 향해 펼쳐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왠지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기분 좋은 길이다. 먼 옛날 이곳엔 길조차 없었을 테지만 추사 선생도 바다가 보이는 어딘가에서 잠시 쉬어 가며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이윽고 길은 종착지인 안덕계곡에 닿는다.
안덕계곡은 신비로운 제주의 자연과 조우하는 숨은 공간이다. 몇 년 전 이곳으로 올레길이 지나가면서 예전보다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비밀스럽고 벅찬 감동을 주는 비경으로 꼽힌다. 서너 시간에 걸쳐 걷는 긴 사색의 시간. 이전보다 몸과 마음이 조금 더 맑아진 기분이다.
2코스 인연의 길 : 제주추사관~오설록(8km)
제주추사관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유배길은 인연의 길인 2코스이다. 유배 시절 추사 선생은 수많은 시를 쓰고, 두고 온 가족과 벗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외로움을 달랬다. 특히 옷가지며 먹을거리 들을 챙겨주던 아내가 병고 끝에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받고 그는 긴 통곡의 서한을 쓴다.
“어허! 어허! 나는 형틀이 앞에 있고 큰 바다가 뒤를 따를 적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려 해도 길이 없으니 어떤 까닭인지요. 어허! 어허….” 얼마나 황망하고 슬펐을지 그의 절절한 심정이 지금 읽어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왼쪽/오른쪽]추사 선생이 쓴 시들을 모아놓은 수월이못 / 귀양살이하는 마음이 담담하게 적혀 있다.
추사관에서 조금만 가면 보이는 수월이못은 그가 썼던 시들을 감상하는 작은 시 공원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못가에 그만의 서체로 아로새겨진 한시들이 가슴에 콕콕 박힌다. 긴 유배생활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내리쬐는 가을빛이 한 자 한 자 오래 머물다 간다.
[왼쪽/오른쪽]추사유배길 2코스 마지막 지점인 오설록 서광다원 / 녹차밭 사이를 정답게 걸어가는 가족들
감귤밭 사이를 지나 자박자박 걷다 보면 매화마을 너머 노랑굴과 검은굴 이정표를 차례로 지나치게 된다. 말들이 줄지어 선 승마장 건너편은 온통 녹차밭이다. 인연의 길 끝에는 오설록 서광다원이 펼쳐진다. 특히 차를 좋아했던 추사 선생은 초의선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초의선사는 직접 그를 찾아와 오래 머물며 말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추사 선생이 살아 있다면 드넓은 녹차밭 사이를 거닐며 얼마나 기뻐할까. 맑은 기운이 담긴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이 가을, 그를 추억한다.
여행정보
제주추사관
주소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문의 : 064-760-3406
1.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제주국제공항 → 중문, 신제주 방면 우회전 → 공항로 → 신제주 입구에서 중문, 한림 방면 우회전 → 도령로 → 안성교차로에서 고산, 대정 방면 우회전 → 추사로 → 제주추사관
* 대중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750번(평화로 노선)을 타고 안성리 정류장에서 하차. 추사관까지 도보 5분
2.주변 음식점
한라식당 : 갈칫국, 옥돔 / 제주시 광양9길 19 / 064-758-8301 / korean.visitkorea.or.kr
송전 : 흑돼지오겹살, 소갈비 / 서귀포시 중앙로62번길 36 / 064-763-4646 / korean.visitkorea.or.kr
마당깊은집 : 갈치조림, 흑돼지구이 / 서귀포시 천제연로 93 / 064-738-8777 / korean.visitkorea.or.kr
3.숙소
제주오션팰리스호텔 : 서귀포시 중앙로 14 / 064-730-5800 / korean.visitkorea.or.kr
꿈꾸는노마드 : 서귀포시 강정동 1026-1 / 064-739-3114 / korean.visitkorea.or.kr
고망난돌민박 : 서귀포시 성산읍 일주동로 5464 / 064-787-1060 / korean.visitkore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