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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아도기라(阿道基羅) >묵호자가 향을 전하다
묵호자가 향을 전하다
아도기라(阿道基羅) 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 제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19대 눌지왕(訥祗王)註 017017 신라의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17년~458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 하였고, 영일 냉수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으로 보인다. 실성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에서는 눌지왕 때부터 왕위가 부자세습제로 확립되었다(이기동,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74쪽).닫기 때 사문(沙門)註 018018 머리를 깍고 불문에 들어가 도를 닦는 출가승을 가리킨다.닫기묵호자(墨胡子)註 019019 ≪해동고승전≫ 권1, 아도조(阿道條)에는 묵호자(黑胡子)로 되어 있다.닫기가 고려(高麗)[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註 020020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이다.닫기에 이르렀다. [그] 군사람인 모례(毛禮) 혹은 모록(毛祿)이라고도 한다.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서 [그를] 편히 있게 하였다. 그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을 전해왔다. 고득상(高得相)註 021021 고려시대 사람으로 ≪해동삼국통력(海東三國通曆)≫ 12권과 ≪해동삼국통록(海東三國通錄)≫이 있으나 같은 책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닫기의 영사시(詠史詩)註 022022 ≪해동고승전≫에는 ‘詩史’로 되어 있다.닫기에는 양나라에서 원표(元表)라는 사승(使僧)을 시켜 명단향(溟檀)과 불경·불상을 보내왔다고 한다. 군신(君臣)은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싸들고 전국을 다니면서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향이라고 하는데, 이를 사르면 향기가 매우 강하여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통하게 하는데 쓰인다. 신성은 3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약 이것을 사르며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눌지왕은 진송(晉宋)시대에 해당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註 017
신라의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17년~458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 하였고, 영일 냉수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으로 보인다. 실성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에서는 눌지왕 때부터 왕위가 부자세습제로 확립되었다(이기동,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74쪽).
註 018
머리를 깍고 불문에 들어가 도를 닦는 출가승을 가리킨다.
註 019
≪해동고승전≫ 권1, 아도조(阿道條)에는 묵호자(黑胡子)로 되어 있다.
註 020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이다.
註 021
고려시대 사람으로 ≪해동삼국통력(海東三國通曆)≫ 12권과 ≪해동삼국통록(海東三國通錄)≫이 있으나 같은 책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註 022
≪해동고승전≫에는 ‘詩史’로 되어 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
정치>외교>사신>사절활동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문화>사상>불교사상>경논소
문화>사상>불교사상>의식구·불화
색인어
지명 : 일선군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아도기라(阿道基羅) >묵호자가 향을 피워 왕녀의 병을 치료하다
묵호자가 향을 피워 왕녀의 병을 치료하다
이때 왕녀(王女)가 몹시 위독했는데, 묵호자를 불러들여 향을 사르며 소원을 표하게 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며 예물을 후하게 주었는데, 얼마 후에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색인어
이름 : 묵호자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아도기라(阿道基羅) >아도가 신라에 불법을 전하다(527년 (음))
아도가 신라에 불법을 전하다 ( 527년 (음) )
또 21대 비처왕(毗處王)註 023023 炤知王 또는 照知王이라고도 한다.닫기 때 아도(我道)註 024024 ≪삼국사기≫에는 아도(阿道)(一作我道)라 하였다.닫기 화상(和尙)註 025025 덕이 높은 스님에 대한 존칭이다. 그런데 신라 통일기까지는 화상이라고 할 때 ‘尙’이 아니라 ‘上’으로 써야 옳다고 한다(김영태, 「아도화상비」, ≪삼국신라시대 불교금석문고증≫, 민족사, 1992, 29쪽).닫기이 시자(侍者) 세 명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그] 의표가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고, 그 시자 세 명은 남아 있으면서 경율(經律)을 강독하니, 왕왕 신봉자가 있었다. 주(注)에서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와는 전혀 다르다註 026026 ‘此據金大問鷄林雜傳所記書之 與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 所錄秀異’(≪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5년조의 협주)닫기”고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서천축[西竺] 사람이라고 했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도 하였다.註 027027 ‘釋阿道 或云本天竺人 或云從吳來 或云自高句麗入魏 後歸新羅 未知孰是’(≪해동고승전≫ 권1, 유통1-1, 아도, 흑호자·원표·현창)닫기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註 028028 조위(曹魏) 제왕(齊王)의 연호로 20년~248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연간에 조위(曹魏) 사람 아(我) 성(姓)이 아(我)이다.굴마(崛摩)가 사신으로 구려(句麗)[고구려] 에 왔다가 고도령을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 인해서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는 다섯 살에 그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열여섯 살에 위(魏)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玄彰)註 029029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따르면 남북조 시대의 고승으로 경율에 밝고 선요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여러 설을 두루 섭렵한 학승이다.닫기 화상의 강석에 나아가 배웠다. 열아홉 살 때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이 나라는 아직까지 불법(佛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월이 지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출현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에는 일곱 곳의 절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흥륜사(興輪寺)註 030030 신라의 불교전래 및 공인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고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되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544년(眞興王 5년)에 완공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으로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66쪽).닫기이다. 금교는 서천(西川)의 다리를 말하는데, 세간에서는 송교(松橋)로 잘못 부르고 있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정미(丁未)에 이르러 처음 창건되었고, 을묘(乙卯)(553년)에 크게 공사를 벌여 진흥왕(眞興王)註 031031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닫기때 마쳤다.이요, 둘째는 삼천기(三川歧) 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다.요,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 지금의 황룡사(皇龍寺)註 032032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229).닫기이다. 진흥왕 계유(癸酉)(553년)에 처음 개창되었다.이요, 넷째는 용궁 북쪽 지금의 분황사(芬皇寺)註 033033 선덕여왕 3년(634)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주시내의 황룡사지 북쪽에 있다.닫기이다. 선덕왕[善德] 갑오(甲午)(634년)에 처음 개창되었다.註 034034 ‘改元仁平 芬皇寺成’( ≪삼국사기≫ 5, 신라본기5, 선덕왕 3년 춘정월).닫기이요,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 지금의 영묘사(靈妙寺)註 035035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대 경주에 세워진 사찰이다. 경주시 사정동 국당리를 영묘사지(靈廟寺址)로 비정한다(이근직, 「신라 흥륜사 위치관련 기사 검토」, ≪신라문화≫ 20, 2002).닫기이다. 선덕왕 을미(乙未)(635년)에 처음 개창되었다.註 036036 ‘...靈廟寺成’(≪삼국사기≫ 5, 신라본기5, 선덕왕 4년).닫기요,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註 037037 신라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의 하나로 선덕여왕이 이곳을 도리천(忉利天)이 있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였다(≪삼국유사≫ 권3 흥법 아도기라).닫기지금의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기묘(己卯)(679년)에 개창되었다.註 038038 ‘...四天王寺成’(≪삼국사기≫ 7, 신라본기7, 문무왕19년 추8월).닫기이요,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 지금의 담엄사(曇嚴寺)註 039039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의 남쪽에 위치했던 절이다. 지금은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26쪽).닫기으로서 모두 전불(前佛)시대의 절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를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방으로 향해올 것이다.”
아도가 분부를 받들고 계림에 와서 왕성(王城)의 서쪽 마을에 우거했는데, (곧)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註 040040 신라의 제13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262년~284년이다. 김알지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구도갈문왕이고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한편 미추는 ‘元’, ‘本’의 뜻으로 시조왕이란 의미를 가진다고도 한다(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其名に就いて」, ≪東洋學報≫15-2, 1925).닫기 즉위 2년 계미(癸未)(263년)였다.
대궐에 나아가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고 하여 꺼리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지금의 일선현(一善縣)모록의 집 록(祿)은 예(禮)와 [글자] 형태가 비슷하여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법사가 처음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라는 명칭을 모르므로 아두삼마(阿頭三麽)라고 하였다. 삼마란 향언(鄕言)의 승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었다.
3년이 지났을 때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의(巫醫)도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 의원을 구하게 하였다. 스님이 급히 대궐로 들어가서 마침내 그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소원을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빈도(貧道)는 백에 [하나도] 구할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일 뿐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를 착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지붕을 이었는데, [아도는 여기에] 머물면서 강연하니 가끔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절 이름을 흥륜사라고 하였다.
모록의 누이동생 사씨(史氏)註 041041 ≪해동고승전≫에는 ‘史侍’라 하였다.닫기가 스님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는데, 그도 역시 삼천기에 절을 짓고 살았다. 절 이름은 영흥사라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이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고 하여 스님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돌아갔으니, 마침내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註 042042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로서 천감 년간은 502년~519년이다.닫기 13년 갑오(甲午)(514년)에 왕위에 올라 불교(釋氏)를 일으켰다. 미추왕 계미년으로부터 252년 뒤의 일이다. 고도령이 예언한 3천여 월은 들어맞았다.
註 023
炤知王 또는 照知王이라고도 한다.
註 024
≪삼국사기≫에는 아도(阿道)(一作我道)라 하였다.
註 025
덕이 높은 스님에 대한 존칭이다. 그런데 신라 통일기까지는 화상이라고 할 때 ‘尙’이 아니라 ‘上’으로 써야 옳다고 한다(김영태, 「아도화상비」, ≪삼국신라시대 불교금석문고증≫, 민족사, 1992, 29쪽).
註 026
‘此據金大問鷄林雜傳所記書之 與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 所錄秀異’(≪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5년조의 협주)
註 027
‘釋阿道 或云本天竺人 或云從吳來 或云自高句麗入魏 後歸新羅 未知孰是’(≪해동고승전≫ 권1, 유통1-1, 아도, 흑호자·원표·현창)
註 028
조위(曹魏) 제왕(齊王)의 연호로 20년~248년에 사용하였다.
註 029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따르면 남북조 시대의 고승으로 경율에 밝고 선요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여러 설을 두루 섭렵한 학승이다.
註 030
신라의 불교전래 및 공인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고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되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544년(眞興王 5년)에 완공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으로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66쪽).
註 031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註 032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229).
註 033
선덕여왕 3년(634)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주시내의 황룡사지 북쪽에 있다.
註 034
‘改元仁平 芬皇寺成’( ≪삼국사기≫ 5, 신라본기5, 선덕왕 3년 춘정월).
註 035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대 경주에 세워진 사찰이다. 경주시 사정동 국당리를 영묘사지(靈廟寺址)로 비정한다(이근직, 「신라 흥륜사 위치관련 기사 검토」, ≪신라문화≫ 20, 2002).
註 036
‘...靈廟寺成’(≪삼국사기≫ 5, 신라본기5, 선덕왕 4년).
註 037
신라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의 하나로 선덕여왕이 이곳을 도리천(忉利天)이 있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였다(≪삼국유사≫ 권3 흥법 아도기라).
註 038
‘...四天王寺成’(≪삼국사기≫ 7, 신라본기7, 문무왕19년 추8월).
註 039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의 남쪽에 위치했던 절이다. 지금은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26쪽).
註 040
신라의 제13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262년~284년이다. 김알지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구도갈문왕이고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한편 미추는 ‘元’, ‘本’의 뜻으로 시조왕이란 의미를 가진다고도 한다(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其名に就いて」, ≪東洋學報≫15-2, 1925).
註 041
≪해동고승전≫에는 ‘史侍’라 하였다.
註 042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로서 천감 년간은 502년~519년이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문화>사상>불교사상>의례·결사
색인어
이름 : 비처왕,아도,모례,묵호자,아도,고도령,아,굴마,아도,굴마,현창,선덕왕,선덕왕,아도,미추왕,모록,성국공주,아도,모록,사씨,미추왕,모록,법흥대왕,고도령
지명 : 서천축,천경림,사천미,신유림,서청전,속림,천경림
서명 : 고승전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아도기라(阿道基羅) >묵호자와 아도에 대한 논(374년 (음))
묵호자와 아도에 대한 논 ( 374년 (음) )
이상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 본다. 양(梁)·당(唐) 두 ≪고승전≫註 043043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과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을 말한다.닫기 및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이라고 하였는데, 이도(二道)註 044044 아도(阿道)의 착오로 보이지만, 순도조려조와 관련하여 순도와 아도를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닫기 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 갑술(甲戌)에 고구려에 온 것은 분명하므로 이 전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아도가] 비처왕 때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고구려에서 백여 년이나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하나 반드시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신라에서의 불교 신봉이 이처럼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약 미추왕 때였다고 하면, [아도가] 고구려에 온 갑술년보다 백여 년 전이 된다.
이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도 미처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오지 않은 채 신라로 넘어갔다는 것도 불합리하다. 설사 [미추왕 때] 잠깐 [불교가] 흥하였다가 곧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그토록]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을 것이며, 향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겠는가? 어찌하여 하나는 너무 뒤지고, 하나는 너무 앞서는가?
생각건대, [불교] 동점(東漸)의 형세는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되고 신라에는 나중에 들어왔을 것이다. 즉, 눌지왕대는 소수림왕대와 서로 근접해 있으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니, 이른바 묵호자라는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라 그저 지목한 말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들이 달마(達摩註 045045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로서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왕자였다.닫기)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고 하고, 진(晉)나라에서 석(釋) 도안(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柒道人)註 046046 도안(313~384)은 중국 전진(前秦) 때의 고승이다. 칠도인이란 그의 모습이 누추하다는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닫기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아도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고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아도 두 이름을 두 사람으로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하물며 아도의 의표가 묵호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으로도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이 잘못되었기에 이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올려 놓는다.註 047047 ‘若按朴寅亮殊異傳云...又其國京師 有七法住之處...五曰神遊林(今天王寺) 六曰沙川尾(今靈妙寺)...’(≪해동고승전≫ 권1, 유통1-1, 아도, 흑호자·원표·현창).닫기 3천여 월이란 것도 꼭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 때로부터 [법흥왕] 정미년(527년)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할 것이다. 성을 아(我)라고 하고 이름을 외글자로 한 것도 거짓인 듯 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註 043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과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을 말한다.
註 044
아도(阿道)의 착오로 보이지만, 순도조려조와 관련하여 순도와 아도를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註 045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로서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왕자였다.
註 046
도안(313~384)은 중국 전진(前秦) 때의 고승이다. 칠도인이란 그의 모습이 누추하다는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
註 047
‘若按朴寅亮殊異傳云...又其國京師 有七法住之處...五曰神遊林(今天王寺) 六曰沙川尾(今靈妙寺)...’(≪해동고승전≫ 권1, 유통1-1, 아도, 흑호자·원표·현창).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이도,소수림왕,비처왕,미추왕,아도,눌지왕,소수림왕,아도,눌지왕,아도,묵호자,달마,벽안호,도안,칠도인,아도,묵호,아도,아도,묵호,고도령,눌지왕
지명 : 사천미
국명 : 양,당,고구려,백제,고구려,신라,고구려,고구려,계림,고구려,신라,고구려,백제,신라,고구려,신라,양,진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아도기라(阿道基羅) >담시가 중국에서 불법을 행하다
담시가 중국에서 불법을 행하다
또 북위(元魏)註 048048 원문의 원위는 북위·후위라고도 한다. 북위는 본래 탁발씨인데 효문제 때에 성을 원씨로 고쳤으므로 원위라 한다.닫기의 석(釋) 담시(曇始) 혜시(惠始)라고도 한다.전(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담시는 관중(關中) 사람으로 출가한 뒤로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나라 효무제(孝武) 태원 9년 말에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3승(三乘)註 049049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중생의 능력과 상황에 맞게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 것으로서, 3승이란 불제자로서 자기만의 구원을 구하는 성문승(聲聞乘), 스승도 없이 혼자서 깨닫는 독각승(獨覺乘) 또는 연각승(緣覺乘), 자타의 구원을 동시에 추구하고 모든 중생은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보살승(菩薩乘) 또는 불승(佛乘)을 말한다.닫기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가 불도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註 050050 중국 동진 안제(安帝)의 연호로 405년~418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3보(三輔)註 051051 한나라 때 장안 부근을 일컫던 말로서 곧 경조(京兆)·좌풍익(左馮翊)·우부풍(右扶風)을 지칭한다.닫기를 개도(開導)시켰다. 담시는 발이 얼굴보다도 희었으며, 비록 진흙탕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모두 [그를]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나라 말기에 북방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註 052052 5호 16국의 하나인 하(夏, 407~432)의 왕이다.닫기이 관중을 함락시키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때 담시도 화를 만나기는 했으나 칼이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발발은 감탄하면서 널리 사문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는 이에 몰래 산림으로 도망하여 두타(頭陁)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註 053053 북위(386~534)의 태무제(太武帝)(423~452)를 가리킨다.닫기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註 054054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섬서성의 위수(渭水) 분지 일대를 말한다. 현재는 서안(西安) 함곡관(函谷關) 내를 말한다.닫기과 낙양에 위세를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註 055055 현재의 하북성 안평현(安平縣) 일대이다.닫기에 최호(崔皓)註 056056 중국 북위 시대의 관료이다. 명문 한인 가문 출신으로 431년에는 한인사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사도(司徒)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태무제 때 국사편찬의 책임을 맡아 화이사상을 근거로 글을 썼다가, 그를 비롯한 화북의 명문 귀족 128명이 주살되었다.닫기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벼슬이 위보(僞輔)註 057057 위보(僞輔)란 위조(僞朝)의 재상을 뜻하니, 남조(南朝)를 정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닫기가 되어 탁발도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註 058058 도교의 교주를 가리킨다.닫기구겸지(寇謙之)註 059059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 출신으로 도교의 대성자(大成者)로 알려졌다. 장노의 도술을 배우고 신선 성공흠 밑에서 10년간 수행하였다. 태상노군, 이보문으로부터 여러 비법을 전수받았으며 세조 태무제의 신임까지 얻게 되어 한때 도교가 국교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닫기와 함께 탁발도에게 ‘불교는 무익하고 백성의 복리에 해만 준다’고 하여, 불교를 폐지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태평(太平)註 060060 북연(北燕)의 왕인 풍발(馮跋)의 연호로 409년~430년에 사용하였다.닫기 말년에 담시는 바야흐로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註 061061 정월 초하루에 갖는 조회(朝會)를 말한다.닫기일에 문득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 앞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그 말을] 듣고 그를 죽이라고 명했으나 여러 번 베어도 상하지 않았고, 탁발도가 그를 직접 베어도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에게 물게 하려고 해도 [호랑이] 또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탁발도는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악질에 걸렸다. 탁발도는 [그] 죄과가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의 가족을 죽이고 국내에 선포하여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는 그 뒤로 종족을 모른다.
논의하여 말한다. 담시는 태원 말년에 해동(海東)에 왔다가 의희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체류한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의 역사 東史에는 기록이 없겠는가? 담시는 본래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 묵호자, 마라난타難陁 등과 연대 및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註 048
원문의 원위는 북위·후위라고도 한다. 북위는 본래 탁발씨인데 효문제 때에 성을 원씨로 고쳤으므로 원위라 한다.
註 049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중생의 능력과 상황에 맞게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 것으로서, 3승이란 불제자로서 자기만의 구원을 구하는 성문승(聲聞乘), 스승도 없이 혼자서 깨닫는 독각승(獨覺乘) 또는 연각승(緣覺乘), 자타의 구원을 동시에 추구하고 모든 중생은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보살승(菩薩乘) 또는 불승(佛乘)을 말한다.
註 050
중국 동진 안제(安帝)의 연호로 405년~418년에 사용하였다.
註 051
한나라 때 장안 부근을 일컫던 말로서 곧 경조(京兆)·좌풍익(左馮翊)·우부풍(右扶風)을 지칭한다.
註 052
5호 16국의 하나인 하(夏, 407~432)의 왕이다.
註 053
북위(386~534)의 태무제(太武帝)(423~452)를 가리킨다.
註 054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섬서성의 위수(渭水) 분지 일대를 말한다. 현재는 서안(西安) 함곡관(函谷關) 내를 말한다.
註 055
현재의 하북성 안평현(安平縣) 일대이다.
註 056
중국 북위 시대의 관료이다. 명문 한인 가문 출신으로 431년에는 한인사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사도(司徒)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태무제 때 국사편찬의 책임을 맡아 화이사상을 근거로 글을 썼다가, 그를 비롯한 화북의 명문 귀족 128명이 주살되었다.
註 057
위보(僞輔)란 위조(僞朝)의 재상을 뜻하니, 남조(南朝)를 정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註 058
도교의 교주를 가리킨다.
註 059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 출신으로 도교의 대성자(大成者)로 알려졌다. 장노의 도술을 배우고 신선 성공흠 밑에서 10년간 수행하였다. 태상노군, 이보문으로부터 여러 비법을 전수받았으며 세조 태무제의 신임까지 얻게 되어 한때 도교가 국교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註 060
북연(北燕)의 왕인 풍발(馮跋)의 연호로 409년~430년에 사용하였다.
註 061
정월 초하루에 갖는 조회(朝會)를 말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담시,담시,효무제,담시,백족화상,혁련발발,담시,발발,담시,탁발도,최호,탁발도,구겸지,탁발도,담시,탁발도,탁발도,탁발도,탁발도,최호,구겸지,탁발도,담시,담시,담시,아도,묵호자,마라난타
지명 : 요동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아도기라(阿道基羅)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사(才思)도 많아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법흥왕이 불도를 도울 사람을 구하자, 염촉이 내양하다(527년 (음))
법흥왕이 불도를 도울 사람을 구하자, 염촉이 내양하다 ( 527년 (음) )
원종흥법 눌지왕 때와 1백여 년간 떨어졌다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신라본기(新羅本紀)註 062062 여기의 신라본기는 고려초기에 편찬된 ≪구삼국사(舊三國史)≫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닫기에 이르기를, “법흥대왕(法興大王) 즉위 14년註 063063 서기 527년인데 ≪삼국사기≫ 권4에는 법흥왕 15년으로 기재되어 있다.닫기에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없앴다”고 하였으니, 바로 소량(蕭梁) 보통(普通)註 064064 중국 남조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로 보통 년간은 520년~526년이다.닫기 8년 정미(丁未)(527년)로 서천축(西竺)의 달마(達摩)가 금릉(金陵)註 065065 중국 강소성의 남경이다.닫기에 왔던 해이다. 이 해에 낭지(朗智)註 066066 삽량주(歃良州,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 일대)의 영취산(靈鷲山)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론하고, 신통력을 발휘하였다. 661년 지통(智通)을 가르치는 한편, 반고사(磻古寺)에 원효(元曉)가 머무르게 되자 그도 가르치면서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하였다고 한다.닫기법사가 역시 처음으로 영취산(靈鷲山)註 067067 경상남도 양산 부근에 있다.닫기에서 불법을 열었으니, 대교(大敎)의 흥하고 쇠하는 것은 반드시 원근(遠近)이 동시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여기서 믿을 수 있다.
원화(元和)註 068068 당(唐) 헌종(憲宗)의 연호로 원화 년간은 서기 806년~820년이다.닫기 연간에 남간사(南澗寺)註 069069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남산(南山) 서쪽에 있었던 절로, 신라 문무왕 때 혜통(惠通)의 집이 있던 은천동(銀川洞)에 창건하였다고 한다.닫기의 사문(沙門) 일념(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사실을 매우 자세히 실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옛날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之殿)에서 즉위하고 동방(扶桑)註 070070 부상은 동해중에 있는 신목인데 해가 뜨는 곳에 있고 부상국은 동방에 있는 나라이름으로 부상수가 많이 나서 그 나라 사람들이 그 부상을 먹는다고 한다. 여기서 동방은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닫기의 땅을 굽어 살펴보고 말씀하시기를, “옛적 한(漢)나라 명제(明)註 071071 중국 후한의 제 2대 황제이다.닫기가 꿈에 감응받아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왔다. 과인은 즉위하면서부터 창생(蒼生)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만들려고 염원해왔다”고 하였다. 이에 조신(朝臣)들 향전(鄕傳)에는 공목(工目), 알공(謁恭) 등이라 한다.은 땅을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大義)만을 준수했을 뿐 절을 세우겠다는 신성한 계획은 따르지 않았다.
대왕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아아, 과인은 덕이 없이 왕업을 계승하니,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훼손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거움이 없으므로 정무의 여가에 마음을 불도(釋風)에 두고자 하지만, 누구와 함께 동반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내양한 자(內養者)가 있어 성은 박(朴), 자는 염촉(厭髑) 혹은 이차(異次)라고 하고, 혹은 이처(伊處)라고도 하니, 방언의 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번역하면 염(厭)이 된다. 촉(髑),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곧 조사(助辭)이다. 이제 윗자만 번역하고 아랫자는 번역하지 않았으므로 염촉(厭髑) 또는 염도(厭覩) 등이라고 한 것이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할아버지는 아진(阿珍) 종(宗)으로, 곧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신라의 관작은 모두 17등급인데, 그 네 번째는 파진찬(波珍喰)註 072072 신라 17관등 중 제4관등으로 해간(海干),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한다.닫기 또는 아진찬(阿珍喰)이라고도 한다. 종은 그 이름이고, 습보도 이름이다. 신라인은 대체로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葛文王)註 073073 주로 국왕과 혈연·혼인 등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에게 봉해진 칭호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이기백, 1973, 「新羅時代의 葛文王」 ≪역사학보≫ 58). 그 연원과 피봉(被封) 범위, ‘갈문’의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당시에도 이미 확실치 않았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총 19명의 갈문왕이 나타나며, 금석문상에서는 냉수리비와 봉평비, 천전리서석 그리고 창녕비 등에서 보인다. 특히 냉수리비에 나오는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은 지증왕(智證王)으로 비정되는데, 이를 통해 지증왕은 정식 왕이 되기 전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현재까지 발견된 금석문 상의 갈문왕은 모두 沙喙部 소속으로 되어있어 이를 근거로 왕은 喙部, 갈문왕은 沙喙部 소속이라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다(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소, 239~240).닫기이라고 했는데, 그 실상은 사신(史臣)도 역시 자세히 모른다고 하였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살펴보면, 사인(舍人)註 074074 염촉을 가리킨다. 사인은 신라 때의 관직명으로 궁중에서 국왕 혹은 태자를 받드는 일종의 근시직(近侍職)이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는 확인되지 않는다.닫기은 그때 나이가 스물여섯 살이며,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걸해대왕(乞解大王)註 075075 신라 제 16대 흘해니사금(訖解尼師今)을 말한다.닫기이라고 하였다.
註 062
여기의 신라본기는 고려초기에 편찬된 ≪구삼국사(舊三國史)≫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註 063
서기 527년인데 ≪삼국사기≫ 권4에는 법흥왕 15년으로 기재되어 있다.
註 064
중국 남조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로 보통 년간은 520년~526년이다.
註 065
중국 강소성의 남경이다.
註 066
삽량주(歃良州,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 일대)의 영취산(靈鷲山)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론하고, 신통력을 발휘하였다. 661년 지통(智通)을 가르치는 한편, 반고사(磻古寺)에 원효(元曉)가 머무르게 되자 그도 가르치면서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하였다고 한다.
註 067
경상남도 양산 부근에 있다.
註 068
당(唐) 헌종(憲宗)의 연호로 원화 년간은 서기 806년~820년이다.
註 069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남산(南山) 서쪽에 있었던 절로, 신라 문무왕 때 혜통(惠通)의 집이 있던 은천동(銀川洞)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註 070
부상은 동해중에 있는 신목인데 해가 뜨는 곳에 있고 부상국은 동방에 있는 나라이름으로 부상수가 많이 나서 그 나라 사람들이 그 부상을 먹는다고 한다. 여기서 동방은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註 071
중국 후한의 제 2대 황제이다.
註 072
신라 17관등 중 제4관등으로 해간(海干),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한다.
註 073
주로 국왕과 혈연·혼인 등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에게 봉해진 칭호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이기백, 1973, 「新羅時代의 葛文王」 ≪역사학보≫ 58). 그 연원과 피봉(被封) 범위, ‘갈문’의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당시에도 이미 확실치 않았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총 19명의 갈문왕이 나타나며, 금석문상에서는 냉수리비와 봉평비, 천전리서석 그리고 창녕비 등에서 보인다. 특히 냉수리비에 나오는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은 지증왕(智證王)으로 비정되는데, 이를 통해 지증왕은 정식 왕이 되기 전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현재까지 발견된 금석문 상의 갈문왕은 모두 沙喙部 소속으로 되어있어 이를 근거로 왕은 喙部, 갈문왕은 沙喙部 소속이라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다(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소, 239~240).
註 074
염촉을 가리킨다. 사인은 신라 때의 관직명으로 궁중에서 국왕 혹은 태자를 받드는 일종의 근시직(近侍職)이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註 075
신라 제 16대 흘해니사금(訖解尼師今)을 말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교정책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원종,염촉,법흥대왕,이차돈,달마,낭지(朗智)註 066066 삽량주(歃良州,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 일대)의 영취산(靈鷲山)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론하고, 신통력을 발휘하였다. 661년 지통(智通)을 가르치는 한편, 반고사(磻古寺)에 원효(元曉)가 머무르게 되자 그도 가르치면서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하였다고 한다.닫기법사,일념,법흥대왕,명제,염촉,종,습보갈문왕
서명 : 촉향분예불결사문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염촉이 자신을 희생하여 불법의 이익됨을 깨닫게 하다
염촉이 자신을 희생하여 불법의 이익됨을 깨닫게 하다
[그는] 죽백(竹栢)과 같이 [곧은] 자질을 드러내고 수경(水鏡)과 같이 [맑은] 뜻을 품었으며, 적선(積善)한 이의 증손으로서 조정의 중심(爪牙)註 076076 꼭 필요한 사람, 혹은 호위하는 사람을 말한다.닫기으로 촉망되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 태평성대(河淸)註 077077 중국 전설에 황하가 맑으면 성왕이 나온다는 말로, 태평성대란 뜻으로 사용한다.닫기의 시종이 되기를 바랐다. 그때 나이 스물두 살로 사인 신라 관작에 대사(大舍), 소사(小舍) 등이 있었는데, 대개 하사(下士)의 등급이다.의 자리에 있었다.
용안(龍顔)을 우러러보고 [왕의] 뜻을 눈치 채고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옛사람은 비천한 사람(蒭蕘)에게도 계책을 물었다고 하니, 중죄를 피하지 않고 [대왕의 뜻을] 여쭙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사인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 사령을 그릇되게 전했다고 하여 신을 형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지시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살을 베어 저울에 달더라도 한 마리 새를 살리려고 했고,註 078078 매에 쫒긴 새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닫기 피를 뿌리고 목숨을 끊어서라도 일곱 마리의 짐승註 079079 도살의 대상이 되는 짐승을 말한다.닫기을 스스로 불쌍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네가 비록 공덕을 짓는다고 할지라도 죄를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사인이 말하기를, “모든 것이 버리기 어렵지만 제 목숨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가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기러기와 따오기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바다를 건널 기세를 품었다고 하더니 네가 이와 같구나. 가히 대사(大士)註 080080 현자, 덕 있는 사람, 보살도의 실천자를 말한다.닫기의 행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의를 갖춰 바람 같은 조두(風刁)를 동서로 늘이고 서릿발 같은 무기를 남북에 벌여 놓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묻기를, “그대들은 내가 정사(精舍)를 지으려고 하는데 고의로 지체시키는가?” 향전에 이르기를, “염촉이 왕명이라고 하면서 공사를 일으켜 절을 창건한다는 뜻을 전했더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하였다. 왕은 이에 노하여 염촉을 책망하고,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전하였다고 하여 형벌을 가하였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전전긍긍하며 황급히 맹서하고 손가락으로 동서를 가리켰다. 왕이 사인을 불러 힐문하니, 사인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대답할 말이 없었다. 대왕이 분노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니 유사(有司)가 [그를] 묶어 관아로 끌고 왔다. 사인이 발원하고 옥리(獄吏)가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향전에는 사인이 맹세하기를,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므로 [저는] 신명을 돌보지 않고 인연을 모두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사람들에게 두루 보여주소서”라고 하니, 이에 그의 머리가 날아가서 금강산(金剛山)註 081081 경주의 북쪽 교외에 있는 산을 말한다. 그 산에 백률사가 있다.닫기 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하늘은 사방이 침침해지고 사양(斜陽)이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면서 꽃비가 내렸다. 성왕(聖人)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를 적시고, 재상은 근심하여 조관(蟬冕)註 082082 신하들의 조관(朝冠)이다.닫기에까지 땀이 흘렀다. 샘물이 갑자기 마르매 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가 떼를 지어 울었다. 춘궁(春宮)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했던 친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듯 이별을 애석해 하였다. 상여를 바라보며 장송곡을 듣는 이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모두들 말하기를, “개자추(子推 )가 다리 살을 벤 것註 083083 한의 유향(劉向)이 저술한 ≪說苑≫ 복은편(復恩篇)에 있는 고사이다. 자추는 진(晋) 문공(文公)이 시장하여 못견디는 것을 보고 자신의 다릿살을 베어 먹였다고 한다.닫기도 이 고절(苦節)에 비할 수 없고,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註 084084 홍연은 춘추시대 위(衛) 의공(懿公)의 신하이다. 의공이 적인(狄人)에게 죽어서 간만 남은 것을 보자 사신으로 갔던 홍연은 그 앞에서 자기의 배를 가르고 간을 넣었다는 고사이다.닫기인들 어찌 이 장렬함에 견주랴. 이는 임금님(丹墀)註 085085 법흥왕을 가리킨다.닫기의 신앙력을 붙들어 아도(阿道)의 불심을 이룬 성자(聖者)다”고 하였다.
드디어 북산의 서쪽 고개 즉, 금강산이다. 전(傳)에서는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밝히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에 장사지냈다. 나인(內人) 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터를 잡아서 난야(蘭若)註 086086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원을 말한다.닫기를 짓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註 087087 이차돈을 위하여 세운 절로 지금의 백률사로 생각된다(이하석, ≪삼국유사의 현장기행≫, 문예산책, 1995, 239쪽).닫기라고 하였다. 이에 집집마다 예를 하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사람마다 도를 닦으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깨닫게 되었다.
註 076
꼭 필요한 사람, 혹은 호위하는 사람을 말한다.
註 077
중국 전설에 황하가 맑으면 성왕이 나온다는 말로, 태평성대란 뜻으로 사용한다.
註 078
매에 쫒긴 새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註 079
도살의 대상이 되는 짐승을 말한다.
註 080
현자, 덕 있는 사람, 보살도의 실천자를 말한다.
註 081
경주의 북쪽 교외에 있는 산을 말한다. 그 산에 백률사가 있다.
註 082
신하들의 조관(朝冠)이다.
註 083
한의 유향(劉向)이 저술한 ≪說苑≫ 복은편(復恩篇)에 있는 고사이다. 자추는 진(晋) 문공(文公)이 시장하여 못견디는 것을 보고 자신의 다릿살을 베어 먹였다고 한다.
註 084
홍연은 춘추시대 위(衛) 의공(懿公)의 신하이다. 의공이 적인(狄人)에게 죽어서 간만 남은 것을 보자 사신으로 갔던 홍연은 그 앞에서 자기의 배를 가르고 간을 넣었다는 고사이다.
註 085
법흥왕을 가리킨다.
註 086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원을 말한다.
註 087
이차돈을 위하여 세운 절로 지금의 백률사로 생각된다(이하석, ≪삼국유사의 현장기행≫, 문예산책, 1995, 239쪽).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교정책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색인어
지명 : 북산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흥륜사를 세우다(544년 (음))
흥륜사를 세우다 ( 544년 (음) )
진흥대왕(眞興大王) 즉위 5년 갑자(甲子)註 088088 서기 544년이다.닫기에 대흥륜사(大興輪寺)註 089089 신라의 불교전래 및 공인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고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되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544년(眞興王 5년)에 완공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으로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66쪽).닫기를 지었다. ≪국사(國史)≫와 향전에 의하면, 실은 법흥왕 14년 정미(丁未)(527년)에 터를 잡고, 21년 을묘(乙卯)(535년)에 천경림(天鏡林)을 크게 벌채하여 처음으로 공사를 일으키고, 서까래와 대들보를 모두 그 숲에서 취해 쓰기에 넉넉했고, 계단의 초석이나 석감도 모두 있었다. 진흥왕 5년 갑자(甲子)(544년)에 절이 낙성되었으므로 갑자라고 한 것이다. ≪승전(僧傳)≫註 090090 고려의 승려인 각훈(覺訓)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을 말한다.닫기에 7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태청(太淸)註 091091 중국 양 무제의 연호로 서기 태청 년간은 547~549년이다.닫기 초년(547년)에 양(梁)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를 가져왔고, 천가(天嘉)註 092092 남조(南朝) 진(陳) 문제(文帝)의 연호로 천가 6년은 서기 565년이다.닫기 6년(565년)에는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가 승 명관(明觀)과 함께 내경(內經)을 받들고 왔다.
절과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양 늘어섰다.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종을 매어다니, 용상(龍象) 같은 승려註 093093 물에서는 용,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제일 강력하다고 생각하여, 수도에 용맹한 승려를 의미한다.닫기의 무리가 세상의 복전(福田)이 되고, 대소승(大小乘)의 불법이 서울의 자비로운 구름이 되었다. 타방(他方)의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 분황(芬皇)의 진나(陳那)와 부석(浮石)의 보개(寶蓋), 그리고 낙산(洛山)과 오대산(五臺)에 이르기까지가 이런 것이다. 서역(西域)의 명승들이 [이] 땅에 강림하니, 이로 인하여 삼한(三韓)을 병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온 세상을 합하여 한 집안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덕명(德名)을 천구(天𨨣)의 나무에 새기고, 신성한 행적을 은하수 물에 그림자로 남겼으니, [이] 어찌 세 성인의 위덕으로 이룬 것이 아니랴. [세 성인은] 아도, 법흥, 염촉을 말한다.
훗날 국통(國統)註 094094 승관 중 최고의 자리이다. 혹은 사주(寺主)라고도 하며 진흥왕 12년 혜량법사를 사주로 임명한 데에서 비롯하였다.닫기혜륭(惠隆), 법주(法主)註 095095 승관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불교의 한 종파의 장이나 설법을 주관하는 사람의 뜻인 것으로 보인다.닫기효원(孝圓)과 김상랑(金相郞), 대통(大統)註 096096 국통 다음의 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승관이다.닫기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註 097097 대서성에 관련된 사료는 거의 없지만 서(書)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비문과 문서의 작성, 그리고 각자(刻字) 등의 일에 종사하였을 승관으로 파악한다(이수훈, 「신라 승관제의 성립과 기능」, ≪부산사학≫ 14, 1990).닫기진노(眞怒), 파진찬(波珍喰) 김의(金嶷) 등이 옛 무덤을 수축하고 큰 비를 세웠다. [이때가] 원화註 098098 당 헌종의 연호로 12년은 서기 817년이다.닫기 12년 정유(丁酉)(817년) 8월 5일, 즉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9년이었다.
흥륜사의 영수선사(永秀禪師) 이때는 유가(瑜伽)의 제덕(諸德)을 모두 선사라고 불렀다.가 이 무덤에 예불하는 향도(香徒)를 모아서 매달 5일에 혼의 묘원(妙願)을 위해 단을 모으고 범패를 지었다.
또 향전에 이르기를, “향로(鄕老)들이 항상 그의 돌아간 날이 되면 사(社)를 만들어 흥륜사에서 모였다”고 하였는데, 즉 이 달 초닷새는 사인이 몸을 바쳐 불법에 귀순하던 날이다. 아아! 이러한 임금이 없었으면 이러한 신하가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신하가 없으면 이러한 공덕이 없었을 것이니, 유비(劉)와 제갈량(葛)이 물과 고기 같았던 것과 같고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다.
법흥왕이 이미 폐지된 [불교를] 일으켜 절을 세우고, 절이 낙성됨에 면류관을 벗고 가사를 입었으며, 궁중의 친척들을 내놓아 절의 종으로 삼았다. 절의 종은 지금까지도 왕손이라고 한다. 그후 태종왕(太宗王) 때 재상 김양도(金良圖)註 099099 신라통일기의 장군이며 문장가였다. 김유신(金庾信), 김인문(金仁問)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닫기가 불법을 믿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어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고 했는데, 사신(捨身)하여 이 절의 종이 되었다.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註 100100 신라의 대야성 성주 품석(品釋)의 막료였으나,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을 공격할 때 백제군과 내통하고 검일(黔日)과 공모하여 성 내의 군량미 창고에 불을 질러 신라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성이 함락된 후 백제에 귀부하였으나, 660년(태종무열왕 7) 백제가 항복한 뒤 검일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의 가족을 [이] 절의 노예로 삼았는데, [이] 두 가족의 후손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불교를 널리 폈다. 진흥왕이 [그의] 덕행을 이은 성군이었기에 왕위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처하여 위엄으로 백관을 통솔하니 호령이 다 갖추어졌으므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로 사액하였다.
註 088
서기 544년이다.
註 089
신라의 불교전래 및 공인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고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되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544년(眞興王 5년)에 완공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으로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66쪽).
註 090
고려의 승려인 각훈(覺訓)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을 말한다.
註 091
중국 양 무제의 연호로 서기 태청 년간은 547~549년이다.
註 092
남조(南朝) 진(陳) 문제(文帝)의 연호로 천가 6년은 서기 565년이다.
註 093
물에서는 용,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제일 강력하다고 생각하여, 수도에 용맹한 승려를 의미한다.
註 094
승관 중 최고의 자리이다. 혹은 사주(寺主)라고도 하며 진흥왕 12년 혜량법사를 사주로 임명한 데에서 비롯하였다.
註 095
승관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불교의 한 종파의 장이나 설법을 주관하는 사람의 뜻인 것으로 보인다.
註 096
국통 다음의 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승관이다.
註 097
대서성에 관련된 사료는 거의 없지만 서(書)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비문과 문서의 작성, 그리고 각자(刻字) 등의 일에 종사하였을 승관으로 파악한다(이수훈, 「신라 승관제의 성립과 기능」, ≪부산사학≫ 14, 1990).
註 098
당 헌종의 연호로 12년은 서기 817년이다.
註 099
신라통일기의 장군이며 문장가였다. 김유신(金庾信), 김인문(金仁問)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註 100
신라의 대야성 성주 품석(品釋)의 막료였으나,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을 공격할 때 백제군과 내통하고 검일(黔日)과 공모하여 성 내의 군량미 창고에 불을 질러 신라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성이 함락된 후 백제에 귀부하였으나, 660년(태종무열왕 7) 백제가 항복한 뒤 검일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문화>사상>불교사상>의례·결사
색인어
이름 : 진흥대왕,법흥왕,진흥왕,심호,유사,명관,아도,법흥,염촉,혜륭,법주,효원,김상랑,녹풍,진노,김의,영수선사,유비,제갈량,법흥왕,김양도,진흥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