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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민주주의 외치는 극우파가 알아야 할 역사의 진실
작년에 일명 태극기 부대는 애국과 반공과 선민사상을 주장하며 태극기와 미국기와 이스라엘기를 내걸고 시위했다. 그들은 반공당이 집권하지 못하고 미국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한국이 당장 공산국가가 될 꺼라고 주장해서 많은 기독교인의 지지를 받았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기독교인에게는 공산주의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우리는 승리자의 시각으로 쓰여진 기록을 통해 역사를 배우면서, 미국은 우리를 공산치하에서 구원해준 은인이요 우방국가 민주국가라고 배워왔고 지지했다. 은인의 나라 미국에 대해서 ‘미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젊은이들을 보면 빨갱이라고 머리를 저었다. 그런데 많은 세월이 지나고 감추어진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그들이 미국을 비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식민정치와 한반도 분할
한국이 1909년부터 1945년까지 36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 데에는 미국의 개입이 있었다. 최근 비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1904년 5월 스테른부르크와 러일전쟁의 강화 조건을 상의하는 자리에서 일본은 한국을 차지할 수 있다. 단 그들은 한국 내에서의 미국의 권익보호를 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을 미국과 같은 자유로운 입헌 체제의 나라, 공정과 번영의 나라라고 추켜 세우고, 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여 한국을 보호하고 통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을 미 국민과 워싱턴 당국에 납득시켰다. 그는 자신의 친일 정책을 강행하기 위해 이를 반대해온 알렌을 해임하고 에드윈 모건을 주한 미국공사에 임명했다. 루스벨트와 그의 정부가 한국의 주권과 독립을 부정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게 된 배경에는 필리핀 지배라는 실리주의와 일본의 치열한 대미 로비가 크게 작용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식민지배가 끝나면서 한국은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며 주권국가로 설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열렸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서 나라가 둘로 나뉘게 되었다. 사실 7월에 열렸던 포츠담회담에서 이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것이 잠정 합의된 바 있었다. 한국은 아직 혼자 일어날 힘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해방 한달 후 남북 도로가 봉쇄되고 4개월 후 왕래가 끊기고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에 주둔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다음날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36년동안 펄럭이던 일장기가 내려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건 태극기가 아니라 미국의 성조기였다. 1946년 5월3일부터 도쿄 전범재판이 열렸다. 종전 직후 세계 여론은 15년에 걸쳐 기나긴 살육전쟁을 이끌어온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응징을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 상원위원은 전범으로서의 천황의 체포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천황 히로히토가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휘한 최고 책임자로서 절대로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맥아더는 워싱톤에 천황의 전쟁범죄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으며 그를 전범으로 처벌한다면 일본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따라 백만 대군의 희생이 예상되는 새로운 전쟁을 치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전문을 보냈다. 결국 천황은 아무런 문책을 받지 않았다. 일본이 전범 국가로서 재판받을 때에도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죄목은 없었다. 그래서 36년간 비인간적이고 잔인무도한 식민지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2만 명의 일본군은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평화롭게 철군할 수 있었다.
미군정 정보부 소속의 리차드 로빈슨은 당시 미국의 정책은 한국에 어떻게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거나 누가 민주정부를 이끌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가장 절실한 목표는 소련의 세력을 어떻게 막아내느냐는 것이었다고 증언한다. 존 하지 중장은 미국의 이익에 따라 협력할 세력들을 물색해 나갔다. 그리고 아베 총독을 비롯한 일제 총독부의 모든 일본인과 조선인 관리들에게 기존의 임무를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일제 경찰들은 해방된 조선 땅을 여전히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다.
시카고대학교의 브루스 커밍스는 이것은 끔찍한 아이러니라고 했다. 미국은 일본과 싸우면서 수많은 전사자를 냈고 일본을 패망시킨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한국에 오자마자 일본인과 더 친해진 것이다. 일본인과 하지의 참모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료의식이 싹텄다고 말했다.
이후 미국은 반공을 내세우며 소련을 대항해서 미국과 함께 싸워줄 동지로서 일본을 선택하고 함께 한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일본과 미국에 저항하는 세력은 제주도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등을 통해서 ‘말살’시켜 버리려 했다.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광복 이전 우리나라는 분명 하나였는데 남한에서만 선거를 하겠다는 건 남북분단을 의미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반대하며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시위가 극심했던 곳은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특수 지역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려는 시점에, 일본군에게는 본토사수를 위한 최후 보루로, 전쟁 상대인 미군에게는 일본으로 진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으로 부각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주도에 머물던 일본군이 물러가자 광복과 동시에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미군정이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앉히고 서서히 우익 인사들을 조직화시키자 제주도민들의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불만은 1947년 3월1일 열린 3.1절 기념집회에서 터졌다.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이 그대로 가려하자 분노한 일부 군중이 경찰에 돌멩이를 던졌고 경찰은 군중에게 총을 발포했다. 이로 인해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은 근처에서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었고, 주민에게 발포한 반공 서북청년단은 미군정이 지원경찰로 끌어들인 자들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분노를 사며 4.3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48년 4월 3일 무장한 350명 제주도민은 제주도 12개 경찰서로 몰려가 무장시위를 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거부하고, 경찰과 반공청년단 등의 제주도민 학대를 궐기하기 위함이었다. 시위의 슬로건은 군중에 대한 폭력적 탄압 금지,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였다.
진압군은 공산계열의 반민족적이며 파괴적인 분자들의 지도 아래 흉기를 가진 무장세력들이 경찰서, 관공서, 선량한 동포 등을 살해하며 방화 및 폭행으로 만행을 저지른다고 주장하며 화염과 총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무자비한 진압의 중심에는 미군정의 하수인 친일경찰이 있었고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아래 반공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1947년 6월3일 CIC(주한 미군방첩대)가 보낸 정보보고서는 서북청년단이 맡은 일을 ‘더러운 일’이라며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정치의 힘에서 어떤 정당이 자신의 대의에 열렬히 충성하며 '더러운 일'을 수행할 강력한 무장청년단체가 없다면, 다른 정치조직에게 아무런 위협도 될 수 없다."
제주도 내에서의 치열하며 피비린내 나는 단독선거 반대 항쟁에도 불구하고, 친일파의 득세로 1948년 5월 10일 단독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파들이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였다.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총선을 거부한 지역이 되었다. 계획대로 남북이 갈라지며 이승만 정권의 남조선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 정권은 여수와 순천에 주둔 중이었던 14 연대에게 제주도로 출동해서 제주도민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14연대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냈다.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의 조선동포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권리를 위해 총궐기했다. 첫째, 동족상잔 결사반대. 둘째, 미군 즉시철퇴."
여수군대가 자국민을 죽이라는 정부의 명령에 반대했던 이유로 여수시민 수천 명이 여수여자중학교 운동장에 집결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집결한 민간인 2,600명이 총으로 학살당했다. 그들을 죽인 총에도 태극기가 달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 위해서 친일경찰을 적극 활용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제주도민의 거의 10%에 해당하는 3만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부상당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다. 친일군대와 친일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진압군이 사용한 권총은 미군정이 준 것이었고 그들의 권총에는 태극기가 달려있었다.
이승만은 왜 이렇게 적극적이었을까? 시카고대학 역사학과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공산주의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심하게 탄압할수록 이승만정권은 더 강력한 미국의 지원을 받을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국은 한국에서 좌익을 색출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하버드 옌칭 연구소 부소장 에드워드 베이커도 이에 동의한다.
남북분단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자국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경찰과 군인이 잔인하게 죽인 가장 부끄럽고 비극적인 이 사건은 이후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오히려 극우파들은 이 사건이 폭력적이며 사상이 불순한 제주도민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 때의 교과서는 이 사건을, 공산 무장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기록했다. 2003년 10월에야 615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노무현대통령 당시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의 공식 사과가 있었다.
-한국전쟁과 배후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은 미국과 소련의 세력 경쟁, 그리고 그 대리자들의 욕망의 희생제물이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이상 지속된 전쟁에서 150만명의 남북 청년들이 사망했고 360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70만명 이상이 대한민국 국군, 헌병, 반공 극우단체 등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중에는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를 포함해 적어도 2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있었다.
1949년 8월 19일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쓴 편지 파일이 미국 극비문서 속에서 발견됐다. 거기에는 우리는 미군이 흘려야하는 피를 남한의 군대가 대신 흘리게 하기 위해서 훈련시키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치루기 위한 리허설로서 제주4.3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한국전쟁을 일으켜서 남북한 국민 대학살을 자행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전쟁에서는 상대방을 적군으로 보고 죽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한국전쟁의 경우 민간인의 인명피해가 너무 컸다. 민간인 사상자가 남한은 전체 사상자의 50%, 북한은 80%에 달했다. 그리고 살해 방법이 너무나 잔인했다. 강정구 교수는 논문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에서 미군이 전쟁포로를 대상으로 총기의 성능시험과 독가스와 세균무기의 실험을 했다고 폭로한다.
1992년 12월 19일 한겨레신문은 한국전쟁 당시 거제 6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에서 문서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비옷에 싸이고 큰 병속에 넣어져 발견된 문서는 속옷을 찢어 만든 광목에 잉크로 기록된 것이었다. 내용은 포로수용소 내부상황을 폭로한 것으로, "미군이 북한포로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기 성능시험을 하고 있다", "세균무기실험 등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 "세계평화를 위해 애쓰는 여러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 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라고 씌어 있었다. 엽서만한 크기의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활동계획을 적은 기밀문서 30점도 발견됐다.
포로수용소장인 도드 준장이 인민군 포로들에게 35일간 억류되는 사태도 있었다. 포로들이 도드에게 요구한 4개 조항 가운데 제1조항은 폭행, 모욕, 고문에 의한 심문, 혈서의 강요를 중지하고 위협, 학살 독가스와 세균무기 실험중지, 국제법에 의한 전쟁포로의 인권과 생명의 보장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독가스와 세균무기 실험이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군의 잔인함에 치를 떠는 이유는 제2차세계대전 중 그들의 731부대가 만주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자행했던 탄저균의 생체실험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도 그랬다. 미국은 전범재판에서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원들을 면책해주는 댓가로 한국전쟁 동안 한국인에게 세균전을 자행해 줄 것을 협력받았다. 아랍권 신문 ‘알 자지라’도 한국전쟁 시기였던 1951년 “인간과 권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미 합동참모본부가 작전 상황에서 세균전을 위한 특정 병원체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해보라는 명령을 내린 문서가 발견됐다고 폭로했다.
미국인 자신도 동일하게 증언한다. 존 파웰은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월간중국 리뷰>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일하면서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UN의 역할을 비판했다. 그리고 미국이 생물학무기를 사용했다고 비난한 북한과 중국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는 ‘고의적인 오보’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을 처지에 놓였지만 전국 법률가 조합의 도움을 받아 기소가 철회될 수 있었다. 그후 파웰은 미국의 세균전 프로그램에 관한 조사를 계속하는 중 맥아더가 관련자들과 주고받은 비망록을 입수하면서 미국정부가 일본 세균전 전범과 맺은 거래의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작성한 “탄저균과 미군 그리고 731부대, 이들의 검은 커넥션”은 1980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한국전에서 미군이 벌렸던 엽기적이고 광란적인 살인행각은 무기성능실험이나 탄저균 등의 생체실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 미군은 일명 ‘싹쓸이 작전’을 따라 네이팜탄으로 불리는 소이탄을 투하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중인 CIA기록에 의하면 3년간 32,357 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해서 북한 지역을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북한만 아니라 강원도 영월에도 투하되어 4,440명이 죽고 충북 단양과 경북 예천 사이는75%가 불태워졌다. 소이탄은 섭씨 3,000도 가량으로 고열발화하는 소이제를 탄두에 넣은 폭탄으로 공중에서 폭발하며 수십개의 자탄으로 분리되어 광범위한 민간인 거주지역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공격무기다.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 인구의 12-15%가 죽임을 당했는데 특히 폭격이 집중되었던 평양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8,000미터 상공에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옥상에 적십자 표시를 해 놓은 병원도 미군의 폭격대상이 되어 시한폭탄을 떨어트렸다. 결국 평양 인구는 50만에서 5만으로 줄어들었다.
당시 미국 잡지에는 관련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1951년 1월자 ‘케미컬 저널’에 실린 적들은 그 망할 폭탄을 싫어한다, 1951년 4월자 ‘올 핸즈’에 실린 네이팜 젤리탄, 한국에서 놀라운 성공 입증, 1952년 11월자 ‘육군 전투력 저널’에 실린 놀라운 무기 네이팜탄 등의 기사에서 기자들은 폭격기 오락을 하는 아이들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한국전쟁에 가장 가깝게 참여하면서 가장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MBC는 2001년6월22일 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 일본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 뒤에 숨겨진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다루었다.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이 많았다. 한국전 협력을 바탕으로 한 외교로비 끝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한국을 협상국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식민지배상 문제를 회피할 수 있었고, 이전까지 분명하게 한국영토로 명시되었던 독도 조항을 없앨 수 있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패망으로 침체한 경기를 한국전쟁 참여로 인한 ‘경제특수’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한국민이 전혀 원하지 않던 중에 제3국들에 의해 일어났던 한국전쟁은 엄청난 인명과 국토를 파괴시키고 남북사회의 이질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남한에서는 ‘반공통일’이, 북한에서는 '민족의 철천지 원수'를 배척하는 '반미주의'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체계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이런 비극을 이용해서 또 다른 비극들을 계속 발생시켰다.
-광주 5.18사건, 그리고
이승만 시절에 이어 유신정권과 신군부 체제에서도 반공을 최고 국시로 하면서 이념을 빌미로 권력자들이 자국민을 죽이는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강압적이고 독재적인 공산국 북한에서뿐만 아니라 소위 민주국가라는 남한에서도 일어났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자들에게는 ‘빨갱이’라는 혐의를 씌워서 고문하고 감금하고 죽였다.
조봉암사건, 조용수사건, 동백림사건,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 재일교포유학생 간첩단사건, 무림사건, 학림사건, 아람회사건, 부림사건 등등에서 독재정권 비판자들은 간첩이나 친북·좌경·용공세력으로 지목되어서 사형당하거나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면서 정신이상자가 되기도 했고 온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국정원이나 안기부는 공산당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고문하고 조작해서 혐의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가 자국의 최고 권력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었다.
이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지게 된 광주 5.18사건은 제주4.3사건과 많이 닮아있다. 다른 지역들이 잠잠할 때 담대하게 나서서 독재정권에 대항하다가 희생당한 지역이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미국 탐사보도 전문기자 팀 셔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증언한 것처럼 미국이 살육 작전에 가담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한국정부는 미군의 도움을 받아 그 지역의 자국민을 진멸하기로 작정이나 하듯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며 단시일에 엄청난 사망자와 실종자와 부상자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뉴스를 들으면서 공산사상을 가진 광주폭도들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이 정부가 만들어낸 거짓 뉴스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세상에 진실을 알리려고 애쓰면서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 친구 의기가 있다. 그는 진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들어 서울에서 뿌렸다. 진실이 뭐든 나와 상관없다는 사람들은 관심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놀라고 분개했다. 그는 계엄군에게 쫒기다가 결국 5층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다. 진실을 말하면 죽이는 세상이었다.
진실을 알지 않았다면 꽃다운 20대에 죽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침묵할 수는 없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진실을 만난 것은 아니었다. 피해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고 공감하다가 불의한 세상, 불의한 권력자들을 알게 되었다. 권력자들의 범죄를 고발하면서 무고한 시민들과 아름다운 학생들이 많이 죽어갔다.
내가 여기서 미국이나 일본 등의 범죄를 고발한 이유는 그들에 대한 혐오나 갈등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민 대부분은 권력자들의 야심을 알지 못해서 저들의 범죄에 동조하고 지지했던 희생자일 뿐이다. 역사에서 범죄를 일으킨 자들은 국민들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들이다.
모든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고 했다. 권력의 타락은 정치나 경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권력의 타락은 하나님이나 신이라는 절대자의 이름을 빙자하기 때문에 더욱 끔찍해진다. 종교권력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과 결탁하면 더욱 강력해지고 더욱 위험해진다. 지금 세계최고 권력자들이 그런 세상의 세계정부를 완성해가고 있다.
역사는 진실에 상관없이 승리자와 권력자들에 의해 쓰여진다.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악을 선하다며 동조하고 선을 악하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악을 용서는 하되 동조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