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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본문: 사 2:6-22
요절: 2: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들어가면서
1:27 말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심판을 통하여 정화하신다“는 이사야서 전체를 흐르는 주요 모티브이다. 1:21-31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말씀이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지를 예언하였다. 2:6-22에서도 마찬가지로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는데, 양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첫째로는, 1장에서는 단지 이스라엘의 악행만을 열거하지만, 이곳에서는 이스라엘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의 악행으로 연장된다(인간이라는 말이 9,11,17,20에 나온다). 그리고 이 심판도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2:1-4(열방이 시온에 가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이 심판을 통하여 남은 자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과 같이, 열방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법도를 받기 위해 시온으로 가기 전에 먼저 수치를 당하여 겸손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6-22는 2:1-4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둘째로는, 2장에서 심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높으심과 크심이 드러난다. 결국, 인간은 수치를 당하고 겸손하게 되어야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
내용구분(6-22)
6a(„그러나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 야곱의 집을 버리셨습니다“)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형식인데, 이것은 5절과 잘 연결된다. 5절에서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열방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 백성에게 „빛 가운데 거하라“는 격려의 경고를 하지만, 현실을 보면 이 백성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신 것을 당연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탄한다.
6b-8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증거로서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부대 효과를 들고 있다. 이 세 구절은 „...으로 가득하다“는 표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9절은 그 결과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것이다. 여기에 이사야의 보편주의적 사고가 드러나고, 지혜서에서도 이러한 보편주의적 사고(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염두에 두는 것, 혹은 하나님이 구원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시는 것)를 보인다. 10-17절에서 본 단락의 주제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심판에서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간의 비참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이 이곳에서 반복된다.
18-21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올 때에 벌어지는 상황이 나오는데,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것이며, 그들이 만든 우상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버리는 것이다. 마지막 절인 22절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의 비천함을 배워서 인간을 의지하거나 섬기지 말라는 권고로 본 단락은 끝난다.
해설
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6a. 그러나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 야곱의 집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언약을 지키지 않고 불의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정화의 심판을 시작하셨고(1:9),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쫓겨난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바빌론 포로 때에 완전히 쫓겨나게 된다. 이들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이미 그러한 상태에 들어와 있다. 쫓겨났다는 말은 „포기하다, 더이상 신경쓰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이므로,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시면, 그는 주위의 강국에 의해 정복당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포기하신 것은 아니지만, 더이상 그들을 도와주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방치하신다. 심판이란 꼭 벌을 받는 것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손을 놓는 것도 심판에 해당한다. 이사야는 아직 이스라엘에 희망을 가지고 5절에서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라고 권유하지만, 6절에서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거의 모든 이스라엘은 그의 권유를 무시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러나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 야곱의 집을 버리셨습니다“라고 하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6b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NIV: “They are full of superstitions from the East; they practice divination like the Philistines and clasp hands with pagans”
KJV: “because they be replenished from the east, and are soothsayers like the Philistines, and they please themselves in the children of strangers”
왜냐하면 그들은 동방 사람처럼 점술에 관심이 많으며 블레셋 사람처럼 마술을 좋아한다: 1장에서 이사야가 지적한 백성의 죄는 주로 17절에 나타난 대로 연약한 자를 누르고 착취하는 사회적 죄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것이므로 2장에서 지적한 다른 영(신)에 의지하는 우상숭배(점치는 것과 마술)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자는 반드시 사회적으로 죄를 짓거나 혹은 미신에 빠져서 살거나 우상숭배(물질주의, 명예욕)에 빠진다. 이것은 결국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이방인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민족과 맹약을 맺는 것을 엄금하셨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은 그들이 동맹국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신 것이고, 또한 맹약을 맺으면, 외국의 우상숭배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점을 치고 마술을 하고 외국과 맹약을 맺어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세속국가가 되어 하나님의 법도를 좇지 않고 완전히 물질과 안정만을 추구하는 이방인과 같아졌다.
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결과 그들은 매우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말과 병거가 가득할 정도로 강국이 되었다. 이것을 볼때에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면 부자가 되며 강국이 된다는 말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야 자신 꿈과 욕심을 키우고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지켜주는 것은 부와 힘 뿐이므로 전력을 다해 이것들을 추구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고 강해진다는 것이 거짓말임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눅 6:20a).
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우상숭배와 부는 자주 정비례한다. 가장 우상숭배를 많이 하는 일본은 매우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이들은 한 가지 목적으로 자기를 위해서만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므로, 이웃과 많은 것을 고려하므로 부자가 되기 어렵다.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우상이란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상이 부를 약속하므로 이것을 믿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지만, 실제로는 우상이 도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도운 것이다. 이것과 똑같이 우리 시대의 로버트 슐러와 조용기 목사의 „적극적 사고방식“, „자기 암시 훈련“등은 현대판 우상들이다. 이사야는 벌써 2700년 전에 이러한 사기적 기독교의 본질을 보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NIV: “So man will be brought low and mankind humbled-- do not forgive them”
KJV: “And the mean man boweth down, and the great man humbleth himself: therefore forgive them not”
이사야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공격하다가 갑자기 인간의 본질을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부분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깨달은 것을 일반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인간은 우상에게 절을 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만든 것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굴복함으로써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만든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동족을 사랑하는 이사야가 왜 그러한 기도를 할까? 그러한 지경에 도달하면, 용서가 아무런 소용이 없을뿐더러 그들을 더욱 상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들의 비참함을 깨달아야지만 하나님께 돌아온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렇게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한 교회의 교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겠는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사야는 6:9이하의 전대미문의 하나님 명령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말씀을 기록하여 아무도 읽지 못하도록 책을 닫고 인봉한다. 이스라엘에는 더이상 회개할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10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 오른 작은 언덕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이제 다시 심판의 예고가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열방에게 심판자가 되시기 위해 일어나셨기 때문이다.
10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NIV: Go into the rocks, hide in the ground from dread of the LORD and the splendor of his majesty!
KJV: Enter into the rock, and hide thee in the dust, for fear of the LORD, and for the glory of his majesty
이사야는 그들에게 바위틈에 숨어들어 가라고 한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그 위엄과 거룩함 앞에서 어떠한 피조물도 자기변호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더럽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심판자로 나타나시면, 여호와의 두려움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여호와의 두려움이란,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진군했을 때와 사사 시절 이스라엘이 적군과 싸울 때 적군에게 임한 큰 두려움이다. 이로써 적군은 전의를 잃고 쉽게 패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시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심판의 두려움으로 그의 위엄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중심이 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숭고함과 인간의 숭고함은 서로 상극이다. 인간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인본주의는, 바로 하나님만 숭고하시다는 말씀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2부에서는 여호와만 숭고하시다는 것이 강조되어, 이스라엘과 모든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계시하는 수단이 된다. 그런데, 1:27에 따라서 구원은 단지 심판을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자랑하는 인간의 눈은 수치를 당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명상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심판하시기 위해 일어나시는 그날에(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숭고함은 계시가 된다.
11절의 인간은 수치를 당해 낮아지고 여호와만 홀로 높임을 받는다는 말씀이 12-17에서 전개된다.
12 여호와의 날에는 모든 교만한 자와 높아진 자가 낮아진다. 그런데 13-14에서 레바논의 높고 높은 백향목과 바산의 상수리 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높은 언덕이 낮아진다고 한다. 이것은 교만한 사람이 낮아진다는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할까? 아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이러한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상징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죄란 단지 인간 내면과 인간 공동체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피조물에 속하고, 또한 피조물은 인간에게 속하므로, 인간의 죄는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피조물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나서게 되면, 인간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피조물까지도 심판을 받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는, 인간이 이것을 자신과 연관 지어 그것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든가 자존감을 얻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작은 동네 앞에 매우 높은 산이 있다면, 주민들은 그 산을 바라보면서 산의 위용과 함께 그들의 자존감도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심화하면 산이 그들의 우상이 된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자신의 숭고함의 상징으로 삼으셨는데,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높은 백향목과 비교한다는 구절이 여러 개 있다(시 29:5; 37:35):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시 29:1-5)
바산(오늘날의 골란)의 거대한 상수리나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이러한 나무뿐만 아니라, 큰 산과 큰 언덕에도 임한다. 인간은 높고 위용이 있는 산에 신당을 차림으로써 자신이 신과 가깝다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40:4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선포하면서 산과 언덕이 낮아져 평탄하게 되리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써 높은 것을 쳐부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이 쉽게 올 수 있도록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 이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면, 높은 산과 언덕은 사라지고 하나님만 홀로 높은 자로 남아계신다(57:7).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선사하시는 구속사역은 우주 전체를 움직이시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죄의 결과로 야기된 자연의 무질서는 사라질 것이다.
15-16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인간이 큰 의미를 부여한 결과 오히려 인간을 지배할 정도가 된 산과 언덕이 심판받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놓은 높은 탑과 견고한 성벽과 큰 배에도 심판이 임한다. 사람들은 큰 탑과 높은 건물을 지음으로써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려고 한다. 죄인은 높은 건물을 사고 큰 집에 살면 자신의 자존감이 높아진다. 견고한 성벽을 쌓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견고한 성벽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아 올리려는 교만하고 무지한 인간의 노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는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다시스의 배는 페니키아 상인(블레셋 족)의 배로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오늘날의 스페인)과 교역하기 위해 만들어진 크고 견고한 상선이다. 다시스의 배는 번창하는 국제 교역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할 때에는 국제 교역도 무너진다.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인간의 교만,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전부 무너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11절을 다시 반복한 것이다. 우리는 예배 때나 기도에서 „하나님 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살고 있는가? 말만 그렇게 하고 자신이 영광을 받고 있지 않은가? 내가 영광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는가? 만약 인간이 조금이라도 영광을 받는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훼손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의하며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이 단락은 10절 말씀(„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으로 돌아가서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날이 오면 인간이 만든 우상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큰 교회, 많은 교인, 큰 건물, 목사와 교인의 명예, 부유함과 권세와 같이 그들이 일생 노력하여 이룩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들은 두려운 하나님을 피해 동굴과 바위 밑으로 숨은 것이다. 그들은 도저히 거룩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9절에 „그의 위엄“이라고 번역된 말은 앞에서 나온 „여호와의 두려움“이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과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자신의 백성에게 심판을 행하실 때에 열방과 모든 피조물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22 너희는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 그는 하나의 입김에 불과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 2:5 말씀과 같이 다시 이사야의 권고가 나온다. 하나님의 숭고함이 나타나는 여호와 날에 교만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의지하면 안 된다.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날에는 심판의 대상이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한 번의 입김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하고, 하나님만 높여야 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부록 6
여호와의 날
1.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은 전형적인 구약적 표현이지만, 신약에서도 의미가 확장되어 사용된다. 이 말은, 아마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와 초기에,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에서 겪은 이스라엘의 경험에 그 기원이 있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어 드보라 사사가 바락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에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삿 4:14)“
즉,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는 전사로서 이스라엘 앞에서 나가시며, 그들에게 승리를 선사하신다.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위기의 날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이러한 주의 날을 여러 번 겪었다.
2. 암 5:18-20은 이러한 승리의 날에 대한 기대가 이스라엘의 통속적인 믿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암 5:18-20)
여기에서 아모스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을 대항하는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난다고 선포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적이 되었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러 출두하시는 날이라고 선포하였다. 욜 2:1-11은 무서운 메뚜기 떼로 묘사된 하나님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이것을 천체가 흔들리는 것과 연관시켰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1-3)
3.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러 나선다면, 이방 백성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이 심판받는 날은 열방이 심판받는 날로 확장된다. 이사야 13장에서부터 열방을 향한 예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이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손의 힘이 풀리고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이 불꽃 같으리로다“(6-8)
스바냐 1장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얼마나 무서운지 자세하게 묘사된다. 그날은 거대한 전장이 되어 열방이 죽는 날이 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계 19:17-18은 이것과 연관됨이 분명하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계 19:17-18)
4.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엘 서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해 자세히 묘사된 것을 문맥을 고려하면서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모든 것을 황폐하게 하신다는 무서운 예고와 함께, 은혜의 선포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심판 예고 후에 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욜 2:28-32에서는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것과 연관하여 생각할 때, 말세의 심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Erbarmen; mercy)과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날에 심판하실 때에 구원해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은 죄인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는 구원의 날이 된다. 욜 2:28-32는 행 2:21과 롬 10:13에서 보듯이 예루살렘 원 교회의 설교에서 큰 역할을 했다.
누가는 주의 날을 „마지막 날들“(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정하신 기간(기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함께 어울려있다는 것은 사 61:1-2에서도 매우 분명히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이 말씀을 변형시켜서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선포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9) à 지금의 시대는 희년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이사야서의 „보복의 날“을 제외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로 특별히 강력하게 쏟아부으시는 시기가 될 수 있다.
5. „여호와의 날“, 나중에는 „주의 날“로,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재림하는 그 순간으로 변화되었다. 주의 날은 „도적과 같이“ 갑자기 오며(살전 5:2),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5:4-6)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날에 모든 감추인 것을 환히 드러나게 하시기 때문이다(롬 2:16).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을 만물 앞에서 그들의 거룩한 삶에 대해 상을 주시기 때문이다(비교: 고전 1:8; 빌 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그분의 모든 적들에 대한 승리의 순간이요, 그리스도인을 위한 구속의 날이요(엡 4:30), 불신자에게는 „진노의 날“(롬 2:5)이 된다. 같은 한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심판이 나온다.
주의 날은 이미 와서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주의 날은 최후의 한 순간으로 다시 와서 모든 사람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나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살전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