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그집엘 가보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이라고 하기보다는 방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몇 가구의 사람들조차 자심들의 방 밑에 그런 방이 존재하고 잇다는 사실 조차 모를 지도 모른다.
남편의 사업이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몰려든 빚쟁이들에게 집과 세간을 빼앗기고 당장 고사리 같은 아이 둘을 앉힐 방을 찾아 넋이 나간 채 몇 날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방이었다. 붙여놓은 지 몇 달이 지났는지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 만큼 얼룩진 '지하방 한칸 월세'. 신이나를 가엾게 여겨 어느순간 전봇대에 붙여놓은 듯, 비탈진 언덕배기를 며칠을 헤맨 끝에, 땅위
를 걷는 것이 마치 벼랑 끝으로 한 발짝을 내딛듯 아무런 중력도 없이 허방하게 느껴질 그 때 그 방이 나타났다.
시간이 많이 흘러갔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나는 그 방엘 가보곤 한다.
집주인은 외지에 살고 객들이 들락거리는 터라 집은 관리가 안 돼 엉망이었고 허술한 대문은
늘 열려 있었다. 담벼락을 따라 폭이 일미터도 안 되는 좁은 통로를 따라가면 대문과는 반대편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바로 옆에 창문이 하나 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손바닥만 한 창문. 먼지가 쌓인 창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본다. 안은 어두컴컴해서 한
참을 보고 있어야 경 사방 분간이 된다. 방은 언제나 그렇듯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리가 이사를
한 후 아무도 살지르않았는지 말끔히 치워진 그대로였다.
어두운 과거를 가진 여자가 두꺼운 옷을 한 겹씩 들추고 지난날의 상처를 찾아내 어루만져 보듯,
그래서 일그러진 흉터조차 더 이상 징그럽지 않고, 마치 나비모양의 문신으로 변해 버린 흉터를
바라보듯 그 방을 들여다 본다. 남편이 처음 암 선고를 받던 날이 생각난다.
그날은 우리 가족이 드디어 지상에서 쫓겨나 지하 셋방으로 이사를 가던 날이었다. 남편은 지난
며칠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나는 그런 남편을 외면했다. 꼴도 보기 싫었다. 되지도
않는 사업을 한답히고 대기업 안락의자도 내팽개치고 가족은 물론 시댁과 친정까지 말아먹은
터였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는 남편앞에서 보란듯이 세간을 처분하고 초라한 살림살이 몇가지
를 챙겨 지하 셋방으로 아이들을 앞세우고 이사를 갔다.
그날 밤 남편은 심하게 앓았고 다음날 암 진단을 받았다. 길어야 2-3개월. 암 선고를 받고 가족
회의를 했다. 이병원 저병원에서 모두 같은 의견으로 두 달을 얘기했다. 수술은 전혀 불가능하
다고, 수술 도중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가족들 모두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조용히 보내자
고 했다 결정권은 내가 쥐고 있었고, 나는 수술을 고집했다. 남편 친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담당의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 하는 수술을 여덟시간동안에 받았고, 남편과 나는 그후 2년
을 병원에서 보냈다.
중환자실이 있는 이층 복도 끝에 큰 창이 하나 있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잠든 틈틈이 나는 이 창
앞에 와 서곤했다.낮에는 그럴겨를도없지만 밤이되면 병실에도 불이 꺼지고 중환자실 환자들
돟 밤인 줄은 아는지, 혹은 진통제를 맞은 후 비로소 편안해졌는지 모두들 깊은 잠이 든 후에야
혼자 살그머니 병실을 빠져나와 창 앞에 서곤 했다.
남편은 이제 통증이 오기 시작하는 지 깊은 잠을 못 이루고 토끼잠을 자는 바람에 우리는 지난
일 주일 간 서너시간이나 잤을까. 남편도 나도 눈알이 시뻘게져 보는 사람마다 혀를 차곤 했다.
보통때의 두배나 되는 진통제를 투여한 뒤에야 남편은 겨우 잠이 들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병실
을 나오는데 '누워 있는 남자'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남자'는 남편과 한 병실을
쓰는 마흔살의 남자다. 남편과 동갑인데 사실 그는 마흔 아홉살이다. 마흔살에 교통사고로 식
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실려오는 바람에 여태껏 마흔살로 기재되어 있다.
'누워 있는 남자'란 별명은 내가 붙여 주었는데 그는 해맑은 얼굴에 너무 크고 맑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그 큰 눈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을 때면 혹시 그가 멀쩡한데 단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망울이 초롱초롱 했다. '누워 있는 남자의'의 유일한 보호자인
그의 아내는 가끔 그를 내게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성
숙한 남자환자를 감당하기가 황망스러워 거절을 하기도 했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성적인
의미를 상실한 남자의 성기는 단지 인간의 몸에 어쩔수 없이 붙어 있는 배설기구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약간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를 확인하고 소변기를 갖다 대면 그는 초롱 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오줌량을 체크하고 나는 잠시 '누워있는 남자'의 아내를 생각한다.
남편의 성기를 생판 남인 다른 여자에게 맡기고 그녀는 무엇을 위해 마른 짚단 같은 몸을 휘석
거리며 가야하는지. 창밖에는 깜깜한 어둠이 내려 앉았고, 멀리 보이는 큰길에는 차들이 불야
성을 이루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야경이 펼쳐졌다. 밤 풍경에 빠져들어 한없이 바라보
고 있노라면 마치 세상과 단절 돼 아무리 기를 써도 창박으로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아득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병원 밖의 세상. 남편과 내가
저쪽 바깥 세상에서 살았던 일이 정말 있었나 싶게 까마득햇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 알수
없었고, 알 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아이들 생각만 하면 늘 목이 뻑뻑하게 차오르며 눈물이 났다. 햇볕도 한 줌 들지 않는 지하방
에서 어쩌고들 있는지. 어느 순간엔 아이들 걱정에 미칠 듯한 마음이 들어 남편을 간호사에게
잠시 부탁해 놓고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아이들은 병아리를 키우고 있었다. 한 뼘 남짓 햇빛
이 비치는 지하 계단에서 노란 병아리와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먹을 것을 겨우 몇가지 챙겨놓
고는 혼자 있을 남편 걱정에 황급히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원래 방으로 세를 놓지 않을 작정이었던지 지하방은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질 않았다. 덩그러니
방 하나에 간이 주방, 주방 한 쪽 계단 밑 공간으로 간이 화장실이 전부였다. 침대위에 전기장판
을 깔고 아이들에게 전기장판 사용법을 몇차례나 일러주고 실습까지 시켜본 후에야 서둘러 집
을 나섰다.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아 돌아보면 전기장판 위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취위 탓인지 더욱 조그맣게 보였다.
남편의 병세는 더욱 깊어져 이제는 진통제 없이는 단 한 시간도 깨어있질 못햇다. 그럴수록 남
편은 살고 싶어 몸부림 치고 나는 죽고만 싶어졌다. 시시각각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가는 남편
을 옆에서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하는 절망스러움.....
통증으로 꼬박 밤을 새우고 새벽녘 희뿌옇게 밝아오는 병실 창을 내다보고 있으면 오만가지
생각에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어지러웠고 결론은 늘 한가지였다. 차에다 남편과 아이들을
태우고 멀리 강원도 깊은 골짜기로 가야지. 산에는 꽃이 피어 있고 새들이 주줄지줄 대면 아이
들의 웃음소리가 숲속에 퍼지겟지 남편도 좋아하겠지.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더이상 오를 데가
없을때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을 것이다.
우리는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 깊은 물속으로 갈 것이이다. 천길 만길 물길을 건너 다른 세상으
로 가야지. 이세상과는 다른 곳으로. 고통도 병도 없는 편안한 곳으로. 어느날 큰딸아이가 병원
으로 전화를 했다. 지금 집에 난리가 났다고. 서울에서 집주인이 와서 우리집에 큰 공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행여 밀린 방세를 보내지 않아 집주인이 살림살
이를 들어내는 것이나 아닌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 얼굴을 마주한 집주인 여자는 나보다 훨씬 젊은 새댁이었다. 그녀가 먼저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월세가 밀려 전화연락도 안되고 해서 독촉도 할겸 집을 둘러보러 내려왔는데
우리 사정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주인여자는 나를 위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집세 걱정하지 말고 얼마든지 살라고. 보일러도 새로 놓아주겠노라고. 엎드려 절을 해도 시원찮
을 마당에 나는 그녀의 친절한 목소리를 꿈결인 양 들으며 가만히 서 있기만했다. 뻔뻔스럽게도.
보일러는 생각외로 비교적 간단하게 설치되는 것 같았다. 공사를 끝내는 것도 보지 못하고 병원
으로 돌아왔다가 밤늦게 집에 가보니 방문 바로 옆에 보일러가 있어서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기차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초등학교6학년인 딸아이는 빨래를 잔뜩해서 방안에다 널어놓
고는 동생을 안고 잠들어 있었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행복한 듯 들으며, 방이 따뜻해서인
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어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던 9월의 어느날, 뼈만 남아 앙상한 남편의 하얀손이
마치 태극무를 추듯 허공을 휘휘 젓다 침상아래로 떨어졌다. 비극적인 연극의 종말을 막이 내
릴 때까지 바라보듯, 나는 남편의 하얀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이 마흔에 과부가 된 나와 고사리 같은 아이 둘, 나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
고 아이들도 다행히 밝게 자라주었다. 우리는 이사를 했다. 열두평짜리 임대 아파트. 이사하던
날 작은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방에누워서도 하늘이 보여요"
우리 세식구는 손바닥만한 방에나란히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보
며 나는 지하방을 생각했다. 남편의 병이 기적적으로 나아 그 방에서 우리 네 식구가 새롭게 출
발하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던 그방을.
이사를 하고 나서 몇 달쯤 지나 처음으로 그 방을 찾은 날은 토요일 오후였다. 일찍 퇴근을 하고
통근버스도 일부러 놓친후 이생각 저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
고 보니 어느새 그 방 앞이었다. 그새 주가 이사라도 들어왔나 조심스레 창문을 여니 방은 우리
가 이사하던날 그대로 였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방은 의외로 사람이 살고 있는 방같이 정겨
워 보였다. 한족 벽에 검푸르게 피어있는 곰팡이만 아니라면.
이사하는 날 장롱을 들어낼 때 벽에 곰팡이가 잔뜩 핀 걸보고 놀랐던 기억이 났다. 문득, 곰팡
이 벽때문에 아무도 이사를 오지 않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저의 나처럼 , 벼랑끝에
선 어떤 여자가 구세주를 만난 듯이 방 창문을 열고 방을 들여다보고는 마치 푸른 꽃이 핀듯한
벽을 보고는 기겁을 해서 절망스럽게 이창문을 닫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곧장 집으로 와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곰팡이 핀 벽에 새로 도배하는 법, 방수 페인트
사용법 등등. 자료를 꼼꼼하게 뽑고 여기저기 알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 방법을 물어봐 두
었다. 일요일 아침 ,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작업복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그방으로 갔다.
상처를 도려내듯 검푸른 곰팡이가 핀 벽지를 미련없이 뜯어내렸다. 마른걸레로 벽을 닦아낸
후 방수 페인트를 칠했다. 칠이 마르길 기다리는 동안 창문을 떼어내 먼지를 털어내고 초록색
페인트를 칠했다. 손바닥만한 초록색 창문은 내가 봐도 정말 앙증맞았다.
방수 페인트를 칠한 벽에 다시 얇을 초벌지를 바르고 그 위에 자잘한 분홍 꽃망울이 그려진 벽
지를 발랐다. 난생처음 해보는도배지만 한나절만에 그런대로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다 끝난후
밖으로 나가 계단 옆에 쭈그리고 앉아 초록색 페인트칠을 한 앙증맞은 창문을 열고 방 안을 들
여다 보았다. 마치 그 방으로 이사를 해도 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심사관처럼. 그리고 마지막
으로 방에들어가 본다. 전등을 켜고 보일러도 켰다.
도배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방에 가만히 누워 본다. 방은 금세 따뜻해졌고, 이상스레 졸음이
첫댓글 혈압 체크하러 구청에 왔다가 읽고 감. 한편의 드라마 같네요. 가슴 아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