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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섬&산) 좋은사람들--버스매일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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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여행 후기 스크랩 흑산도 여행 ③ :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을 지켜나가는 명품 섬, 영산도
갈하늘 추천 0 조회 1,572 17.12.22 03: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산도(永山島)

 

여행일 : ‘16. 5. 8()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영산리

산행코스 : 선착장신당전망대깃대봉천박재삼거리앞뒷된볕산 암릉천박재영산리(산행거리 : 4)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흑산도에서 동남쪽으로 4지점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면적은 2.25이고, 해안선 길이는 7.9이다. 대흑산도·가거도·대둔도(大屯島다물도(多物島대장도(大長島)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섬은 남동쪽 해안이 단조롭고 급경사의 사면(斜面)을 이루는 반면, 북서쪽 해안은 완만한 경사에 만()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만의 입부(入部)에 집중되어 있다. 경작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주민들의 소득은 대부분 바다에서 얻어진다. 이 섬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운 경관이라고 봐야 한다. 규암(硅巖)과 사암(砂巖)으로 이루어진 암릉은 육지의 유명 바위산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거기다 섬의 해안 대부분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탓에 영산팔경(永山八景)’이란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빼어난 절경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때문에 영산도 탐방은 암릉을 걸어보는 산행과 함께 유람선 투어를 꼭 끼워 넣어야 할 일이다.

 

찾아오는 방법

영산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흑산도까지 와야만 한다. 영산도로 들어가는 배를 뒷대목(흑산면 예리)에서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여객선은 없다. 동네에서 운영하는 도선(渡船)이니 미리 연락을 주어야만 제시간에 배를 이용할 수 있다. ! 뒷대목으로 가는 길이 좀 애매하니 거론해보기로 하겠다. 흑산도에는 섬을 일주하는 순환도로가 있다. 예리항에서 이 도로가 좌우로 갈라지는데, 뒷대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왼쪽 길을 택해야 한다. ‘면암 최익현선생의 유배지인 천촌마을 방향이다. 이 길을 따라 200m쯤 걸으면 고갯마루가 나온다. 이때 왼편 바닷가에 사각의 정자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뒷대목 선착장이 보이니 길을 찾아 내려가면 된다.




뱃길로 10분 남짓, 짙은 해무(海霧) 너머 그림처럼 떠있던 영산도가 와락 품안으로 안겨든다. 선착장 물빛은 곱디 고운 청잣빛이다. 속이 보일 듯 말 듯 희뿌옇다. 청물이 들 때면, 바닥까지 훤히 보인단다. 참고로 영산도는 1일 출입인원을 최대 ‘50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섬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이미 보유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란다. 바다도 마찬가지로 외부 낚시꾼들의 출입은 금지되어있다. 주민들조차 자체 금어기(禁漁期)를 정해놓고 해산물을 보존한다니 그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풍요로운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소득을 얻는데 연연하지 않는... KBS-2TV다큐멘터리 3에서 영산도를 바보섬으로 표현한 이유일 것이다. 주변에서 그들을 바보라 부른다면서 말이다.



배에서 내리면 널따란 광장(廣場)이 나타난다. 광장 뒤편 바위절벽에 국립공원, 영산도 명품마을이라는 문구가 로고(logo)처럼 붙어있다. 문구 앞에 홍어를 그려 넣은 것은 이 고장이 홍어의 고장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012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영산도가 보유한 생태 자원과 섬 문화 자원, 그리고 주민들의 열정을 높이 평가해 이 섬을 명품마을로 선정했다. ‘명품마을 사업은 국립공원에 포함된 마을 중 자연과 문화가 잘 보전된 지역을 선정해 주민과 함께 마을 만들기를 추진하고자 시작된 프로젝트다. 2010년 진도의 관매도를 시작으로 2013년까지 전국에서 9곳이 명품마을로 지정된바 있다. 명품마을 지정 이후 영산도에서는 1년여에 걸친 자원 조사와 자문 작업이 이뤄졌고, 마을 펜션과 식당, 탐방로 조성, 벽화 사업 등도 추진되었다. 또한 여름 휴가철에는 소규모의 관광객만이 출입할 수 있는 진짜 명품마을로 탈바꿈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영산도는 1981다도해 해상 국립공원(흑산영산도지구)’2009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환경부의 생태우수마을농촌체험·휴양마을’, 2014생태관광 모델지역(환경부 소관)’으로 선정된바 있다. 특히 2016년에는 좋은이웃 밝은동네시상(광주방송문화재단 주관)에서 밝은동네 분야 으뜸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천혜의 관광자원을 훼손하지 않고 쾌적한 생태환경을 유지하면서 주민의 인식변화를 계기로 지역발전을 모색하는 등의 마을공동체 운영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로고(logo)를 위에서 둘러싸는 모양새로 적어 넣은 명품마을 백년을 꿈꾸다.’라는 문구는 마을의 규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이곳 영산리 마을 주민들의 염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비록 22가구에 5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한때는 98가구에 450여명이나 살았을 정도로 번성(蕃盛)했다니까 말이다. 당시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수도 100명이나 되었단다. 이 조그만 섬에 파출소와 보건소, 큰 규모의 초등학교 등 여타 다른 작은 섬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들이 들어서있는 것이 그 증거란다. 그러니 어느 누군들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넓지 않은 갯벌에서 미역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겨우 두 명이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마을 공동 작업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 마을에서는 대부분의 소득사업이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KBS-2TV의 인기 프로그램인 '다큐멘터리 3'의 애청자인 난 이곳 영산도를 소개한 바보섬에 살고 있네편도 놓치지 않았었다. 당시 방송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미역을 채취하고, 거둬온 미역을 똑같은 양으로 분리한 다음 추첨식으로 나눠가지는 만보라는 분배방식을 소개하고 있었다. 체력과 능력에 상관없이 함께 일하고 똑같이 나눠가지는 그네들의 공동체 생활을 보며 세속에 찌들은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이를 먹어 일을 많이 하지 못하는 사람들 대신 그만큼 일을 더해주는 젊은이들이 있는 삶, 욕심내지 않고 서로서로 도와가며 더불어 사는 삶이 있는 곳, 이런 곳이 바로 유토피아(utopia), 즉 이상향(理想鄕)이 아니겠는가.



배에서 내리자 주민 한 분이 우릴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선착장에서 50m쯤 떨어진 등산로 입구까지 우리를 인도한 다음, 이곳 영산도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산의 생김새에 대한 설명이다. 마을 뒤편에 늘어서 있는 바위봉우리들의 형상이 산발한 여인네가 풍요로운 젖가슴을 드러낸 채 누워있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이런 형상은 도선(渡船)을 타고서 보면 더욱 또렷해진다고 한다. 아무튼 산비탈에 놓인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탐방은 시작된다. 잠깐! 아무리 바빠도 들머리에 세워놓은 영산도 안내도는 꼭 살펴보고 출발하자.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지니고 산에 오르는 게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가파른 계단을 잠시 오르면 조그만 건물 두 동이 보인다. 윗 건물 앞에 당산(하당)’이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어장신(漁場神)김첨지영감을 모시는 곳인데, 이 영감님이 배, 어장, 해초 등의 보호를 관장하는 신()으로 둑제의 신이란다. ‘둑제는 소머리를 통째로 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흑산도 홍어잡이의 시초가 이곳 영산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을 정도로 전통적인 어업활동이 활발하던 영산도 주민들이 만들어낸 신앙(信仰)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곳에는 상당과 하당, 그리고 제기실(祭器室)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상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당과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는가 보다.



그런데 모셔져 있는 초상화는 아무리 봐도 여자의 형상이다. 안내문에는 김첨지영감을 모신다고 적혀있는데도 말이다. 안내판의 그림도 역시 여자 그림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어느 글에선가 상당에서 당할아버지당할머니’, ‘별방도련님’, ‘소조아기씨님’, ‘산신님등을 모신다고 했는데, 그쪽에 붙어있어야 할 그림 하나가 이리로 자리를 옮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은 내 눈이 덜 여물었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여행을 끝내고 자료를 정리하다가 처녀의 혼을 모신 흑산도의 진리에 있는 당집의 신을 모셔왔다는 다른 이의 글을 발견했는데, 옳은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당집 앞에 세워진 안내판의 내용과 부합(符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집 주위는 오래묵은 나무들로 우거져 있다. 그중에는 소나무들도 꽤 보인다. ‘영산팔경(永山八景)’ 중 제1경인 당산창송(堂山蒼松)’, 오래된 소나무들이 당산의 기와집 2동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팔경의 나머지 일곱은 기봉(箕峰)에 아침햇살이 비칠 때 신비로운 풍광이 만들어진다는 기봉조휘(箕峰朝輝)2이고, 층암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물로 만병을 고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비류폭포(飛流瀑布)3이 된다. 천연석탑(天然石塔)이라는 제4경은 자연이 빚은 석탑과 석수를 말하고, 용이 승천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제5경 용생암굴(龍生岩窟)과 사람의 코를 닮은 바위에 물이 드나들며 코고는 소리를 낸다는 제6경 비성석굴(鼻聲石窟)도 별스러운 재미가 있는 곳이다. 바닷물이 바위를 빚어 만든 아름다운 석문인 제7경 석주대문(石柱大門)은 영산팔경의 하이라이트이며 섬의 최고봉인 문암산의 높은 구름과 황혼의 조화로 자연의 신비스러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문암귀운(門岩歸雲)이 영산팔경의 대미를 장식한다.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과 만나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데크전망대 하나가 만들어져 있다. 영산도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조망처이다. 마을을 감싸주고 있는 앞된볕산은 물론이고 해무(海霧)에 가리다시피한 흑산도도 눈에 들어온다. ‘앞된볕산은 자신의 위세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양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매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닮아도 너무 닮았네요.’라며 집사람이 탄성을 지른다. 아까 선착장에서 보았던 때보다 훨씬 더 여성의 몸매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인의 얼굴, 젖가슴, 불룩 튀어나온 배 등 신체와 대비되는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해준다. 맞다. 다른 건 몰라도 뽈록하니 솟아오른 것이 여성의 젖가슴을 쏙 빼다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능선을 탄다. 그리고 그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작은 바위 조각들이 널브러진 곳이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산을 오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보다는 길가에 피어난 들꽃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보면 되겠다.



거기다 가끔 암릉구간이 나오면서 조망(眺望)이 터지기도 한다. 높은 암릉을 타다보면 왼쪽 아래로 흑산군도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오른쪽 아래로는 명품마을 영산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항아리처럼 움푹 파인 만()의 안에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는 모양새이다. 이렇게 전망 좋은 암릉은 대략 20분 정도 이어진다.



영산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집들마다 알록달록한 색채의 옷을 입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벌인 국립공원 명품마을 조성사업의 결과라고 한다. 공단은 지난 2010년 관매도를 시작으로 섬과 산 등 국립공원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정주 여건 개선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영산도는 그 가운데 여덟 번째 결과물이라고 한다.



마을 뒤편에 있는 영산도의 명물인 앞된볕산도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탐방로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산길이 외길인데다 잘 닦여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중간에 세 곳이나 이정표(#1 : 깃대봉 0.6Km/ 선착장 0.7Km, #2 : 깃대봉 0.4Km/ 선착장 0.8Km, #3 : 깃대봉 0.3Km/ 선착장 1.0Km)를 만들어 두었다. 얼마쯤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해볼 수가 있어 산행에 많은 도움이 된다.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이 구간은 침침한 활엽수림이 펼쳐지는 대신 조망은 탁 막혀있다는 얘기이다. 대신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를 오르자 드디어 깃대봉이다. 정상은 한 평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비좁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깃대봉, 해발고도 185m’라고 적힌 이름표 달고 있는 이정표(노인회관 1.5Km/ 선착장 1.2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잡목들 때문에 조망 또한 트이지 않는다. 오래 머물지 않고 그냥 출발해버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곳 깃대봉은 영산팔경(永山八景)’ 중 제2경인 기봉조휘(箕峰朝輝)를 만들어낸 장소이다. 아침햇살이 이 봉우리에 비칠 때 신비로운 풍광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기봉(箕峰)’은 깃대봉을 말한다니 참조한다.



하산을 시작한다. 아니 된볕산으로 향한다고 하는 게 옳겠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노인회관방향이다. 잠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니 왼편에 목책(木柵)을 둘러 난간을 만들어놓았다. 수백 길의 낭떠러지 아래로 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위험구간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시야(視野)가 툭 트이면서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하지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방향으로 보아 진도 쪽에 있는 섬들이 보일만도 한데 말이다. 아무래도 해무(海霧)의 방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사진은 바다 쪽 벼랑을 찍은 것으로 대신해봤다. 수직의 바위벼랑이 눈요깃감으로 제법 쏠쏠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각점(흑산 12)이 있는 봉우리(해발 220m)에 올라선다. 삼각점이 있는 걸로 보아 어쩌면 이곳이 실제의 깃대봉정상일지도 모르겠다. 아까 이정표가 세워졌던 곳보다는 이곳이 훨씬 더 정상답기 때문이다. 더 높기도 하거니와 조망(眺望)까지도 시원스럽게 터진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영산팔경의 제1경인 기봉조휘(箕峰朝輝)’에 어울리지 않겠는가. 이때의 기봉조휘는 아침햇살에 비치는 신비로운 풍광을 일출의 장관으로 보면 되겠다.



삼각점 부근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건너편에 아직도 해무(海霧)가 덜 걷힌 흑산도가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언젠가 미술관에서 보았던 몽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영산도는 흑산도와 떼어놓고 얘기하기 힘든 섬이다. 흑산도로서는 영산도가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아주니 늘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고, 영산도에게는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큰 섬 흑산도가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앞된볕산도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하얗게 빛나고 있는 암릉이 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하얀색이 특징인 규암(硅岩, quartzite)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규암의 또 다른 특징은 단단하다는 것이다. 전라도 말로 산독인 규암은 유리의 원료로 사용된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천박재가 나온다. ‘품위가 없고 상스럽다?’ 썩 좋지 않은 어감(語感)의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이곳의 지질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듯이 이곳 영산도의 바위들은 규암으로 이루어졌는데, 규암의 특징이 바로 매우 얇고 척박한 토양을 만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 시달리며 살았을 삶이 어찌 평탄했겠는가. 아무튼 길은 이곳에서 오른쪽을 향해 직각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노인회관 0.8Km/ 깃대봉 0.7Km, 선착장 2.0Km) 역시 오른편으로만 방향표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능선을 타는 것도 가능하다. 참고로 천박재에서는 앞된볕산과 뒷된볕산의 암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새 한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형상과 흡사하다.



넓적한 바위에 앉아 잠시 고민에 빠져본다. ‘된볕산으로 가보고 싶은데, 그쪽 능선 방향에다 넘어가지 말라는 의미로 보이는 금()줄을 쳐놓았기 있기 때문이다. 고민의 결과는 뻔했다. 영산도의 명물인 앞된볕산을 빼먹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래 사진에서 집사람의 뒤에 보이는 산은 뒷된볕산이다. 왼편이 수직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지만 등산로는 잘 나있는 편이다. 밧줄난간까지 만들어놓아 안전성까지 확보되어 있다.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물론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누군가 화살표 모양의 조형물을 좌우 양쪽으로 매달아 놓았을 따름이다. 미리 검색해본 사진에서는 화살표 위에 지명이 적혀있었는데 그새 지워져버린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왼편은 이곳 영산도에서 가장 높다는 뒷된볕산(241.6m)’으로 가는 길이고, 영산도의 명물인 앞된볕산(212m)’은 오른편이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가는 것이 옳다. 정상을 둘러보고 이곳으로 되돌아 나온 후에 앞된볕산으로 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뒷된볕산의 답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등산을 하다가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파열되었던 인대가 아직도 덜 아물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올라가보겠지만 집사람의 서슬 시퍼런 눈초리 앞에서는 그런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앞된볕산의 답사는 허락해줬다는 것이다. 비록 위험하지 않은 곳까지만 진행하는 것으로 다짐을 해줬지만 말이다.



울창한 숲길을 잠시 헤쳐 나가자 진행방향에 하얀색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앞된볕산이다. 이쯤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정상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보이는 바위능선을 포기하고 왼편의 숲 방향에서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우리는 바위벼랑을 기어오르고야 말았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직벽이지만 오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된볕산은 규암(硅岩, quartzite)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암은 보통 눈처럼 흰색을 띤다. 암릉이 하얗게 보이는 이유이다. 또한 미세하게 각이 진 절리를 가지며, 동결작용(凍結作用)에 의해 각력(角礫)으로 깨진다. 덕분에 암릉을 오르기는 수월한 편이다. 바위가 단단한데다 각이 지기 때문에 붙잡거나 의지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암릉의 위로 오르자 실로 어마어마한 경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조그만 섬에 저리도 거대한 암릉이 어떻게 들어설 수 있을까.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산도(永山島)를 감싸고 있는 산의 이름을 영산(永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흑산도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흑산(黑山)이 곧 흑산도(黑山島)이듯, 영산(永山)의 산 이름이 곧 영산도(永山島)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원래는 영산(靈山)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영산(永山)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그만 섬에 저렇게 거대한 암릉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어느 누가 신령스럽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된볕산이라고 부른다. 영산리 마을 사람들이 뒷산을 바라볼 때 하루 종일 햇볕이 되게(전라도 방언) 쪼이는 산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바위봉우리는 앞된볕산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앞된볕산의 험준한 암릉을 가운데에 놓고 오른편으로는 흑산군도와 영산리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왼쪽 아래로는 폐가만 남아있다는 액기미마을의 해안이 내려다보인다. 그 너머로는 웅장한 흑산도가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깃대봉 방향으로도 암봉이 하나 있다. 아까 데크전망대에서 보았을 때 임신한 배 모양으로 뽈록하게 튀어나왔던 부분이 아닐까 싶다. 지도에 얼굴바위로 표기된 지점일 것 같아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얼굴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무리한 진행은 그만두기로 하고 천박재로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그다지 가파르지가 않다. 거기다 가끔은 흑산군도까지 조망이 되는 멋진 길이다.



그렇게 30분쯤 진행하면 마을(이정표 : 노인회관 2.0Km/ 깃대봉 1.3Km, 선착장 2.5Km)에 내려선다. 마을 뒷산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마을로 돌아온 셈이다. 내려오는 길가의 집들은 모두 높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처마 끝까지 올라오는 것이 제주도의 옛집들과 비습한 외관(外觀)을 보여준다. 집뿐만이 아니다. 담장은 파와 감자, 고추 등 작물들까지도 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었다. 돌이 많은 섬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바람이 많다는 것은 섬이 지니는 일반적인 특징이니 거론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그 담들이 하나같이 반듯반듯하게 잘도 쌓아놓았다. 오래 묵지 않아 고풍스러운 맛은 덜하지만 서서히 담쟁이덩굴로 뒤덮여가고 있으니 이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포토존(photo zone)이 생겨날 것 같다는 얘기이다.



돌담길을 지나자 학교 건물이 나온다. ‘흑산초등학교 영산분교장이란다. tvN에서 방영하는 섬총사에서는 이곳 영산도를 소개하면서 학생 수가 한 명 뿐이었다면서 취학 사실을 과거형으로 만들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정이 깨끗한데다. 태극기까지 옥상에서 펄럭이는 걸로 보아 아직까지도 문은 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취학아동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KBS-2TV다큐멘터리 3에서는 이곳 영산도가 명품마을이 된 데는 고향으로 돌아온 40-50대 젊은 층들의 역할이 크다고 했었다. 올망졸망한 애들을 연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공공시설이 학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2층으로 반듯하게 지어진 보건소도 있고, 목포경찰서에서는 치안센터까지 만들어놓았다.



바닷가 쪽으로 잠시 내려오자 소풍객들의 쉼터인 피크닉장이 나온다. 빙 둘러 돌담을 쌓은 공간을 서너 개쯤 만들고 그 안에다 나무로 만든 야외용 식탁을 배치했다. 비록 공동이긴 하지만 싱크대도 만들어 놓았다. 음식물을 준비해온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어서 치안센터가 나왔다싶으면 이번에는 캠핑장이다. 야영 장비를 갖추고 찾아온 백패커(backpacker)들을 위한 시설이다. 이곳은 아예 바비큐(barbecue)를 해먹을 있도록 숯불화로까지 준비해 놓았다. 세간의 화두(話頭)고객만족CS : customer satisfaction)를 보게 되다니, 명품마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명품마을로 추켜세우고 싶다.



캠핑장 아래에는 영산상회라는 마켓(market)이 있다. 2년쯤 전인가 방영했던 KBS-2TV ‘다큐멘터리 3바보섬에 살고있네편에서는 이 섬에는 가게와 식당, 그리고 자동차가 없다고 했다.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라고는 펜션 두 동과 마을식당 한 곳이 전부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영산도도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비록 문은 열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버젓한 마켓을 차려놓았으니 말이다.



점심식사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 부뚜막에서 했다. 이번 여행을 주관하고 있는 산악회(좋은 사람들)에서 미리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내놓는 음식마다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는 소문을 들은 게 예약을 한 이유란다.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손수 기른 채소와 직접 잡은 생선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음식은 그들의 정성까지 더해져서 어느 하나 맛없는 것이 없었다. 특히 묵은지와 갓김치는 그야말로 일미(一味)였다. 따로 안주를 시키지 않고도 소주 한 병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비워버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참고로 이 마을은 친환경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부단의 노력을 하고 있다. '영산각'이라고 불리는 마을 특산품인 자연산 돌미역의 품질을 지키기 위해 양식이나 외부 미역반입을 철저히 막고 이를 어긴 주민은 조합자격을 박탈해버릴 정도라고 한다. 자연산 홍합은 자체적으로 금어기를 설정해 '많이 팔기'보다는 '제대로 키워 팔기'에 집중하고 있단다. 그 덕분에 영산도의 자연산 미역과 홍합은 옆 섬마을 주민들도 찾는 '없어서 못 파는'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특히 홍합은 명품마을 사업 전 6천 원 하던 값이 무려 4배로 뛰었다고 한다. 술안주로 가장 선호하는 게 홍합이기에 얼마간 사보려고 했지만 나 역시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길을 걷다보면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벽화로 유명한 통영의 '동피랑'마을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명품마을사업을 하면서 그린 그림들이라고 한다. 이 벽화들은 이재호 화백의 재능 기부를 통해서 만들어졌단다.



영산도를 빠져나가는 길에 섬에서 운영하는 도선을 이용해 섬을 반 바퀴 정도 둘러보기로 했다. 해안은 온통 깎아 세운 듯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덕분에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절경이다. 태초의 신비마저 느껴진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만 계속되던 바닷길에 난데없이 모래사장을 낀 해변이 나타난다. 혹시 액기미마을 해안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곳 영산도에는 영산마을만 있는 게 아니라고 했었다. 지금은 비록 이름만으로 남았지만 옛날에는 10여 가구의 주민들이 살던 의젓한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을의 이름은 액기미’, 액운 있는 사람은 오지 말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란다.



영산도의 수직 절벽은 칼로 자른 듯 날카롭게 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영산도가 아니고는 볼 수 없는, 그것도 배를 타고 나오지 않았다면 결코 믿을 수 없는 신비로운 절경에 눈앞에 펼쳐진다. 저절로 벌어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는 비경들의 연속이다. 거울같이 맑고 푸른 바닷물이 파도에 밀려 물보라를 날리는 모습과 어우러진 기암괴석을 바라보면 천지창조의 오묘함에 감탄하게 된다.




얼마쯤 달렸을까 영산팔경(永山八景)’ 중 대표 절경으로 꼽히는 '석주대문(石住大門)'이 장엄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파도가 몰아쳐 절벽을 깎아 섬과 바다를 잇는 아치형의 돌기둥을 만들었다. 자연과 세월이 만들어낸 숨막히는 아름다움이다. 풍랑이 몰아치면 그 속으로 피하곤 했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옛날 중국 청나라와 교역을 할 때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면 이 대문 안으로 대피했다는 것이다. 주위의 바다가 거센 파도 때문에 요동을 쳐도 이 대문바위 안에만 들어오면 거짓말처럼 바람이 잔잔해져 풍랑이 잠자기를 기다려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배가 지나가도 될 만큼 거대한 기둥을 통과해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기다란 코를 바다에 처박은 코끼리의 모양이 나타나 일명 '코끼리 바위'라고도 불린다. 또한 영산도 사람들은 영산도를 지탱하는 지둥바위(기둥바위의 전라도 방언)라고도 부른단다.


에필로그(epilogue), 영산도라는 이름은 의외로 큰 의미를 갖는다. 120나 떨어진 영산포영산강이란 지명이 이 섬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왜구에 시달리는 섬 지역에 대해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썼다. 당시 이곳 영산도 주민들도 섬을 떠나 나주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터전에 영산포라는 이름을 붙이는 한편, 그 옆의 강은 영산강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왕에 온 김에 영산도라는 지명을 갖게 된 이유도 한번 짚어보자. 두 가지인데 영산화. 영산홍(映山紅)’이 많이 핀다는 데서 연유했다는 설과, 섬의 산세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든 곳이라 하여 영산도(靈山島)’라 했다는 설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자로 알고 있다. 나도 역시 그랬다. 하지만 영산도에는 영산화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후자가 옳을 수도 있겠다. 비록 다른 곳에서도 흔한 밋밋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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