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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4월 1일 화요일
[(자)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는 것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던 병자를 고쳐 주신다(제2독서).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파스카 성야 세례 서약 갱신 후 따름 노래).>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7,1-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어떤 한 사람이 서른여덟 해나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아픈 이들이었기에 다른 이의 아픔이 눈에 들어올 리 없던 것이지요. 모든 이가 같은 희망을 가지고 모여 있는 벳자타 못에서 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이 사람 또한 온 힘을 다하여 물에 들어가 낫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힘이 있어 일어날 수 있었더라면 다른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갈 때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하였겠지만, 이제는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데다가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면, 그는 희망을 잃고 좌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건강을 되찾고 싶은 마음만을 미련처럼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이 사람에게 관심을 두시고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신 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6.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한말씀으로 그는 병이 나아 건강해졌습니다. 연못에 먼저 들어가야만 낫게 되는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그저 한말씀만 하시어 낫게 하셨습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일어날 의지를, 들것을 들 힘을, 그리고 걸어 나갈 용기를 얻어 지금까지 갇혀 있던 삶에서 벗어나 참된 삶으로 갔습니다.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도 오랜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어나 나아가려는 의지와 용기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순종을 위해 가슴을 찢은 만큼 은총이 스며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항상 교회에 반항하며 살았습니다. 처음에 사제가 되고자 하는 부르심을 어렸을 때부터 받기는 하였습니다. 25살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계속 저항했다면 사제가 되는 축복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신학교 때는 유학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거부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승낙하기는 하였으나 교수와의 갈등으로 논문도 힘겹게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순종이 없었다면 성서 석사학위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어서 다시 유학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교님이 한 달 기도해보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시 교수님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가장 힘든 일입니다.순종이란 것이.
덕분에 교의 신학 석박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은총의 크기가 커질수록 순종의 무게도 커졌습니다. 본당 생활을 조금 하다가 보니 교구청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저는 못 참고 2년 반 만에 주교님께 내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교구 영성관으로 가서 6년 동안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역사만 이렇겠습니까? 신앙은 단 한 가지, 순종을 배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38년이나 병이 고쳐지기를 바라며 매일같이 벳자타 연못에 나와 있는 한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다가가 먼저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는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예수님이 이해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이 하려고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예수님은 많은 병자가 있는데, 이 병자의 무엇을 보고 고쳐주셨을까요? 우선은 이 병자가 은총을 바라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매일 38년을 같은 병원에 다니며 병을 고치려고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그 병을 반드시 그 병원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희망의 크기는 믿음의 크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입니다. 다른 많은 병자들도 그런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벳자타 연못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병자가 38년 동안이나 희망하도록 내버려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게 하려고? 바로 ‘순종’입니다.
영화 『가라테 키드』에서 스승 미야기는 제자인 다니엘에게 이해되지 않는 반복적인 작업 (자동차 닦기, 바닥 닦기, 페인트칠 등)을 지시합니다. 다니엘은 순종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노동이라고 생각하며 항의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진짜 대련 상황에서, 그 모든 반복적인 동작들이 몸에 익어 방어 기술로 쓰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은 비로소 스승에게 순종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결과적으로 큰 은혜와 승리를 얻게 됩니다.
이런 일이 신앙에서도 일어납니다. 성녀 파우스티나는 예수님으로부터 환시와 계시를 받았지만, 고해신부가 그것이 진정한 계시인지 시험하기 위해 그녀에게 모든 환시를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내적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힘들었지만, 파우스티나는 고해신부를 통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든 환시를 멈추고 기다렸습니다.
결국 고해신부는 그녀의 순종을 보고 그녀가 받은 계시를 기록하도록 허락했고, 그 기록들은 훗날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의 일기』로 전파되어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Padre Pio da Pietrelcina)는 교회로부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약 2년여 동안 공식적으로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집전하거나 고해성사를 주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당국은 비오 신부의 성흔(오상)의 진위에 대한 의혹과 그의 인기에 따른 혼란을 염려하여 이러한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비오 신부는 이 금지령 앞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교회의 결정에 대해 철저히 순종하며 겸손하게 인내했습니다.
마침내 1933년 교회는 금지령을 철회했고, 성 비오 신부는 다시 공식적으로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성덕과 겸손한 순종의 모범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많은 신자들에게 큰 은총을 끼쳤습니다.
은총은 선물입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그 받는 사람에게 무언가 기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거저 주는 젖 안에도 실제로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이 기대를 저버릴수록 젖을 주고 싶은 마음도 감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오늘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병자가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사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갈 수 있도록 자기를 낮출 수 있도록 38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38년은 그 병자가 순종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에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은총을 주는 이에게는 반드시 순종의 그릇으로 다가가야 함을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증거합니다.
우리는 가정에도 있을 수 있고, 회사에도 있을 수 있고, 나라나 교회 안에 속해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공동체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은총이 다릅니다. 가끔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은총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고 능력만 있는 사람은 그 조직에 위해가 될 수 있기에 은총을 주는 이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언제나 순종의 능력을 첫째로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아이에게 그 아이가 달라는 것을 다 사준다면 부모의 권위가 실추되고 가정은 콩가루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심부름이라도 시키고 용돈을 주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 먼저 그릇을 준비합시다. 그 그릇은 순종입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을 받으시기 위해 어떤 순종의 그릇을 준비하셨습니까? 주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겠다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총의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를 매 삼종기도 때 되풀이합니다. 그냥 바치지 말고 은총의 그릇이 된다고 여기며 삼종기도를 바치면 많은 은총을 이 세상에서부터 받는 은총의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라엘에는 생명을 풍요롭게 해 주는 갈릴래아 호수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해(死海)가 있습니다. 먼저 갈릴래아 호수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갈릴래아 호수는 물이 흘러가는 곳입니다. 이 호수는 주변에 생명을 주는 수원으로,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며 사람들과 생명체들이 함께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물이 흘러가는 것, 즉 나눔과 소통의 의미입니다. 나눌 때 진정한 생명이 자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나눌 때, 그 안에서 진정한 연대감과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사해는 어떨까요? 사해는 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오직 흡수만 합니다. 그럼에도 사해는 말 그대로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해는 비유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사랑과 은혜를 움켜잡고 나누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고독과 공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 베풀고, 사랑할 때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8장에서 나온 말로, "가장 높은 선(善)은 물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노자는 물의 덕(德)을 통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를 설명합니다. 물의 덕은 다음과 같습니다. 겸허함(謙虛),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흐르는 물처럼, 인간도 교만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로움(利),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습니다. 강제적으로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바위를 깎고 길을 만듭니다. 이는 ‘유연한 강함’을 의미합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 물은 인위적으로 어떤 틀에 맞추려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따릅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정신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융통성과 적응력, 물은 어떤 그릇에 담기든지 그 형태에 맞춰 변화합니다. 이는 환경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청정함과 정화(淨化),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맑게 합니다. 우리도 마음을 깨끗이 하고 타인을 정화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겸손과 사랑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물처럼 살아가는 삶은 곧 겸손과 사랑, 그리고 이웃을 위한 희생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물과 관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고,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 네가 마시는 물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물이 힘이 있고, 물이 영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물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물은 단순히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과 가까이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말라 버려지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아야만 영적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꼭 물속으로 들어가서 씻어야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통로입니다. 기도, 전례 참여, 단체 활동 등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주님의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고, 주님의 크신 사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몸과 피를 나누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눔의 궁극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고 소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갈릴래아 호수처럼 사랑을 흘려보내고, 서로를 보살피고 돕는 삶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물처럼 흘려보내는 삶을 살면, 우리 주변에 많은 이가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함께 사랑을 나누고 소통하는 삶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7)
홀로 사람은
사람일 수 없기에
한 사람 있어
곁 사람이
사람일 수 있으니
그 한 사람
기꺼이 되어주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홀로 사람은
사람다울 수 없기에
한 사람 있어
곁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으니
그 한 사람
기꺼이 되어주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홀로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없기에
한 사람 있어
곁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으니
그 한 사람
기꺼이 되어주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오늘의 성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 은수자
마리아는 히브리어 Myriam에서 유래된 말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여자’란 뜻이다.
젊은 테오도시우스의 통치때, 팔레스티나에는 한 집에서만 43년동안 살았고, 하느님만 섬기는 거룩한 조시모라는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요르단으로 향하였으나, 자신은 자기 수도원과 20일 간의 거리나 떨어져 있음을 알고는 기도 시간이 되어 시편을 외우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시모 신부님, 나는 여자입니다. 당신의 겉옷을 던지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의 주인공이 곧 이집트의 마리아이다.
그녀는 이집트 여성인데, 17년 동안이나 거리의 여성으로 살아왔지만,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28세때, 신비스런 방법으로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성 십자가 축일을 지내려 가는 일단의 무리들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는 도중에 자기의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열심한 순례자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성당에 들어가려 하니,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듯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 있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윽고, 눈을 들어 마리아 상을 바라보니, 그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고 한다.
그제서야 그녀는 밝은 마음으로 성당으로 갔고, 깊히 통회하니, "너는 요르단으로 가서 여생을 지내라."고 명하여 이렇게 사막에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르단 사막에서 47년 동안이나 사람 한사람 구경못하고 살았다.
조시모는 그녀를 위해 성체를 영해주고, 그녀가 약속한 두 번째 지점에서 만나기로 하고 갔으나, 그녀는 이미 운명하고 있었다.
"조시모 신부님, 가련한 마리아를 장사지내 주십시오."하며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이야기해주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성 후고 (Hugh)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그르노블(Grenoble)
활동연도 : 1052-1132년
같은이름 : 위고, 후꼬, 휴스
프랑스의 샤토외프에서 태어난 그는 평신도로서 방랑스의 주교좌에서 활동하다가 주교의 협조자가 되었다.
그는 성직매매를 반대하는 주교의 캠페인에 적극 가담하여 큰 성과를 얻었고, 1080년에 열린 아비뇽 시노드에 참석하고 있던 중에 그레노블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대사로부터 서품되고,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주도면밀한 교구 개혁안을 수립하였는데, 성직매매와 고리 대금업을 철저히 배격하였고, 성직자의 규율과 사제 독신제를 확립하는 한편, 텅빈 교구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그후 그는 세즈-디외 수도원에서 베네딕또 회원이 되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권고로 자기 교구로 돌아갔다.
그는 성 브루노의 제자였기 때문에 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성 브르노의 카르투시오회가 크게 번창하는데 기여하였다.
성 로도비코 파보니(Lodovico Pavoni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784-1849년
같은이름 : 누수, 로도비꼬, 로도비꾸스, 로도비쿠스,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성 로도비코 파보니는 1784년 9월 11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브레시아(Brescia)에서 부유한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활기 넘치고 총명한 아이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관심을 갖고 당대의 사회적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재빨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후에 브레시아의 주교가 된 도미니코회의 카를로 도메니코 페라리(Carlo Domenico Ferrari) 신부의 집에서 신학교육을 받으며 사제직을 준비하였다. 집에서 공부했던 것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Napoleon I)가 이탈리아를 점령했던 시기(1799-1814년)에 신학교가 강제로 폐교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807년 브레시아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818년, 그는 고아원과 직업학교를 설립할 허락을 받고 성 바르나바(Barnabas) 성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면서부터 불행한 소년들을 돌보는 사업을 시작했고, 이는 1821년 ‘성 바르나바 학교’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첫 번째 사업으로 인쇄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1823년에 ‘성 바르나바 학교 출판사’를 설립했고, 이는 오늘날의 ‘안코라 출판사’(Ancora Press)의 전신이 되었다. 소년들은 또한 목수, 은세공인, 대장장이, 제화공, 염료 제조 기술자가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같은 해에 그는 처음으로 농아들을 학교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장을 구입하여 농업학교도 설립하였다.
1825년, 성 로도비코 파보니 신부는 자신의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 사제와 수사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만들었고, 184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브레시아를 위해 이를 승인해 주었다. 1847년 8월 11일, 브레시아 교구의 주교좌 참사위원장 루치(Luchi) 몬시뇰이 ‘원죄 없으신 성모의 아들회’[또는 ‘파보니아니’(Pavoniani)]를 설립했고, 그해 12월 8일 성 로도비코 파보니 신부와 첫 회원들의 수도 서원이 거행되었다.
1849년 3월 24일, 브레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저항했던 ‘열흘’ 동안, 양측은 모두 브레시아를 약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콜레라마저 유행하는 동안 시민들을 돌볼 책임을 느낀 성 로도비코 파보니 신부는 12km 떨어진 사이아노(Saiano) 언덕에 있는 수련소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소년들을 이끌며 그의 마지막 영웅적인 애덕의 행위를 완수했다. 한 주일 뒤인 1849년 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 밝아오던 새벽녘에 그는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30여 년간 교육의 긍정적 방법으로 거리의 소년들의 필요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영감을 쏟아 부었던 그의 생이 마감된 것이다.
교육에 대한 그의 이상은 광범위한 것으로 한 인간의 전인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자들을 훌륭한 사회인이자 그리스도인으로 교육했다. ‘노동헌장’이 반포되기 50년 전에 이미 그는 사회정의의 종교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 스스로 고용인들을 올바로 대우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후대의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처럼 격려하고 예방하는 교육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엄격함보다 관대함을 선호했다. 그래서 종종 “엄격주의는 하늘나라를 텅 비게 만든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회원들은 현재 브라질, 콜롬비아, 에리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책을 출판하는데, 로마에서는 성 베드로 광장 밖에서 안코라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성 로도비코 파보니 신부는 2002년 4월 1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16년 10월 16일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성 루도비쿠스 파보니(Ludovicus Pavoni)로도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