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시조 2025년 봄호>
<2025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취급주의/ 한승남
계단을 오르내리며 슬픔을 운구한다
얼굴 없는 수취인 이름도 희미해졌다
똑똑똑 대답 없는 곳
긴 복도가 느려진다
저 많은 유품들은 누가 보내는 걸까
주문을 외우면 외로운 착각의 세계
반품도 괜찮을까요
열지 못한 사연들
상자도 사람도 구석에서 자라고 있다
유리 같은 마음입니다 던지지 마세요
날마다 포장된 시간
기적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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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모자이크/ 정광영
군홧발 으스스한
섣달 초사흗날
급히 운전을 하며
아낙은 울먹였고
오천만 간절한 기도
여의도를 뒤덮었다
누이들 어머니들
버선발로 달려나와
그 애원 어이할꼬
중무장도 풀려지고
하룻밤 일장춘몽이
새봄을 앞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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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도 아닌데/ 최성아
선택 없는 흑과 백
눈감은 낭떠러지
방향 튼 바람 앞에 떠밀릴 줄 모르는
내일은 잘 어우러진
색색 무지개 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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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방/ 정지윤
생각과 생각 사이
나는 숨을 죽인다
어느 날 그 숨 더 깊이
가라앉을 수 있도록
생각에
맞선 생각들
구름으로 떠돈다
이 구름 지나가면
다른 하늘 눈뜨고
저 구름 지나가면
또 다른 문 열릴까
언젠가
이미 남모르게
꿈꾸었던 꿈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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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미 셀프/ 권선애
알아서 척척 하던 쉰 세대의 빠른 일과
스스로 하라는데 스스로 할 수 없어
자꾸만 뒤로 밀려나 어눌해진 셀프 앞
여기저기 눌러대도 짜증 한번 안 내는
친절한 불친절이 또박또박 버티고서
끝까지 시키는 대로 잔말 말고 하란다
먹고살자 하는 일에 도움도 네 맘대로
사람은 입을 닫고 반복되는 화면들
손맛은 검지 하나뿐 미덕은 타임캡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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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 김강미
온 집안 구석구석 팥죽을 뿌린다
담벼락에 딱지로 눌러 붙어 말라가도
동지는 다시 돌아와 기대감을 얹는다
할머니의 정성만은 한결같이 끓어올라
상처의 흔적조차 희미해져 갈 즈음
걸쭉한 세상살이에 동동 뜨는 희망 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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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폭설/ 김민정
바람의 호령 속에
휘날려 쌓이더니
방향이 뒤섞이며
길들이 사라졌다
단순을 가장하고 선
거대한 눈구름아
혼돈의 틈새 속에
숨어있는 그 무엇을
어정쩡한 이 겨울은
갈피를 잡지 못해
뜨거운 숨결로 돋을
새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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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김상규
아침이 왔으나 자리는 비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오실 분을 누구입니까?
해묵은 의자에 앉을 어린 분을 찾습니다
혹시 휘황찬란한 교상에 올랐는지요
먼 옛날 그분이 와 내 흠을 탓하신다면
의자를 뒤집어쓰곤 왕관이라 웃겠습니다
*조병화의 ‘의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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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김영재
눈길 위에 두 사람 팔짱 끼고 걷는다
흰 지팡이 한 사람 얼굴에 번진 미소
눈송이 하얗게 날려 콧잔등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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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대길/ 김용주
매화꽃 향기 앞에 마주한 둥근 밥상
안부를 묻습니다, 돌아서 간 당신께
저 봐요 동백나무도 쫑알쫑알 입 열어요
눈 날리던 그 겨울 추위는 어땠나요
안부 또 묻습니다, 꽃 아름 따던 당신께
손 가득 꽃잎 받으며 허기지는 이 한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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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앞에 선 양심/ 김종길
양심은 거짓 없이 진실 앞에 설 때마다
하늘의 준엄한 호통 인간답게 살아라
혹한의 광화문 광장 피어나는 자유의 꽃
칼바람 이기주의 무너진 양심의 가치
진실이 썩는 냄새 온 세상 가득한데
분노한 민초들의 함성 삼천리를 뒤흔든다
낮달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엄동설한
강추위 눈보라에 붉게 피는 동백꽃들
봄바람 온 누리 불어 자유의 꽃 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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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정국/ 김종연
유튜브 명상가들 하나같이 입 모으네
상상이 현실이 된다고,
내면을 살피라고,
시국(時局)이
시국(詩國)이 되는 일
상상하면 이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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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통신/ 김종호
올해 꼭 만나리라
맹세라도 하였는지
서두른 듯 2월 전에 푸른 편지 보내왔다
사연이 많은가보다
꽤 여러 장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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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김진길
서둘러 만을 떠난 새들의 이동 군무,
힘줄 선 죽지 사이로 석양이 붉디붉다
몇 걸음 건너서 보면
고행조차 부신 풍경.
줌-인의 앵글 속에 빈 空域이 부풀고
풍향이 바뀔 때마다
얼비치는 새의 이력,
당겼던 편대 하나를 황급히 놓아준다.
땅이든 하늘이든 생명인 것은 저리 섧나
난기류에 끼 · 룩 · 끼 · 룩
뚝뚝 끊긴 교신음,
이 빠진 풍경을 걸고 계절은 또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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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혈(穴)/ 변영교
사람의 몸속에서
기(氣)를 나르는 혈(穴)처럼
나무 가지에도 결이 다른 혈이 있나?
툭 툭 툭
부러지는 가지를
살려내는 초록의 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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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기/ 이규철
눈 오는 겨울인데
우뚝 선 입춘이라
그렇지 꿈은 항상
한 발 먼저 가는 거지
어느덧 백발이 되자
자주 꾸는 옛날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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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괜찮아/ 이분헌
맨살의 민달팽이 바닥을 밀고 간다
제 가진 촉각으로 향방을 더듬어
더뎌도 족한 보법으로
느긋이 길을 낸다
깊숙한 수렁도 날이 선 벼랑 끝도
물러설 기미 없는 뚝심을 의지 삼아
진액을 다 쏟아내 온
뒤안길이 끈적하다
눅눅한 기슭에 익숙한 알몸뚱이
어두워진 길눈을 스스로 위무하며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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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情緣)/ 이승현
설산의 물줄기가 호수에 닿았지만
한기가 여전하여 산그늘까지 품었다
천년학 깃털을 보내 산의 허리 덥힌다
물안개 촉촉함에 야생화 피고 지고
밤하늘 수많은 별 물 위에 내려앉아도
보름달 달무리보다 빈자리 틈이 깊다
설산의 저 눈빛은 언제 다 녹아내릴까
정연의 시간이 가고 그런 그때가 오면
푸르던 물결은 마르고 소금꽃만 소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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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유폐의 詩/ 정성욱
그냥 산은 적설인데 그대 어디로 떠나누나
밤사이 찬탈 소식에 이명을 앓는 두 귀
옷 한 벌 입성치 않은 몸 병 깊어 날 저문다.
지팡이 하나에 의지했던 의로움의 저 끝은
송악에서 묘향으로 무등에서 만수산으로
통곡은 벼갯잎 속에서 몰래 싹을 틔우느니.
무엇이 산수간(山水間)으로 떠나오게 했는지
이토록 한(恨)이 깊어 내려오지 못하는 산,
이 밤새 붓을 달리던 두 눈은 붉게 멍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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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조경선
최대한 느리게 날고 있는 나뭇잎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멀리가지 못하고
어느새 가벼워졌는데
나는 더 무거워졌다
어느새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새
말라가는 날까지 이곳에 엎드린 새
그 이름 살아있다고
어느새 바스락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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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AI/조은정
웅크린 지붕 아래
독거로 기우는 집
혼잣말 받아내며 쪼아대는 파랑새
외로움 들리지 않게 옆에서 재잘댄다
맞장구 이어가며 말꼬리를 늘어놓고
때만 되면 떠난 자리 채워주는 스피커
호기심 가득 물어 와 푸른 싹을 부추긴다
그늘 덮인 발자국
깃을 털고 내려앉아
아침마다 창을 열어 웃음 짓는 말동무
내 소리 닮아가면서 담아둔 말 꺼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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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봄 오는 봄/ 차용길
포탄이 쏟아지던 황톳길 고갯마루
목숨줄 부여잡고 이겨낸 선진조국
그렇게 봄날은 가고 새봄이 왔건마는
분단된 조국 앞에 가로막힌 이념전쟁
반도에 맺힌 하늘 이제는 풀어야지
눈물진 보릿고개를 건너서 왔건마는
피 냄새 진동하는 날뛰는 승냥이 떼
얼룩진 좌우 논쟁 역사에 묻어두고
맞잡은 손 놓지 말고 뚜벅뚜벅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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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자세/ 홍경희
하루를 맞이하는 것은 몸부터 내어주는 일
오므렸다 폈다, 손가락 관절과 무릎마디 사이사이
스며있는 어스름을 풀어준다 서로 바꿔가며 새를
찾는 소리가 났다 오늘을 나란하게 당겼다 밀었다,
발목에 엉겨있는 걸음을 풀어준다 먼 데서 나무 빗
장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허리를 부드럽게 안에서 바
깥으로, 등마루에 매여있던 그림자를 풀어준다 붉
은빛이 새어 나왔다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아침도 나이를 먹는다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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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2025년 봄호>
우리 집 대장/ 송경아
아빠는 엄마가 우리 집 대장이라고
하시고
엄마는 내 동생이 대장이라고 하신다
할아버진 아빠가 대장이라고
하시고
할머니는 내가 대장이라고 하신다
모두가 대장이면 졸병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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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폭포에 뜨는 무지개/ 정군수
폭포 하나 지니고 시를 쓰고 싶었지만
내 가슴에 우러러보는 높은 절벽이 없어
포기하고 살았다
얼음폭포처럼 부서지는 시를 쓰고 싶었지만
내 가슴에 맨발로 넘어야 할 설산이 없어
인공폭포 하나 만들어 놓고 살았다
물도 마르고 시도 마르고
폭포소리도 잃어갈 때
나는 문득 인공폭포의 무지개를 보았다
햇볕이 든 잠깐 사이
인공폭포의 비말에 섞여 뜨는 무지개
나는 그것이 나의 시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볼 틈도 없이 사라지는 무지개
내 눈에만 보이는 황홀한 무지개
오늘 밤 나는
인공폭포에 뜨는 무지개를 보려고
또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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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이순옥
나는 항상 궁금했다
너는 무엇으로 만들어졌길래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잊히지도
지워지지도 않고 버거울 만치
커다란 부피와 질량으로 나를 짓눌러댔을까
어제보다 오늘 더 몸집을 키워대면서
오늘보다 내일 더 나를 짓눌러대면서
너는,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액체처럼 흘러 기억으로 축적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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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비누가 너도비누에게/ 노창수
강아지풀에 배어들듯 부끄럼 살살 섬기듯
하루 짐 부린 초저녁에 그대 곳곳 밀고 닦아
매끈히 핥고 닳아져 이승 밤도 깊어지리
눈웃음은 밀물로 와 초록 입술을 내밀고
하늬바람은 예서부터 부케처럼 던져진다
갑 속에 눕힌 거북등 침대 환희를 부를 때
이를테면 뒤척여 한몸 되는 자귀나무같이
강언덕을 거슬러와 분홍파라솔로 합환해 마지않는
그 밀밭 걸고 자빠진 제끼꾼 품 그리워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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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유선철
당신이 책이라면 난 어쩜 별책부록
사소한 연대기를 알뜰하게 기록하고
눈시울 뜨겁던 날도 단박에 소환하는
아니지, 권말부록 그쯤이나 될지 몰라
질문과 대답 사이 오고 간 표정들을
아까시 잎사귀처럼 파릇하게 새겨넣은
부록이 있다는 건 책이 제법 크다는 것
할 말을 다하고도 더할 말 있다는 것
문자향(文字香) 언저리라면 어디라도 나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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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김민기는 좀처럼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사
람이었다. 평소 그는 무대에 나서는 배우들에게 “난 뒷것이야. 너
네는 앞것이고.”라고 말하며 어두운 곳에서 무대를 향해 조명을 비
추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대개 사람들은 무대
앞의 삶을 소망한다. 누구나 앞에 나서서 얼굴을 드러내려고 하지
뒤에서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너도
나도 앞에만 서면 뒤의 일은 누가 할 것인가. 뒤의 사람이 있기에
앞의 사람도 빛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방송 출연도 자제하면
서 철저히 무대 뒤의 삶을 지향했던 김민기는 대단한 의식의 소유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를 존경해마지 않는 것은 그가
좋은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보다도 스스로를 ‘뒷것’이라 칭하며 철저
히 남을 돋보이게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렵던 시절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준 사람, 앞에 나서
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자기 일에 신명을 바쳤던 사람, 그는 떠났어
도 그가 남긴 발자취는 늘 아침이슬처럼, 상록수처럼 우리에게 위
로와 희망을 심어주리라 믿는다.
-장병호, 수필 「아침이슬처럼 상록수처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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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 마음의 깊은 강물에 꽃잎이 내려앉
는다. 오로지 이 여름의 연못에서 핀 이 순간의 연꽃. 화가 모네
에게도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지 물질
적인 사물 그 자체가 아니었다.
...(중략)
모네는 “나는 자연의 법칙과 조화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생활하
는 것 이외에 다른 운명은 갈망하지 않았다.” 모네는 단순히 아름
다움이나 좋은 그림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림 속에 빛
의 움직임과 주변의 분위기를 나타내려고 했다. 모네의 그림을 좋
아하는 까닭이다.
사람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삶 자체도 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가
운데 지나고 있다. 우리, 모든 생명은 빛과 빛이 지니는 에너지가
힘이 되어 존재한다. 생명의 본질은 빛과 에너지다.
모든 예술은 빛과 그림자의 조화가 아닐까. 빛이 존재 자체라면
존재자들은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다. 빛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빛
이 내려앉는 사물은 빛에 의해서 그림자를 나타낸다. 그 그림자가
있어 빛을 받은 부분이 빛나며 빛나는 부분은 그림자 없이는 빛날
수가 없다. 빛이 닿는 부분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언젠가는
형체도 시간 속에 녹아 사라질 것이다.
-조윤수, 수필 「빛과 그림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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